“내가 저 인간 덕에 이 자리까지 온 것도 아닌데, 저 인간을 무서워할 필요가 뭐가 있어?”“학교에 그런 일도 있어요?”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백연우는 고개를 쳐들어 나를 빤히 응시했다. 초롱초롱한 그녀의 눈은 언제나 매력적으로 느껴진다.“안 그러면 내가 왜 너 좋아하겠어? 난 네 몸만 좋아하는 게 아니야.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그 순진함이 좋은 거야. 네가 뭐든 다 아는 능구렁이라면 나도 너한테 흥미 못 느꼈을 거야.”“왜 그렇죠?”나는 약간 어리둥절했다.그러자 백연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이런 일은 서로 잘 맞아야 하는 거야. 서로 즐거워야 하는 거잖아. 만약 나쁜 목적으로 접근한 거면 재미없어. 저 인간은 딱 봐도 목적이 불순해. 생각만 해도 역겨워. 이제 알겠어?”백연우는 말을 명확하게 하지 않고 은연중에 자기 생각을 내비쳤다.예전 같았으면 못 알아들었을 텐데, 남주 누나한테서 정계에 관해 많은 걸 배운지라 알아들을 수 있었다.사실 정계든 학교든 다 작은 사회판이라 본질은 비슷하다특히 권세가 있는 사람들한테는 그곳이 어디든 늘 천당 같을 거다.그에 반해 권력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위로 올라가려고 결국 제 몸을 판다.이건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어디 가든 다 비슷하니까. 그저 백연우가 그런 식으로 더럽혀지지 않으면 그만이었다.“한 번 더 할래요?”백연우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나는 또 흥미가 솟아났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또 요구하자 백연우는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좀 새로운 걸 해보자.”‘새로운 거라니?’나는 살짝 어리둥절했다.다음 순간, 백연우는 뒤에서 밧줄을 꺼냈다.그걸 본 순간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헐. 이렇게까지 한다고요? 이건 너무 화끈한 거 아니에요?”“뭐 어때? 화끈하게 놀아보자. 어때? 할 수 있겠어?”나는 살짝 망설여졌다. 무엇보다 백연우와 하면 항상 내가 당하는 기분이 드는 게 문제였다.사내대장부인 내가 여자한테 당하다니?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내가 백 쌤을 묶으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요? 우리는 결혼이 불가능한 것 같아요?”“내가 결혼한다고 해도 너랑 하지는 않을 거야. 차라리 집안 형편이 비슷한 사람을 찾지.”백연우의 말에 나는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그 순간 나를 언짢아하던 애교 누나 아버지의 말이 문득 떠올라 기분이 다운됐고 말도 하기 싫었다.백연우는 내 가슴에 엎드린 채 싱긋 웃으며 물었다.“왜 그래? 화났어? 기분 안 좋아도 할 수 없어. 내 말이 사실이니까.”나는 포기하지 못해 끈질기게 물었다.“돈 많은 사람들은 항상 그래요? 저처럼 가난한 사람은 본인과 겸상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백연우는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그런 것만은 아니야. 하지만 나나 애교나 결혼할 때 본인만 생각할 수 없어. 가족도 생각해야 하거든. 우리가 결혼하는 건 사랑 때문에 하는 것만이 아니거든. 함께 하면 앞으로 얼마나 더 발전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해.”“네 애교 누나는 자기 짝이 어떤 사람이든지 신경 쓰지 않을 거지만 가족은 분명 엄청 신경 쓸 거야. 그 가족이 너무 현실적이라고 욕할 게 아니야. 원래 잘나가는 집안일수록 평범한 사위를 얻으면 뒤에서 말이 많아.”“너나 애교는 이상을 좋지만 난 좀 현실적인 사람이거든. 결혼의 본질을 알기에 결혼하기 싫은 것도 있고. 내가 지금 너를 빼앗아 오고 싶다는 건 그냥 널 소유하고 싶은 거지 결혼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야.”백연우의 설명은 명확했지만 내 기분은 말이 아니었다.신분 차이는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벽이라 항상 나를 열등감과 불안감에 허덕이게 한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그래요, 알았어요.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자요. 전 이만 돌아갈게요.”“가지 마. 하루만 같이 있자.”백연우는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그 부드러운 모습에 나는 또 마음이 흔들렸다.애교 누나를 안고 잔 것도 벌서 오래전 일이라 그런 느낌이 고프기도 했다.하지만 애교 누나를 안을 수 없으니 백연우를 그 대신으로 생각하며 그리워할 수는 있
민우는 워낙 먹는 걸 좋아해 음식 얘기를 듣자마자 방금 했던 대화를 까맣게 잊었다.잠시 후, 민우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주선영도 민우와 함께 내려왔다.주선영은 머쓱한 듯 나에게 말을 걸었다.“수호 오빠, 저 오늘 늦잠 자서 늦었는데 학교까지 태워줄 수 있어요?”“당연하지. 타.”이젠 차도 있으니 가는 길에 바래다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때 민우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그럼 네 후배더러 조수석에 타라고 해. 난 뒷좌석에서 좀 더 잘게.”말을 마치자마자 민우는 뒷좌석에 앉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코를 골기 시작했다.나는 결국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어제는 대체 뭘 했길래 이래?”“뭐 안 했어. 그냥 욕구 좀 풀었어.”민우는 무심코 말을 내뱉고는 문득 주선영도 차에 있다는 걸 인식하고 난감해했다.“저기, 그런 뜻이 아니라. 내 말은... 아니에요. 나 잘게요.”주선영은 부끄러운지 얼굴이 붉어졌다.나는 주선영더러 민우 말을 신경 쓰지 말라고 넌지시 말했다.“자. 고기만두야.”주선영한테 만두를 건네면서 보니 오늘 그녀의 옷차림이 예전과 많이 달랐다.주선영은 그동안 긴 바지에 짧은 티셔츠를 입고 치마는 거의 입지 않았었는데, 오늘은 웬일로 짧은 바지를 입었다. 게다가 몸매가 날씬해 애교 누나와 견줄 만했다.주선영이 오늘 입은 반바지는 핫팬츠라 늘씬하고 새하얀 다리가 드러나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다만 그 모습을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오늘 웬일로 그렇게 입었어?”주선영은 살짝 부끄러운 듯 말했다.“날씨가 더워서 너무 많이 입으면 땀띠가 날까 봐요.”‘진짜? 요즘도 분명 더웠는데 그동안 이렇게 안 입었잖아.’사실 내 짐작이 맞았다. 주선영은 오늘 확실히 변했다.그도 그럴 게, 이제는 남자 친구를 사귀어야겠다는 결심이 섰으니까. 안 그러면 영원히 바보같이 굴다가 속은 것도 모를 수 있다.나는 주선영을 의과대학에 바래다주고 곧장 화인당으로 향했다.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민우를 뒷좌석에서 일으켜
“상세한 건 나도 몰라. 왕정민이 방금 찾아와서 장인어른 손에 있는 증거를 우리 측에서 제공한 거냐며 따져 물었어. 원래는 잡아떼려고 했는데 왕정민이 수호 씨 이름까지 언급하면서 이 일이 수호 씨랑 관련이 있냐고 했어.”“내가 물론 대답 안 하고 쫓아냈지만 가만있지 않을 것 같아.”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알아도 상관없어요. 안 무서워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가 왜 왕정민을 무서워하겠어요?”“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조심해. 뒤에서 뭔 짓할지 모르니까.”“알았어요. 고마워요, 사장님.”“참, 그러고 보니 화인당은 어때?”“괜찮아요. 제가 지키고 있으니 아무도 찾아와서 소란 피우지 못할 거예요.”나는 윤미화와 몇 마디 더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왕정민이 나를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설령 그런다 해도 막을 방법은 있었으니까.나는 동료들과 함께 바삐 움직였다.그때 누군가 오후에 함께 정 사장님을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화인당의 평판은 그동안 정 사장님이 몇 년 동안 쌓아온 거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소동이 일었어도 장사에는 별 영향이 없이 여전히 잘 되고 있었다.다만 9시가 넘었을 때 익숙한 그림자가 나타났다.상대는 다름 아닌 오랜만에 보는 왕정민이었다. 하지만 그를 봤음에도 나는 여전히 평온했다.“무슨 일이야?”왕정민 역시 평온한 얼굴로 살짝 웃으며 말했다.“일 있지. 아주 큰일.”“따라와.”나는 왕정민을 뒷마당으로 안내했다. 그러자 그는 두말없이 순순히 따라왔다.뒷마당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왕정민을 빤히 바라봤다.“무슨 일인지 말해.”“혹시 지금 윤미화가 운영하는 탐정 사무소에서 일해?”“응.”나는 직접적으로 인정했다.그러자 왕정민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내 장인어른이 나 조사하라고 시킨 거 네가 맡았어?”“아니.”나는 그 일은 인정하지 않았다.이유야 간단했다. 왕정민한테는 내가 자기를 조사했다는 정거가 없을 테니까.내가 왕정민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번거로운
왕정민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이 빨았다.“무섭지. 당연히 무섭지. 그렇게 대단한 분들 앞에서 난 고작 벌레에 불과해. 내가 왜 이애교는 모함하면서 전소희한테는 아무것도 못 하는지 알고 싶어?”왕정민이 마침 내가 알고 싶어하는 걸 물었기에 나는 말하지 않았다.그런데 갑자기 웬일인지 왕정민은 먼저 나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유야 간단해. 이태웅 역시 딸과 마찬가지로 나를 너무 믿었어. 두 사람의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너무 감정적이라는 거야. 이애교의 약점은 나고, 이태웅의 약점은 딸이고. 내가 아무리 이애교를 모함해도 이태웅은 자기 딸 명성을 생각해서 나를 진짜 어떻게 하지는 않을 거야.”“만약 뒤에서 몰래 나를 공격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뒤에서 말이 나올 거야. 무엇보다 이태웅처럼 정직한 사람은 그런 일은 못 해.”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그렇게 말하면서 양심의 가책도 안 느껴져?”왕정민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심? 양심이 뭔데? 양심이 밥 먹여줘? 양심이 뭔 쓸모가 있는데? 내가 강북에서 혼자 구르는 동안 이태웅은 조금도 도와준 적 없어. 다 내 혼자 이룬 성과야. 그런데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이태웅은 계속 나를 못마땅해 했어. 내가 이애교와 이혼한 건 이태웅 때문도 있어.”“내가 왜 전소희를 선택한 줄 알아? 전소희 아버지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것 말고도 그 여자한테는 희망이 보여.”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렇다면 왜 또 전소희까지 배신하는데?”나는 정말 왕정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말에 왕정민은 웃음을 터뜨렸다.“배신? 배신까지는 아니지. 난 전소희 배신할 생각 없어. 그 간호사와는 그냥 좀 즐기는 것뿐이야. 남자는 다 그렇잖아. 돈이 있으면서 밖에 애인 없는 남자가 어디 있어? 이건 체면과 신분의 상징이야. 내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거기기도 하고.”왕정민은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고는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려 발로 눌러 껐다. 이윽고 짙은 담배냄새를 풍기며 나에게 걸어왔다.“내가 왜 이런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왕정민은 제 쪽으로 걸어오는 이태웅과 딱 마주쳤다. 그 순간 왕정민은 사색이 되었다.물론 지금은 이애교와 이혼한 상태지만 이태웅이 주는 위압감은 여전히 사람을 숨 막히게 했다.왕정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는 얼굴로 말했다.“아버님, 언제 오셨어요?”나는 그런 왕정민이 참 대단하게 여겨졌다. 그는 그야말로 뻔뻔함의 극치를 보여줬다.그때 이태웅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아버님이라 하지 마. 난 당신 같은 사위 둔 적 없으니까. 아까 내 딸을 천 것이라고 욕하는 것도 똑똑히 들었어.”왕정민은 여전히 헤실 웃고 있었다.“잘못 들으셨겠죠. 제가 왜 애교를 욕하겠어요. 애교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요. 우리가 이혼한 건 다 제 잘못 때문인데, 제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애교를 욕하겠어요?”사람이 뻔뻔하면 얼굴이 벽보다 더 두꺼워질 수 있다더니, 왕정민이 딱 그 짝이었다.헛소리를 해대는 왕정민의 모습에 이태웅의 얼굴은 새파래졌지만 본인 신분 때문에 직접적으로 손찌검하지 못했다.왕정민 역시 이태웅이 그럴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이태웅은 자기 신분을 가장 신경 쓴다. 그런데 강북시 부시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어떻게 이유 없이 사람을 때리겠나?그저 본인이 환하게 웃으며 뻔뻔하게 굴면 이태웅이 저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걸 왕정민은 확인했다.두 사람은 오랫동안 알고 지냈기에 서로 어떤 성격인지 꿰고 있다. 게다가 이태웅은 확실히 왕정민 생각대로 어쩔 방법이 없었다.그때 내가 간 크게 다가가 발로 왕정민의 허리를 걷어차 그를 넘어뜨렸다.왕정민은 이내 눈을 부라리며 나를 째려봤다.“정수호, 네가 감히 나를 찼어?”나는 왕정민에게 삿대질하며 버럭 소리쳤다.“애교 누나는 내 여자 친구야. 한 버만 더 누나 뒷담화하면 또 차버릴 거야.”인기척을 느낀 동료들은 하나둘 뒷마당으로 모여 나를 도와주었다.다들 이유는 모르지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 편을 들어주었다.결국 머릿수에서 밀리자 왕정민은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네
“꺼져. 여긴 당신 환영하지 않아.”나는 쌀쌀맞게 축객령을 내렸다.왕정민은 그 순간 폭발했지만 찍소리도 못한 채 의기소침해서 꽁무니를 뺐다.동료들은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따져 묻지도 않고 다들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그사이 나는 이태웅 곁으로 다가갔다.“아버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이태웅은 여전히 서리를 뒤집어쓴 것처럼 안색이 좋지 않았다.“얘기 좀 하려고.”“아, 그럼 안으로 들어가죠.”나는 지나치게 흥분하지도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안 그러면 이태웅은 내가 저를 무서워해서 아부하려 한다고 생각할 테니까.나는 오민혁에게 차 두 잔을 부탁하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아버님, 무슨 말이 하고 싶으세요?”“내 딸 일이네. 난 역시 자네가 내 딸한테 헤어지자고 먼저 얘기했으면 좋겠네.”청천벽력 같은 한마디에 나는 살짝 평정심을 잃었다.하지만 이내 싱긋 웃었다.“제가 싫다면요?”이태웅의 낯빛은 더 어두워졌다.“정말 내 딸을 위한다면 귀찮게 굴지 말게. 이미 한번 상처받은 아이라서 두번 다시 상처받는 걸 원치 않네.”나는 자연스럽고 의젓한 말투로 말했다.“전 누나한테 진심이에요. 절대 상처 주지 않아요.”“하. 진심만 있다고 되는 줄 아나? 자네가 내 딸이 편한 생활을 누리게 할 수 있나? 다른 사람이 뒤에서 애교를 손가락질하지 않게 할 수 있나?”“왕정민은 아무리 망나니라도 사업을 하고 있는 회사 대표인데, 자네는 뭔가?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인 데다 능력까지 없으니 다들 내 딸이 자기보다 못한 짝을 찾았다고 말하지 않겠나?”그 말을 들으니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하지만 나는 반박했다.“입이 그 사람들한테 달린 걸 어쩌겠어요. 다른 사람 의견이 그렇게 중요하면 차라리 살지 말아야죠.”이태웅은 쾅, 하고 테이블을 내리 치며 벌떡 일어섰다. 그의 안색은 무서울 정도로 새파래져 있었다.“지금 태도가 그게 뭔가?”“아버님이 애교 누나를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어요. 하지만 누나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이태웅은 사레가 심하게 들려 나를 말리지도 않았다. 다행히 내가 한참 동안 등을 토닥여줬더니 상태가 점차 호전되었다.이태웅은 나를 차가운 눈으로 쏘아봤다.“됐네. 날 위하는 척 그만하게. 내가 그렇게 대했는데 이렇게 참을성을 보인다고? 누굴 속이나?”나는 담담하게 웃었다.“속인다고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저가 뭘 하든 아버님 눈에는 제가 거짓말하는 거로 보일 거잖아요.”“내가 자네한테 선입견을 갖고 있는 건 부정하지 않겠네. 다만 자네와 내 딸이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닌 건 맞아.”이태웅은 자기가 너무 했나 싶었는지 태도를 살짝 누그러뜨렸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 저는 애교 누나랑 다른 세계 사람이에요. 누나는 정계 유명 인사 딸인데 저는 그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세속적인 눈으로 볼 때, 제가 이렇게까지 누나를 쫓아다니는 건 분명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일 거예요.”“아버님도 제가 왕정민과 같은 목적으로 애교 누나를 이용해 아버님 권세를 빌리려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죠?”이태웅은 묵인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우리를 그토록 반대하는 것도 아마 그 이유에서일 거다.내가 아무리 입이 닳도록 말해도 이태웅은 절대 나를 믿지 않을 거다. 때문에 나는 변명하는 대시 다른 방식으로 말했다.“하지만 제가 성과를 보인다면 기회를 주실래요?”이태웅은 단칼에 거절하지 않고 나를 보며 물었다.“어떤 성과 말인가?”이 상황에서 나도 모른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내가 너무 줏대 없고 무성의해 보일 테니까.”이태웅이 찾으려는 건 애교 누나한테도 잘하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다.그래도 명색이 강북시 부사장 사위인데,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을 한번 이혼한 딸과 이어준다면 분명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릴 거다.”나는 한참 생각하다가 진지하게 말했다.“왕정민 정도 실력을 키울게요.”내가 너무 큰소리쳤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이태웅은 상대가 왕정민보다 능력 있는 사람이어야 마음 놓고 딸을
“서 사장님, 괜찮습니까?”“서 사장님...”룸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잇달아 서윤기를 부축했다.서윤기는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지만 코에서 이미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모두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젠장. 누군데 서 사장님을 때려?”사람들은 나를 보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서윤기가 손을 뻗자 사람들은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서윤기는 휴지로 피를 닦더니 나를 싸늘하게 바라봤다.“정수호,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이렇게 큰 Y시에서 다 만나고.”나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정 사장님이 여기로 인도해 주셨어. 네놈이 여기 있는 줄 알고 너 처리하라고 여기로 이끌어 주셨어.”서윤기는 그 말에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정호섭 말이야? 그렇다면 좋겠지만 정호섭이 그럴 수 있어? 그렇게 신통하다면 왜 자기 죽음도 못 막았겠어?”정 사장님이 불상사를 당한 뒤 모든 사람이 비통했는데, 서윤기는 오히려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울화가 치밀어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룸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막아섰다.그때 이동민이 굳은 얼굴로 나에게 걸어왔다.“젠장. 감히 내 앞에서 서 사장님께 폭력을 써?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이동민은 키가 크고 덩치가 산만 했다. 듣기로 이동민은 예전에 백정이라서 아주 포악했었다는 말도 있다.나 역시 그의 몸에서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도살업자는 설령 그 일을 그만두더라도 피부와 핏속까지 스며든 피비린내를 지우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이동민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커다란 주먹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두 주먹이 부딪히는 순간 나와 이동민의 표정은 동시에 일그러졌다.이동민은 내 주먹이 그렇게 단단할 걸 몰랐는지, 아니면 내가 자기 주먹을 받아낼 줄 몰랐는지 살짝 당황했다.나 역시 꽤 센 이동민의 주먹에 흠칫 놀랐다.싸움을 배운 뒤로 나는 이 정도 상대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주먹끼리 부딪힌 뒤 한동안 팔이 저리더니 잠
버섯전골은 Y시 명물이라 다른 곳에서는 먹을 수 없다. 어느새 냄비 안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방안 전체에 퍼져 버섯 냄새가 가득했다.윤지은은 사모님한테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유미야, 너 요즘 밥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많이 먹어.”“그만 집어 줘. 내가 직접 먹을 수 있어. 두 사람도 먹어.”우리는 묵묵히 전골을 먹었다. 그동안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분위기는 다소 조용했다.나는 몇 번이나 분위기를 띄워주려고 했지만 사모님이 별 반응이 없고, 윤지은도 협조하지 않아 혼자 원맨쇼를 하는 느낌이 들어 포기했다.“차 마시고 싶어...”사모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제가 물어볼게요.”무엇보다 나는 어렵게 말을 꺼낸 사모님의 요구를 얼른 만족시켜 주고 싶은 생각뿐이었다.나는 얼른 밖으로 나가 큰 방을 지나다가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걸 보고 무의식적으로 안을 들여다봤다.그랬더니 내 눈에 익숙한 실루엣, 서윤기가 들어왔다.‘서윤기가 Y시에 왔다고?’나는 얼른 몸을 숨긴 채 안대성에게 전화했다.“서윤기를 감사하라고 했잖아. Y시에 온 건 왜 말 안 했어?”[네? 서윤기가 Y시에 갔다고요? 몰랐는데요? 형님, 제가 부하들한테 서윤기 잘 감시하라고 시켰는데...]안대성은 자기가 말실수했다는 걸 인지하고 얼른 입을 막았다. 그 순간 나는 당장 놈을 발로 걷어차고 싶었다.나는 얼른 전화를 끊고 룸 안을 훔쳐봤다.룸 안에는 서윤기 외에 Y시 현지인으로 보이는 남자 몇 명이 있었다. 그중 한 중년 남성은 왠지 낯이 익었다.나는 몰래 중년 남자의 사진을 찍어 판자촌 노랑머리에게 보냈다.[이 사람 알아요?]노랑머리는 곧바로 답장했다.[그 사람은 이연화의 아버지 판자촌 터줏대감 이동민이에요.]‘젠장.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이연화와 닮았잖아.’‘이동민이 여기 나타난 데다 서윤기와 웃고 떠드는 걸 보니 설마 정 사장님 교통사고가 서윤기 짓인가?’나는 그럴 가능성이 무척 크다고 생각했다.서윤기가 강북 시장
“한 번에 천만 원? 여기가 뭔 금은방인 줄 알아요?”나도 이제는 돈 좀 있지만 한 번에 음식점에 천만 원을 충전하는 건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북에서 최고급 호텔 멤버십에 가입하는 것도 고작 몇백만 원인데, 길가에 널리고 널린 버섯전골 집이 멤버십 카드만 천만 원이라니?매니저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돈 없으면 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나가요.”“잠깐!”나는 언성을 높였다.그러자 매니저가 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왜요? 또 무슨 일이죠?”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난 이 가게가 악의적으로 손님들에게 소비를 강요한다고 의심되거든. 그래서 지금 신고할 생각이야.”내가 신고하겠다는 말에 매니저는 얼굴색이 싹 바뀌더니 나를 삿대질하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당신 미쳤어? 본인이 밥 먹을 돈 없으면서 왜 남의 가게를 신고해?”“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더니, 왜? 내가 신고할까 봐 두려워? 불법 경영한 거 걸릴까 봐 걱정돼? 그렇다면 더 신고해야겠네. 이렇게 부도덕한 가게는 문 닫아야 하니까.”윤지은은 네 행동을 지지했다. 심지어 사모님 역시 이 일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나는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매니저의 태도가 너무 괘씸해 밥을 먹지 못하더라도 이분을 풀 생각이었다.내가 정말 전화하자 매니저는 이내 태도를 누그러뜨렸다.“알았어요. 오늘 일은 저희 측 책임이니 사과드리죠. 지금 당장 자리 내어드릴게요. 됐죠?”“어디? 홀? 아니면 구석?”내가 따져 물었다.그러자 매니저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당연히 룸을 내드려야죠. 하지만 큰 룸은 이미 손님이 꽉 차 작은 룸밖에 남지 않았어요. 비용은 사과하는 의미에서 받지 않겠습니다.”나는 손을 뻗어 매니저의 말을 잘랐다.“됐어. 값은 원래대로 받아요. 안 그러면 음식에 또 뭔 짓 할지도 모르니까.”매니저는 내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은 매니저가 비열한 소인배라고 공개 처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나는 윤지은과
결국 어쩔 수 없었던 나는 할 수 없이 내려가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Y시에 버섯전골 맛집은 꽤 많았다. 하지만 사모님 기분이 안 좋은 지금 작은 가게를 가면 보는 눈이 많고 시끄러워 기분이 더 안 좋아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때문에 나는 한적한 가게를 찾으려고 한참을 더 걸었다. 다행히 그런 가게를 찾는데 겨우 성공했다.“안녕하세요. 프라이빗룸 하나 예약하게요.”이 가게는 환경도 좋고 손님도 많은 걸 보니 맛도 괜찮은 듯 시었다.“큰 룸 하나가 남아 있는데 괜찮으신가요?”“큰 룸은 얼마인데요?”“큰 룸은 기본 소비가 60만 원 이상입니다.”“좋아요. 그걸로 주세요.”60만 원이면 괜찮았다.룸을 예약한 뒤 나는 또 운전해서 윤지은과 사모님을 픽업하러 호텔로 돌아갔다.두 사람은 어느새 현지 특색이 담겨 있는 꽃무늬 옷으로 갈아입었다. 역시 절세 미녀들이라 그런지 뭘 입어도 예뻤다.물론 나는 칭찬의 말을 아꼈다. 지금 장소와 분위기에 그런 칭찬은 맞지 않았으니까.잘못했다가 또 윤지은의 욕지거리를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나는 일부러 맞을 짓을 골라 할 이유가 없었다.30분 뒤, 우리는 버섯전골 가게에 도착했다. 하지만 나하테 큰 룸 예약을 도와줬던 종업원이 충격적인 얘기를 했다.“손님, 죄송하지만 큰 룸은 이미 다른 분이 예약하셨습니다.”“방금 분명 내가 먼저 예약했잖아요. 왜 남의 방을 함부로 다른 손님한테 내줘요?”나는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하지만 종업원은 터무니없는 변명을 늘어놓았다.“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인터넷 오류가 났는지 그 방은 이미 예약한 분이 있어요.”이미 이곳에 왔는데 그대로 갈 수 없었기에 나는 차선책을 제시했다.“그럼 작은 방이라도 줘요.”“죄송하지만 오늘 가게에 있는 모든 룸은 이미 예약돼서 남은 룸이 없어요. 괜찮으시면 홀에 있는 자리를 내어줄게요. 동남쪽에 한 테이블이 비어 있어요.”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당신들 장사 이따위로 할 거야? 내가 예약한 자리가
요즘 겪은 일이 너무 많은 탓인지 나도 가끔 감회가 새로울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특히 사장님처럼 좋은 분이 유골이 된 걸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우리는 한동안 돌아갈 수 없기에 사모님은 부모님을 불러 사장님의 유골함을 강북으로 가져가 매장했다.두 어르신은 충격이 너무 컸는지 순식간에 더 늙어진 것 같았다. 항상 친아들처럼 생각했던 사위가 그렇게 됐으니. 간암인 줄 알았을 때도 그렇게 믿기 어려웠는데 또 이런 불상사를 겪었으니 당연히 충격이 컸을 거다.하지만 임민수는 딸이 더 걱정됐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미야, 너 정말 강북에 안 돌아갈 거니?”사모님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진실을 파헤치기 전에 절대 안 돌아가요. 엄마, 아빠, 호섭 씨는 두 분께 맡길게요.”사모님은 무척 아쉬워하며 사장님의 유골함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그 순간 사모님의 눈빛은 매우 복잡했다. 아쉬움과 슬픔, 괴로움 그리고 아름다운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도 한데 섞여 있었다.나는 절친한 사람을 잃어본 적 없어 사모님의 심정을 깊이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알고 있었다.나와 윤지은은 사모님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사모님은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아무 말도 하지 마.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아니까.”사모님은 매우 침착했고 엉엉 울지도 않았다.그런 사모님의 모습이 나와 윤지은은 모두 걱정되었다.하지만 사모님이 말했다.“걱정할 거 없어. 내 상태는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비록 슬프고 안타깝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지 않을 거야. 호섭 씨도 내가 이러는 모습 원하지 않을 거야.”“유미야,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야.”윤지은은 감개무량하듯 말했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이내 나를 째려봤다.‘벌써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무엇보다 난 아직도 내가 대체 언제 무엇 때문에 윤지은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결국 나는 할 수 없이 묵묵히 두 사람을 따라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
우리는 희망을 이연화에게 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때문에 그 백수들이 소식을 전하기 전에 우리는 호텔에서 기다리기만 했다.하지만 윤지은은 호텔에 갇혀만 있으면 사모님이 답답해할까 봐 한가할 때면 사모님과 함께 산책하곤 했다.사모님이 자기 컨디션을 끌어 올리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었다.하지만 동력과 희망이 없는 탓에 사모님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Y시에 온 지 사흘 만에 강한나는 다시 강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떠나기 전 우리와 함께 시사 자리를 가졌다.“정말 여기 남아서 조사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강한나가 말했다.“알았어. 나도 도와줄 건 없으니 성공하길 빌게.”나와 윤지은은 곧바로 강한나가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아니나 다를까, 사모님이 화장실 간 틈에 강한나는 얼른 우리에게 말했다.“호섭 씨 시신 어느 때 화장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몰라. 유미가 아직 동의하지 않았어.”그 말에 강한나가 말했다.“시체를 화장하지 않아도 시체에서 단서를 찾는 건 어려울 거야. 난 고인 편히 쉬게 해주는 게 좋다고 봐.”“하. 그런데 문제는 유미가...”사모님이 아쉬워하는 게 문제다.화장하지 않으면 그래도 보러 갈 수 있지만 화장하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사실 나도 강한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우리도 그 말 이해해요. 사모님은 저희가 설득해 볼게요.”식사를 마친 뒤 강한나는 그 길로 떠났다.나와 윤지은은 호텔로 돌아가는 내내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했다.“두 사람 먼저 돌아가. 난 장례식장에 가볼 거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사모님이 또 사장님 보러 간다는 걸 알았다.하지만 장례식장도 규정이 있는데, 아무 때나 들여보낼 수 있을 리가 없다.그건 다른 것도 아닌 시신이니까.그때 윤지은이 입을 열었다.“유미야, 이번에 보고 난 뒤 호섭 씨 편히 자게 해주자.”“안 돼!”사모
“왕정민 이 파렴치한 놈. 어떻게 이럴 수 있지?”분명 자기가 잘못했으면서 뻔뻔하게 애교 누나한테 집착하다니.“애교 누나는 그럼 어떻게 처리했어요? 신고는 했어요?”[애교가 예전보다 많이 강해졌더라고요. 그걸 다시 왕정민한테 보냈어요. 심지어 안에 뭔갈 더 추가해서.]“네? 하하. 애교 누나가 정말 변했네요.”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그러니까요. 그것도 다 왕정민 때문에 할 수 없이 변한 거긴 하지만요. 애교가 만만한 줄 알고 애교만 괴롭히다니. 그렇게 대단하면 그 여자를 그렇게 괴롭히지...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 할 걸요.][그런 사람들은 원래 그래요. 여자들은 뭐 드세고 화를 자주 내는 여자가 되고 싶어서 되겠어요? 다 남자들이 행복한 줄 모르고 기어오르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변한 거죠.][특히 우리 여자들은 가끔 독해질 필요가 있어요. 독하지 않으면 남들이 괴롭혀도 되는 줄 알아요...]나는 형수의 말에 백 번 동의한다.애교 누나가 이토록 강해졌다니 나는 많은 걱정을 덜 수 있었다. 형수도 마찬가지고.두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내가 마음 놓고 할 일을 할 수 있다.형수와 한참 얘기한 뒤 나는 곧바로 애교 누나에게 전화했다.“누나, 왕정민 일은 왜 말 안 했어요?”애교 누나 목소리는 여전히 간질거리고 듣기 좋았다.[수호 씨가 Y시에 있는데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요? 수호 씨 가 나 때문에 와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나 이제 많이 변했어요. 다른 사람의 보호만 받으면서 살 수는 없어요.][그동안 아빠한테 반항하면서 독립적인 여자가 될 거라고 큰소리쳤는데, 지금껏 한 번도 그렇게 산 적이 없어요.][예전에 결혼에 묶여 나를 잃었고, 행복한 결혼만 있으면 모두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알았어요. 여자는 자기 마음이 강해져야 진짜 강한 거예요.]애교 누나의 말을 들으니 나는 순간 누나를 다시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이 사람이 아직도 내가 알던 나약하기만 하고, 무
“내가 방 하나 더 잡을게요.”나는 말하면서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갑자기 사모님 목소리가 들렸다.“수호 씨, 먼저 내 침대에서 눈 붙여요.”고개를 돌아보니 사모님은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내가 누울 공간을 내주었다.나는 속으로 거절했다.비록 사모님이 다른 마음 없이 그저 나를 휴식하라고 호의를 베푸는 거라는 걸 알지만, 사장님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내가 사모님과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건 말도 안 됐다.게다가 윤지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데, 내가 동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나는 결국 거절했다.“아니에요. 가서 다른 방 구하면 돼요.”나는 다급히 방을 나가 프런트 데스크로 달려갔다.처음 온 날 우리는 사실 싱글룸 세 개를 잡았다. 하지만 나중에 사모님 상태가 걱정되어 나와 윤지은이 사모님 방에 들어와 지내게 되면서 나머지 싱글룸 두 개를 취소했다.확인 결과 더블룸 하나가 나왔다는 말에 나는 얼른 그 방을 잡았다. 그러면 사모님과 윤지은이 더블룸에서 함께 지내고 내가 싱글룸에서 지내면 되니까.나는 카드키를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은 조용한 데다 환경도 좋아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내가 침대에 눕기 바쁘게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전화한 사람은 다름 아닌 형수였다.요즘 사장님 일 때문에 여기저기 달려 다니느라 형수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때문에 마침 조용한 틈을 타 나는 형수와 얘기하려고 여상 통화를 받았다.형수는 사모님 상태를 걱정하며 일의 진전을 물어봤다.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쉽지 않아요. 조사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어 한동안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아요.”[수호 씨 사장님 내외가 수호 씨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이번 기회에 유미 씨 옆에서 많이 도와줘요.]형수가 말했다.그 말에 나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네, 저도 알아요. 형수는 요즘 어때요?”[좋아요. 잘 먹고 잘 자고 이제 천천히 걸을 수도 있어요.]“진짜예요? 사진 찍어 보내 봐요.”나는 너무 기뻐 흥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