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한소리들은 장공주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러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콧방귀를 꼈다.“그림도 잘 알지 못하면서 이참에 기회를 잡은 모양이네요. 말조차 섞고 싶지 않은 모양이니 소자는 물러가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혜 태비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혜 태비는 그저 어리둥절했다.'이 늙은 여시가 또 왜 이러는 거지? 심기를 건드린 건 평양후부 노부인인데, 왜 나를 노려보는 거야?' 그녀 밑에서 많은 억울함을 당했고 더군다나 둘 사이에 장사도 얽혀 있으니, 그녀를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조금 더 감상하지 않으실는지요?"그러자 장공주는 그녀 옆으로 다가와 귀에 속삭였다. 그녀는 은근 명령어로 말하고 있었다.“당연히 감상해야지요. 다만, 모든 이들이 돌아간 뒤에 이 그림들을 저에게 보내주시지요. 오늘 중으로 꼭 봐야겠어요.”그러고는 가의군주와 함께 떠났다. 그 광경에 전소환도 뒤를 따라갔다. 장공주의 부인들도 망설이다 일어섰다.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안만수의 손녀 안여옥은 넋을 잃은 채 하나하나 자세히 감상 중이었다. 마치 선 하나하나까지 마음속에 새기려 하는 듯했다.그림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은 그저 혜 태비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까 노심초사 중이었다. 하여 방금 전의 신경전도 제대로 이해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장군부의 그 소녀에게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 같았다. 혹시라도 아들과 이어지기라도 한다면 평생 걱정할 일이 없을 것이다. 마침, 아들이 짝을 찾고 있는 시점에 놓인 가문에서는 전소환을 검은 명단에 올려버렸다. 독신으로 살지언정 저런 여자를 며느리로 맞이할 수는 없었다.한편, 한동안 그림을 감상하던 혜 태비는 점점 고민이 되었다. 그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귀한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던 혜 태비는 만약 장공주에게 보낸다면, 다시 돌려받지 못할 것 같았다.‘보낼 것인가, 보내지 않을 것인가?’보내지 않으면 나중에 무슨 문제를 일으킬지 알 수 없었다. 그 모녀는 사람을
대청에 들어서자, 황제와 승상, 그리고 많은 대신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심지어 아들까지도 푸른 옷을 입은 준수한 외모의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황제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인사를 올렸다.혜 태비의 기분이 좋아졌다. 부인들에게 둘러싸여 칭송받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조정의 사람들과는 거의 접촉하지 않았던 그녀에게 수많은 이들이 경의를 표하는 것을 보니 허영심이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었다.그 순간, 마차 안에서 고민했던 것들이 순식간에 잊혀졌다.그녀는 모두에게 예를 갖춘 후 안내를 받으며 정좌로 이동했다.평생 무수한 영예를 누리고 있었지만, 오늘처럼 조정의 대신들과 전설적인 인물인 심청화의 경의를 받고 있으니, 그녀의 입이 저절로 귀에 걸렸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상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아무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큰일이다. 송석석에 대한 호감이 또 한 조각 늘어난 것 같다.하인이 차를 올리자, 심청화가 송석석의 곁으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칭찬은 사람을 다루는 가장 좋은 무기다.”송석석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누가 사형에게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했던가?“결국 한 지붕 아래 있게 될 것이고 너의 시어머니이니, 다툼은 피해야 한다. 또한, 부인들과도 계속 교류해야 하니, 너를 위해 오늘 이 그림 전시를 준비했다. 사형의 뜻을 저버리지 않기를 바라며 앞으로는 섣부른 행동은 하지 않길 바란다.”송석석은 감동했지만 조금 어이없기도 했다. ‘사형에게 나는 무기만 휘두를 줄 사람인가?’매산에서 내려온 이후로, 그녀는 규칙을 배웠고, 전씨 가문에서 1년 동안 바르게 지냈다. 진성에서 어떻게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지,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가급적 누구도 건드리지 않으려 했다. 그녀가 충분히 감당할 수는 있었지만, 그로 인해 서우에게 안 좋은 영향이 있을까 봐 걱정되었다.서우를 위해 그녀는 심신을 다스렸다. 세상 모든 것이 거슬리는 구석이 없었다. 오늘 혜 태비조차도 너무 예뻐
사형의 마음을 받아들인 송석석이 농을 건넸다. “이렇게 좋아하시는데 제가 팔지 않겠다고 하면 뒤에서 저를 욕할 테죠?”“그럴리가요.”병부상서, 이덕회가 크게 웃으며 덧붙였다.“감히 우리 송 장군님을 나무랄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런 자가 있다면 내가 혼 쭐을 내겠소.”젊고 출중한 장군을 어찌 욕할 수 있겠는가? 그녀를 욕하는 자는 곧 병부와 적대하는 것이 될 것이다.이덕회의 말에 밖에 있던 여인들이 토끼눈을 뜨며 서로를 바라보았다.송석석이 군공을 세웠다지만, 여자였기에 몇이나 되는 남자들이 진정으로 높이 평가했을까? 병부상서는 농담처럼 툭 던졌지만 그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장공주와 함께 그녀의 험담을 했던 부인들은 후회가 밀려왔다. 만약 그 말들이 송석석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남편이 피해를 입을 지도 모른다.송석석을 바라보고 있는 황제의 눈빛은 너무 투명했다. 그는 관산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석석아, 난 많이 바라지 않는다. 이 한 폭이면 어떠냐?”송석석은 몸을 낮추며 말했다. “폐하께서 마음에 드시는 것으로 가져가시면 됩니다. 제가 어찌 폐하의 은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폐하께 드리겠나이다.”하지만 황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난 돈을 내고 사겠다. 나에게 선물하면 태부에게 선물하지 않고 되겠느냐? 태부에게 드리면 승상은 어찌할 것이냐? 그러면 부승상도 어찌할 것이냐? 내각의 신하들도 보고 있지 않느냐?”황제의 말에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서둘러 말했다. “저희는 사겠습니다. 페하께서는 그냥 받으십시오.”“너희들이 살 수 있는데 내가 못 사겠느냐?”황제는 송석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말해보아라, 이 관산도는 얼마냐?”송석석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한 폭에 천 냥으로 팔겠나이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모두 사가셔도 좋습니다.”사람들은 그녀가 높은 가격을 부를 줄 알았다. 심청화 선생의 그림은 천금을 주고도 사기 어렵기 때문에, 만 냥으로 시
오늘 부인들이 송석석이 주목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무리 질투가 나더라도, 심청화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기에 별수 없었다.심청화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상, 관료들도 송석석을 높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그림을 사랑하는 태부, 안만수같은 경우, 심청화 선생의 작품을 더 얻고자 한다면, 송석석과 더 많은 교류를 할 것이다.황제와 승상, 그리고 병부상서 이덕회까지, 그들이 오늘 보여준 태도에서도 송석석을 얼마나 예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는 단지 심청화 선생의 영향 때문만은 아니었다.한때 아무 가치 없는 폐물로 여겨졌던 송석석이 궁에서 아름다운 꽃으로 거듭났으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서우도 황제와 여러 사람에게 인사드리기 위해 나왔다. 송석석은 서애를 국공부의 미래 가주로서 일부러 얼굴을 비추게 한 것이다.작은 몸집이지만, 등은 곧게 펴고 있어, 송씨 가문의 아들들을 떠올리게 했다.그런 다음, 송석석은 혜 태비와 부인들을 모시고 차를 대접하러 이동했다. 지금에 와서 부인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예전보다 훨씬 순한 맛이였다. 틈틈이 그녀를 칭찬하는 말들도 들을 수 있었다.물론 그녀도 진짜와 가짜를 분간할 줄 알았다. 사교란 게 그렇지 않은가? 사람들이 그녀를 칭찬하면, 그녀도 칭찬해 주었다. 그야말로 빈틈없는 대응이었다. 흠잡을 데 하나 없었고, 오히려 세가의 대부인들보다도 더 적절하게 처신했다.혜 태비는 송석석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오늘을 겪어보니, 송석석이 그리 밉지만은 않았다.만약 그녀가 자신의 며느리가 아니었더라면, 송석석을 좋아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자신의 며느리다.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본래 서로 마음에 들지 않는 법. 아들이 뛰어나고 선제의 큰 신임을 받았다면 명문가 자제가 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하물며 송석석이야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졌다.그녀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모두가 그녀를 대단하다고 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마터면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길 뻔했으니 말이다.그녀는 화나
화전이 끝난 후, 황제와 여러 대신들은 함께 기뻐하며 자리를 떠났다. 부인들 역시 차례로 작별 인사를 했다. 오늘 일을 겪으면서, 경성에서의 진국공부 위치는 누구도 흔들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황제가 친히 행차하신 것만으로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회 왕비는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송석석은 혜 태비에게는 그림을 보냈으나, 그녀에게는 한 폭도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방금 전 그림을 산 사람들은 황제와 조정의 관료들이었고, 남편이 오지 않았다. 여자인 그녀가 남자들과 함께 다투기란 어려운 일이었다.하지만, 사느냐 못 사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송석석은 그녀에게 한 폭이라도 보내며 오해를 풀려 했어야 했다.그러나 끝까지 아무 말 없었고, 그저 "이모님, 천천히 가세요."라는 인사만 했다.회 왕비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래,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함께 돌계단을 내려오던 진 씨 부인은 빈손으로 돌아가는 그녀를 보고 입을 열었다. 호쾌한 성격의 그녀였기에 거침이 없었다.“아가씨께서 한 폭도 드리지 않았습니까? 왕비님은 그녀의 친이모이시지 않습니까?”회 왕비의 얼굴은 즉시 굳어졌고, 진 씨 부인은 그제야 자신의 말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급히 줄행랑을 쳤다.그렇게 마차에 오른 회 왕비는 손수건을 꽉 쥐었다. 마음속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란이와 함께 혜 태비의 연회에 참석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함께 국공부에 왔었으면 분명 그림 한 폭은 받았을 것이다.그녀만 웃음거리가 되었다. 진 씨 부인만 드러내고 표현했지만, 다른 이들들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모로서 송석석이 이혼할 때 돕지 않았다고 수군거렸을 것이다.하지만 누가 그녀의 사정을 헤아리려 할까?모두들 왕비라면 분명 화려하게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회 왕은 겁이 많아 눈치 보기 바빴다. 그래서 그녀 또한 왕비로서 처지기만 했다.사실 그녀는 언니가 살아있을 때, 언니를 매우 부러워했다. 언니 집안 남자들은 모두 대범했다. 비록 전장에서 죽었어
회 왕비는 딸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연 왕비를 끌어들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연 왕비도 이모 아니었느냐? 당시 혼인을 주선했던 사람도 연 왕비였다. 그런데 왜 코뺘기도 보이지 않는 것이냐? 나만 냉정했던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란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숙모님께서 어떤 상황에 처해 계신지 어머니도 잘 아시잖아요. 몸이 편찮으셔서 오고 싶어도 오실 수 없으셨던 거예요. 게다가 연 왕부에서 숙모님은 권한이 없으시고, 측비가 집안을 장악하고 있어서 연 왕비님을 가둬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회 왕비는 한숨을 쉬었다.“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앞으로는 네가 석석이와 교류하는 걸로 하고, 나는 더 이상 오가지 않겠다. 앞으로 북명왕비가 될 사람이니 완전히 관계를 끊어선 안 된다. 너도 알겠지만, 왕비라고 해도, 신분이 다른 거란다. 네 아버지는 겁이 많아 일을 벌이지 않으려 하지만, 북명왕은 다르다. 병권을 잡고 있지는 않지만, 현갑군과 대리사를 관리하고 있는 실질적인 직책을 가진 사람이란 말이다.”란이는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아버지께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인가? 선황제가 살아계셨을 때, 그들이 진성에 머물 수 있게 해준 것은 특벽히 혜택을 준 것이다.만약 아버지가 지금처럼 조용히 있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봉지로 보내졌을 것이고, 어명 없이는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으면서 늘 이 문제를 걸고넘어지셨다. 그렇게 부부간에 골은 깊어지고, 집안에 평화가 사라질 뿐이다.회 왕비는 혜 태비가 초대했던 상설연에 대한 이야기도 간단하게 말했다. 자신은 그저 억울하다며 모두가 송석석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 때, 도와주고 싶었으나, 부왕의 성격 탓에 너무 많이 말하면 문제가 생길까 두려워 말을 많이 하지 못했다고 했다.또다시 회 왕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미간을 찌푸리던 란이는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함께 갔던 시녀에게 물어보러 갔다.알고 보니, 어
란이를 대문까지 배웅하던 송석석은 참지 못하고 한 마디 건넸다. “너무 자신을 힘들게 만들지 말고, 그들에게 무조건 잘 보이려 애쓰지 마라. 그렇게 한다고 해서 너를 특별히 더 소중하게 여겨지지는 않을 거야.”잠시 멈칫하던 란이가 고개를 흔들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요. 사람의 마음은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 법이니, 제가 녹일 수 있을 겁니다.”말을 마친 후, 그녀는 시녀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올랐다.그녀가 보였던 표정에 송석석은 왠지 모르게 몸에 한기가 느껴져,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추위를 느껴, 보주에게 따뜻한 주머니를 가져오게 했다.그러자 양마마가 물었다.“몸이 불편하신가요?”“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추워서요.”송석석이 대답했다.양마마는 그녀가 여우 털 망토를 두르고 있고 난방도 충분히 되어 있는데 왜 추위를 느끼는지 의아해했다. 그녀는 송석석의 이마를 만져보더니, 차가운 것을 보고 서우의 방에 있는 홍작 어른을 불러 맥을 짚어보게 하려 했다.송석석은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양마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홍작 어른은 약상자를 메고 와서 송석석의 맥을 짚어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마마, 안심하셔도 됩니다. 아가씨의 맥은 아주 좋습니다. 예전 전장에서 입은 부상으로 남은 어혈도 이제 거의 다 나았습니다. 계속해서 천왕보심환을 드셔서 기혈을 보충하시면 됩니다.”“그런데 아가씨가 춥다고 하셔서요.” 양마마는 걱정스러워했다.“아마도 방금 바람을 맞아서 그런 것일 겁니다. 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는 무예를 익힌 분이라, 보통 사람보다 체력은 훨씬 좋습니다.”홍작 어른이 안심시켰다.양마마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아가씨가 체력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처럼 나이 든 사람도 춥지 않은데, 왜 아가씨는 추위를 느낀다는 것일까? 방안은 이미 난방이 되어 있는데도, 아가씨가 따뜻한 주머니를 안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수고 많으셨습니
약당으로 돌아온 홍작어른은 단신의에게 송석석이 연 왕비에 대해 물어본 일을 보고했다.“헛소리하지는 않았겠지?” 단신의는 다소 엄하게 물었다.“제가 어찌 감히 헛소리를 하겠습니까? 그저 지금 연 왕비께서 청목암에서 요양 중이라는 것만 전했습니다.”홍작이 펄쩍 뛰며 대답했다.단신의는 한숨을 쉬었다. “그 일은 우리만 알고 일단 비밀로 묻어두기로 한다. 아무래도 식을 치른 후에야 말하는 것이 좋겠다. 지금 알게 되면 틀림없이 달려갈 테니까.”홍작 어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어제는 심청화 선생이 시화로 페하까지 불러들였으니, 앞으로 진성에서 아무도 아가씨를 험담하지 못할 겁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연 왕부와의 갈등이 생기면 말썽이 끊이질 않을 겁니다.”“어쨌든 재혼에다가 높게 가는 처지라 질투의 대상이었지. 어제 화전이 열리면서 그 험담들을 씻어버렸고, 식이 무사히 치러지면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만 할 거다. 그러면 삶이 한결 나아질 테고.”홍작 어른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사부님도 이런 미신을 믿으시는군요?”단신의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러냐? 우리가 의술만 배웠겠느냐? 의학, 점술, 천문학, 어느 하나라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구나 운명이라는 건 정말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단다, 송씨 가문이 겪은 고난들을 생각해 보아라. 하늘이 그 집안만 골라서 시험에 들게 했던 것 같다. 좋은 말 많이 듣고, 쓸데없는 말썽 없이 무사히 식을 마치게 하려는 거다. 그래야 내 마음이 놓일 것 같구나.”“맞습니다, 맞아요.” 의술만 익혔던 홍작은 점술 방면은 청작만큼은 아니었다.안방에 앉은 단신의에게 제자가 차를 내왔지만, 마시지도 않고 그저 찻잔 속의 물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으며, 송회안 외에는 친구도 없었다.그는 송씨 가문의 아들들과 송석석을 자신의 여식처럼 여겼다. 송씨 가문이 그런 비참한 일을 당했을 때,
소씨 가문의 반응을 보니, 진성의 다른 가문들이 평소에 그들과 친밀하지 않아 이 일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시만자는 소 부인이 놀란 틈을 타 말을 이었다.“우리 부군이 가장 아끼는 조카가 바로 지아인데, 큰 억울함을 당해서 태후마마께 아뢰려던 걸 내가 간신히 말렸소. 지아를 때린 자가 스스로 나서서 벌을 받으면 그만인 것을!”왕이장은 진성에서 여러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시만자의 부군, 만종문의 제자, 병부 효고사, 그리고 진성 내 만종문 산업의 주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 왕씨 가문의 관계는 일부러 밝히지 않았지만, 이럴 때 활용해도 괜찮을 만큼 중요했다. 태후마마가 만종문의 임 사부를 존경하는 점을 생각하면, 이 관계를 의심하는 이는 없을 터였다.시만자는 말을 마치고 혼자 의자에 앉았는데, 그 표정은 송석석과 다를 바 없었다. 이때 소씨 가문은 비로소 섭정왕비가 직접 소 세자를 데려온 것도 왕지아를 위한 조치임을 깨달았다. 소 부인은 왕지아에게 이토록 강력한 배경이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아이고, 제가 소인의 말만 믿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네요…”소 부인이 급히 사죄했다.“반드시 뒤에서 함부로 지껄이던 자들을 찾아내 왕씨 아가씨에게 사과하겠습니다. 당장 사람을 데리고 가서…”그러자 시만자가 차분히 말을 끊었다.“처벌할 마음이 있는데, 왕지아의 눈을 더럽힐 필요까지 있겠소? 백작부에서 처벌하지 못한다면, 마침 섭정왕비께서 사람을 데리고 오셨으니 소 세자를 처벌할 때 함께 처리하면 되겠소.”소 백작은 급히 수긍하며 하녀와 종들을 불러내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넘겼다. 송석석이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소 세자가 덕행에 흠이 있는 탓에 작위 수여는 불가능할 것이오. 그리고 오늘 누군가 경위부에 고소한 이상 내가 방관할 수도 없소. 대충 몇 대 맞고 넘어가려 한다면 법이 왜 있겠소?”시만자는 속으로 생각했다.‘화풀이하러 온 게 아니었나? 소씨 가문 때문에 지아와 소민이를 갈라놓을 순 없는데…’소 부인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시만자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소씨 가문이라는 작은 백작부가 감히 이렇게 날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평생동안 막돼먹은 여자를 많이 보았지만, 귀족 가문의 막돼먹은 여자는 처음이었다.왕지아가 끌려 나가 뺨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시만자는 소씨 가문의 대문을 박차고 사람들을 끌어내고는 한바탕 때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화가 나더라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왕지아와 왕청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니 그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그렇게 시만자가 급히 왕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왕지아가 손목을 그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또 왕청여가 하녀들을 모두 내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곧장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왕청여가 목을 매려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 또한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렸다.최근 몇 년간 자신의 성격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왕청여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자 공방에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왕청여를 때린 후, 시만자는 즉시 소씨 저택으로 향했다. 소씨 저택에 도착하자 석석이 현갑군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의심이 앞섰다.‘석석이는 관직이라 복수 같은 걸 할 수 없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송석석은 관복을 입고 정좌에 단정히 앉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명이 그의 곁을 따르고 있었고, 몇 명의 현갑군이 소민의 형인 소 세자를 붙잡고 있었다.백작부의 모든 어르신과 도련님들이 모여 있었고,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주모인 소 부인도 나와 있었다. 상황을 보니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만자는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미리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러니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백작과 소 부인이 송석석에게 굽실거리며 사정하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알고 보니 소 세자가 부유한 상인의 양첩과 결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걸렸고, 자신의
왕청여에게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게 한 것은 방시원이 돌아올 때도, 전북망과 이혼했을 때도, 왕씨 가문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후회한 것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였다.왕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왕청여는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니 자신에게 잘못이 많음을 깨닫고 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고, 고생한 자신을 비난할 자격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형수님이 자신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면서도, 과거를 들추며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다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지아는 안백작부의 도련님 소민과 정이 들었다. 비록 평서백 작위는 없어졌지만, 형수가 선제의 찬사를 받아 고명을 얻었고 가업 경영에도 능숙했으며, 셋째 동생이 시씨 가문의 딸 시만자와 결혼해 왕씨 가문은 여전히 병부에서 중용되고 있었다. 두 가문의 위상은 비슷했다.그러나 소민이 어머니에게 왕지아와의 혼인을 청하자, 소 부인은 강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다. 비록 소민은 세상에 없는 효자이지만 왕지아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녀 외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겠다고까지 하며 반항했다. 이에 소 부인은 그를 감금해버린 것이다.왕청여는 아마 소 부인이 방문하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소 부인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왕씨 저택에 난입해 최씨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우리 아들을 넘보다니! 윗사람이 바르지 못하니 아랫사람도 바르지 못한 건가? 당신 시누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뻔뻔하게 굴더니, 이제는 딸까지 그 꼴이로군! 어린 나이에 남자를 유혹하고, 우리 아들에게 부모를 협박하는 법까지 가르치다니! 이 가문에는 악랄한 자들밖에 없는 것이냐?!”말을 마치자 하인들에게 저택을 부수게 했고, 왕지아를 끌어내 사람들 앞에서 뺨을 때리며 머리와 얼굴에 침을 뱉었다. 왕청여와 최씨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