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간의 연애 끝에, 강도겸은 새로운 연인과 함께하며 소정은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소정은은 싸우지도,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다. 오히려 짐가방을 차분히 정리하고, 도겸이 마련해준 천문학적인 이별 수당을 받아든 채 과감히 떠났다. 도겸의 친구들은 익숙한 내기를 걸었다. 과연 이번에는 소정은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J시에서 소정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녀가 강도겸을 미친 듯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존심도, 분노도 없는 사랑, 그들이 알고 있는 소정은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생각했다. 사흘 안에 돌아와 사과할 거라고. 하지만 사흘이 지나고, 또다시 사흘이 지나도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결국 도겸이 먼저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그가 처음으로 누그러진 태도로 말했다. “넌 이제 그만 장난칠 때가 되지 않았어? 그만하면 돌아와...” 그러나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것은 뜻밖의 낮은 남자의 웃음소리였다. “대표님,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습니다. 이별을 후회해도 어쩔 수 없죠.” “정은을 바꿔줘, 걔랑 이야기하고 싶으니까!” “죄송하지만, 제 여자친구는 지쳐서 방금 잠들었어요.”
view more방선근은 아무 말도 못 했다.방금 제대로 한 방 먹은 느낌이었다.말은 안 했지만, 얼굴이 말하고 있었다.‘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한편에서, 정은은 여태껏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건 말할 타이밍이 없어서가 아니었다.‘엄마 혼자서 전장을 평정하는데, 내가 끼어들 이유가 없지.’이미숙의 날카로운 발언, 단단한 시선.그리고 단어 하나하나에 실리는 힘.정은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언제부터였지? 언제부터 이토록 강한 사람이 됐을까?’한때, 아이패드도 ‘싫다’며 거부하던 이미숙이었다.문자보단 메모지를 선호하고, 스마트폰도 한참 지나서야 억지로 쓰게 됐는데, 지금의 이미숙은 출판사 대표 앞에서도 단 한 치도 물러섬이 없었다.‘나만 성장한 게 아니었구나.’정은은 불현듯 소진헌도 떠올랐다.이미숙의 책 사인회에 따라다니며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던 그 시절, 소진헌은 늘 뒷짐 지고 조용히 기다려주었고, 그 와중에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고, 자연스럽게 견문이 넓어졌다.그 영향일까? 요즘 소진헌의 수업은 훨씬 재미있어졌고, 작년엔 전국 교사 수업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까지 받았다.그 학교에서 전국 단위의 교사상이 나온 건 처음이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소진헌은 연말에 7년 넘게 묶여 있던 교원 승진 심사를 드디어 통과했다.‘그땐 기대도 안 했는데... 진짜 그냥, 그렇게 되더라.’그는 겉으로 아무 표정도 없었지만, 속으로 아주 기뻤다.다시 현실.방선근은 이미숙이 그냥 지나갈 사람 아니라는 걸, 이제야 제대로 깨달은 듯 말투를 바꿨다.“선생님,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나 편집장님 관련해서는 저희 출판사도 법적 대응을 준비 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님 정도 되시는 분이면 아실 겁니다. 개인과 조직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이미숙은 짧게, 하지만 꽤 날카롭게 웃었다.“후훗... 그게 바로 자리가 사람을 망친다는 거죠.”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방 사장님, 사장님이 착각하고 있는
사건이 터진 뒤, 금액이 워낙 컸던 탓에 나석천은 불구속 수사도 허락되지 않았다.보석 청구는 바로 기각.결국, 나석천의 아내가 이미숙에게 전화를 걸었다.다급하고, 떨리는 목소리였다.그제야 이미숙은 알게 됐다.나석천이 그동안 텐스출판사에서 얼마나 숨 막히게 버티고 있었는지.그동안 이미숙의 책은 텐스출판사에서 출간되어왔지만, 사실 그녀는 출판사 사람들과 직접 마주한 적이 거의 없었다.계약도, 협의도, 문제 대응도,전부 나석천이 중간에서 알아서 처리해줬다.출판사에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오거나, 계약 외의 압박을 넣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런 일은 한 번도 그녀까지 닿은 적이 없었다.언제나처럼,나석천이 앞에서 다 막아줬기 때문이었다.‘그러니까... 난 아무것도 몰랐던 거야.’‘이렇게 편하게만 일해온 게, 다 그 사람 덕분이었다는 걸.’이미숙이 진심으로 신뢰하는 건 출판사도, 브랜드도, 시스템도 아니었다.오직 나석천이라는 사람이었다.게다가 그는 이미숙에게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준 사람이다.처음으로 원고를 ‘작품’이라 불러줬던 편집자.글로 먹고살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어줬던 유일한 사람.사실, 인제 이미숙의 책은 어느 출판사에서든 나올 수 있었다.굳이 텐스출판사였던 이유는 단 하나.나석천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그걸 텐스출판사는 전혀 몰랐던 모양이었다.심지어 이번엔 뻔뻔하게도 나석천을 대체하겠다며 다른 편집자를 이미숙에게 붙였다.이미숙은 단칼에 거절했고, 그 편집자는 나석천의 구속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어떻게 저렇게까지 무신경할 수 있지...?’이미숙은 숨을 고르며 나석천의 아내에게 말했다.“걱정 마요. 나석천 편집장님은 제가 도울게요.”그녀는 즉시 이춘재에게 모든 상황을 정리해 보고했다.이춘재는 곧바로 경찰과 로펌 쪽에 사람을 붙였다.며칠 후, 드디어 경찰이 태도를 바꿨다.정식으로 보석이 승인되었다.하지만, 출판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여러 차례의 협상 끝에도 텐스출판사는 끝내 고발을 철
“오빠가요? 섬엔 왜 갔을까요?”정은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갸웃했다.[들으니 거기에 네 오빠 회사에서 개발 프로젝트가 하나 있나 보더라.]오미선 교수의 말에,정은은 문득 예전에 들었던 호주 쪽 사업 구상이 떠올랐다.‘섬 개발... 오빠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교수님, 나중에 필요한 일 있으시면... 오빠한테 편하게 연락하세요.”[그러니까. 신기하게 너희 남매는 말투까지 똑같네.]“네?”[네 오빠도 그러더라.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연락처도 직접 알려줬어.]정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잘 됐네요. 그럼 정말로, 교수님 절대 사양하지 마세요.”“정말 사양 안 했어.”오미선 교수는 살짝 웃음 섞인 목소리로 이어나갔다.[우리 연구팀이 매달 한 번씩 섬에서 나가 생필품이랑 식재료를 사오거든. 근데 항상 배가 작아서 많이 못 실어 와.][이번엔 미리 목록 보내놨더니, 네 오빠 회사 화물선이 보름마다 섬에 한 번씩 들른다면서 그 배로 필요한 물품들 같이 실어다 주겠대.]잠시 말을 멈추던 오미선 교수가 이내 조용히 한마디 덧붙였다.[나도 알아. 이건 다 네 덕분이지.]“아니에요, 교수님. 오빠는 도 교수님의 제자예요. 교수님하고 도 교수님이 어떤 사이신데요. 저 아니었어도 오빠는 무조건 도와드렸을 거예요.”오미선 교수와의 통화를 끝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핸드폰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보낸 사람은... 심현빈.사진 한 장.정은은 사진을 클릭했다.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커다란 바위 위, 오미선 교수와 현빈이 나란히 서 있었다.오미선 교수는 언제나처럼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현빈은 잔잔하게 웃으며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고 있었다.세찬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이 조금 흩날렸다. 한 사람은 희끗희끗한 옆머리, 다른 한 사람은 짙은 검은 머리를 단정히 넘긴 모습.[맥스 군도에서 너희 지도교수님 만났어.]정은은 바로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오빠, 알아요. 교수님이 다 얘기해주셨어요. 정말 고마워요.]잠
소문은 순식간에 학교 본부까지 퍼졌다.한중기가 사무실 문을 거의 부수다시피 열고 뛰어들어왔다.“됐어요, 됐어!”“뭐가? 복권이라도 당첨됐어?”송영한은 뜨거운 차를 홀짝이며 무심하게 받아쳤다.“정은이 논문, 게재 확정됐답니다!”“응?”송영한은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이번엔 Nature야? Science?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걔네 팀 논문 나오는 거 하루이틀 일도 아니잖아.”한중기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했다.“이번엔... 안 나왔었죠.”“《란셋》입니다.”“총장님? 얼어붙으셨어요?”“잠, 잠깐만... 다시 한 번 말해봐. 뭐에 실렸다고?”“《란셋》이요. 들으셨죠? 필요하시면 다시 말씀드릴까요?”송영한은 한순간 멍해졌다.“정은 실험실에서? 《란셋》? 진짜 확실해?”“방금 담당 교수님한테 직접 전화 받았어요. 리얼입니다.”“아니 근데... 정은은 바이오 쪽 전공 아닌가? 그 논문이 어떻게 의학 저널, 그것도 《란셋》 같은 데 올라가?”한중기가 슬슬 으쓱해지며 어깨를 들썩였다.“그게 바로 그 친구 능력이죠. 저도 정확한 원리는 모릅니다만.”“논문 원문 있어? 나도 좀 보게...”“아직 최신호 출간 전입니다, 총장님. 좀만 기다리세요.”“아니, 그럼 초고라도...”말을 꺼낸 순간, 송영한은 스스로 입을 다물었다.‘초고...은 무슨...’‘애초에 실험실도 교내 아니고, 연구 성과도 학교 이름 안 걸고 있는데...’‘그걸 내가 보여 달라 한다고 주겠냐...’얼굴 두꺼운 걸로는 어디 가서 안 밀리는데, 이건 좀 무리인가 싶었다.송영한은 목을 가다듬으며 기침 한 번 했다.“흠... 그... 너 정은이랑 사이 괜찮잖아? 실험실 다시 교내로 옮기게 설득해 볼 수 있을까?”“지원금은 학교가 다 책임진다고 전해줘. 박사 졸업 후엔 바로 박사후 과정도 연결해줄 수 있고, 원하면 전임 교원 자리도 보장해주고 말이야. 정직원으로.”“아이고!”한중기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총장님, 전 진짜 몰랐어요. 그렇게 꿈이 크신
두 사람의 솔직한 대화 후, 정은도 마음속 짐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 더 이상 가끔 재석의 집을 찾아갈 이유도 없었고, 강서원을 대하는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무엇보다 정은 자신이 만족했고, 그 사실에 그녀 스스로 더욱 기뻤다.정은은 곧장 모든 에너지를 새 과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11월, 1년 중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인 국제학술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2년 전, 정은, 민지, 서준, 세 사람이 학교 대표로 바이오 유닛 분야 경시대회에 참가한 이후, ‘박사과정 우선선발 조항’에 해당 대회 수상자가 우선 추천 대상이 된다는 조항이 공식적으로 포함되었다.그 이후로 수많은 후배들이 참가 신청을 하며 경쟁이 치열해졌고, 자격을 얻기 위한 싸움은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학교 측도 학생들의 뜨거운 성원과 열기에 당황할 정도였다.결국 교내 예선전을 여러 차례 열어 우수한 팀을 선발하고, 그 팀이 국제대회에 나가게 하는 방식으로 조율되었다.정은은 그 전설적인 대회에서 ‘설욕의 아이콘’이자 ‘박사 선발 제도 개척자’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대표팀이 출국하기 전, 그녀는 학교의 출범식에서 대표로 연설을 부탁받았다.무대에 오르는 정은의 모습이 보이자, 강당 안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마치 콘서트장 같은 분위기였다.“정은 선배님, 짱이예요!”어디선가 터져나온 그 한마디에, 현장은 순식간에 뒤집어졌다.“정은 선배님, 진짜 멋져요!”“정은 선배님, 저희의 롤모델이에요!”“...”송영한 총장은 얼굴이 붉어지며 말했다.“이게 무슨 말버릇이야? 결의식이 아이돌 팬미팅도 아니고... 구호까지 외치고 있으니 원...”한중기 부총장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에이, 너무 그러지 마세요. 학생들이 진심에서 우러나 이러는 거잖아요. 오히려 전 이런 분위기 꽤 감동적인데요? 출범식이라는 게 결국 사기를 북돋우는 자리 아닙니까? 정은 학생이 무대에 서기만 해도 이런 반응이라니, 이미 절반은 성공이죠.”“당신...”“총장님, 요즘 애들이 좀 자유롭고 즉흥
“강도겸과 헤어지고 나서, 그때 내가 했던 노력과 버틴 시간을 돌아보니... 그게 참, 우스웠어요.”정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 안에는 씁쓸한 회한이 배어 있었다.“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 하나 때문에 그렇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자신을 갉아먹고, 결국엔 나 자신을 의심하게 됐던 그 시기... 그게 정말, 가치 있었을까요?”재석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니, 가치 없지.”정은이 희미하게 웃었다.“맞아요. 가치 없죠. 나...”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가, 마치 자신을 더 단단히 다잡듯 다시 입을 열었다.“해야 할 일이 아직 너무 많아요. 학업도, 연구도, 과제도, 논문도... 그 모든 것들이 ‘며느리 노릇'이나 '결혼해서 아이 낳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해요.”“내가 얼마나 애써서 그 진창 같은 과거에서 빠져나왔는데... 이제야 겨우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됐는데... 또다시 다른 진창에 빠지고 싶진 않아요.”재석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근데, 그게 진창이 아니면? 넌 아직 가까이 가보지도 않았잖아. 어떻게 단정할 수 있어?”정은은 곧장 남자의 눈을 마주 보았다.그 눈빛엔 두려움도, 미련도 없이 오직 확신만이 담겨 있었다.“아직도 모르겠어요? 난, 앞이 어떤 길인지 시험해 볼 여유도, 체력도 없어요.”“당신 말대로, 그게 진창이 아니라, 짙은 안갯속에 가려진 아름다운 풍경일 수도 있겠죠. 안개만 걷히면 드러날지도 몰라요.”“하지만 그 안에 낭떠러지나 벼랑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나는 그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요.”“확실한 방법은 하나예요. 애초에, 그 테이블에 앉지 않는 것...”재석은 대답하지 않았다.아무 말도, 아무 표정도 짓지 못했다.말은 끊겼지만, 분명 손은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서로를 바라보는 눈도 마주하고 있었다.하지만 둘 사이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버티고 있었다.그 무엇보다 가까운 듯.또 그 무엇보다 멀리 느껴지는 거리.그 정적을 깨뜨린 건, 다름 아닌 정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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