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무슨 방법이든 동원해서라도 그를 도와주겠다는 거야? 심지어 내 심장에 칼을 꽂는 일이라도?” “성유리, 너 정말 독하다.” 박한빈은 말을 끝내더니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거친 파도는 여전히 밀려왔다가 나갔지만 넓은 해변 위에는 이제 성유리 혼자만 남아 있었다.그날 밤, 성유리와 박한빈은 서로 등을 돌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제는 침대 한쪽에 누군가 더 있는 게 익숙해졌지만 그전에는 둘이 같은 베개를 쓸 때면 잠들기 전 꼭 뭔가를 하거나 아니면 박한빈이 그녀를 품에 안고 잠들 곤 했다. 그러나 그날 밤 기분이 상한 박한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등을 돌린 박한빈의 모습은 마치 그들 사이에 깊은 골이 생긴 것을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성유리 역시 등을 휙 돌렸고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가 버렸다. 아침이 밝았을 때, 성유리가 눈을 떴지만 박한빈은 이미 없었다. 그가 일을 하러 갔는지 아니면 에릭이 말한 파티에 갔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주변 풍경도, 해변도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고 다른 곳도 딱히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하루 종일 호텔에 머물며 영화만 봤다. 방을 나가지도 않고 식사는 모두 호텔 레스토랑에서 방으로 배달시켰다. 어느덧 어둑어둑한 밤이 되었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성유리는 그들이 말한 파티가 얼마나 순수하지 않을지 대충 예상은 했다. 아마 지금쯤 박한빈의 곁에는 다른 여자가 있을 것이다. 여긴 금성은 아니지만 그는 여전히 탑에 서 있는 남자였으니까. 꿀을 발라놓은 케이크에 화려한 나비들이 몰려들 듯이 박한빈에게 여자들은 끊임없이 달라붙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을 기다리기 포기했고 그냥 휴대폰을 꺼두고 혼자 잠잘 준비를 했다. 혼자서 큰 침대를 차지하는 건 역시 편했고 성유리는 곧 깊은 잠이 들었다. 그러나 꿈속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무언가에 눌리는 듯 답답했고, 몸 아래로 차갑고 간지러운 느낌이 스멀
고통과 분노, 그리고 굴욕과 공포의 감정이 한순간에 몰려왔다. 성유리는 그 충격으로 몸부림조차 할 수 없어 잠시 멈췄지만 몇 초 후 정신을 차리자마자 더욱 거칠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여전히 그녀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고 있었지만 성유리는 입을 크게 벌려 그의 손등을 있는 힘껏 물었다. 온몸의 힘을 다해 문 성유리기에 남자의 살이 거의 뜯길 정도였다. 그제야 그 남자는 참지 못하고 고통에 하던 행동을 멈추더니 신음을 냈다. 그 틈을 타 성유리는 무릎으로 그의 복부를 강하게 찼지만 이번에는 남자가 먼저 대비를 하고 있었다.남자는 성유리의 다리를 붙잡아 아래로 눌러 제압한 뒤, 그녀의 입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성유리는 곧바로 크게 비명을 질렀다. “이거 놔요! 살려주세요!” 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이미 풀고 있던 넥타이를 그녀의 입에 밀어 넣었다. 그 남자의 몸에서는 진한 술 냄새가 났지만 그보다 더 익숙한 냄새가 성유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성유리는 그 순간 치가 떨렸고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려 남자를 쳐다봤다. 방 안에 불은 꺼져 있었기에 어둠 속에서 남자의 얼굴을 성유리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넥타이를 성유리의 입에 밀어 넣은 뒤, 다시 그것으로 그녀의 두 눈을 가렸다. 성유리는 더 이상 말을 할 수도 없었고 시야마저 완전히 차단되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불길한 추측이 자리 잡았고 성유리는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남자의 일방적인 분풀이였다. 그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는 그녀에게 고통을 주었고 그제야 성유리는 깨달았다. 이전까지 그가 그녀를 다루던 방식은 그나마 부드러운 편이었다는 것을. 이제 남자는 그녀를 만족시키려는 마음을 완전히 버렸는지 성유리는 오로지 고통만 느낄 뿐이었다. 일 초는 일 년같이 느껴졌고 결국 성유리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을 정도로 지쳐버렸다. 얼마나 시
성유리는 이미 모든 걸 알게 되었지만 박한빈은 오히려 이렇게 된 것이 잘됐다고 생각했다. 다른 모든 사람은 그의 부드럽고 완벽한 모습만을 보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의 또 다른 면모를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아무리 사이가 나쁘다 해도 결국 성유리는 박한빈의 아내이자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와 끝까지 함께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박한빈이 자신의 진짜 “얼굴”을 성유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박한빈은 이런 방식과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알게 될 줄은 몰랐다. 거의 광기에 서려 이성을 잃었던 하룻밤이 지나고 박한빈은 잠에서 깨어났다. 겨우 두 시간밖에 자지 않았지만 정신은 매우 맑았다. 옆에 누워 있는 성유리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눈꺼풀은 퉁퉁 부어있었고 목 아래에는 온통 빨간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어깨에는 박한빈의 치아 자국까지 선명하게 남아있었지만 그는 언제 그렇게 물었는지 기억나지 않았고 딱히 상관도 없었다. 옷을 입으면서 그는 호텔 프런트에 약을 주문했고 직접 잠 들어있는 성유리에게 발라주려고 했다. 당연히 이 과정이 순조로울 리 없었고 성유리는 약이 몸에 닿자 바로 깨어났고 박한빈이 자기 위에 있는 걸 발견하자 깜짝 놀라 그를 발로 차려고 했다. 그러나 곧 박한빈이 단지 약을 발라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비록 투덜거리며 불만을 표했지만 결국 가만히 있었다. 약을 다 바른 후, 박한빈은 호텔에서 주문한 아침 식사를 성유리의 옆에 놓고는 방을 떠났고 나가기 전 문을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성유리의 여권을 박한빈이 이미 가져간 상황이지만 그녀가 다른 곳으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젯밤의 일을 겪고 나서 박한빈은 더 이상 예전처럼 조건만으로 그녀를 위협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새로운 협상 카드가 필요해.’ 그리고 그 새로운 카드는 사실 어렵지 않게 준비할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준비되어 오고 있
박한빈은 옷을 입으면서 이미 알아차렸지만 처음엔 신경 쓰지 않았다. 예전 성유리가 그의 뺨을 자주 때릴 때도 그는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그대로 하고 회사에 나가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에릭의 시선이 닿자 박한빈은 이상하게도 어딘가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들은 게 있는데 너희 쪽 여성들은 대개 현모양처에 부드럽고 사랑스럽다며? 그런데 보니까 네 아내는 그런 타입은 아닌 것 같아.” 에릭이 박한빈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을 이어갔다. “근데 너는 왜 성유리 씨와 결혼했어?” 에릭은 마치 성유리에 점점 더 흥미가 생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박한빈은 셔츠 깃을 살짝 당기며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SK 쪽 협상은 어떻게 돼 가고 있어?” “상황이 별로 좋지만은 않아.” 박한빈의 딱딱한 말투에도 에릭은 신경 쓰지 않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데이비드 그 노인이 도무지 입을 열지 않으려고 해. 네가 직접 가야 할 것 같아.” 박한빈이 씩 미소를 지었다. “네가 가는 게 더 적합하지 않나? 어차피 그 사람 딸을 너에게 시집보내고 싶어 하잖아.” “내가 미쳤다고 찾아가서 만나겠냐?” “괜찮지 않나? 들으니 그 딸 명의로 된 석유 광산 몇 개가 있다던데 그 여자랑 결혼하면 너도 평생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거 아냐.” 에릭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박한빈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그 여자 너한테도 관심이 적진 않던데?” “나는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잖아.” 박한빈은 손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 쪽은 결혼하면 상대만 보는 일편단심이야. 그러니 네가 가는 게 더 적합하지. 그걸 핑계 삼아 그 노인의 입을 막을 수 있잖아.”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에릭에게 고정했다. 하지만 에릭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너도 알잖아. 올해 우리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는 이번 일에 달렸다는 거. 너는 이쪽으로 이주할 생각도 없으니 데이비드가 고집을 꺾지 않으면 내가 여기서 움
성유리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생활에 꼭 필요한 물과 각종 음식을 발견했다. 그 음식들은 대부분 하루 종일 보관할 수 있는 빵 종류였다.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깨달은 성유리는 아픈 다리를 이끌고 문 앞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문은 예상대로 밖에서 잠겨 있었고 성유리는 화가 나서 문을 세게 두드리며 소리쳤다. “당장 문 열어!”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씩씩거리던 성유리는 다시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의 전화는 꺼져 있었다. 호텔 프런트에도 전화를 걸어봤지만 프런트에서는 자신들도 문을 열어줄 권한이 없다고 할 뿐이었다. 성유리가 여러 차례 불만을 제기하며 강하게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그녀에게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 방법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성유리는 하루 종일 방에 갇혀 있어야 할 거라 생각했지만 해질 무렵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박한빈이 돌아온 줄 안 성유리는 그를 마냥 반길 마음은 없었기에 손에 재떨이를 들고 그에게 던질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박한빈이 아니었다. 문 앞에는 로버트가 아주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그를 바라보던 성유리는 들고 있던 재떨이를 내려놓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가요?” “에릭 선생님의 지시로 부인을 저녁 식사에 모시러 왔습니다.” “박한빈 씨는 어디 있나요?” 성유리는 로버트에게 따지듯 물었다.그러나 로버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성유리는 그가 에릭과 함께 있을 거라 짐작했지만 지금은 저녁 식사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고민도 없이 거절하려던 성유리에게 로버트가 말했다. “사모님, 빨리 가시죠. 에릭 선생님께서도 바쁘십니다.” 성유리는 눈을 꼭 감았다 뜨더니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 날씨를 고려해 박한빈이 챙겨준 옷은 대부분 슬립 드레스였는데 지금 그녀의 몸에 남은 흔적들은 슬립 드레스로는 도저히 가릴 수 없었다. 그래서 성유리는 얇은 흰색 시스루
에릭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평온했는데 마치 성유리와 날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성유리는 잠시 그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에릭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해 웃는 모습을 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사실 성유리는 에릭을 한 번밖에 만난 적이 없었다. 그때 에릭은 좋은 교양과 박한빈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성유리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의 눈빛에는 뚜렷한 오만함과 성유리에 대한 무시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은 둘이 있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에릭은 이런 태도가 지금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억지로 온화한 표정을 지어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고 에릭의 웃음은 도리어 일그러져있어 어딘가 섬뜩해 보였다. 에릭은 성유리에게 더 많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 그림 마음에 드는 겁니까? 그럼 제가 성유리 씨에게 선물해 주죠.” “괜찮아요.” 성유리는 에릭의 말에 재빨리 거절하며 대답했다. “저는 잘 모르거든요.” “그러십니까? 근데 여기 이렇게 많은 것들 중에 성유리 씨는 유독 이걸 골랐잖아요. 그래도 보는 눈은 있는 것 같습니다.” 에릭의 말은 칭찬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성유리는 어딘가 불쾌한 느낌만 들었다. 박한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성유리는 더 이상 에릭과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박한빈 씨도 있을 때 같이 밥이나 먹죠.” 말을 끝낸 성유리는 곧장 뒤돌아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에릭은 성유리를 굳이 막으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성유리가 입구에 다다르자 문 앞에 서 있던 정장 차림의 체구가 큰 남자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당황한 성유리가 다시 에릭을 향해 돌아서며 물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그야 당신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려는 거죠.” 에릭은 담담히 대답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저는 당신이
에릭은 불쾌한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성유리는 결국 자신이 초대한 손님이니 꾹 참고 계속 말했다. “잘 이해가 안 되시나본데 지금 저는 남자대 여자로 이성적인 호감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하하.” 성유리는 에릭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뭐지?’ 그녀의 웃음에 에릭의 미간은 더더욱 찌푸려졌다. “에릭 씨는 저를 좋아하지 않으시잖아요.” “지금 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에도 짜증이 나시는 걸 꾹참고 계시는 거 다 알아요. 그러니까 굳이 애쓰지 않으셔도 돼요.” 성유리는 에릭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쯧. 숨기려 했는데 결국 들켜버렸네요.” “네. 그러니까 원하시는 게 뭔지 저한테 바로 말씀하시는 것이 좋을 거예요.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에릭은 도도하게 구는 성유리를 오랫동안 말없이 쳐다보더니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역시 로얀이 선택한 여자 아니랄까 봐 재미있네요.” 그는 성유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말 참 잘 꺼냈어요. 저도 바쁜 사람이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죠. 전 성유리 씨와 자고 싶거든요.” 만약 성유리가 입안에 무언가를 물고 있었다면 그대로 뿜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아무것도 없었고 그녀는 에릭의 말에 충격을 받아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시각, 에릭의 시선은 이미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결국 성유리가 걸친 얇은 시스루 셔츠 위에 멈췄다. “로얀과 어젯밤 꽤 재미있게 놀았나 보군요. 오늘 아침 그의 몸에 남아있는 자국을 봤어요.” “하지만 전 그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아요. 여자란 침대에서 얌전해야 하거든요. 그러니 부탁인데 잠시 후엔 제 몸에 어떤 자국도 남기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아시겠죠?” ‘미친놈인가?’ 성유리는 차마 입 밖으로 욕설을 내뱉지 못해 속으로 에릭에게 고함을 질렀다. ‘역시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어.’ 박한빈과 에릭이 저녁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이미 두 사람은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과 똑같이 미친 사람들이라는 걸 성유
한편 박한빈은 아주 순조롭게 담판을 마쳤다. 그렇지만 데이비드는 아니나 다를까 계약서에 사인을 마치고는 박한빈에게 저녁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며 자신의 딸을 소개해 줬다. 박한빈이 몇 번이나 자신은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라고 말했지만 데이비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딸이 아주 말을 잘 듣는 편이니 이곳에 남아 딸을 아무 때나 보러 와도 괜찮다고까지 했다. 박한빈은 끝까지 데이비드의 말을 믿지도, 듣지도 않았고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티격태격” 다퉜다. 그가 비행기에 오른 시간은 이미 12시가 지나버린 뒤였기에 박한빈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호텔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 과정에서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두 통의 전화를 걸었지만 박한빈은 회의를 하고 있거나 비행기에 타 있어 미처 받지 못했다. 그래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받아주지 않았다. ‘화가 났나?’ 성유리 혼자 호텔에 가둬두고 온 것이 마음이 걸려 박한빈은 그녀가 지금 자신에게 화가 나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참 고민하던 박한빈은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케이크 하나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비록 성유리가 지금 화나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약간의 성의는 보여야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한빈은 방 카드로 문을 열었지만 왜인지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그러나 이 또한 박한빈이 예상했던 일이었으니 그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케이크를 든 채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밤 날씨는 생각보다 너무 좋아 창문을 통해 달빛이 환하게 비췄다. 그래서 방 안 구조는 한눈에 잘 보였고 박한빈은 순식간에 몸이 얼어붙었는지 움직이지 못했다. 성유리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잠이 든 줄 알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박한빈은 행여나 자신이 피곤한 탓에 성유리를 발견하지 못한 줄 알아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봤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성유리가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지자 박한빈은 머릿속이 새하얘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
“저 좀 놔주세요.”“제발 살살 좀... 박한빈 씨, 제발.”두 달 넘게 억눌러왔던 욕망을 지금 이 순간 남자는 모조리 터뜨리고 있었기에 성유리를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성유리는 물에 빠졌다가 막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과 얼굴에 들러붙었고 붉어진 눈동자 너머로 드러난 얼굴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요염하고 아찔했다.마치 물속에서 기어 나온 아름다운 요괴 같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꼭 이 순간,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듯이.처음에 성유리는 그저 순순히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무시하는 박한빈의 무심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던 성유리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박한빈의 어깨를 있는 힘껏 물었다.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왼쪽 송곳니가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고 곧 입안에 피비린내가 퍼졌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날 문 거야?”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박한빈은 늘 순하고 얌전한 그녀만을 봐왔었다.성유리 역시 박한빈에게는 순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지만 이번엔 달랐다.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가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정말 못 참겠어서...”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성유리를 바라봤다. 방금 그녀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자신을 물어뜯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그 장면이 묘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박한빈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아직 끝 내기엔 너무 일러. 걱정하지 마. 조금 살살 해줄 테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자신을 놓아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엔 관계가 끝나면 그녀는 꼭 스스로 먼저 방으로 돌아갔었다.박한빈은 누군가와 함께 자는 걸 싫어했으니까.하지만 임
박한빈은 아내인 성유리에게 한 번도 그런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었다.“한빈이 왔니?”윤청하는 재빨리 박한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그럼 저녁 같이 먹을까?”“아니요.”박한빈은 차디찬 말투로 대답했다.“회사 일이 좀 바빠서 지금 가봐야 합니다.”바쁘다면서 박한빈은 한 바퀴 빙 돌아 성유정을 집까지 데려다줬다.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숙여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직도 안 갈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만이 섞여 있었지만 성유리는 원래 거절하고 싶었다.하지만 만약 여기 남아 있으면 윤청하가 계속 이상한 한약을 먹으라고 강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을 따라가기로 했다.성씨 저택을 나선 박한빈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는데 성유리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이내 차에 도착했을 때, 운전기사는 성유리를 보고 약간 놀라는 것 같았지만 바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박 대표님, 회사로 가십니까? 아니면...”“회사요.”성유리는 박한빈 대신 대답했다.“가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 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박한빈은 침묵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다.“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셨죠?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심상치 않은 시선을 감지한 성유리가 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 말에 피식 웃었지만 성유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말하기 싫어 차창 밖을 바라보며 몸을 창문 쪽으로 홱 돌려버렸다.그때 박한빈이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집으로 갑시다.”그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왜 집으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성유리와 박한빈이 함께 집에 돌아오자 저택의 도우미들도 많이 놀란 듯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집에 들어서고 성유리가 신발을 갈아 신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앞쪽으로 끌고 갔다.
윤청하가 말한 좋은 물건은 아니나 다를까, 또 출처 불명의 한약이었다.이번 한약의 냄새는 그렇게까지 자극적이지 않았고 윤청하도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이건 내가 수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겨우 찾은 거야. 모두 말하길 이 한약만 먹으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대!”성유리는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시대에 이런 역설적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전 안 먹을 거예요.”성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지금 제 뱃속에 아기가 있는데 이걸 먹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소용 있어! 그 사람들이 말했어. 만약 첫 6개월 안에 마시면 무조건 효과가 있다니까. 설사 성별이 정해져도 바꿀 수 있다고.”성유리는 순간 윤청하가 미친 사람처럼 보여 바로 반박했다.“전 안 마실 거예요. 그리고 저는 남자아이, 여자아이 모두 괜찮아요.”“너 미쳤어? 박한빈은 박씨 가문의 유일한 혈육이야. 그런 집에서 아들이 나와야 후계자가 되지 않겠어?”“하지만 이 아이는 박씨 가문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제 아이이기도 하죠.”“너...”윤청하는 뭔 말을 더하려고 했지만 성유리의 눈을 마주친 후 갑자기 뚝 멈췄다.성유리는 처음에 그녀가 자신에게 설득당한 줄 알았지만 이내 윤청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너는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너랑 한빈이도 결혼했으니까 이 아이가 여자일지라도 별문제 없을 거야. 너희는 아직 젊고 앞으로 기회가 많을 테니까.”“그런데 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렸어? 한빈이도 그걸 아직 모르겠지? 한빈이가 원했던 조건이 그렇게 까다로웠는데 전에 네가...”윤청하의 말은 여기서 멈췄지만 그 말의 의미는 곧 성유리의 안색을 창백해지게 만들었다.“그래서 난 계속 너한테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했던 거야. 아들이 생기면 너는 박씨 가문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잖아!”“세상에 감춰진 불씨는 없으니까... 한빈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알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