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의 기억 속에서 성유리는 언제나 우울하고, 고지식하며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혼 후에야 그는 전 아내가 사실은 온화하고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다시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자, 성유리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박한빈 씨, 우리 이미 끝난 사이잖아.”
view more박한빈과 노수호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무렵, 성유리는 다른 장소에서 설윤지를 마주쳤다.그녀는 정장 차림에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공장에 가려는 길인 듯했다.그러나 성유리와 성노을을 발견하자 발걸음을 멈추며 미소를 지었다.“어머, 여기서 다 만나네요?”성유리도 고개를 끄덕였다.“일하러 가는 길이에요?”“네. 공장에 좀 다녀와야 해서요.”설윤지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어갔다.“그날 밤, 사실 유리 씨와 박 대표님을 봤어요.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았고 또 제 처지가 그쪽에서 좋은 소문이 아니다 보니 괜히 민폐가 될까 봐 인사도 못 드렸어요.”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혹시 이곳에 며칠 더 계실 건가요? 시간 되시면 제가 식사 한번 대접하고 싶은데요.”“아마 며칠 안에 떠날 것 같아요.”성유리는 다시 설윤지에게 되물었다.“설윤지 씨는요?”“저는 최소 한 달은 있어야 할 것 같네요.”성유리가 다시 무슨 말을 하려던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대체 무슨 낯짝으로 아직도 여기 기어들어 오는 거예요?”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기에 설윤지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노미혜 씨.”이번에 노미혜는 성유리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기에 오히려 억지로 웃으며 공손하게 인사했다.그러나 곧 설윤지를 향해 독을 품은 시선을 던졌다.“사모님, 제가 충고 하나 하죠. 저 여자랑 가까이 지내지 않는 게 좋아요. 무슨 병을 옮길지 모르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설윤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방금 뭐라고 하셨어요?”“제가 틀린 말 했어요? 해외 좀 나갔다 왔다고 네 과거가 지워질 줄 알았어요? 제가 다 말할까요?”노미혜가 말을 더 하기도 전에 성유리가 먼저 끼어들었다.“노미혜 씨. 어쨌든 설윤지 씨는 가족이었고 형수였어요. 지금 관계가 끊겼다 해도 최소한 존중이라는 건 아셔야 하지 않을까요?”그 직설에 노미혜는 대놓고 눈을 굴렸다.평소였다면 이미 반박했을 테지만 성유리
“내가 제안을 받아들이든, 아니면 어부지리를 노리든, 내가 끼어들면 결국 백지환 씨는 원하는 걸 얻지 못하겠지.”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렸다.“그런데 원래도 그게 한빈 씨 계획 아니었어요?”“원래는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박한빈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이 사실을 알고 난 뒤에도 내가 예전처럼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설령 내가 고집을 부려도 넌 동의하지 않을 거잖아.”성유리는 여전히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노 대표님이 병을 숨긴 건 단순히 설윤지 씨를 위해서만이 아니야. 날 끌어들이려는 계산도 있었겠지.”박한빈의 목소리는 느리지만 확실했다.“만약 처음부터 노 대표님 상태를 알았다면 난 애초에 해청시에 오지도 않았을 거야. 이 일에 손댈 일도 없었겠지.”“하지만 노 대표는 그걸 원치 않았어. 그래서 결국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건, 다 노 대표님의 의도였던 거야. 날 끌어들여 설윤지 씨를 돕게 하려는 거고.”그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다.박한빈은 코웃음을 치더니 눈앞에 있던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대단하네. 감히 내 행동까지 계산하다니.”그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고 곧장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뭐 하려는 거예요?”성유리가 서둘러 그의 손을 붙잡았다.“비행기표 예매.”그의 표정엔 한 점의 온기도 없었다.“바로 금성으로 돌아갈 거야.”성유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여기 일은... 그냥 다 놓으시려고요?”“응.”“그럼 이미 투자한 자금은요?”“거지에게 던져준 돈이라 생각해야지.”박한빈의 말투에는 조금도 미련이 없어 보였다.곧, 그는 성유리에게 짐을 챙기라고 했다.그리고 무슨 말을 더 하려던 찰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제일 먼저 반응한 성유리가 고개를 돌리며 박한빈에게 물었다.“제가 열어볼까요?”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게 곧 동의라 여기고 움직이려 했다.하지만 그는 갑자기 성유리의 손을 붙잡더니 곧장 문 쪽으로 걸어갔다.이미 누가 찾아왔는지
박한빈은 노수호라는 사람에 대한 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다.처음 그가 외도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이미 마음속에 편견이 자리했다.뒤이어 딸을 내세우며 가식적인 모습을 연출하는 모습을 보고는 더욱더 위선적이라 여겼다.그래서 성유리가 들었다는 말들을, 그는 전혀 믿지 않았다.만약 노수호가 정말 지독히도 사랑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설윤지를 찾아가 진심을 설명해야 하는 것 아닌가.게다가 그때 중병을 진단받았다면 벌써 죽었어야 맞다.하지만 지금 노수호는 안색이 조금 창백하긴 해도 멀쩡히 살아 있지 않은가?수년간 무사히 지내왔다면 애초에 왜 그렇게까지 해서 설윤지를 몰아낸 건지, 그리고 정말 마음이 있었다면 오늘 밤 왜 사업 협력을 제안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앞뒤가 맞지 않는 모습과 노수호의 행동은 박한빈 눈에는 구멍 숭숭 뚫린 벽으로 보였다.그의 분석을 듣고 있자니 성유리도 조금씩 냉정함을 되찾았다.그리고 방금 전 얼굴을 물들였던 감동은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그래도 뭔가 좀 이상해요.”“뭐가 이상한데?”“딱히 설명은 못 하겠지만 그냥... 다른 사정이 더 있는 것 같아요.”하지만 그 사정이 무엇인지는 성유리도 알 수 없었다.박한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으니까.더구나 설윤지가 처음 협력 제안의 매개로 찾은 사람 역시 성유리였다.지금 이 업계라면 그녀를 거쳐 박한빈을 움직이려 한다는 건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만약 노수호가 그것을 노려 어머니와 함께 일부러 연극을 꾸며 보였다면 충분히 그럴 법한 일이기도 했다.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성유리의 머리를 박한빈이 쓰다듬으며 달랬다.“그만 생각해. 네가 들은 건 내가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면 되니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곧 드러나겠지.”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다른 게 떠올라 다시 물었다.“그럼... 아이는요?”조용히 곁에 기대 있던 성노을이 갑자기 눈을 떴다.온종일 피곤해 엄마 품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지만 ‘아이’라는 말에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성유리를 바라봤다.“
그 진실은 성유리에게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지금까지 노수호와 설윤지의 과거를 들려준 건 설윤지였다.그녀의 시선에서 본 노수호는 가장 약한 순간에 모진 말로 상처만 남긴 비정한 남자였다.그랬기에 설윤지가 그를 증오하고 복수를 위해 다시 돌아온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임씨 가문을 무너뜨리려는 것조차 성유리는 과하지 않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방금 전 들은 대화는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진 사람이 노수호였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엄마, 아까 그 사람들이 뭐라고 한 거야?”성노을의 맑은 목소리가 성유리를 현실로 끌어당겼다.그녀는 재빨리 몸을 낮춰 아들의 눈을 바라보았다.“아무 일도 아니야. 방금 들은 얘기는 절대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 알겠지?”성노을은 잘 이해하지 못한 듯했지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곧, 성유리는 아이의 손을 꼭 움켜쥐었고 마침 그때 박한빈이 다가왔다.그는 한눈에 성유리의 창백한 안색을 알아차리고 곧장 그녀의 손을 잡았다.“무슨 일 있었어?”“아니야.”성유리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그런데...”“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응?”성유리는 방금 들은 모든 걸 박한빈에게 털어놓으려 했다.그러나 이 자리가 적절치 않다는 생각에 말을 바꿨다.“저희 이제 돌아가면 안 될까요?”“그래. 나도 그럴 생각으로 널 데리러 온 거야.”박한빈은 그녀의 온몸을 살펴 다친 데가 없는지 확인한 뒤, 성노을에게 시선을 돌렸다.성유리와는 달리 옆에 있던 아이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곧, 그는 다시 성유리의 손을 꼭 쥐었다.“가자. 집에 가서 얘기하자.”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연회장을 지나칠 때,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설윤지를 찾았다.그러나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기에 대신 한눈에 노수호가 눈에 들어왔다.그는 잔을 들고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지만 성유리의 눈에는 노수호의 안색이 왠지 지나치게 창백해 보였다.그를 응시하던 순간, 박한빈이 갑자기 그녀의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그러자 성유리는 흠칫 놀라며 고개
“저 사람... 전에 노씨 가문 사모님 아니야? 어떻게 갑자기 돌아온 거지?”“설마 다시 노 대표님이랑 재혼하려는 건가?”“말도 안 돼. 벌써 몇 년이나 소식 하나 없다가 이제 와서 무슨 재혼이야.”“게다가 아까 노 대표님 반응 봤잖아. 둘 사이에 무슨 가능성이 남아 있겠어?”“가능성은 무슨, 이미 이혼했는데 무슨 가능성을 얘기해.”잔잔하지만 날 선 속삭임들이 연회장을 파고들었다.성유리는 그런 목소리들을 들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반면, 박한빈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여전히 잔을 기울이며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그사이 성노을이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엄마, 나 아까 많이 먹어서 배 아파.”성유리는 아들을 데리고 조용한 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마침 노예린은 케이크를 자르고 있었기에 사람들의 관심은 모두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덕분에 정원은 한결 고요했고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몇 바퀴 돌았다.“아직도 배 아파? 엄마가 소화제 가져올까?”“아니, 괜찮아.”“배부르다면서 왜 그렇게 많이 먹었어?”“걔가 먹으래서.”“누구? 동생?”“응.”성유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예린이가 먹으라니까 그냥 다 먹은 거야?”성노을은 대답 대신 입술만 꾹 다물었다.그러자 성유리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싫으면 싫다고 말해도 돼. 억지로 먹을 필요 없어. 예린이가 강제로 먹이진 않을 테니까.”“알았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노을의 발걸음은 여전히 무겁고 굳어 있었다.그래서 성유리도 더는 다그치지 않았다.그때, 앞쪽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도대체 어쩔 생각이야? 저 여자가 왜 여기 있는 건데?”한 여인의 날 선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그녀는 화려하게 치장했지만 얼굴에는 분노의 감정이 가득 드러나 있었다.“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잊었어? 겨우 정리한 걸 왜 다시 헤집어! 아직도 미련이 남았다는 거야?”노수호는 검은 양복 차림으로 서서 침묵할 뿐이었다.그러자 여자는 더욱 격앙되었다.“아직
노수호는 설윤지를 바라보다가 막 입 밖으로 꺼내려던 말을 꾹 삼켜버렸다.그의 시선은 천천히 그녀의 손으로 내려가더니 잠시 후에야 다시 시선을 마주했다.설윤지의 손은 마치 잡아달라는 듯 미묘하게 허공에서 멈췄고 그제야 노수호는 망설임 끝에 그 손을 꼭 쥐었다.“돌아왔구나.”그의 목소리는 낮지만 덜덜 떨렸다.“네.”설윤지는 웃으며 대답하고는 시선을 뒤에 서 있는 어린 소녀에게로 돌렸다.“쟤가 노 대표님 딸이에요? 정말 예쁘네요.”노예린은 아빠 뒤에 숨어 조심스레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그 말에 금세 앞으로 다가왔다.설윤지가 준비해 온 선물을 건네려던 순간, 옆에서 노미혜가 달려와 손에 들린 상자를 탁 쳐서 떨어뜨렸다.“여기까지 와서 잘난 척하시려고요? 누가 이런 쓰레기 달라고 했어요? 설윤지 씨, 여기서 감히 어디라고 찾아왔어요? 당장...”“노미혜!”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노수호가 차갑게 끊어버렸다.그의 목소리에는 뚜렷한 불쾌감이 묻어 있었다.뜻밖의 반박에 노미혜는 눈을 크게 뜨며 오빠를 바라봤지만 그는 동생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옆에 있던 직원들에게 말했다.“데려가.”“뭐? 내가 왜 나가야 해?”노미혜가 반발했지만 노수호는 단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그리고 일말의 여지조차 주지 않은 채, 사람들은 곧 그녀를 끌고 나갔다.그녀는 끝까지 욕설을 퍼부으며 발버둥쳤고 덕분에 연회장 안의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곧,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설윤지 또한 그 기류를 느꼈지만 오히려 담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제가 괜히 돌아온 건 같네요.”노수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설윤지는 그를 신경 쓰지 않고 몸을 굽혀 바닥에 떨어진 선물 상자를 주웠다.그리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노예린에게 건넸다.“아무튼, 생일 축하해.”노미혜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따뜻했다.선물을 건네받은 아이의 표정은 마치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지만 설윤지는 더는 머물 생각이 없는지 몸을 홱 돌렸다.그때, 맑고 또렷한 목소리가 그녀의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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