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만 해도 강민아를 그의 셔츠 자락에 붙은 밥알처럼 역겨워하며 털어내기 바빴다.부부가 이혼하고 재산을 나눌 때도 그는 강민아에게 단 한 푼도 주지 않았다. 강민아가 그의 품을 벗어나 정이와 함께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깨달을 수 있도록.그는 강민아가 놀러 나간 개처럼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돌아와 꼬리를 흔들며 밥을 달라고 달려올 거라고 확신했다.그런데 불과 몇 달 만에 그가 강민아와 협상할 자격을 잃었다니.반하준은 어이없고 우스꽝스러웠다.자신은 부신 그룹 대표로 서경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이다.강민아는 지금 그저 말로만 강경하게 나오는 것이다.이윽고 강민아의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여러분, 반하준과 저는 이미 이혼했고 저희 둘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부신 그룹과 아무런 연관이 없고 기꺼이 부신 그룹을 향해 도전장을 내밀 생각입니다. 반하준 대표가 굳이 선을 넘어 저를 건드린다면 저희는 경쟁 관계입니다. 어느 쪽이 먼저 쓰러지는지 두고 보면 알겠죠.”더 이상 반하준은 차분하게 숨을 쉴 수가 없었다.몇 년 동안 일부러 무시하고 기생충처럼 여겼던 아내가 지금 그를 압도하기 위해 도전장을 내밀고 있었다.반하준의 가슴은 수백만 년 동안 얼어붙어 있던 빙하 속에서 갑자기 뜨거운 마그마가 솟아오른 것처럼 열기로 타들어 갔고, 그의 이성과 자존심은 내면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강민아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여러 명의 재계 거물들이 건네는 명함을 흔쾌히 받아들이며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오늘 밤 달이 유난히 밝지 않아?”반하준의 뒤에서 심은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가 홱 고개를 돌려 방어적이고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강민아 앞에서 유난히 가식을 떠는 교활한 남자를 바라보았다.심은호의 얇은 입술을 가운데가 검붉은 액체에 물들어 마치 새처럼 연약한 미인을 연상케 했다. 그 붉은 빛이 원래도 빼어난 그의 미모에 매혹적인 색채를 더했다.“한 번도 강민아가 이렇게 눈부신 줄 몰랐지? 널 위해 본연의 빛을
갑자기 옆에서 손이 뻗어 나와 김예나의 팔을 잡고 그녀를 난간에서 바로 끌어 내렸다.강나현은 힘껏 두 손을 내밀었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한 채 균형을 잃고 상체가 앞으로 쓰러졌다.“아!”강나현은 비명을 지르며 허리까지 오는 난간을 넘어 아래의 관목 숲으로 떨어졌다.테라스 아래의 정원은 칠흑처럼 어두웠다.강나현은 추락한 후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강기성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아래를 한 번 내려다보더니 가볍게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웃듯이 말했다.“죽지는 않을 거야.”강기성은 더는 강나현을 신경 쓰지 않고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마치 놀란 새처럼 긴장해있던 김예나는 그의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강기성은 휴대폰의 손전등을 켜고 직접 손을 뻗어 김예나의 무릎에 박힌 유리 조각들을 모두 제거했다.김예나는 온몸을 떨고 있었는데 유리 조각을 집어낼 때마다 다리가 나른해질 정도로 아팠다.강기성은 신속히 조각들을 타일 위에 떨어져 딸그락 소리를 냈다.이어서 김예나는 천이 찢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강기성이 셔츠의 아랫부분을 물고 자락을 찢어 띠 모양으로 만들었다.그는 셔츠를 찢어 김예나의 무릎 상처를 간단히 고정하며 상처가 다시 오염되지 않도록 했다.“누가 없어?”“누가 없어? 내 핸드폰은 어디에 있는 거야?”아직도 관목 속에 누워 있는 강나현은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관목 위에 떨어져 온몸이 뻣뻣했고 조금만 움직여도 심한 통증을 느낄 수 있었다.강나현은 누군가를 찾아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그녀는 아직도 김예나가 갑자기 한쪽으로 넘어진 것이 자신을 피하려는 의도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녀가 난간에서 넘어질 때 넓은 테라스 위의 그늘속에 한 사람이 담배를 피우며 서 있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김예나는 놀랍게도 강기성이 강나현을 구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오히려 그녀에게 더 관심이 있는 듯 보였다.남자는 피가 묻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커다란 몸집으로 그녀를 난간에
강기성은 그녀의 순수한 두 눈을 바라보며 흥미롭게 웃었다.“우리의 세계에서는 옆에 여자가 있으면 사귄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따른다고 하지.”김예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그럼 곁에 따르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강기성은 입을 벌름거렸지만 말문이 막혀 이내 다시 다물었다.김예나는 다치지 않은 손을 꽉 쥐었다. 이 사람은 강나현의 오빠이기 때문에 그를 따르면 아마...김예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며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였다.“당신을 따르면 월급도 주시나요? 주말도 쉬나요? 국민 4대 보험도 되나요? 저에게 이익을 준다면 당신은 내시가 될 필요가 없어요.”강기성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내가 말한 따른다는 건 그런 뜻이 아니야.”김예나는 무해하고 연약한 꽃처럼 그녀의 분홍색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제가 당신을 따르는 첫 번째 사람인가요?”강기성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자신이 아주 특별하다고 생각해?”김예나는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는데 두 눈에서 순결한 눈빛이 반짝였다.“따르는 사람도 없이 이전에는 어떻게 살았어요?”강기성은 입을 다물었다....강나현은 허리를 잡고 절뚝거리며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반하준을 찾았지만 반하준은 물론 연진숙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먼저 연회를 떠난 걸까?강나현은 휴대폰을 꺼내 반하준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휴대폰 화면이 거미줄 모양으로 깨졌고 손등도 나뭇가지에 긁혀 여러 군데 상처가 났다.헤어스타일이 흐트러지고 얼굴에도 상처가 난 자신의 모습이 어두운 화면에 비쳤을 때 강나현의 기분은 최악이었다.그녀는 혼자서 간신히 관목 숲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치켜들고 한참을 더듬어서야 겨우 휴대폰을 찾았다.그가 테라스에 돌아왔을 때 이곳은 텅 비어 있었고 바닥에는 유리 조각들만 남았다.그녀가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연회장에 돌아온 것은 반하준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고 싶었기 때문인데 반하준은 어디에 있는 걸까.강나현은 과반수의 손님이 겹겹
강민아와 심은호는 동시에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반용화가 비록 그의 상태를 폭로했지만 심은호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심은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냄새를 맡아보세요. 이건 피 냄새예요? 아니면 술 냄새예요?”그가 가까이 오자 강민아는 저도 모르게 정신을 집중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와인의 향기를 맡았다.방금 심은호가 맞을 때 강민아는 한 손에 와인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와인의 향기가 자신의 잔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녀의 잔에 있던 와인은 모두 반하준의 얼굴에 쏟아졌다.다시 심은호에게 다가간 그녀는 여전히 짙은 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그녀는 심은호의 입술을 자세히 보았는데 피가 굳은 색과 조금 달랐다.그의 입술은 예쁘게 생겼다. 어쩐지 강민아의 머릿속에는 갑자기 입술을 묘사하는 말이 떠올랐다.“키스하기에 딱 좋은 입술.”이 말이 뇌리에 스치자 그녀는 마음속으로 연신 ‘죄송합니다’를 외쳤다.“수석 연구원이네요.”“와, 정말 수석 연구원이네요. 제가 살아 있는 수석 연구원을 보게 된다니.”아래층에 있던 손님들은 반용화가 나타난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예전에는 반용화가 연회에 참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비범한 천재는 결코 일반 손님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그들은 반용화를 보고 격동한 마음을 참지 못했다. 마치 인간 세상에 내려온 신을 보는 것처럼 그들은 예배하는 것처럼 열광적으로 달려갔다.반용화는 그의 뒤 따르던 경호원들이 앞으로 나서려 하자 손을 살짝 들어 경호원들의 행동을 막았다.경호원들은 의아해했다. 평소에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반용화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자 2층 회의실에 앉아 있던 큰 인물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순식간에 반용화는 수십 명의 손님에게 둘러싸였다. 경호원들은 어쩔 수 없이 현장 질서를 유지했고 강민아의 주의력도 손님들의 떠드는 소리에 끌렸다.휠체어에 앉은 반용화는 손님들에게 완전히 둘러싸였다. 이런 환경에
“선생님은 백련이 아니에요!”강민아의 반박에 심은호는 심장이 떨렸다.‘역시 반용화가 진짜 남자친구야! 그럼 난 애인이라도 할 수 있겠지?’강민하는 계속해서 말했다.“심은호 씨는 한 가지만 맞혔어요. 선생님은 순결한 백련이 맞아요. 아파도 슬퍼도 절대 밖으로 말하지 않는 분이에요.”반용화가 무릎을 문지르는 것을 보고 그녀는 즉시 앞으로 다가가 휠체어의 뒤에 있는 작은 상자에서 무릎보호대를 꺼냈다.“제가 착용해드릴게요.”“고마워.”반용화는 담담하게 말했다.강민아는 몸을 쭈그리고 앉아 무릎 보호대를 착용해줬다. 반용화는 그윽한 눈빛으로 강민아의 정수리를 지켜보다가 곧 시선을 돌려 심은호를 바라봤다.두 남자의 서로 경쟁하는 시선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쳤다. 강민아는 반용화와 심은호의 눈빛 교환을 보지 못했지만 반용화의 신변을 지키는 경호원들은 이를 보고 표정이 엄숙해졌다.심은호는 입 모양으로 반용화에게 소리 없이 절름발이라고 욕했지만 소리 내어 말한 것은 달랐다.“아저씨, 나이가 들수록 이 다리를 더 잘 보호해야겠네요.”촌수에 따라 심은호는 확실히 반용화를 아저씨라고 불러야 했다.강민하는 또 담요를 가져와 반용화의 다리에 덮었다. 담요를 정리하며 그녀는 마음속에서 신으로 모시고 있는 선생님을 위해 변명했다.“선생님은 심은호 씨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요.”반용화는 휠체어에 앉아 고개를 돌렸지만 심은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부채모양의 속눈썹 아래에는 뛰어난 재능으로 인한 오만한 표정이 가득했다.개의 IQ는 60이지만 인류의 IQ는 100이라고 한다. 하지만 반용화의 IQ는 150인데 그 이유는 국제 표준으로 된 IQ 검사에서 만점이 150이기 때문이다.즉 반용화가 누구를 보든 이는 일반 사람이 개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심은호는 반용화의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어머?”강민아가 몸을 일으켰는데 무언가가 그녀의 몸에서 떨어졌다.허리를 숙여 주어보니 국제 레이싱 대회(서경시 스테이션)의 VI
“아직 시도해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자신이 다시 프로 레이서가 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죠?”강민아는 그를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레이싱에 관해서는 심은호가 그녀를 가장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다시 초대장을 보며 마음속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먼저 메일을 보내볼게요. 만약 그 사람이 답장한다면 이번 대회에 참가해보려고 해요.”심은호는 순간적으로 강민아가 누구에게 이메일을 보내려는지 알았다. 그녀의 전 내비게이터이자 5년 전 헤어진 절친이다.루나가 은퇴한 후 그녀와 그녀의 내비게이터는 5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다.강민아는 휴대폰을 꺼내 이메일에 로그인했다.이메일 외에는 그 사람과 연락할 방법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그녀는 이메일 발신란에 익숙한 이메일 주소를 입력한 후 휴대폰을 들고 메일 내용을 편집했다.강민아는 예전에 심은호가 드림을 몰고 그녀 앞에 나타났을 때 물었던 질문이 떠올랐다.그녀의 꿈이 영원히 변함없는지 물었었다.그 순간 그녀는 가장 친한 친구를 떠올렸다.[나는 다시 루나가 되어 우리의 옛꿈을 이루고 싶어.]강민아는 이메일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그녀의 심장은 힘차게 두근거렸고 메일을 발송한 후에도 평온해지지 못했다.강민아는 재빨리 휴대폰을 잠갔는데 아마 수학 경연에 참여할 때도 이렇게 긴장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심은호가 먼저 말했다.“제가 집에 데려다줄게요.”길에서 그들은 국제 레이싱 대회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으며 강민아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엄마!”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민아는 즉시 정이가 있는 방향을 찾았다.정이는 랜드로버에 앉아 한 손을 창문에 대고 다른 한 손으로 흔들고 있었다.운전석에 앉은 키 큰 남자는 어둠에 깔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강민아는 웃으며 심은호에게 말했다.“오빠가 데리러 왔어요.”심은호는 다가가 정이와 인사하려고 했지만 기침을 했다.“아저씨, 왜 그러세요?”정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심은호는 차 문을 열고
지프차가 차고를 떠나자 반하준은 반용화 곁으로 와 공손하게 말했다.“작은아버지.”“패가망신이 따로 없네!”반용화의 평가에 반하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반용화는 반하준을 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만약 내가 너에게 뛰어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민아가 학업을 마치도록 네가 지원하는 것을 내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아마 이 모든 것이 달라졌을 거야.”반하준은 반용화의 무릎 위에 덮여 있는 담요를 바라보며 눈을 내리깔고 눈 밑에 가득 찬 포악한 기운을 감췄다.“작은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그는 비웃으며 말했다.“작은아버지는 절대 잘못된 결정을 내린 적이 없어요.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작은아버지가 하는 모든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셨어요. 왜요? 작은아버지도 후회할 때가 있어요?”이 순간 반하준은 자신과 반용화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다고 느꼈고, 그도 잘못된 결정을 내릴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반하준은 턱을 들고 반용화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는데 두 눈에 늑대처럼 포악한 기운이 감돌았다.“작은아버지, 저의 전처가 마음에 걸리세요?”처음에 반용화의 입에서 강민아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반하준은 그녀가 반용화에게 특별하다는 걸 알았다.반용화의 목소리는 산속의 종소리처럼 유유하게 울려 퍼졌다.“난 예전에 너에게 민아를 맡기면 민아가 이 세상 모든 여자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줄 알았어. 내가 널 너무 좋게 생각했던 거야. 넌 민아를 가질 자격이 없어.”반하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힘을 풀고는 숨을 들이쉬며 쌀쌀하게 말했다.“민아가 이렇게 좋으면 작은아버지는 그때 왜 민아와 결혼하지 않고 제가 결혼하게 내버려 뒀어요?”...“엄마 이거 봐요!”정이가 서류 뭉치를 강민아에게 건넸다.강민아는 종이를 받았는데 이것은 승덕 명문 학교에서 매년 열리는 야외 가족 활동 초대장이었다.학교에서 학생과 학부모가 야외 활동에 참여하도록 조직하는 건데, 그 목적은 가족 간에 더 많은 활동을 만들어 학부모들이 서로 다른
정이는 심은호와 육성민을 번갈아 보며 진지하게 고민했다.“음... 내일 아침에 엄마에게 말할게요.”돌아가는 길에서 심은호는 정이를 재웠다. 그는 이어폰을 꺼내 정이의 귀에 살짝 넣고 그가 휴대폰에 적은 글을 재생했다.“오늘 강윤정 어린이는 엄마와 심은호 아저씨와 함께 가족 활동에 참여했어요. 강윤정 어린이 가족은 제일 화목한 가족이라는 칭호를 받았어요.”정이는 꿈속에서 입꼬리를 올렸다.“그러나 정이는 엄마와 삼촌과 함께 가족 활동에 참여했을 때 우람진 삼촌 때문에 친구들이 두려워 울다 보니 최악의 가족이라는 칭호를 받았어요.”정이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처졌다.“심은호 아저씨는 정이와 함께 여러 시합에서 우승했고 정이의 나쁜 아빠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어요.”“정이는 삼촌과 함께 시합에 참여했을 때 삼촌이 게임 규칙을 이해하지 못해 시합 자격을 잃었고 나쁜 아빠는 민이를 안고 정이를 비웃었어요.”이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른 정이는 몸을 움츠렸다. 꿈속에서 불안감을 느낀 정이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깨물었다.랜드로버는 심씨 저택의 대문 앞에 멈춰 섰다. 심은호는 차에서 내리며 무심코 강민아에게 말을 건넸다.“저 이번 주말에 시간이 있어요.”운전석에 앉은 육성민의 얼굴은 어두워졌다....아침 일찍 일어난 정이는 포동포동한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어젯밤 그녀는 예지몽을 꾼 것 같았디. 심은호와 함께 가족 활동에 참여하니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그러나 육성민과 함께 가족 활동에 참여했을 때는 친구들이 그를 보고 엉엉 우는 장면이었다.정이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옷을 입고 이부자리를 정리한 후 방문을 열었는데 맛있는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다.‘엄마가 요리하는 걸까?’정이는 신이 나서 주방으로 달려갔다.그런데 키가 190cm가 되는 우람하고 튼튼한 육성민이 조리대 옆에 선 채 열 손가락에는 밀가루가 묻어 있었다.“삼촌, 뭐 하고 있어요?““만두를 만들었어. 곧 익을 거야.”만두의 맛있는 냄새에 정이는 입에서 침이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
반하준은 크게 헐떡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굵직한 땀방울이 아치형 눈썹을 따라 떨어지며 눈가에 고여 있었다.땀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고 창문 유리는 흔들리면서도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강나현이 뒤에서 다가와 그를 껴안더니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댔다.“하준 씨... 더는 못 참겠어...”그녀가 손을 뻗어 반하준의 옷을 벗기려 하자 반하준은 몸을 비틀며 강나현을 떨쳐내려고 했다.“놔!”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 강나현은 쉽게 그의 재킷을 벗겨냈다.양복 재킷은 반하준의 손목에 걸렸고, 여자는 그의 앞에서 뱀처럼 몸을 배배 꼬며 두 팔을 그의 목에 걸었다.강나현의 몸엔 남아있는 옷이 별로 없었고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남자의 턱에 닿으려 했다.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반하준의 속이 뒤집히며 말할 수 없는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여자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강나현은 미꾸라지처럼 그에게 매달린 채 진득하게 붙어있었다.“강나현, 정신 차려!”반하준이 소리쳤지만 강나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준 씨... 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온몸이 너무 이상해... 내 몸을 주체할 수가 없어...”그녀는 말하며 반하준의 얼굴로 다가가 키스하려 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은 공포에 질린 채 머리카락 한 올마저 강나현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쳤다.그 순간 종아리가 소파에 부딪히며 반하준은 균형을 잃고 온몸이 뒤로 넘어졌다.강나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의 몸을 짓누르며 말했다.“하준 씨, 나 힘들어! 하준 씨도 힘들지? 나 좀 살려줘. 이러다간 우리 둘 다 미쳐버릴 거야!”“나한테 손대지 마!”반하준은 몸을 비틀었다.“강나현, 참아! 빌어먹을, 나한테서 떨어져!”강나현은 반하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하준 씨, 우린 약에 취했고 해결하지 않으면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해. 약효가 절정에 달하면 우리 둘은 미친개가 될 거야. 그때 가서 이성을 잃고 서로를
“나 건드리지 마!”반하준이 소리를 질렀지만 강나현은 더욱 거세게 그의 위로 뛰어올라 그를 제압하려 했다.“난 하준 씨 도와주려는 거야. 나도 벗었는데 왜 안 벗어?”“하지 마, 놓으라고!”그가 저항하면 할수록 강나현은 더욱 흥분했다.“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강나현은 반하준의 정장 단추를 풀려고 했지만 풀리지 않아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아이참, 움직이지 마. 자꾸 몸을 비틀면 나도 정말 무슨 짓할지 몰라?”반하준은 소름이 끼치고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그는 두 다리를 쭉 뻗어 강나현을 소파에서 차버렸다.“아악!”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지며 비참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은 소파에 누운 채 바닥에 굴러떨어진 강나현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자신을 방에 가둔 게 강나현의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강나현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다.“하준 씨, 왜 날 발로 차?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해?”강나현이 씩씩거렸지만 반하준은 무시한 채 소파에서 버둥거리며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등을 돌리고 문에 손을 뻗었지만 방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젠장!”반하준이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자신과 강나현을 함께 가두는 데 앞장선 사람이 강민아라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창가로 걸어갔지만 창문도 잠겨 있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되어 도살당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디퓨저 기계에 시선이 멈췄다.그는 숨을 참으며 기계로 걸어가 다시 한번 등을 돌려 이어진 전선을 뽑고는 기계를 집어 들어 창문 유리에 던졌다.창문만 깨지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테니 그도, 강나현도 이성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의 손은 수갑에 의해 등 뒤로 꽉 묶여 있었고, 기계를 잡고 있어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비를 맞은 듯 반하준의 얼굴이 뜨거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디퓨저 기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눈을 크게 뜬 강나현은 반하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하준 씨가 왜 여기 있어?”반하준은 굳어진 얼굴로 침착하려고 애쓰며 조목조목 분석했다.“강민아 비서는 강민아가 따로 만나고 싶어 한다며 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강나현이 등 뒤로 향한 그의 손을 보았다.“하준 씨 손은... 왜 수갑이 채워져 있어? 강민아가 그러라고 시켰어?”반하준의 얼굴이 검게 탄 냄비처럼 어둡게 변했다. 짜증이 난 그는 멍청한 자신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대체 어쩌다 강민아가 그런 걸 즐긴다고 생각했는지 더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다.강민아에게 한 방 먹은 거다.그 생각에 반하준은 마음이 복잡하고 오장육부에 불길이 타올랐다.주위를 둘러보며 열쇠를 찾던 그가 강나현을 재촉했다.“열쇠 좀 찾아봐!”“그래.”강나현도 수갑을 풀 열쇠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머릿속으론 지금 반하준과 단둘이 방에 갇혀 있고, 반하준의 손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약기운을 빌미로 그에게 마음대로 들이댈 생각을 하고 있었다.생각만 해도 강나현은 온몸에 힘이 풀려 허리를 움직이면서 반하준을 향해 등을 돌렸다.반하준도 약에 취해 충동을 느끼기 쉬운 상태라면 충분히 남자를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강나현은 열쇠를 찾는 척하면서 말했다.“강민아가 우리 둘을 함정에 빠뜨렸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 둘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 난 친동생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모든 책임을 강민아에게 돌리고 그녀와 반하준이 밤을 보내면 반하준이 원하지 않아도 그녀가 아닌 강민아를 탓할 거다.애초에 심은호에게 하려던 짓이었는데 강민아가 미리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강민아는 이참에 반하준과 강나현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밀어뜨릴 계획이었다.그녀에게 조롱당했다는 수치심에 강나현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하지만 곧 반하준과 벌어질 일을 생각하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드러나는 표정을 감추었다.줄곧 반하준과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