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남편과 이혼한 지 어언 1년, 뜸했던 단톡방에서 뜬금없이 나를 태그한 반하준. [냉전도 이만하면 됐으니까 그만 돌아와. 다시 시작하자.] 나는 쌀쌀맞게 답장했다. [지금 제정신이야?] 눈치 빠른 사람들이 냉큼 분위기를 파악하고 화해를 종용했다. 반하준이 참지 못하고 또 물었다. [내가 없는 동안 뭘 하고 지냈어?] 나는 아기를 토닥이는 다정한 남편을 슬쩍 보고는 답장을 보냈다. [산후조리 중.] 시끌벅적하던 단톡방이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 반하준이 108통의 전화를 걸어왔지만, 나는 싸늘하게 외면했다. 한때 그를 목숨처럼 사랑했던 여자는 이제 그의 곁에 없었다.
Lihat lebih banyak“심 대표님, 우강 그룹 인수를 축하드립니다.”“우강 그룹을 인수했다는 건 강 부사장과 좋은 소식이 있다는 뜻인가요?”심은호와 강민아가 교제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서경 전체가 술렁였다.재계 인사들이 이곳에 참석한 것도 직접 현장에서 소식을 전해 듣기 위해서였다.심은호가 한 손을 양복바지 주머니에 넣자 양복에 주름이 잡혔다.“앞으로 민아 씨와 저에게 좋은 소식이 생기면 가장 먼저 여러분께 알려드리죠.”참석한 사업가들은 심은호와 강민아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채며 두 사람이 정말 사랑하는 사이라고 생각했다.“잘됐네요!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부사장님은 남자 복도 많네요. 누가 봐도 부러워할 정도로 운이 좋아요.”모두가 심은호와 강민아를 놀리며 열광하고 있을 때, 갑자기 주위 목소리가 작아지며 곧이어 심은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씩 바뀌었다.심은호가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비서와 함께 나타난 반하준이 보였다.반하준은 강렬한 기운이 느껴지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심은호를 향해 곧장 걸어왔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두 기운이 서로 부딪힌 듯 주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몇 발짝 뒤로 물러서야 했다.살짝 내리깐 반하준의 살벌한 눈빛은 마치 사람의 몸 위를 기어다니는 냉혈한 짐승처럼 보였다.그가 햇빛도 닿지 않는 축축하고 음침한 어둠이라면 심은호는 따스한 햇살 아래 반짝이는 천사였다.심은호는 얇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당당하게 웃었다. 앞머리가 살짝 흔들리며 반듯하고 윤기 도는 이마를 돋보이게 했다.반하준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그는 쉽게 현장 분위기를 장악했다.“반 대표님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길가의 쥐새끼처럼 쫓겨날 거란 걸 모르시나?”반하준은 손에 쥔 초대장을 번쩍 들어 보였다.“나 초대장 있어.”“나랑 민아 씨가 직접 초대장을 써서 사람들에게 나눠줬어. 우리가 네 이름을 쓴 기억은 없는데.반하준의 귀에 ‘우리'라는 단어가 유난히 거슬렸다.그는 점점 더 싸늘한 눈빛으로 심은호를 바라보며 건방지게
입을 크게 벌리고 거침없이 쏟아내는 통곡이 텅 빈 농구장에 울려 퍼졌다.강민아가 건네준 귤을 움켜쥔 모습이 꼭 버려진 새끼 짐승 같았다.“도련님!”경호원이 당황하며 서둘러 민이를 달랬지만 민이는 도저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반하준이 다가와 물었다.“반현민, 왜 울어?”툭하면 감정을 터뜨리는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5살이나 돼서 왜 자꾸 울어?”강민아가 민이에게 귤 한 통을 건네는 걸 봤다. 그녀가 가자마자 아이가 우니 반하준은 민이의 무릎 위에 놓여 있던 플라스틱 상자를 가져가려고 손을 뻗었다.“안 돼요!”민이는 비명을 지르며 즉시 몸을 숙여 반하준이 강민아가 준 귤을 가져가려는 것을 막았다.마치 그 귤 상자가 자신의 소중한 소유물인 것처럼.반하준은 차가운 얼굴로 경고했다.“울지 마!”그는 아이를 달랠 줄도 몰랐고 그저 많은 사람 앞에서 갑자기 우는 민이가 못마땅할 뿐이었다.민이는 반하준이 강민아가 준 귤을 빼앗을까 봐 재빨리 손을 뻗어 귤을 입에 넣었다.귤락을 벗기지 않은 귤에서 살짝 쓴맛이 느껴졌지만 민이는 귤의 신맛과 눈물의 쓴맛을 목구멍으로 삼켰다.예전에는 강민아가 귤락을 깨끗이 뜯어내지 않으면 마구 난동을 부렸지만 이제는 그럴 자격을 잃었다.강민아가 귤을 까주는 것도 드문 일이기에 민이는 플라스틱 상자에 담긴 귤을 모두 꺼내 입에 넣었다.반하준은 민이의 입가에서 즙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며 볼품없이 먹는 아들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경호원에게 휴지를 달라고 부탁한 반하준은 허리를 굽혀 민이의 입을 닦아주었다.민이는 반하준이 강민아가 준 귤을 빼앗아 갈까 봐 얼굴을 돌렸고, 반하준은 민이가 자신을 경계하자 무기력하고도 짜증스러운 어투로 말했다.“안 빼앗아!”...일요일, 강승 테크 건물에서는 곧 인수식이 열릴 예정이다.마이바흐 650 폴만의 바퀴가 땅을 밟으며 대문 앞에 멈췄다.제복을 입은 도어맨이 계단을 내려와 문을 열자 심은호가 차에서 내렸다.짙은 회색 스리피스 수트가 187의 큰 키를 돋보이게 하
반하준은 정이와 함께 한 시간 넘게 연습했다. 그의 가슴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심하게 오르내렸고, 거친 헐떡임은 텅 빈 농구 코트에서 선명하게 들렸다.땀은 홍수처럼 그의 머리에서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고 흠뻑 젖은 검은 머리카락은 하나둘씩 아래로 내려와 그의 잘생긴 이목구비를 덮었다. 흐트러진 모습에 전처럼 그렇게 날카로워 보이지 않았다.비라도 맞은 듯 땀이 얼굴을 타고 줄줄이 떨어지고 있었다.외투를 벗은 뒤 입고 있던 니트 조끼와 남색 스포츠 상의가 땀에 젖어 짙은 색으로 변했다.반하준은 몸을 살짝 구부린 채 쓰러지지 않으려고 모든 의지를 동원해 버티고 있었다.하지만 두 다리는 시멘트에 잠긴 듯 걸음을 옮길 수도 없었다.꽃밭에서 뛰어내린 정이는 의상을 입은 채 핑크빛 얼굴을 내놓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땀과 함께 이마에 붙어 있었다.아이가 강민아에게 달려가자 그녀는 정이가 사용하는 텀블러를 건넸다.정이가 벌컥벌컥 물을 마시는 동안 강민아는 작은 수건을 가져와 정이의 옷깃 사이로 손을 넣고 등을 닦아주었다.쪼그리고 앉은 강민아가 다시 정이의 옷 속에 손을 넣어 만져보고는 이렇게 말했다.“옷 다 젖었으니까 일단 옷부터 갈아입을까?”“네.”정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강민아는 정이를 탈의실로 데려갔다. 아이의 연습을 보러 오면서 몇 벌의 옷과 신발, 양말까지 여분으로 챙겨온 것이다.정이가 양말을 벗자 강민아는 자기 양말도 축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새 신발과 양말을 신긴 뒤 세면대로 데려가 수건을 적셔 아이의 얼굴과 손을 닦아주었다.그러고는 다시 정이를 데리고 나오면서 미리 준비해 둔 과일과 기력을 보충해 줄 초코바를 건넸다.정이는 의자에 앉은 채 두 다리를 흔들거렸다.강민아는 민이에게 다가가 귤이 담긴 플라스틱 상자를 건넸다.“먹을래?”민이는 흠칫하며 강민아가 건네준 플라스틱 상자를 황급히 받고는 고개를 숙여보더니 무의식적으로 말했다.“난 하얀 실 싫은데.”그의 말에도 강민아는 아무런 대꾸가 없
연습을 시작한 지 1분도 안 됐을 때...“윽!”정이에게 맞아 한 발짝 뒤로 물러난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낮은 울부짖음이 흘러나왔다. 갈비뼈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신경과 연결된 모든 근육에서 통증이 느껴졌고, 반하준은 금세 피 맛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더니 사레에 들려 콜록거렸다.정이가 꽃밭 위에 올라서서 물었다.“아저씨, 괜찮아요?”반하준은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정이의 발길질에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 줄은 몰랐다.그가 말하기도 전에 또렷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못하겠어요?”반하준이 홱 고개를 돌리자 강민아 곁에 앉아 벽에 기댄 채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그를 바라보는 심은호가 보였다.심은호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악랄한 미소를 지었다.반하준이 무슨 속셈으로 갑자기 찾아와 정이 연습을 도와주겠다고 했는지 안 봐도 뻔했다.강민아와 육성민이 말리지 않았던 건 정이의 연습을 도와준 대가가 어떤 건지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반하준만 한때 자기 딸이었던 애가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모를 뿐.“아주 멀쩡해!”반하준은 고함을 질렀다. 절대 심은호에게 무시당할 수는 없었다. 정이의 아빠로서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보여줄 작정이었다.강민아는 두 사람의 기 싸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리 위에 비닐봉지를 올려놓은 채 정이가 쉬면서 먹을 수 있도록 귤을 까고 있었다.민이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는데 작은 몸을 검은색 큰 패딩으로 감고 있어 마치 거대한 담요를 덮은 것처럼 보였다.강민아와 몇 미터 떨어져 있던 아이는 농구장에 들어올 때부터 계속 강민아만 바라보고 있었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민이는 강민아가 정이를 위해 귤껍질을 벗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강민아는 귤을 조각조각 떼어내 이쑤시개로 안에 있는 씨까지 골라냈다.뭐든지 잘 먹는 정이는 까탈스러운 민이와 달리 수박을 먹을 때도 씨를 뱉지 않고 사과도 껍질째 먹곤 했다.반면 민이는 수박을 먹을 때는 반드시 씨를 빼고 가운데 부분만 먹었다. 정이는 음식
북을 치고 있던 육성민은 상의도 입지 않은 채 구릿빛 피부가 땀으로 범벅이 되어 눈이 부신 햇살에 금속처럼 반짝이고 있었다.스틱을 잡은 팔에는 근육이 겹겹이 쌓여 있었고, 팽팽하게 긴장한 이두박근은 쇠처럼 단단했다.심은호는 예쁜 눈을 가늘게 뜨며 이를 악물었다.“형님도 정이랑 같이 무대에 서요?” 강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둘이 싸우는 장면도 있어서 정이가 준비하는 공연을 오빠랑 같이할 거예요.”심은호는 조용히 콧방귀를 뀌며 육성민이 또 정이를 위해 나서는 모습에 놀리듯 말했다.“형님이 무대에 오르면 분명 팬들이 많이 생길 거예요.”강민아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 육성민이 뒤돌아 꽃밭에 있는 어린 사자에게 다가갔다.정이가 두 발로 육성민의 가슴을 밟자 육성민은 손을 뻗어 다시 꽃밭 위에 올려주었다.“뛸 때 힘이 들어가는 위치가 잘못됐어. 그러면 동작할 때 떨어질 수가 있어.”육성민은 근엄한 목소리로 정이를 훈련시켰다.“다시!”정이가 다시 점프를 하려고 머리를 들어 올리는 순간 중심을 잃고 종아리가 변두리에 부딪히자 육성민은 제때 아이를 붙잡으며 말했다.“기본기가 부족해. 이 동작은 반복해서 연습해야겠어.”말하며 벤치에서 쉬고 있던 춤 선생님들을 불러냈다.“정이랑 같이 연습하세요.”“아...”몇몇 선생님들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아침 6시부터 연습했는데 두 사람은 지치지도 않아요?”육성민은 얼굴을 찡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정이에겐 시간이 없어요. 동작이 익숙하지 않으니까 최대한 서둘러 연습해야죠.”“정아, 아빠가 연습 도와줄게!”반하준이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 뒤에는 민이가 있었다.민이는 경호원이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들어오자마자 강민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불청객의 등장에 육성민은 음산한 기운을 내뿜었다.“나가!”육성민은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는 반하준이 반갑지 않았다.반하준이 슬쩍 강민아가 있는 방향을 흘겨보자 심은호도 거기 있었다.‘둘이 세트로 등장하네.’그는 진지하게 육성민을 향해 말했다.
윤세현은 강민아와 함께 정이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가면서 말했다.“이해가 안 돼. 반하준은 정이의 양육권을 되찾으려는 거야, 아니면 너랑 이혼한 걸 후회하는 거야?”강민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그 사람 생각은 상관없어. 그 사람과 반씨 가문을 떠난 하루하루가 나한테는 자유니까.”윤세현이 걱정을 드러냈다.“반하준이 껌딱지처럼 너한테 들러붙을까 봐서 걱정이야.”강민아 역시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윤세현이 제안했다.“경찰에 신변 보호를 요청해서 생활하는 범위 내에 접근 금지하는 건 어때?”“나한테 폭력을 행사한 것도 아니라서 신변 보호를 요청할 수가 없어. 게다가 반하준은 극단적인 사람이라 통제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더 반항할 거야.”강민아는 반하준이 자신을 납치했을 때를 떠올리며 여전히 가슴이 쿵쾅거렸다.“반하준을 상대하려면 무시가 상책이야. 나타나고 싶으면 그러라고 해. 하지만 절대 가만두지는 않을 거야.”...집으로 돌아온 정이는 축제에서 탈춤을 추기로 했다.아이는 강민아에게 말을 꺼내면서 보고 배웠던 탈춤을 선보였다.강민아는 입을 크게 벌린 채 손뼉을 쳤고 윤세현도 눈알이 튀어나올 기세로 보다가 잠기운도 달아난 채 손뼉을 쳤다.“정아, 대단하다. 이런 건 누구한테 배운 거야?”정이는 춤을 추고 난 후에도 얼굴이 붉어지거나 심장이 빨리 뛰지도 않았고 호흡도 안정적이었다.“TV 프로그램에서 배웠어요.” 윤세현은 깜짝 놀랐다.“그냥 TV를 보고 배웠다고?” “네!” 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쉬워서 무대에서는 꽃도 쌓아놓고 싸우는 동작도 넣으면 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 같은데요?”윤세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그건 너무 어려울 것 같은데. 연습할 시간이 이틀밖에 안 남았잖아.”강민아는 정이의 연습 진행이 전혀 걱정되지 않는지 윤세현에게 말했다.“TV로 발레 동작, 다리 찢기, 턴까지 다 배운 애야.”윤세현은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탈춤이 발레보다 더 힘들어. 게다가 정이는 단체 무대에 참
순진한 정이의 목소리에 반하준 뒤에 있던 선생님들은 흥미로운 표정이었다.반하준은 당황하며 서둘러 해명했다.“아니야...”그는 고개를 들어 강민아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짜증이 솟구쳤다.“아빠는 강나현이랑 잔 적 없어! 절대 그런 적이 없다고!”마치 강민아에게 하는 말인 듯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그런데 반하준의 해명은 정이의 논리를 이길 수 없었다.“하지만 이모가 아빠의 친구인 것처럼 현이 씨도 엄마의 친구인데요?”“달라!”반하준이 부정하자 정이는 볼을 부풀리며 여전히 반박하려는 반하준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하더니 오히려 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아저씨, 자기한테는 관대하고 남한테는 엄격하면 안 되죠. 그건 내로남불이에요!”말문이 막힌 반하준은 어른의 사생활과 관련된 주제에 대해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다 문득 생각이 나서 강민아에게 물었다.“대체 정이한테 무슨 말을 했길래 강나현과 내 사이를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강민아는 콧방귀를 뀌며 설명하고 싶지도, 그와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아저씨는 엄마를 오해하고 있어요.”딸이 입을 열자 반하준는 한결 마음이 풀려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아빠가 했던 행동 때문에 네가 오해를 한 것 같으니까 지금 확실하게 말할게. 아빠와 이모는 그저 친구 사이야. 우리는 절대 네 엄마와 이 자식처럼...”윤세현은 몸을 돌려 강민아를 끌어안고 자기 머리를 강민아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그녀는 반하준을 향해 도발하듯 말했다.“엥? 친구랑 안은 적 없어요?”“...”반하준의 목소리가 뚝 멈추며 정이가 대신 대답했다 “내가 이모랑 아저씨 안고 있는 거 봤는데?”옆에 있던 선생님들은 구석에 숨어서 구경하기 바빴다.윤세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웃었다.“친구 사이에 서로 안는 건 당연하지. 가까운 사이면 뽀뽀도 하고.”말하며 그녀가 강민아의 얼굴에 쪽 입을 맞추자 반하준은 순식간에 속에서 피가 끓으며 입안에는 비릿한 피 맛이 가득 느껴졌다.주먹을 불끈 쥔 그의 손등
반하준은 자신의 역할을 부각하고 딸에게 아빠의 능력을 알려주기 위해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방송국 팀을 불러줄 수도 있고 춤추고 싶으면 아빠가 국내외 최고의 댄서들에게 연락할 수도 있어. 정아, 뭐가 됐든 넌 내 딸이니까 최대한 나한테 의지했으면 좋겠어.”정이는 다소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이의 기억 속 반하준은 지금처럼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애정을 보이니 불편하기만 했다.“정아, 네가 나한테 의지했으면 좋겠어. 전에는 아빠가 미안했어. 넌 이제 겨우 다섯살이니까 지금부터라도 충분히 보상해 줄 수 있어.”정이는 반하준의 말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었고, 그 뒤에 숨은 반하준의 의도도 분석할 수 없었다.그저 자신의 직감과 감정에만 근거해서 남자에게 대꾸했다.“아저씨, 엄마랑 날 방해만 하지 마세요.”반하준은 즉시 부인했다 “내가 왜 방해해...”“하지만 아저씨는 현이 씨를 좋아하지 않고 엄마와 현이 씨가 함께 있는 걸 반대하잖아요.”반하준은 칼로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통증과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그는 불쑥 말을 뱉을 뻔했다.‘당연히 반대하지!’강민아 곁에 다른 남자들이 나타나고 윤세현이 강민아의 진짜 사랑이라는 데 반대하지 않을 수가 있나.‘진짜 사랑’이라는 말이 씨앗처럼 반하준의 마음에 자리 잡아 싹을 틔우고 심장을 관통하는 가시로 자랐다.반하준은 위태롭게 요동치는 심장을 느꼈다.자기 핏줄인 딸이 강민아와 윤세현의 만남을 응원하고 있었다.젠장!반하준은 심각한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네 엄마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는데 네가 말하는 현이 씨가 같은 집에 살면서 엄마랑 자는 건 바람피우는 거야!”강민아의 감정사를 딸에게 너무 자세하게 얘기하고 싶지는 않아 그는 씁쓸하게 말했다.“아빠는 엄마가 널 잘못 가르칠까 봐 걱정하는 거야.”강민아와 윤세현은 서로를 바라봤고, 윤세현은 입술을 달싹이며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힘겹게 참았다.강민아는 윤세현을 향해 어깨를 으쓱거렸다
강민아는 반하준을 차갑게 바라봤다.이미 조금 전 강당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엘리베이터가 오작동하고 반하준이 우연히 이곳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그의 의도는 이미 뻔했다.강민아는 정이의 손을 잡은 채 식은땀이 삐질 났다. 정말 미친놈이다. 말로는 제 딸이라고 하면서 정이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다.하지만 구체적인 증거 없이는 본인이 엘리베이터 오작동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거다.강민아는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참았다.“반진경이 정이를 노리는 거 알고 있었어?”“요즘 어머니랑 가깝게 지내고 있어...”다시 말해 반진경은 연진숙의 지시를 받고 학교에서 오만방자하게 날뛴 것이다.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문화부 선생님 몇 명이 나타났다.그들은 반하준을 보고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반 대표님.”정이도 그들을 안다. 별님반에서 축제에 참여할 때 그들이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었다.“안녕하세요. 저는 햇님반 강윤정이라고 합니다. 축제에서 단독으로 공연하고 싶은데 그래도 되나요?”정이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진지한 얼굴로 여러 선생님을 바라보았다.그들은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반하준을 돌아보며 이사장인 그가 동의하면 그들도 그의 뜻에 따를 생각이었다.하지만 이런 암묵적인 규칙을 정이 앞에서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강민아가 반하준에게 물었다.“여기서 내가 애원하길 기다리는 거야?”반하준은 강민아가 부탁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에 깊은 동공에 웃음기가 번뜩였다.“나한테 부탁하면 정이가 축제에 참여하는 걸 쉽게 해결할 수 있지.”정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축제에 참여하고 싶지만 무슨 공연을 할지 생각은 못 했어요.”아이는 진지하게 선생님들을 향해 말했다.“연습하고 나서 선생님들께 보여드릴게요. 제 공연이 마음에 드시면 제가 무대에 올라가 친구들 앞에서 공연하는 걸 응원해 주세요.”반하준은 정이가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에 이렇게 물었다.“정아, 아빠 도움은 필요 없어? 네가 아빠 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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