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진의 그 말은 피로연에서 송가람이 꾀병을 부린 것에 대한 적나라한 조롱이 분명했다. 그 말에 송가람은 금세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너—”아마도 송가람이 또 멍청한 소리를 내뱉을까 걱정이 된 듯 서해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현진아, 네가 사용하는 오일은 장미 추출물이 아니야. 내가 향을 맡았을 땐 백단, 데이지 그리고 난꽃향이 났어. 장미 향은 없었어.”한현진이 멈칫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분명 장미 추출물이라고 했어요. 장미라는 말을 듣고 산 건데, 제가 장미를 제일 좋아하거든요.”그 말을 들은 송민준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장미를 제일 좋아한다고? 해바라기를 제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서해금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가끔 어떤 판매원들은 매출을 위해 일부러 아예 없는 성분을 넣어서 말하기도 해. 특히 향료 같은 경우는 일반 소비자들이 구체적인 성분을 잘 분별하지 못해서 쉽게 속을 때가 많아. 다음에 오일을 만들고 싶을 땐 회사로 오렴. 네가 원하는 향을 말하면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한현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구나.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아줌마.”“고맙긴.”서해금의 눈에 어느 순간 멸시하는 눈빛이 감돌았다. 한아름의 딸은 결국 그녀의 천부적이라고 여겨지던 재능인 후각을 물려받지 못했다. 향기도 구분하지 못하는 꼴이라니. “아줌마께서 장미 알레르기가 있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죠. 아빠 장미는 제가 나중에 가져갈게요. 내가 아빠 대신 잘 보살피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네?”송병천이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당연히 되지. 하지만 옮길 때 조심해야 해. 내가 해외에서 어렵게 가져온 거야. 조심조심 다뤄야 해.”한현진의 착각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어쩐지 송병천이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자 서해금의 얼굴에 침울한 기색이 살짝 드리운 것 같았다. 한현진은 그런 서해금의 표정은 못 본 척 웃으며 말했다. “아빠가 주신 세뱃돈을 생각해서라도 꼭 살려내야죠.”한
한현진은 본가에서 지내던 때를 떠올렸다. 장미 화분을 정성껏 돌보는 송병천의 표정은 늘 부드럽게 변했었다. 그는 장미를 통해 오래전 사별한 아내를 떠올린 것이 아니었을까.“사실 아빠가 정원에 전문적으로 꽃을 가꿀 화원을 만들어 그 장미를 조금 더 심으려고 하셨어. 하지만 공사를 시작도 전에 아줌마 알레르기 때문에 아빠는 잠시 생각을 접으셨지.”한현진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기가 막힌 우연이네요.”그 장미들이 정말 얼어 죽은 것이 맞는지, 한현진은 의심스러웠다. 한주는 아무리 추운 날이라고 해도 기껏해야 영하 4, 5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장미는 그렇게까지 까다롭거나 예민하지 않았다. 온실에서 재배된 것이라고 해도 이틀 사이 얼어 죽을 정도로 생명력이 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많은 꽃 중에 하필이면 한아름이 제일 좋아했던 장미 알레르기가 있다니, 우연 같지 않은 우연이라고 느껴졌다. “오빠, 방금 왜 일부러 죽을 엎은 거예요?”말하며 한현진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혹시 오빠가 알아낸 일과... 관계되어 있어요?”송민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실한 건 아니야. 그 간호사 말에 따르면 당시 그들을 찾아간 건 남자였어. 하지만 아줌마 주변엔 단 한 번도 남자가 있었던 적은 없어.”“청부업자일 가능성은요?”“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야. 최측근이 아니라면 넌 믿고 맡길 수 있겠어?”한현진이 침묵했다. 맞는 말이었다. 운명공동체와 죽은 사람의 입이 제일 안전한 법이었다. 가슴이 불안하게 뛰어왔다. 만약, 정말 서해금이 벌인 짓이라면 그녀는 대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마음 편히 이 모든 것을 누리고 살았던 걸까. 한현진은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생각하지 마.”송민준이 한현진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마. 넌 그저 마음 푹 놓고 태교에만 집중하고 너만 잘 챙기면 돼. 다른 건 오빠가 해.”한현진이 눈을 꼭 감았다. 비행기 추락 사고가 정말 인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면..
그건 한현진이 강한서를 “협박”하려고 업로드한 피드였다...그리고 섣달그믐날 저녁에 한현진을 찾아왔다는 건, 주강운네에서는 섣닫그믐날 가족끼리 모여 저녁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건가?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찾아온 손님을 당연히 그저 돌려보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한현진이 주강운이 내민 술을 받으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녀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장난으로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을 올린 거예요. 그믐날 저녁엔 인스타그램을 하는 사람은 없을 줄 알았는데.”“이제 막 야근을 마치고 현진 씨가 올린 피드를 확인했거든요. 그래서 현진 씨 보러 왔죠.”본가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려던 한현진은 행여나 강한서가 그녀가 어딨는지를 찾지도 못할까 친절히 주소까지 태그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니 주강운이 본가에 찾아온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그믐날에도 야근이에요?”한현진이 조금 놀라워하며 말했다. “요즘 변호사 사무실이 그 정도로 경쟁이 심한 거예요?”주강운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설 연휴가 다들 휴가 갔거든요. 고모도 집에 계셔서 전 그다지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요.”한현진이 멈칫하더니 곧 주강운의 말을 이해했다. 동생의 죽음을 기점으로 주강운의 동년은 그를 억누르는 시절이 되었다. 그리고 주시윤은 바로 그 모든 사건의 간접적인 범인과 마찬가지였다. 만약 주강운과 같은 입자에 놓인다면 한현진 역시 가족들이 단란하게 모이는 명절에 상처를 숨기고 억지 미소를 지으며 그 사람에게 명절 인사를 건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한현진이 주강운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서해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강운아, 오늘 잘 왔어.”서해금의 말에 한현진은 말이 없었다. ‘술을 마실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그치?’평소와 다른 서해금의 모습이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서해금은 송가람보다 훨씬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 당시 강한서가 한현진의 요구대로 인스타그램을 업로드했을 때, 서해금은 바로 송가람과 강한서 사이에는 더 이상
“손수건 준비했어?”전화를 받은 한성우가 다짜고짜 말했다. 강한서가 영문도 모른 채 대답했다. “아니.”“그럼 하나 가져가.”한성우가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네 전 와이프가 널 울릴 것 같거든.”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흥 콧방귀를 뀐 한성우가 말했다. “네 전 처남이 채팅방에 자기 집에 있는 주강운 사진을 올렸던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직도 모르겠어?”미간을 찌푸린 강한서의 얼굴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한성우는 여전히 수화기 너머로 주절거리며 말하고 있었다. “만약 네 전 와이프와 강운이가 만나면 태어난 아이는 네 성을 따라야 할까, 아니면 강운이 성을 따라야 할까? 나중에 아기 돌잔치 땐 우린 너에게 축의금 줘야 하는 거야, 아님 강운에게 줘야 해?”강한서가 이를 악물었다. “그 입 좀 다물어.”한성우가 쯧 혀를 찼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내가 힘들게 번 돈이고 나중엔 와이프가 돈 관리할 텐데 전부 똑똑히 기억해 뒀다가 다시 받아와야—”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한서가 뚝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성우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차미주에게 문자를 보냈다. [도둑아, 재밌는 거 보러 갈래?]차미주 역시 지루한 설 연휴를 보내고 있었던 것인지 곧 답장을 보내왔다. [재밌는 거 뭐? 너 혹시 현진이 영화 전체 대관했어? 몇 타임이나 했어?]“...”한성우는 애초에 뭘 보러 간다는 얘기를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만약 지금 이 타이밍에 그가 그런 게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차미주는 가차 없이 읽씹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당연히 대관했지. 다음 주로 했어. 오늘은 영화 말고 민준이 본가에 구경하러 가자.][현진이 집에?]차미주가 얼른 문자를 보냈다. [준비할 테니까 기다려.][그래. 주소 보내면 내가 데리러 갈게.]곧 한성우는 차미주가 보낸 주소를 확인했다. 경하 대학의 교직원 아파트였다. 베란다에서 나온 차미주가 식탁에 도란도란 앉아
차미주가 냉담하게 말했다. “저 인간이 무슨 자격으로 엄마에 대해 함부로 말해요? 아버지가 학교 다니실 때 엄마가 시댁 사람들 모시면서 절 키웠어요. 엄마 내조로 성공한 아버지 그늘을 자기가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제까짓 게 뭐라고 엄마를 욕해요?”“저를 여기서 설을 보내게 하려고 매년 엄마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제가 왜 오겠어요?”“밥도 먹었고 할 말도 했으니 이젠 더 이상 엄마에게 전화하지 마세요. 잘 지내신다는 거, 잘 알겠어요. 죄송하지만 엄마도 잘 지내요. 엄마가 재혼하지 않은 건 엄마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또다시 머리 검은 짐승을 만나기 싫으시기 때문이에요.”하고 싶던 말을 전부 내뱉은 차미주는 그대로 자리를 벗어났다. “거기 서.”그 소리에 고개를 돌린 차미주가 그가 준 세뱃돈을 던져버리려는데 갑자기 한 인영이 달려들며 그녀를 밀쳤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차미주는 휘청이며 바닥에 벌러덩 넘어졌다. 꼬리뼈가 어디에 부딪힌 것인지 말 못 할 고통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차미주를 밀친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이복동생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 역시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멍해졌다고 그녀를 부축하려고 앞으로 다가왔다. 차미주는 내밀어진 그의 손을 피하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소년은 여전히 소란스레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네가 뭔데 감히 엄마아빠를 욕해? 네까짓 게 뭔데. 다시 한번 말해 봐.”아버지의 얼굴에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괜찮냐고 묻고 싶었지만 또 한편으로 방금 차미주가 내뱉었던 말 때문에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차미주는 그런 아버지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가방을 내려놓더니 순간 앞으로 다가가 냅다 소년을 업어치기로 넘겨버렸다. 퍽 소리와 함께 방안에 돼지 멱 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넘어간 아들에 부부가 깜짝 놀라며 달려와 아들을 살폈다. 그 현장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고 울음소리와 욕설이 어지럽게 섞여 들려왔다. 차미주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가방을 들고 쿨하게 자리를 벗
차미주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한성우는 어젯밤 그녀에게 있었던 일을 듣고는 철렁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는 손을 뻗어 차미주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다음엔 꼭 나도 데려가. 네가 키가 작으니까 만만하게 본 거야. 내가 가서 떡하니 버티고 서 있으면 꼼짝 못 할 거야.”차미주가 흥 코웃음 쳤다. “그 인간들도 속이 시원하지는 않을 거야. 내가 자기 귀한 아들을 업어치기 해버렸거든. 내가 뭘 배우는지도 모르면서— 씁—”“네네, 차미주 씨가 최고예요.”한성우가 차미주를 치켜세워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얘기 그만하고 좀 쉬어. 힘 좀 아끼라고.”차미주가 눈을 감았다. “설날부터 엉덩이나 굽고 있다니. 창피해 죽겠네.”한성우가 피식 소리 내 웃었다. “치질 수술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이야.”“꺼져.”한성우가 몸을 일으켰다. “물 좀 가져올게.”차미주가 나른하게 대답했다. 병실을 나서자마자 한성우는 손을 들어 이마를 탁 소리 나게 때렸다. ‘젠장, 너무 하얗잖아.’한편, 서해금의 지시로 아주머니가 전을 다 부쳤을 때, 마침 강한서가 한현진의 본가에 도착했다. 문을 연 송민준이 눈앞에 서 있는 강한서를 보더니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주유 값이 올랐든?”강한서가 멈칫하더니 대답했다. “살펴보지 않았는데.”“그래?”송민준이 말을 이었다. “난 또 주유 값이 올라서 네가 그 돈이 아까워서 걸어오는 건 줄 알았지.”“...”송민준은 쓸데없이 마음 쓰이게 하는 강한서를 힐끔 쳐다보더니 콧방귀 뀌며 말했다. “안 들어와? 내가 안까지 안아드려야 하는 거야?”강한서는 그제야 선물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식탁에는 몇 가지 술안주들이 다시 세팅되었다. 주강운은 송병천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송가람은 그들 맞은편에 앉아 있었지만 한현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강한서는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송가람이 그런 강한서를 발견하고 눈을 반짝이며 소리높여 그를 불렀다. “한서 오빠!”두
한현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다음에요. 지금 만든다고 해도 푸딩이 굳으려면 몇 시간은 있어야 해요. 닭국수 어때요? 마침 닭고기 수프도 좀 있는데.”주강운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현진 씨가 만들어주는 거면 뭐든 좋아요. 현진 씨 음식 솜씨가 너무 기대되는데요?”강한서가 작게 헛기침하더니 중얼거렸다. “무지한 자는 용감한 법이지.”강한서의 목소리가 워낙 낮았고 TV까지 틀어져 있었던 터라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묻혀 그의 말을 들은 사람은 없었다. 강한서의 바로 뒤에 서 있던 한현진은 어렴풋이 그가 뱉은 말을 들은 것도 같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한현진은 강한서에게 물었다. “강한서 씨, 뭐라고요?”강한서가 움찔 몸을 떨더니 태연하게 말했다. “양념간장이 없어서 맛이 없다고요.”‘방금 그 말이 이렇게 길었었나?’한현진이 입술을 앙다물고 잠시 강한서를 훑어보더니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주강운이 직접 음식을 기대한다고 얘기를 꺼냈으니 설에 실망감을 안겨줄 수는 없었다. 한현진이 자리를 비우자 송가람은 차를 따르는 사이 강한서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강운은 덤덤한 눈빛으로 강한서를 힐끔 쳐다보았다. 강한서는 시선을 내린 채 접시에 놓인 전을 먹으며 옆에 앉은 송가람에게는 특별한 리액션을 해주지 않았다. 송가람이 말을 걸어도 강한서는 그저 무덤덤하게 대답을 해줄 뿐이었다. 다정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냉담한 태도도 아니었다. 주강운이 물었다. “한서야, 올해 그믐날엔 본가에서 할머니랑 보내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덤덤하게 말했다. “현진 씨 데리고 같이 갈 거야.”주강운이 미소 짓더니 고개를 돌려 송병천에게 물었다. “아저씨, 현진 씨가 본가로 돌아오고 처음으로 함께 새해를 맞이하는 건데 올해 설 연휴는 본가에서 지내라고 하지 않으신 거예요?”“같이—”송병천이 막 대답하려는데 식탁 밑으로 누군가 그의 발을 걷어찼다. 움찔 손을 떤 송병천은 하마터면 술을 쏟을 뻔했고 아까운 마음에 그는 술
송가람은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건네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한서 오빠, 손 닦아요.”강한서가 수건을 받으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송가람의 시선의 강한서의 이목구비를 훑고 지났다. 가까워 지면 질 수록 더 좋아졌다. 그녀가 주먹을 꽉 움켜쥐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한서 오빠. 건강은 이제 제법 회복되지 않았어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송가람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현진 씨와 파혼할 거예요?”강한서는 아무런 동요 없이 여전히 손을 닦으며 말했다. “현진 씨는 지금 제 기억 회복을 위해 애쓰고 있어요. 파혼 얘기를 꺼낼 타이밍은 아닌 것 같아요.”송가람이 멈칫했다. “전 오빠가...”송가람이 말을 잇지 못하자 강한서가 따지듯 물었다. “제가 뭘요?”송가람이 얼른 시선을 내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다행히 강한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수건을 다시 송가람에게 돌려주며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나지막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해 복 많이 받아요.”화장실로 향하던 한현진의 귓가에 마침 강한서의 그 말이 들려왔다. 멈칫, 걸음을 멈춘 한현진이 조용히 옆으로 몸을 숨기고 송가람과 강한서를 관찰했다. 멍해진 송가람은 얼굴부터 목까지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은 파르르 떨렸고 가녀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에게 주는 거예요?”강한서가 시선을 내린 채 말했다. “그날 편의점에서 본 거예요. 가람 씨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요. 마음에 들진 모르겠네요. 혹시 마음에 안 들면...”“마음에 들어요.”송가람이 다급하게 말했다. 말하며 입술을 꼭 깨문 그녀의 얼굴이 한층 더 빨갛게 변했다. 어쩐지 강한서가 피식 소리 내 웃은 것 같았다. 송가람은 너무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한서 오빠, 혹시... 혹시 해줄 수 있어요?”한현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알겠다고 하기만 해 봐. 오늘 그 다리를 분질러 버릴 테니까.’하지만
진윤: ...진윤이 흥, 콧방귀를 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성 그룹 대표지?”진윤이 머리가 떨어질세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언변이 장난이 아녜요. 게다가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요. 전엔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도 그 형님 앞에선 꼬마에 불과한 것 같아요.”진윤의 뒤통수를 툭 치려던 홍혜림은 그의 머리에 감싸진 붕대를 보고는 시선을 내려 엉덩이를 차버렸다. “형이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팔이 밖으로 굽어?”진윤이 바지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좋은 건 당연히 형이 더 좋죠. 하지만 능력으로 따지면 형님이 더 뛰어난 것 같아요..”강한서를 향한 콩깍지가 두껍게 쓰인 진윤의 모습에 홍혜림은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상대방이 강한서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정인월이 직접 교육한 아이였으니 성품이 우수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수 그룹과 한성 그룹은 같은 업계에 종사하지 않은 탓에 협업하는 일이 거의 없어 연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윤은 한성 그룹이 종사하고 있는 업계와 관련된 전공을 하고 있었고 강한서는 IT 업계의 정상급 인물이었다. 그러니 강한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진윤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강한서가 아무 이유 없이 진윤을 도울 리가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여자친구 대신 자신에게서 서해금의 일을 알아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홍혜림은 그 일엔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세를 지고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한 적도 없어 오히려 홍혜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 대표에게 우리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은근슬쩍 오 교수님을 귀띔하게 한 것도 너의 그 스승님 생각인 거야?”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