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씨 가문은 진작 신미정이 결혼 후 몰락하기 시작했다. 신씨 가문의 아들딸이 가진 것이라곤 그저 외모가 전부였다. 두 사람은 아무리 힘을 합쳐도 그럴듯한 아이디어 하나 내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만약 강씨 가문이 아니었다면 신씨 가문은 진작 재벌이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을 것이다.강한서가 신미정이 강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명분으로 동생에게 끌어준 자금줄을 전부 끊은 후 전부터 안 좋던 회사 정황은 나날이 바닥을 찍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신표의 아내가 돈을 빼돌려 도망갔다고? 한현진은 그것이 사실일 거라고 믿지 않았다. 이혼도 하지 않은 상황에 아들딸을 데리고 어디로 도망갈 수 있을까? 설사 도망갔다고 해도 신표에게 돈이 있을 땐 가만히 있다가 하필 돈 떨어진 이 타이밍에?게다가 강한서의 외숙모는 그리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신표는 도박 중독이었다. 신씨 가문 절반 이상의 재산은 전부 신표가 도박으로 날린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아무리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였어도 신씨 가문과 어울리는 집안에서는 도박꾼에서 딸을 시집보내기를 원하지 않았다. 신표의 아내인 이윤하는 신씨 가문에서 지방에 있던 지인을 통해 소개 받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가정 형편도, 외모도 평범했고 억척스러운 여자였다. 신표는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결혼했고 그가 결혼할 때 강한서는 이미 곧 고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그러니 강한서는 그때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강한서의 외할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외할머니도 몸이 편치 않으셨다. 결혼식을 준비는 전부 신미정이 짊어지게 되었다. 신미정은 이윤하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이윤하를 거칠고 교양 없는 여자라 생각했고 못생기고 평범한 집안 때문에 신씨 가문에 그 어떤 도움에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친이 이윤하를 며느리로 콕 점 찍어둔 상태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결혼을 막을 희망이 보이지 않자 신미정은 결혼식에서 이윤하의 기를 눌러 줄 계획을 세웠다. 예물 교환 순서에 사용될 화
신미정은 신표가 자신의 편에 서게 하기 위해 몰래 그에게 돈을 쥐어주기도 했다. 도박을 끊는 건 금연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오랜 시간 손을 대지 않을 땐 괜찮았지만 일단 다시 시작하기만 하면 멈추기가 힘들었다. 신표는 또다시 도박장의 단골이 되었고 연년생 아이를 낳은 이윤하는 신표와 회사를 관리할 정력이 없었다. 어렵게 일으킨 회사는 또다시 휘청거렸다. 그러나 그 당시 마침 강한서는 한성을 혼자 이끌어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자 신미정은 강씨 가문의 이름으로 신표에게 투자자를 끌어다주었다. 이윤하는 모든 정력을 아이들의 교육 문제에 퍼부었고 회사 일에는 점점 손을 놓게 되었다. 그녀는 신표가 도박을 하든 말든 가만히 놔두었다. 어차피 신씨 가문의 재산은 대부분 이윤하가 관리하고 있었다. 신표가 도박으로 날린 돈은 전부 신미정이 몰래 그에게 준 것이었다. 얼마 전 주강운이 말한 두 사람의 이혼 소송의 원인은 아마 신표에게 다른 여자가 생겨 그쪽으로 몰래 돈을 빼돌리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중에 한현진이 강한서와 그 얘기를 꺼냈을 때 강한서는 재산은 어차피 이윤하가 관리하고 있고 내연녀와 새 살림을 꾸릴 용기 따위도 없고 돈이 생기면 바로 도박장으로 달려가는 신표를 어떤 눈 먼 여자가 따라다니겠냐고 했다. 젊은 시절의 신표는 연예인과 견주어도 꿀리지 않는 외모를 가진 남자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곧 50대가 되는 아저씨였다. 그러니 뭘 보고 그런 남자의 내연녀가 되려고 할까? 중년을 향하는 나이가 마음에 들어서? 아니면 도박꾼이라는 직업이 마음에 들어서?이 일은 생각할수록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송민준에게 말했다. “오빠, 이윤하 행적을 알아봐줘요. 채무 상황도요.”다음 날 송민준이 소식을 전해왔다. 이윤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빈해시로 향했다. 그녀의 계좌엔 16억이 들어온 기록이 있었고 그 돈을 보낸 사람은 신표였다. 그리고 신표의 계좌에는 신미정이 한현진에게서 받은 20억이 들어온 기록이
한현진이 씩 웃으며 텀블러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강한서에겐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고 아직 앞날도 창창하잖아. 절대 신미정이 강한서를 망치도록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야.”20억이 신표의 손을 거치자 4억이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가능성뿐이었다. 신표는 여전히 도박을 끊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현진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역시나 신표는 또다시 도박장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신표는 처음부터 도박장의 단골이었다. 비록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는 하지만 이런 사업을 하는 인간들에게 애초부터 규칙이나 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돈. 돈만 있다면 그들의 문은 언제든지 열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사설 도박장은 아무나 함부로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는 지인의 추천이 있어야만 입장할 수 있었고 몇 번의 테스트를 거친 후에야 눈을 가린 채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한성우의 안내로 한현진은 한 번도 출입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박장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한성우는 야심도 있고 간도 크고 놀기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엔 어떤 사람과도 어울려 지냈고 도박장도 예전에 함께 놀던 양아치 같은 친구들이 데리고 들어온 것이었다. 도박장이라는 곳에는 승승장구하는 장군은 없는 법이었다. 한성우가 이곳에서 제일 많이 돈을 잃었을 땐 생활비조차도 없어 매일 강한서에게 밥을 얻어먹으려 다녔었다. 나중에야 점차 비결을 알아냈고 돈을 따면 멈추는 법도 배우게 됐다. 한성우는 도박으로 쏠쏠하게 돈을 벌었지만 그 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한서에게 들키고 말았다. 단 한 번도 한성우에게 언성을 높인 적이 없던 강한서였지만 한성우가 도박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날 오후, 그는 곧바로 한성우의 집으로 달려가 한바탕 주먹을 날렸다. 한성우는 지금까지도 자신을 때린 후 꽉 쥐고 있던 강한서의 주먹이 얼마나 떨렸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강한서의 외할아버지는 바로 도박을 하는 신표 때문에 화병으로 돌아가셨다는 것
한현진의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주사위 잘 던지신다면서요?”한성우가 대답했다. “그렇죠. 하지만 도박장에서는 제가 주사위를 굴리는 게 아니잖아요.”“...”“주사위 게임은 심리전이예요. 거기에...”한성우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었다. “밑장빼기가 중요하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연기만 잘하면 돼요. 온전히 도박 기술에만 의지하면 신이와도 굶어죽을 거예요.”멈칫하던 한성우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왔어요.”한성우의 시선을 따라 한현진이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보통의 몸매를 가진 남자가 뒷짐을 진 채로 매 테이블을 관찰하고 있었다. 한현진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 한성우가 바로 그녀를 데리고 고수의 테이블로 향했다. 신표를 유인하기 위해 한성우는 거액의 돈을 흩뿌렸다. 연속 세 판을 지자 2억 원이던 판돈은 곧 바닥을 드러냈다. 주변엔 점점 더 많은 구경꾼이 모여들었고 신표도 한성우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왔다. 한현진은 조금 긴장한 티가 났지만 한성우는 오히려 덤덤했다. 그는 소매 단추를 풀며 씩 웃더니 말했다. “오늘은 운이 안 좋네.”주변에서 구경 중이던 사람들이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 오늘 처음이시죠. 처음 보는 얼굴인데.”한성우가 말했다. “여기 리모델링하기 전부터 왔었어요. 요 몇 달 동안 바빠서 못 왔죠. 그러시는 분들도 처음 보는 얼굴이네요.”말하며 한성우가 카드를 펼쳤다. 쯧, 혀를 차며 카드를 테이블에 던졌다. 여전히 운이 따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역시나, 또 졌다. 한성우가 손을 들어 손짓하자 곧 두 사람이 상자 두 개를 들고 다가와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상자를 열자 안에는 현금 뭉치가 가득 들어있었다. “계속 하지.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한성우의 똥손 기운과 두 박스에 가득 찬 현금에 몇 명의 도박꾼은 마음이 흔들렸다. 곧 누군가 한성우를 따라 배팅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한참 동안 관찰하던 신표도 드디어 참지 못하고 한성우의 계략에 걸려들었다. 한성우가 본격적으
도박으로 부자가 될 수 있을 거란 착각이 들 때는 이미 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위기를 발판 삼아 다시 일어서려고 하겠지만 다른 사람은 그런 날 발판으로 삼아 전 재산을 탕진하게 하려고 할 것이다. 수십 년을 도박판에서 뒹군 신표는 진작 돈에 눈이 멀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머리가 아니었다. 재미를 봤을 때 손을 뗄 줄만 알았다면 도박에 손을 댄지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도박 빚에 시달리는 무일푼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판으로 손에 쥐고 있던 모든 돈을 날린 신표는 심지어 20억이 넘는 돈을 빚지기까지 했다. 그는 자신의 명의로 된 유일한 별장을 도박장에 넘겨야 했다. 분노에 잠긴 신표의 눈이 빨개졌다. 그는 짐승처럼 한성우에게 달려들어 따지기 시작했다. 한성우가 그를 상대로 판을 짜 밑장빼기를 했다며 말이다. 노름판에서 밑장빼기가 나왔다는 건 도박장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니 도박장 관리자는 이런 헛소리를 지껄이며 난리를 피우는 신표를 참아줄 수는 없었다. 머리에 포대기가 씌워진 신표는 그렇게 기절당한 채로 거리에 버려졌다. 한현진과 한성우, 이 피 안 섞인 남매는 그 자리에서 노름돈을 나눠 가진 뒤 안대를 착용한 채 도박장에서 준비해준 차량을 타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안대를 벗은 두 사람은 곧 침묵에 잠겼다. 멀지 않은 곳에 마이바흐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슈트 차림의 강한서가 차 앞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현진이 팔꿈치로 한성우를 툭, 건드렸다. 무슨 방법이든 동원해 말을 하라는 의미였다. 한성우가 갑자기 미친 연기력을 펼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형수님, 배가 움직였어요. 우리 착한 조카가 찬 거예요?”“네?”당황하던 한현진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배를 움켜쥐었다. “아, 네. 힘이 꽤 세네요.”한성우가 한현진을 부축하며 그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태동은 안 아파요?”“아파요.”한현진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여
‘만약 들키면 호기심에 간 거라고 딱 잡아떼기로 한 거 아니었어?’‘혁명이 성공하기도 전에 중도에 배신이라니! 믿을게 못 되는 자식들!’한현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기들 세상 구경 시켜주려고 갔다고 하면 믿어줄 거야?”강한서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차미주가 말했다. “자백하면 감형 받을 수 있어. 현진아, 그냥 사실대로 얘기해.”한성우가 옆에서 거들었다. “형수님, 저희 오기 전에 얘기했었잖아요. 좋은 건 같이 누리고 고난은 형수님이 혼자 감내하시기 로요. 지금 이 타이밍에 저희를 끌어들이시면 안 되죠.”한현진은 어두워진 얼굴로 자신을 팔아넘긴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그윽한 강한서의 두 눈을 마주한 그녀는 순간 다시 얌전해졌다. “사실은, 난 그저 너희 삼촌이 도박을 끊을 수 있게 도우려던 것뿐이야.”강한서가 차갑게 말했다. “돈 얼마나 보냈어?”한현진이 모르는 척 물었다. “뭘? 내가 누구한테 돈을 보내?”강한서가 무표정한 얼굴로 휴대폰을 꺼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직접 물을 거야.”한현진이 곧바로 이실직고했다. “얼마 안 돼. 50억밖에 안 보냈어.”강한서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돈은 왜 보낸 거야?”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한성우가 차미주를 일으켰다. “우린 가서 장 좀 볼게. 두 사람 천천히 얘기 나눠.”그는 말하며 발버둥 치는 차미주를 끌고 자리를 벗어났다. 방에 두 사람만이 남겨지자 한현진은 강한서 옆으로 자리를 옮기려 했다. “여보...”“거기 앉아서 얘기해. 오지 마.”강한서가 한현진의 애교 공격을 차단했다. 그녀가 다가와 애교를 부리면 자신의 다짐이 또다시 무너질까 겁이 났다.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삼촌 회사에 문제가 생겨서 너희 엄마가 나한테 도와달라고 했어. 그래서 돈을 보내준 건데 네 삼촌이 그 돈으로 도박하러 갔을 줄 누가 알았겠어. 그래서 한 번 호되게 당해 보라고 그런 거야.”강한서는
휴대폰 너머에서 전해온 건 신표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낯선 남자의 음성이었다. 신미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 누구야. 내 동생 휴대폰이 왜 당신 손에 있어? 신표는 어디 있어?”“그 인간?”상대방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지금 여기서 수영 배우는 중이야.”남자는 말하며 휴대폰을 옆으로 가져가 소리쳤다. “어이, 신표! 네 누나가 너한테 얘기하잖아.”수화기에서는 물장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울부짖는 신표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었다. “누나! 누나! 빨리 나 좀 구해줘. 이것들이 날 죽이려고 하고 있어. 누— 읍—”신표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물속으로 밀어 넣어 꼬르륵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미정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당신 지금 뭐하는 거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다시 전화를 받은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살인이라니? 아줌마, 우린 법을 지키며 사는 착한 시민이야. 불법적인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줌마 동생이 우리 사장님에게 돈을 빚졌어. 20억이 넘는 돈을 말이야. 사장님이 돈을 못 받아오면 우리 월급도 주지 않겠다잖아. 우리도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입장이라 월급날만 꼬박 기다리고 있거든. 돈을 갚지 않겠다고 하니 우리가 독촉해야지, 어쩌겠어.”말하며 남자는 신표의 머리를 끄집어 올렸다. 촥, 하는 물소리와 함께 신표가 물속에서 나왔다. “자, 누나랑 좀 더 얘기해.”잔뜩 겁을 먹은 신표는 똑바로 서 있지 조차 못했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파들파들 떨며 눈물 콧물 쏙 빼며 소리쳤다. “누나! 얼른 이 분들한테 돈 보내줘. 정말 날 죽일 거야...”신미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너 빚 전부 청산했다며? 왜 아직도 빚이 20억이나 더 있는 거야. 내가 며칠 전에 너에게 보내준 돈이60억은 되잖아. 그 돈은?”신표가 우물쭈물거리며 대답하지 못했다. 신미정의 심장이 저도 모르게 쿵, 내려앉았다. 잠시 후, 그녀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빌어먹을! 너 또 도박하러 갔어?”신
‘이 년이!’신미정을 깔린느로 한현진을 찾아갔다. 한현진이 그녀를 피하며 만나주지 않았다. 신미정이 아무리 지금은 볼품없는 형편이 되었다고 해도 명문가 출신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행패를 부리는 격 떨어지는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러니 한현진이 만나주지 않자 밖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기다리던 한현진은 나오지 않았고 신미정은 송가람과 서해금을 먼저 마주쳤다. 신미정을 다시 마주한 서해금에게는 열성적이던 예전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담담한 말투로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오히려 송가람이 반갑게 신미정에게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 여긴 어쩐 일이세요. 향수 보러 오셨어요?”신미정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현진이에게 볼 이리 있어서 왔어. 가람아, 날 현진이에게 데려다줄 수 있을까?”송가람이 막 입을 열려는 데 앞에 있던 프런트 직원이 말했다. “송 팀장님, 한 대표님께서 오늘을 손님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어요.”그 말의 의미는 너무도 분명했다. 한현진은 신미정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일부러 만나지 않는 것이었다. 신미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분노를 참으며 송가람에게 부탁했다. “가람아, 아줌마 좀 도와줘. 현진이에게 급한 볼 일이 있어서 그래.”신미정의 편을 들어주려는 송가람을 서해금이 불렀다. “가람아, 가야지.”그러나 송가람은 강한서의 어머니에게 잘 보일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엄마, 아주머니께서 아직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잖아요.”서해금은 덤덤하게 말했다. “기다리는 건 그쪽 사정이야.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지 마.”“하지만—”서해금이 송가람의 말을 잘랐다. “일이 있으면 본인 아들에게 부탁할 거야. 만약 아들도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신미정을 대하는 강한서의 태도야. 네가 쓸데없는 일에 끼어든다고 강한서가 너에게 고마워하지 않아. 오히려
어두운 표정으로 이번 일의 경위를 할 번 곱씹은 홍혜림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서해금은 항상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한 번도 어긋난 적조차 없었다. 조금만 먼저 얘기를 꺼냈다면 의심을 살 수 있었고 조금만 늦으면 도와줄 기회를 놓칠 수 있었다. 서해금은 늘 홍혜림이 더는 손 쓸 방법이 없는 타이밍에 나타났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 당연히 홍혜림은 평소처럼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고 도움을 주려는 사람의 손길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서해금이 어떤 인간인데?’서해금은 이익을 얻을 수만 있다면 거지도 아버지로 모실 수 있었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면 친아버지도 아버지라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 인간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도와줄 리가 없어.’‘애초부터 이 모든 것이 서해금이 꾸민 짓이라면 말이 되긴 하지.’‘하지만 대체 왜?’홍혜림은 순간 자신에게도 조향대회의 투표권이 있다는 사실을 또 올렸다. ‘설마 그것 때문에?’서해금 의도를 파악하게 된 홍혜림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 ‘가식적인 X. 감히 날 두고 수작을 부려?’생각에 잠긴 홍혜림이 인상을 폈다 찌푸렸다를 반복하며 가끔은 이를 악무는 모습을 지켜보던 진윤이 걱정스레 물었다.“엄마, 왜 그래요?”홍혜림이 감정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역겨운 일이 떠올라서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래.”아직 어린 나이라 홍혜림 말의 의미를 눈치 채지 못한 진윤이 말했다. “엄마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전 부정행위도 하지 않았잖아요. 지금은 제가 신고까지 했으니 저희가 여기저기 부탁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그 사람들이 저희에게 사정을 해야겠죠. 엄마도 이젠 회사로 나가 보세요. 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너만 괜찮으면 엄마는 아무것도 겁나지 않아. 회사에는 네 아빠와 형이 있어. 내가 할 일은 널 지키는 거야.”그 말에 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떠올렸다.“너한텐 좋은 부
진윤: ...진윤이 흥, 콧방귀를 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성 그룹 대표지?”진윤이 머리가 떨어질세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언변이 장난이 아녜요. 게다가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요. 전엔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도 그 형님 앞에선 꼬마에 불과한 것 같아요.”진윤의 뒤통수를 툭 치려던 홍혜림은 그의 머리에 감싸진 붕대를 보고는 시선을 내려 엉덩이를 차버렸다. “형이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팔이 밖으로 굽어?”진윤이 바지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좋은 건 당연히 형이 더 좋죠. 하지만 능력으로 따지면 형님이 더 뛰어난 것 같아요..”강한서를 향한 콩깍지가 두껍게 쓰인 진윤의 모습에 홍혜림은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상대방이 강한서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정인월이 직접 교육한 아이였으니 성품이 우수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수 그룹과 한성 그룹은 같은 업계에 종사하지 않은 탓에 협업하는 일이 거의 없어 연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윤은 한성 그룹이 종사하고 있는 업계와 관련된 전공을 하고 있었고 강한서는 IT 업계의 정상급 인물이었다. 그러니 강한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진윤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강한서가 아무 이유 없이 진윤을 도울 리가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여자친구 대신 자신에게서 서해금의 일을 알아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홍혜림은 그 일엔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세를 지고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한 적도 없어 오히려 홍혜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 대표에게 우리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은근슬쩍 오 교수님을 귀띔하게 한 것도 너의 그 스승님 생각인 거야?”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