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너무 민망했다.당사자인 이소희보다 내가 더 민망함을 느꼈다.이소희도 물론 민망해하고 있었지만 강철 멘탈인 이소희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헤헤,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이소희는 내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고 빠르게 내 곁으로 다가와 찰싹 붙었다. 그리곤 걸으면서 말했다.“진 기사님 정말로 생리 중인 거죠? 오늘도 뭔가 히스테리가 심하네요.”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소희는 진정우가 짜증을 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내가 힘들까 봐 진정우가 이소희에게 직접 음식을 가져올 것을 권하는 것으로 들렸다.‘정말로 날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이런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며 얼른 생각을 지웠다. 날이 가면 갈수록 착각만 심해지는 것 같았다.“이따가 우리 그냥 따로 앉아요.”음식을 받은 뒤 어젯밤 진정우의 방에서 잔 일이 떠오른 나는 더는 그를 마주할 수 없다고 생각해 이소희에게 말했다.“왜 따로 앉아요? 아는 사이인데 같이 앉아야죠. 게다가 방금 오늘 할 일도 정해야 한다면서요.”이소희는 일 핑계로 말했기에 나는 더는 반박할 수 없었다.다만 나는 그녀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다.“소희 씨는 잘생긴 얼굴 조금이라도 더 구경하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아니에요?”“언니, 어쩜 날 그렇게 잘 알아요?!”이소희는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결국 진정우와 한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괜히 이소희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이상한 오해를 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이소희는 엉뚱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머리가 좋았다.음식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마자 누군가 다가왔다.“어머, 소희야. 정말 너구나?”아주 예쁜 여자가 손에 음식 그릇을 들고 있었다.이소희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반겨주었다.“뭐야, 반장!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나야 출장 왔지. 정말 오랜만이네. 우리 같이 먹을까?”여자는 이소희에게 아침을 함께 먹자고 제안했다.이소희의 반응은 나를 먼저 보는 것이 아니라 진정우를 힐끗 보더
“팀장님은 모르시겠지만 저 연애 한 번도 못 해봤어요. 저는 팀장님처럼 경험이 많지도 못해요. 파혼한 약혼남에, 친한 오빠에, 그냥 아는 남자에... 팀장님처럼 알고 지내는 이성도 별로 없어요.”진정우는 나를 바라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나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소리를 내기도 전에 그가 고개를 숙이며 먼저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두려워해야 하는 사람은 저예요. 어젯밤 저희가 같은 방에 있었던 게 소문이라도 난다면,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제가 진 기사님의 명성에 먹칠했다는 거예요?”나는 약간 화가 난 말투로 물었다.“그런 뜻은 아니에요. 팀장님 어젯밤은 그냥 잠만 잤잖아요.”진정우의 말을 듣고 있자면 내가 변태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고단수였다.나는 속으로만 씩씩댈 뿐 별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손에 들린 빵만 애꿎은 화풀이 대상이 되었다.“명성을 지키려면 저한테서 멀어져야겠네요.”빵을 다 먹고 난 나는 소심하게 반격했다.“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요. 저희같이 일하고 있잖아요.”진정우는 티슈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내가 아침 식사를 끝냈을 때 이소희도 끝냈다. 그녀는 동창들과 인사했다. 다음에는 꼭 오기 전에 연락하겠다면서 말이다.동창들이 차에 탄 다음 그녀는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봤다.“언니, 진 기사님이랑 무슨 얘기 했어요? 둘이 한참 얘기하던데?”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동창들과 밥 먹을 때에도 나를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별 얘기 안 했어요.”나는 짧은 말로 둘러댔다. 이소희는 당연히 믿지 않고 계속 말하라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서 나는 마지못해 말을 이었다.“그냥 일 얘기예요. 저희 앞으로 야근이 더 잦아질 것 같다고요.”“네?”이소희는 급 울상이 되었다.“기사님 너무 한 거 아니에요? 못됐어요, 정말!”나는 말없이 그녀와 함께 놀이동산에 갔다. 진정우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우리가 차에서 내릴 때야 그는 따릉이를 타고 왔다.“언니,
“이게 무슨 말이에요? 쉰다니요?”나는 황급히 진정우에게 가서 물었다.“일주일에 두 번은 쉬도록 국가적으로 규정되어 있어요. 요즘은 일이 바쁘니 하루 정도 쉬는 건 문제 없죠?”진정우의 말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애써 분노를 억누르며 대답했다.“맞아요. 근데 저희 시간이 별로 없어요. 진 기사님도 알잖아요. 휴식은 후에 하면 안 될까요? 추가 수당도 줄게요.”진정우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이건 돈 문제가 아니에요. 사람은 기계가 아니고 휴식이 필요해요. 쉬어야 일도 더 잘하죠.”전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도무지 쉴 수 있을 때가 아니다.나는 숨을 고르고 나서 다시 말했다.“그래서 오늘 꼭 쉬어야겠다고요?”“네.”말을 마친 진정우는 몸을 돌려서 떠나려고 했다. 그러다가 또 한 마디 덧붙였다.“다른 분들도 쉬게 해줘요.”나는 화가 치밀어서 그를 보며 외쳤다.“진 기사님은 푹 쉬세요! 저희가 일하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요!”한쪽에서 이소희는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았다. 진정우는 여전히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다가 팀장님도 일 못해요. 어젯밤...”“진정우 씨!”나는 소리 내어 그의 말을 끊었다. 손바닥에는 땀이 한층 배었다.어젯밤 일을 비밀로 하자고 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언급될 뻔했다. 나는 그를 노려봤지만 결국 기세에 밀려나서 타협했다.“알았어요. 저희도 쉬면 되잖아요. 소희 씨, 이만 돌아가요.”나는 이소희를 불러서 가려고 했다.“팀장님.”이때 진정우가 다시 나를 불러세웠다.“저 부탁할 일이 있어요.”가슴에서는 또다시 불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화를 가까스로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왜요, 쉬는 시간에 마사지라도 해줄까요?”“그건 됐고, 사야 할 물건이 있어요. 팀장님이 안내해 줬으면 하는데.”진정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소희 씨랑 같이 가요.”“저는 팀장님이랑 가고 싶은데요.”“풉!”이소희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실
“진 기사님, 이게 무슨 뜻이에요? 어제 일로 저를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거예요?”“아뇨.”진정우는 내 눈을 피하며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다.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를 패버리고 싶다는 충동까지 생기고 있었다.“저 진짜 이 동네에 대해 잘 몰라서 그래요. 조금 도와주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저도 팀장님 도와준 적 있고...”진정우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마치 내가 안 도와주면 나쁜 사람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역시 진 빚은 갚아야 한다. 그게 돈 빚이든, 인정 빚이든 말이다.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좋아요, 오늘 어디 가고 싶어요? 뭘 사야 하는지 알려주면 안내해 줄게요.”“집 보고 싶어요.”그의 대답에 나는 또 말문이 막혔다.“집이요? 이쪽 일 끝나고 나면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요?”“안 돌아갈 것 같아요. 그래서 미리 봐두려고요.”진정우의 말에 나는 목구멍이 탁 막히는 것 같았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는 몰랐다. 아무튼 이상했다.“기사님 회사 다른 곳에 있잖아요.”“사직하면 돼요.”“...”“참, 저 월세로 알아보고 싶어요. 아직 집 살 능력은 없어서요.”진정우는 지나치게 태연하게 지갑 상황까지 밝혀버렸다.이 점은 약간 놀라웠다. 요즘은 돈이 없어도 있는 척, 할부로 명품을 사며 체면을 차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진정우는 솔직한 편이었다.“그런데 왜 사직해요?”진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못 들은 것 같았다.그가 한 말 때문인지 나는 약간의 동정심이 생겼다. 그래서 그를 차에 태우고 시내로 향했다.“시내는 집값이 비싸지 않을까요?”“교외보다는 비싸겠지만 출퇴근이 어려워요. 교통비까지 생각하면 차라리 여기 사는 게 나아요. 기사님 같은 분이라면 적어도 CBD 쪽 회사에 다닐 거잖아요.”나의 제안에도 진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정이 많이 어려운가 싶어서 나는 말을 보탰다.“돈이 모자라면 제가 빌려줄게요. 돈이 생긴 다음 천천히 갚아요.”“어쩐지 몸으로 갚으라는 말로
“안 될 거예요.”“그거 녹 쓴지 한참 됐어, 총각.”“밸브가 또 얼마나 아래에 있는지 우린 건드리지도 못했어요.”...주민들이 수군댔다.나의 시선은 오직 진정우에게 고정되었다. 밸브를 잡기 위해 그는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힘을 주느라 팔뚝에 힘줄이 튀어 올랐다.그런 데도 밸브는 움직이지 않았다. 진정우는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힘을 줬다.“안 될 거야, 총각. 힘 낭비하지 마. 여기 있는 남자들 이미 다 해 봤어.”할머니 한 분이 보다 못해 말했다. 나도 나서서 말리기 시작했다.“됐어요. 제가 수리 기사님을 부를게요.”말을 마치자마자 진정우가 갑자기 힘을 풀며 말했다.“됐어요.”그는 바닥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이제 올라가서 확인해요.”나는 계단을 타로 흘러내리는 물을 바라봤다. 지금 올라갔다가는 쫄딱 젖을 것 같았다.“이따가 올라가요. 물이 다 빠진 다음에요.”진정우는 내 신발을 힐끗 보고 나서 말했다.“제가 업어줄게요.”그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뜨며 손사래를 쳤다.“아니에요. 아니에요.”이 말을 들은 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구경꾼들은 우리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무언가 보아낸 진정우가 다시 말했다.“그럼 제가 먼저 올라갈게요. 열쇠 줘요.”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벌써 손을 뻗어 내가 들고 있던 열쇠를 가져갔다. 그의 손가락이 피부에 닿은 순간 나는 흠칫 떨었다. 전기라도 닿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강유형과 함께 있을 때는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다. 아마 너무 익숙해져서 그럴 것이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있었으니, 손잡는 것도 포옹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 되었다. 연애하는 긴장감은 당연히 없었다.이 순간 나는 어쩐지 강유형이 신지태에게 했던 말이 이해되는 것 같았다진정우는 성큼성큼 위층으로 올라갔다. 물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 퍽 드라마틱해 보였다.내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다가와서 말했다.“아가씨 남자친구죠? 든든하니 일 잘하게 생겼어요. 아주 잘 골랐어
왠지는 모르겠지만, 놀이동산 일에도 아프지 않던 머리가 이제 와서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저를 못 믿어요?”“아뇨, 그건 아니고...”나는 진정우를 바라봤다. 상의도 바지도 더러워져 있었다. 귀찮으니 수리 기사를 부르겠다는 말은 아무래도 나오지 않았다.“저 이거 할 수 있어요. 빨리 다녀와요.”그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얼른요.”나는 머리가 핑 어지러웠다. 얼마 전 강진혁도 쓰다듬은 적 있지만,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말로 이루 형용하지 못할 따듯하고 달콤한 기분이 들었다. 어딘가 시큼한 것이 갈망하게 되기도 했다. 오랫동안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진정우의 눈빛을 더는 감당할 수 없었던 나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도망갔다. 그가 요구한 물건을 사서 돌아왔을 때, 그는 걸레로 복도에 고인 물을 청소하고 있었다.집 안에 들어갔을 때는 물기 하나 없이 청소된 바닥이 보였다. 배수구가 고장 나기 전보다도 깨끗했다. 내가 물건을 구하는 동안에도 그는 쉬지 않았던 것이다.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멀쩡한 집을 바라보며, 나는 코끝이 시큰거렸다.“아래층에 가서 확인해 보니까 누수는 없어요. 배상할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요.”진정우가 말했다.그는 유능할 뿐만 아니라 세심하기까지 했다. 나는 목이 탁 막혔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잘 나오지 않았다.진정우는 다시 배수관을 수리하기 시작했고 나는 멀뚱멀뚱 지켜봤다. 그는 아주 능숙했다. 현장에서 일할 때와 똑같았다.문턱에 기대서 그를 바라보며 나는 무심코 물었다.“정우 씨는 못하는 게 뭐예요?”“저도 못하는 거 있어요.”그는 일하면서도 내 질문에 대답했다.“뭔데요?”그는 나를 힐끗 보며 말했다.“애 낳는 거요.”어쩐지 약간 다운되던 기분이 그의 말을 들은 순간 확 사라졌다. 나도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장난을 받아쳤다.“그건 낳을 수 있는 사람을 찾으면 되는 거네요.”“그 정도는 할 수 있겠죠.”지나치게 무덤덤한 태도 때문일까?
나는 호흡이 점점 가빠진 채 얼어붙었다. 진정우는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시선은 나에게 단단히 고정되었다. 정확히는 나와 마주 보고 있었다.우리는 이대로 가만히 있었다. 먼저 피하지도, 혹은 더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다. 서로의 심장박동이 이토록 선명하게 느껴지는데도 말이다.이때 밖에서 이웃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이 집 아가씨 남자친구 사람 참 좋아. 복도까지 깔끔하게 청소한 거 봐.”문뜩 정신을 차린 나는 진정우를 밀어내고 거실로 도망갔다. 심하게 당황스러웠다. 어쩔 바를 모를 정도로 말이다.뒤늦게 따라온 진정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여기 부모님 집이에요?”나는 약간 멈칫했다.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한 것도 잠시,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팀장님 어릴 때랑 똑같이 생겼어요.”벽에는 내가 받았던 상장에 가족사진도 붙어 있었다. 교복 차림의 나는 부모님 사이에 서서 활짝 웃고 있었다. 지금 다시 보니 가슴이 아리기만 하는 미소였다.“학교 다닐 때 성적도 좋았나 봐요.”진정우는 또 내가 받았던 상장들을 바라봤다. 전부 학교에서 받은 것들이었다.“지금도 맡은 일은 잘하잖아요.”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자 진정우는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인정해요.”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여러 가지 방면으로.”나는 감히 그를 바라보지도 못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도, 입 밖으로 뱉은 말도 너무나 적나라했다.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오늘 수고 했어요. 제가 밥 살게요. 밥부터 먹고 집 보러 갈까요?”처음 원하지 않던 데서, 이제는 내가 먼저 제안하게 되었다. 아까와 달리 지금은 빚진 게 있었기 때문이다.“좋아요. 그 전에 세수하고 싶은데, 혹시 수건 있어요?”나는 이제야 그의 얼굴에도 옷에도 먼지가 묻었다는 것을 인식했다.“그... 잠시만 기다려 줄래요? 옷부터 사 올게요.”이 근처에는 옷 살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멀지 않은 곳의 대형 마트에 가면 옷이
“혹시 물티슈 있어요?”진정우가 물었다.“아니면 다른 수건도 괜찮아요. 옷도 닦고 싶어서요.”그는 나의 수건을 들고 있었다. 그걸로 옷을 닦기는 아까웠던 모양이다.“일회용 수건 있어요. 그걸 적셔서 쓰면 되겠네요.”나는 일회용 수건을 뽑아줬다. 그는 멍한 얼굴로 잠시 바라보기만 했다. 처음 보는 신문물에 놀란 모습이었다.피식 웃은 나는 괜히 그를 놀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설마 이게 뭔지 몰라요?”“네, 처음 봐요.”순순히 인정하는 모습도 귀여웠다.하긴, 연애 한번 한 적 없는 사람이 이런 건 알게 될 계기가 없었을 것이다. 유행하기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됐고, 여자가 없으면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여자들이 세수할 때 쓰는 거예요. 깔끔하게 한 번 쓰고 버리도록요.”나는 일회용 수건을 물에 적셔서 건네줬다. 진정우는 고개를 숙여서 옷에 묻은 먼지를 닦기 시작했다. 등에도 먼지는 가득했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럽게 다른 수건을 들고 닦아줬다.내 손이 등에 닿은 순간 그의 몸은 눈에 띄게 굳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계속해서 닦았다.그 순간 나는 진정우의 목덜미에 있는 점을 봤다.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그때의 꿈이 떠올랐다. 나를 등지고 있는 남자아이의 목덜미에도 점이 있었다.생각에 잠긴 나는 진정우가 불렀을 때에야 벌떡 정신 차렸다. 내가 들고 있던 수건이 그의 옷을 젹셔 가고 있었던 것이다.“그... 다 됐어요.”나는 그의 점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물었다.“정우 씨, 목덜미에 점은 어릴 때부터 있었어요?”진정우는 손으로 점을 만지작대면서 말했다.“네.”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 꿈에서 본 사람이 진정우 씨는 아니겠지? 말도 안 돼. 현실에서 만나기도 전에 꿈에서 만날 리는 없지. 게다가 그냥 뒷모습이었잖아. 그래, 아닐 거야.’꿈은 환상일 뿐이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나는 꿈과 현실이 결합한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1분 전까지만 해도 모르는 사실이었는데 말이다.“
이 한 방은 강진혁을 향한 것이자 강씨 가문의 체면에 날린 일격이었고 동시에 그에게 보내는 경고이기도 했다.역시 용진표였다. 본색을 드러낼 땐 그 누구도 봐주지 않는다. 명백히 아들을 대신해 분풀이를 한 것이다.“이 자식아, 네 아버지도 생전에 감히 나한테 아니오라고 하지 못했어. 어디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나대는 것이냐.”그는 비서에게서 건네받은 실크 손수건으로 사람을 때린 손을 천천히 닦았다.강진혁의 입가에서 피가 스며 나왔다. 눈동자 밑바닥엔 살기를 담은 분노가 깔려 있었지만 겉으론 억지웃음을 지으며 피 묻은 입가를 닦았다.“대표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예의도, 규칙도 몰랐습니다.”그 모습은 비굴하기 그지없었다.나는 안다. 그건 그저 잠시 몸을 낮춘 것일 뿐이라는 걸 말이다. 이미 조시언 하나만으로도 감당하기 버거운 판에 용진표까지 자극했다간 내일 세운 계획은 아예 무산될 것이다.용진표가 오늘 조문이라는 명목으로 이것에 온 것도 결국엔 그를 윽박지르기 위함이었다. 내일은 아마 큰 소동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하지만 내일은 본래 강두식의 발인이 예정되어 있었다.나는 영정 사진을 바라보았다. 죽어서조차 편히 쉬지 못할 줄은 그도 몰랐을 것이다.어쩌면 이것도 업보인 셈이었다.선과 악은 결국 되돌아오고 하늘은 공평하게 그 누구도 쉽게 용서하시지 않는다.강진혁이 상황을 파악하고 꼬리를 내리자 용진표도 더는 문제 삼지 않고 돌아섰다.강진혁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눈은 용진표가 사라진 방향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엔 마치 죽여버리겠다는 외침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는 참았다. 스스로도 말했듯이 그는 인내에 가장 능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그때 김희연이 다가가 그의 입가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려 했으나 그는 조용히 몸을 피했다.“아주머니, 구급상자 좀 가져와 주세요”김희연이 가사도우미에게 말했다.“필요 없어요”강진혁은 단호히 거절했다.김희연이 뭔가를 더 말하려 했
조시언은 강두식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절을 올리고 김희연에게 다가가 애도의 뜻을 전했다.그 모습은 마치 그가 정말로 단지 조문하러 온 사람인 듯한 착각이 들게 했지만 조금 전 지하 주차장에서 강진혁과 벌인 격렬한 대치전을 생각하면 그렇지만은 않았다.“엄마.”강유형도 김희연에게 걸음을 옮겼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슬이 맺힌 눈으로 고개만 끄덕였다.“옷 갈아입고 아버지 곁을 지켜드리렴.”강유형은 이미 안정을 되찾은 듯했다. 가사도우미의 도움 아래 옷을 갈아입은 그는 김희연의 곁에 나란히 섰다.찾아오는 사람은 드물었다. 나무가 쓰러지면 원숭이들이 흩어지는 건 당연했다.강씨 가문은 강유형의 손에서 강진혁에게로 넘어간 뒤 눈에 띄게 힘을 잃었다. 게다가 강진혁이 용씨 가문과 얽히기 시작하면서 이상한 기류도 감지되었다.이런 때일수록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의 마지막은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것이다.“조시언 씨를 모셔다드려!“조시언이 막 애도를 마친 순간 강진혁은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는 조시언이 쉽게 떠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내쫓듯 말을 꺼냈다.“괜찮아요, 전 우리 리영이를 기다려야 하거든요.”조시언은 안리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단번에 뜻을 알아채고는 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난 지원이와 함께 있을 거야.”나는 당연히 이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누군가가 김희연의 곁을 지키고 있어야 했고 안리영도 내 옆에 있겠다고 했으니 조시언은 자연스레 이 자리에 남게 되었다.강진혁의 눈빛엔 거슬린다는 기색과 도발적인 분노가 아른거렸지만 이곳은 장례식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그럼 조시언 씨는 접견실에서 잠시 쉬시죠.”강진혁의 목소리는 차디차고 딱딱했다.조시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안리영을 한 번 더 바라본 뒤 조용히 자리를 나섰다.하지만 그가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문 밖엔 여전히 그의 사람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의미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모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