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20년 지기 친구의 전 남친, 그리고 나의 새로운 프로젝트 파트너. 우리는 함께 '향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10년 차 인테리어 디자이너 박혜연. 새로운 프로젝트 '카페 블루밍'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재회한 남자, 프리랜서 조향사 강상수. 그는 20년 지기 절친인 소영의 전 남자친구. "당신은 지금 어떤 향기가 나나요?" 비즈니스 파트너로 다시 만난 두 사람. 카페 공간을 채울 단 하나의 향기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혜연은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굴레에 갇혀 잃어버렸던 '진짜 나'의 모습을 발견해 나갑니다. 우정과 사랑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 그리고 가족과의 갈등을 넘어 각자의 꿈을 찾아가는 치열한 성장통.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전문직 로맨스 드라마입니다.
View More4월의 햇살은 잔인할 만큼 다정했다.
햇살이 유달리 다정한 평일 아침이었다.
창문을 넘어 들어온 빛줄기가 침대 머리맡을 부드럽게 훑고 지나갔다.혜연은 천천히 눈을 떴다.
평소라면 출근 전쟁을 앞두고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겠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원룸 안으로 길게 들이친 빗줄기 속에서 먼지들이 느릿하게 춤을 췄다.
혜연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 그 빛의 입자들이 그리는 무의미한 궤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오늘은 그를 만나는 날이었다.
가슴 한구석이 설렘으로 부풀어 오르면서도, 동시에 묵직한 돌덩이가 얹힌 듯 옥죄어오는 감각. 이 모순된 감정은 이제 그녀의 일상이자,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마주해야 하는 형벌이 되어버렸다.진동 소리와 함께 스마트폰 화면이 창백하게 밝아졌다.
알림 문구를 확인하는 그 짧은 찰나에도 심장이 늑골을 때리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했다.[강상수 : 잘 잤어요? 오늘 아침은 꽤 쌀쌀하네요. 따뜻하게 입고 출근해요.
이따 퇴근하고 회사 앞으로 갈게요.]단조로운 문장이었지만, 혜연의 입가에는 옅은 경련 같은 미소가 번졌다.
'따뜻하게 입으라'는 평범한 안부조차 그에게선 특별한 암호처럼, 혹은 은밀한 초대장처럼 느껴졌다.혜연의 손끝이 자판 위를 한참이나 망설이며 배회했다.
'저도 기다렸어요', '보고 싶어서 잠을 설쳤어요' 같은 날것의 진심을 꾹꾹 눌러 담고, 겨우 차갑고 사무적인 가면을 덧씌운 답장을 밀어 넣었다.[박혜연 : 네, 좋아요. 이따 봐요.]
'보고 싶다'는 직설적인 문장을 계속 바라보며 혜연의 가슴이 간질거렸다.
오늘 퇴근 후, 그 시간만을 이정표 삼아 하루를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거울 앞에 선 그녀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다.옷장 문을 열자 갇혀 있던 서늘한 공기가 쏟아졌다.
늘 입던 무난한 검은 니트를 만지작거리다 다시 걸어 두었다. 어쩐지 오늘만큼은 평소보다 더 선명해지고 싶었다.그에게 조금이라도 더 예뻐 보이고 싶은 원초적인 욕망과,
누군가에게 절대 들키지 않으려는 방어 본능이 거울 속에서 격렬하게 부딪혔다.결국 선택한 것은 연한 회색 원피스.
그가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혜연 씨는 무채색이 참 잘 어울려요. 정돈된 공간 같아요'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혜연은 작게 읊조렸다."너무 신경 쓴 것 같나…."
화장대 앞에 앉아 립스틱을 고르던 혜연의 시선이 한구석에 멈췄다.
소영이가 작년 생일에 선물해 준 말린 장미색 립스틱. '이거 바르면 너 완전 여신 돼!'라며 환하게 웃던 소영의 얼굴이 잔상처럼 스쳤다. 순간 손 끝이 가늘게 떨렸다. '미안해, 소영아.'하지만 혜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소영의 선물이 아닌, 며칠 전 백화점에서 몰래 산 선명한 레드 틴트를 집어 들었다. 입술에 닿는 차갑고 끈적한 촉감.거울 속 여자는 지독히도 이기적인, 사랑이라는 명분 아래 우정을 도려내고 있는 배신자였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입술이 붉게 물들수록, 가슴 속의 불안은 기묘한 쾌락으로 변해갔다.행복했다.
발끝이 지면에서 한 뼘쯤 붕 뜬 것 같은, 이 위태롭고 투명한 평화가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 순간이 닥치기 전까지는.오후 8시, 카페 안의 공기는 갓 볶은 커피 향과 사람들의 활기찼다.
골목 어귀의 작은 카페.상수가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놓았다. 조향사다운 정교한 손놀림이었다.
"이 향, 어때요? 오늘 아침에 혜연 씨 생각하면서 새로 조향해 봤어요."
혜연은 마치 신성한 유물을 다루듯 병을 들어 뚜껑을 열었다.
찰나의 순간, 코끝을 스치는 향기는 단순한 냄새가 아니라 하나의 완성된 풍경이었다. 그것은 비 온 뒤의 짙은 숲속 같기도 했고, 갓 구워낸 빵 냄새처럼 포근하게 몸을 감싸 안기도 했다."…라벤더에 베르가못?"
"역시 예민하시네요. 베이스에는 샌달우드를 조금 깔아서 잔향을 눌러줬어요.
톱 노트의 상쾌함이 지나가면, 묵직하고 따뜻한 향이 오래 남도록.""상쾌한데, 어딘가 가슴 한구석이 홧홧해지는 기분이에요. 꼭 오늘 아침 햇살 같아요."
상수의 눈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이 향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베이스 노트만 남는데, 그게 꼭 혜연 씨가 디자인한 공간 같아요.
화려하게 자기를 드러내진 않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단단하고 묵직하게 머물러 주는 안식처."그의 목소리는 조향사 특유의 차분함과, 혜연을 향한 숨길 수 없는 애정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혜연도 따라 웃었다. 이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비난도, 소영의 일그러진 얼굴도 안개처럼 흩어졌다. 테이블 위로 전해지는 그의 온기를 느끼며, 혜연은 나직하게 고백했다."상수 씨, 저 요즘 정말 행복해요. 가끔은 이 행복이 무서워질 만큼."
상수가 천천히 손을 뻗어 혜연의 손등을 덮었다.
굵직한 마디에서 전해지는 단단한 진심이 혜연의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저도요. 혜연 씨 덕분에 숨을 다시 쉬는 것 같아요."
우리는 몰랐다.
죄책감이라는 얇은 살얼음판 위에 아슬아슬하게 쌓아 올린 이 평화가, 얼마나 무력한 것이었는지.
그 얼음판 밑으로 우리를 집어삼킬 듯한 시커먼 폭풍이 이미 입을 벌리고 있었다는 것을.딸랑-.
종소리가 유난히 날카로운 금속성 파열음을 내며 정적을 깼다.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린 혜연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음소거 된 듯 사라지고 오직 제 심장 박동 소리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소영이었다.
혜연은 수치심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자신의 치부를 들킨 아이처럼 방어 기제가 작동했다.“그쪽이 뭔데 내 디자인에 의미를 부여해요? 소영이를 만날 때도 그렇게 남의 세계에 제멋대로 의미를 부여하며 살았나요? 그래서 8년이나 소영이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다가,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낙오자가 된 거 아니에요? 당신은 그냥 소영이가 버린 찌꺼기일 뿐이야!”혜연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공사장의 먼지가 혜연의 격앙된 목소리에 놀란 듯 허공으로 흩어졌다. 현장의 인부들이 잠시 망치질을 멈추고 그들을 쳐다보았지만 혜연은 멈출 수 없었다.상수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혜연의 잔인한 독설을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그것은 비난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혜연이 뱉어내는 말들이 사실은 스스로를 향한 비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의 초연함이었다.“혜연 씨.”상수가 한 걸음 다가왔다. 혜연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려다 발밑의 철근 뭉치 때문에 멈춰 섰다. 상수는 혜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소영의 뒤에서 멍한 눈으로 서 있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 아주 미세하지만, 타협할 수 없는 뚜렷한 의지가 담긴 눈빛이었다.“혜연 씨가 지금 나한테 퍼붓는 그 모진 말들, 소영이가 나한테 해주길 바랐던 진심들 아닐까요? 아니면… 혜연 씨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말들이거나.”“…뭐라고?”“소영이는 8년 동안 제게 한 번도 묻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떤 향을 만들고 싶은지, 내 내면이 어떤 냄새로 썩어가고 있는지. 그저 소영이가 원하는 화려한 껍데기만을 내놓기를 바랐죠. 혜연 씨는 지금 저를 소영의 찌꺼기라고 비난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제 향기에 반응하고 있어요. 자신의 디자인을 지키기 위해 저를 공격하는 그 절박함… 그건 아주 솔직하고, 그래서 저에게는 그 어떤 위로보다 더 날카롭게 다가오네요.”상수의 말은 혜연의 심장에 비수처럼 박혔다. 부정하고 싶었다. 소영은 순수한 피해자였고, 상수는 그
카페 ‘블루밍’의 공사 현장은 그야말로 거대한 아수라장이었다.혜연은 방진 마스크를 눌러쓴 채,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벽면을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한때는 화려한 조명과 웃음소리가 가득했을 이 공간은, 이제 막 뜯어낸 콘크리트 가루와 녹슨 철근의 비릿한 냄새, 그리고 오래된 습기가 만들어낸 퀴퀴한 곰팡이 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혜연이 밤을 새워 설계한 디자인은 완벽한 직선과 차가운 미니멀리즘의 정수였다. 하지만 그 차가운 완벽함은 현장의 거친 먼지 속에 갇혀 좀처럼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든 도면을 거칠게 말아 쥐었다. 현장 소장의 무성의한 마감 처리가 눈에 가시처럼 박혔고, 무엇보다 이 공간에 스며들어야 할 '향기'라는 불확실한 요소가 그녀의 통제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그때, 공사장 입구의 가림막이 들리며 둔탁한 발소리가 들렸다. 상수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먼지 구덩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깨끗한 린넨 셔츠 차림이었지만, 손에 든 작은 샘플 병들을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심장을 다루듯 품에 안고 있었다.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를 보호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운 그 걸음걸이를 보며, 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저 유약한 태도. 소영의 곁에서 8년 동안이나 그림자처럼 지내며 키워왔을 그 지독한 수동성이 이 거친 현장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났다. 혜연에게 상수는 여전히 스스로의 의지라고는 거세당한 채, 타인의 취향에 기생하는 무능한 존재일 뿐이었다.“늦었네요. 현장 시간은 도면의 선 하나만큼이나 정확해야 한다는 걸 모릅니까?”혜연의 날 선 목소리가 공사장 천장에 부딪혀 날카롭게 공명했다. 상수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그의 눈동자는 혜연의 복잡한 도면만큼이나 읽기 힘든 감정들로 일렁이고 있었다.“죄송합니다. 이 공간의 습도와 자재 냄새를 이겨낼 적절한 향의 베이스를 찾느라… 조금 늦었습니다.”“변명은 됐어요. 작가님, 착각하지 마세요. 이 공간은 내 정교한 계산 위에 서 있는 건축물이에
상수의 기억은 다시 아주 오래전, 낡은 아파트의 거실로 돌아갔다. 초등학생 상수에게 그림은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캔버스 위에 자유롭게 색을 칠할 때만큼은 아버지가 아닌 '나'로 존재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군인 출신인 아버지가 예고 없이 집에 돌아왔다."상수야, 그림 그리고 있니?"아버지는 늘 무표정했다. 그 표정은 상수에게 거대한 장벽이었다. 상수는 그림을 그리다 말고 어깨를 움츠렸다."네!""운동은 안 하고?"아버지의 말에 다른 의견을 제시 하지 않고 상수는 붓을 놓았다. 그것은 상수가 생각하는 아버지가 정해준 '올바른 소년'의 길이었기 때문이다."…아, 네. 운동 할게요.""그래."아버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 무미건조한 ‘그래’라는 한마디는 상수에게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중학생이 되어 진로 상담을 할 때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선택할 때도 상황은 같았다. 아버지는 묻고, 상수는 ‘네’라고 답한다."너는 뭐 하고 싶으니?""…잘 모르겠어요.""이공계는 어때?""네!""그게 네 생각이니?"상수는 아버지의 눈을 피했다. 아버지는 상수를 빤히 바라보며 조금 더 깊은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으나, 상수는 그 침묵조차 압박으로 받아들였다."네!""그래."상수는 자신의 의지가 무엇인지조차 고민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원하는 ‘이공계’라는 틀 안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것이 상수에게는 곧 ‘가족의 평화’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네’라고 답하는 순간, 아버지의 굳은 표정이 미세하게 풀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상수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었다.대학 선택도, 전공도, 결국은 아버지의 ‘그래’ 한마디를 듣기 위한 반복된 연극이었다."어느 대학 갈 거니?""…잘 모르겠어요.""공대는 어때?""네, 공대 갈게요.""그게 네가 원하는 거니?""네!"상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게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지조차 모른 채, 그저 아버지가 원하는 답을
[5년 전]저녁 식사 자리는 내내 위태로웠다. 툭 치면 깨질 것 같은 정적 속에서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만 날카롭게 울렸다. 결국 소영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너랑은 말이 안 통해. 정말 지긋지긋해, 강상수."소영은 짧은 비난을 남기고 먼저 식당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겨진 상수는 식어가는 음식 앞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가, 계산을 마치고 형 재현과 함께 사는 낡은 다세대 주택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희망퇴직 후 몇 달째 이어지는 재취업의 실패, 그리고 매일같이 이어지는 소영의 독촉. 그 숨 막히는 현실 속에서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었던 조향 수업조차 소영은 '돈 안 되는 짓'이라며 혐오했다.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실에서 TV를 보던 재현이 고개를 돌렸다."어, 왔냐? 왜 그래, 표정이 왜 이래? 또 소영이랑 싸웠냐?""……아니, 별일 아니야."상수는 건조하게 대답하고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기어들어 갔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몇 번이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라는 문자를 보냈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조차 없었다. 침대에 몸을 던진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8년이라는 시간이 마치 젖은 솜처럼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다.그때, 정적을 깨고 휴대폰이 진동했다. 소영이었다. 상수는 잠시 멈칫하다 전화를 받았다.[그만하자, 우리.]수화기 너머 소영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차가웠다. 8년의 무게가 무색할 만큼 명료한 선언이었다. [……듣고 있어? 우리 여기까지 하자고.]"……그래. 알겠어.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해."상수의 목소리는 평온하다 못해 무미건조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 같았다. 소영은 그 짧은 긍정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상수는 귀에서 휴대폰을 떼고 한동안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멍한 시선이 허공을 헤맸다.'끝났다. 정말로.'심장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다가도, 이내 기묘한 박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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