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인 탓인지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다.방금 달아나느라고 땀이 난 고은서는 바람을 맞자마자 약간의 쌀쌀함을 느꼈다.송민준은 이내 자신이 들고 있던 외투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술 냄새가 조금 나긴 하지만 괜찮다면 쓰고 있어요.”술이 깬 송민준은 평소의 온화한 모습으로 돌아왔고 그의 눈빛은 미안함이 가득 차 있었다.추위를 느낀 고은서는 사양하지 않고 외투를 건네받았다.심지어 그녀는 연회 일로 종일 바삐 보낸 데다가 돌아가는 길에 이런 일까지 부딪히게 되니 너무 피곤했다.그래서 행여나 감기라도 걸릴까 봐 냉큼 외투를 받아 걸쳤다.“죄송해요, 은서 씨. 제가 민폐를 확실하게 끼친 것 같네요. 몸은 괜찮나요? 병원에 가서 검사라도 받아보는게 낫지 않을까요?”송민준이 근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괜찮아요.”고은서가 고개를 저었다.“발이 심하게 부은 것 같은데 민준 씨야말로 병원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아까 경찰한테 부탁해서 임시로 스프레이를 뿌렸는데 많이 나은 것 같아요. 그래서 병원은 잠시 안 가려고요.”송민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마침 송민준의 기사가 차를 몰고 두 사람 앞에 섰다.“은서 씨, 제가 데려다줄게요.”자신의 몸은 자신이 더 잘 아는 법, 고은서는 더는 그를 달래지 않고 당장이라도 침대에 누워 기절한 듯이 자고 싶었다.송민준은 차로 다가가 고은서를 위해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고은서는 거절하지 않고 곧장 차에 올랐다.그러나 문이 닫히기 전에 그녀는 송민준의 팔에 핏자국이 있는 걸 발견했다.“혹시 손을 다쳤나요?”방금 전 고은서가 칼을 든 남자를 발로 차버리긴 했으나 칼을 휘두르는 속도가 워낙 빨라서 송민준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실수로 베였을 수도 있었다.그녀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팔을 들고 확인해 보았다.“별로 큰 상처가 아니네요. 약 바르면 괜찮을 거예요.”그래도 상처가 깊지 않아 다행이었다.기사는 비상용으로 차에 둔 약상자에 상처에 바를만한 연고가 있다면서 두 사람에게 말했
기사는 차 밖에서 대기 중이었고 송민준은 발 때문인지 차에서 내리지 않고 눈을 감은 채 휴식을 청하고 있었다.인기척을 느낀 그는 이내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죄송해요. 제가 저도 모르게 잠들었네요.”고은서는 목을 어루만지면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확인하고는 속으로 무의식적으로 송민준 몸에 기대지 않아서 다행이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저를 깨우지 그랬어요?”고은서가 물었다.송민준은 고은서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그녀를 빤히 바라보면서 화제를 바꾸었다.“저에 대한 경각심을 내려놓았나 봐요. 이렇게 쉽게 잠들다니.”금방 잠에서 깬 고은서는 비몽사몽한 상태라 송민준의 말에 깃든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머쓱해 하며 답했다.“너무 피곤해서 밖을 내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잠에 들었는데 죄송해요.”“제가 해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송민준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차 안은 아주 어두웠는데 가로등 불빛만 희미하게 비춰 들어왔다.고은서는 송민준의 표정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그저 느낌상 그가 평소 젠틀한 모습과 달리 비아냥거리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보아낼 수 있었다.“저를 해치기라도 하시게요?”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해졌다.“그럴 리가요.”송민준은 이내 나긋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부인했다.“갑자기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에요.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내주는 은서 씨가 꽤 부럽네요.”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이내 송민준의 뜻을 알아차렸다.“민준 씨는 민아 오빠 되는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송씨 집안 가정교육과 조건을 보아서라도 민준 씨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데 그만한 믿음은 충분히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고은서는 진심이었다.송민준이 아무리 위험한 인물이라고 해도 이런 틈을 타 그녀를 해칠 정도의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그녀의 말은 송민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어릴 적부터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아무런 곤란도 겪어보지 못하고 자란 걸 보
고은서는 이 일로 더는 송민준과 쟁론하고 싶지 않았는 데다가 그가 원하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은행 카드 번호와 연락처를 송민준한테 알려주고는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문을 열자마자 밖에서 공손한 자세로 대기 중인 기사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나더러 더 편히 자라고 차에서 내려보낸 거겠지.’고은서는 기사한테 간단하게 사죄한 후 아파트 단지로 걸어 들어갔다.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 문을 들어서자마자 이미숙이 부랴부랴 달려왔다.“은서 씨, 대체 어디 가셨다 이제 온 거예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죠?”이미숙은 그녀가 행여나 다치진 않았는지 이리저리 훑으면서 확인했다.사실 고은서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 귀가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심지어 전엔 몇 번이고 고씨 집안 본가에서 하룻밤 머무르다 오곤 했는데 이미숙은 단 한 번도 지금처럼 다급해 한 적이 없었다.‘오늘 무슨 일 있었나?’“아줌마, 저 괜찮아요. 제가 늦게 들어오면 먼저 쉬라고 했잖아요. 아직도 안 주무시고 뭐 하는 거예요?”고은서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이미숙이 입을 열려고 할 때 마침 그녀의 폰이 울렸다.“돌아왔어요. 은서 씨가 금방 집에 들어왔는데 다친 곳도 없고 괜찮은 것 같아요. 걱정하시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도련님.”이미숙은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반면 고은서는 도련님이란 세 글자를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곽승재 연락을 받고 날 걱정하는 거야?’그날 농장에서 곽승재한테 화내면서 자신에게 더는 집착하지 말라고 한 이후로 그는 단 한 번도 그녀 앞에 나타난 적이 없었고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심지어 유일 투자 은행에서 주최하는 연회도 그를 초대하지 않았다.‘이 늦은 시간엔 무슨 일로 전화한 거지?’“네, 알겠습니다. 금방 바꿔드릴게요.”이미숙은 말하면서 폰을 고은서에게 건네주었다.“은서 씨, 도련님 전화에요.”그녀는 의문스럽긴 했지만 순순히 폰을 건네받았다.“무슨 일이야?”“괜찮아? 아무 일 없어?”곽승재의 목소리로부터
이미숙의 표정을 보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차린 고은서는 일부러 외투를 벗으면서 강조했다.“보기만 해도 알리지 않나요? 남자 외투잖아요.”“...”이미숙은 경악하면서도 아쉽다는 표정을 드러내며 그녀한테서 외투를 건네받았다.“내일 세탁소에 맡겨둘게요. 은서 씨는 얼른 올라가서 쉬세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방으로 들어갔다.이미숙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도련님 곁에는 인플루언서가 질척거리고 있고 사모님 곁에는 적지 않은 구애자가 존하고 심지어 오늘은 남자 외투까지 걸치고 왔는데 두 분 정말 재결합할 수 있는 걸까?’이미숙은 은근히 걱정되었다....이튿날, 고은서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다.어제 그런 일을 겪은 데다가 오랜만에 달리기까지 하는 바람에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다행히도 어디 불편한 곳은 없었다.그녀가 씻고 준비하고 유일 투자 은행에 들어섰을 때 송민아가 최신형 스마트 폰 하나를 건네주었다.“오빠가 주라고 해서. 어제 일은 오빠한테 전해 들었어. 미안해, 은서야. 그렇게 큰일을 겪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너랑 상관없는 일인데 사과하지 않아도 돼.”고은서가 웃으면서 말했다.“내가 취하지만 않았어도 네가 이 일에 휘말려들 일도 없는데. 그럼 그 불량배들과 맞붙을 일도 없을 거 아니야.”송민아가 자책하면서 말했다.“또 마침 오빠가 발을 상하면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다 네가 물리쳤다며.”‘아주 자세하게 알려줬네.’“괜찮아. 사고일 뿐이야. 그리고 나 폰 있어. 그러니까 도로 가져가.”고은서는 여분의 폰을 두고 있었는데 마침 그 폰을 쓸 기회가 생겼다.게다가 두 사람을 도와준 남자에게 줄 이천만 원도 송민준이 냈는데 차마 새 폰까지 받을 수는 없었다.“그냥 받아. 마땅히 줘야 할 선물이야. 오빠가 아니었으면 폰이 고장 날 일도 없었을 거 아니야.”송민아가 재촉했다.“이거 먼저 가지고 나중에 시간 나는 대로 같이 밥이라도 한 끼 먹어.”“밥은 거절하지
여시은을 향한 경각심을 낮출 수 없었던 고은서는 그녀한테서 연락이 오자마자 녹음 공능을 켜두었다.그러나 여시은이 이리도 눈치 빠르게 자신의 의도를 알아차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은서 씨, 화났어요? 아니면 정말 저를 오해한 거예요? 저는 은서 씨를 계속 친구라고 생각했는데.”여시은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제가 하도 멍청해서 여시은 씨의 경지에 이르기는 불가능할 것 같네요. 여시은 씨 친구가 될 자격도 없고요.”“은서 씨, 너무 겸손해하지 않아도 돼요. 멍청하다뇨? 퍼퓸 제작 솜씨도 훌륭한 데다가 유일 투자 은행까지 운영하고 있잖아요. 심지어 해성 10대 청년상 수상자이면서 왜 그러는 거예요. 아, 맞다. 어제 연회에서 발언하는 사진을 봤는데 너무 이쁘고 멋지던데요. 저 엄청 부러워했는데.”고은서는 여시은이 갑자기 왜 그 얘기를 꺼내는지 의문이 들었다.“부러워할 필요가 있나요. 시은 씨 능력으로 마음만 먹으면 뭐든 다 해낼 수 있는데. 심지어 저보다 백배 정도 더 훌륭하게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죠.”“과찬이에요.”여시은이 웃으면서 말했다.“제가 무슨 능력이 있어요. 유일하게 은서 씨보다 훌륭한 점이라면 운인 것 같네요. 저 대신 모든 걸 다 해줄 수 있는 아빠가 있어서 굳이 노력하지 않고서도 이 세상 많은 사람들보다 더 좋은 생활을 만끽할 수 있는 운이랄까요? 그저 간혹 심심할 때가 있어서 은서 씨 같은 사람과 지내면서 더 많은 걸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해요.”‘지금 나한테 좋은 아빠를 두었다고 자랑하는 거야?’확실히 이 방면에서는 고은서는 전혀 비길 자격이 없었다.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고 어머니도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고 고준석마저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었다.인내심이 바닥난 고은서는 더는 여시은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제가 바빠서 이만 끊어야 할 것 같네요.”전화를 끊은 후 얼마 되지 여시은한테서 문자가 왔다.[은서 씨, 나중에 회사에 또 연회가 있으면 저도
여시은은 방긋 웃으면서 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예요. 절대 계획에 차질이 생길 없으니까 시름 놓고 돌아가셔도 돼요.”...고은서는 퇴근하자마자 라이트문으로 돌아갔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녀는 눈처럼 새하얀 몸뚱이에 아주 이쁘장하게 생긴 고양이 한 마리를 보았다.고양이를 그녀를 향해 야옹 하면서 다가와 다리에 자신의 몸을 비볐다.순간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린 고은서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 어루만져 주었다.그러나 이내 고양이가 전에 곽승재가 자신에게 보내준 사진 속의 고양이 퀸이라는 걸 발견했다.전보다 많이 자란 데다가 털도 예전보다 훨씬 길어졌는데 눈동자는 바다처럼 푸르렀는데 보기만 해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이뻤다.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퀸의 머리를 더 어루만져 주었다.그러다 문뜩 생각이 들었다.‘퀸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설마...’고은서의 한참 생각하고 있을 때 맞은편 집에서 익숙한 남자 한 명이 걸어 나왔다.“퀸.”곽승재는 고양이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땅에 쪼그리고 앉아 고양이를 어루만지고 있는 고은서와 눈이 마주쳤다.가녀린 몸매에 뽀얀 피부를 가진 고은서가 흰 고양이를 어루만지고 있는 모습이 유독 아름다워 보였다.그러나 고은서의 눈빛은 그를 보자마자 차가워졌다.이를 본 곽승재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나면서 표정이 굳어졌다.“나와 연관된 건 다 싫다며. 그런데 왜 퀸을 안고 있는 거지?”곽승재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고은서는 멈칫하더니 이내 퀸을 내려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퀸이 품에 꼭 안긴 채 더 어루만져 달라고 그녀의 손가락을 살랑살랑 핥기 시작했다.새끼 고양이 앞에서 차마 마음이 독해질 수 없었던 고양이는 앞으로 다가가 직접 퀸을 곽승재 손에 쥐여주고는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왜 여기 있는 거야?”“내 집인데 있으면 안 돼?”고은서는 열린 문 사이로 그의 집 안을 살짝 흘겨보았는데 다행히도 마재경은 보이지 않았다.‘전에 아줌마는 마재경이 이사 갔다고 했는데 곽승재는 왜 여기에 있
곽승재는 자신을 경계하는 고은서를 보면서 입술을 달싹이다가 끝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퀸을 안고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고은서는 어이없어졌다.‘대체 왜 저러는 거야? 정말 머리에 문제라도 생긴 건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마재경과 알콩달콩하더니 동거할 집을 따로 구한 거 아니었어? 왜 계속 여기에 있는 건데? 정 안되면 예원 별장으로 가면 될 것을 왜 굳이 여기에 있는 거냐고?’고은서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집으로 들어갔다.그러나 차마 퀸이 굶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고은서는 이미숙한테 우유를 대신 가져다주라고 말할 예정이었는데 마침 그녀가 집에 없었다.전화해 물어보니 장보고 잃어버리고 안 가져온 채소가 있어서 다시 가지고 가는 길이니 배고프면 국을 먼저 먹고 있으라고 그녀에게 말했다.고은서는 고민 끝에 우유를 들고 곽승재의 집 문을 두드렸다.곽승재는 퀸을 집 안에 두고 혼자 문을 열었다.“무슨 일이야?”고은서가 안을 들여다보니 퀸이 배고픈 탓인지 계속 물을 할짝거리고 있었다.“우유 달라며!”그녀가 우유를 건네주며 말했다.그러나 곽승재는 아주 단호하게 거절했다.“필요 없어. 이미 사람 시켜 사료랑 우유를 가져오게 했어. 아마 곧 도착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일부러 이런다는 걸 알고 있었다.‘내가 방금 전에 거절했다고 본인도 나를 거절한다는 거야?’“싫으면 말고.”‘좋은 마음으로 우유를 가져다줬더니 찬물이나 끼얹고 난리야.’고은서는 씩씩거리며 뒤돌아 가려고 했다.그러나 곽승재가 갑자기 그녀를 붙잡고 집으로 끌고 들어가더니 벽에 밀어붙였다.그의 따뜻한 체온이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고은서가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보았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탁하는 소리와 함께 우유도 땅에 떨어졌다.“곽...”고은서가 화를 내려고 하던 찰나 곽승재가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그는 미리 계획이라도 한 것처럼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잡고 깍지를 끼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뒤통수를 잡고 진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서로 숨결이
고은서는 그 일로 곽승재의 뺨까지 내리쳤었다.‘그러니까 내가 마재경을 해치려 할까 봐 다른 곳으로 옮겨준 게 아니라 내 말을 듣고 정말 라이트문에서 쫓아냈단 말이야?’곽승재는 고은서의 표정 변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기억났으면 계속해도 되지?”그는 고은서에게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또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곽승재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둘러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목을 부축한 채 방금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또다시 숨이 막혀온 고은서는 부득이하게 고개를 들고 그의 키스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키스가 끝난 후, 고은서는 곧 질식할 것만 같았다.곽승재의 몸은 점점 더 뜨거워 났고 그곳도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이를 발견한 고은서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곽승재, 당신 정말 변태야?”그녀의 발그스름한 얼굴과 촉촉한 입술을 바라보고 있던 곽승재는 욕구가 억누를 수 없을 만큼 거세져 가는 것 같았다.“은서야, 난 그저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정말 곧 터질 정도로 네가 그리웠어...”곽승재는 말하면서 또 그녀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그러나 고은서는 더는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던지라 이내 고개를 홱 돌렸다.“잊지 마. 우리 이미 이혼한 사이야. 게다가 당신도 새로운 여자가 생겼잖아. 선 넘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고은서는 애써 덤덤한 척하면서 말했다.곽승재는 그녀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고은서의 말에 자극을 받았는지 아니면 무언갈 떠올렸는지 그는 이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눈빛도 점점 어두워졌다.마침 퀸이 뒤에서 야옹거리는 바람에 고은서는 그 틈을 타 곽승재를 밀어냈다.“얼른 놔.”그는 고은서를 잡고 있던 손의 힘을 풀면서 뒤로 한발 물러서더니 끝내는 그녀를 놓아주었다.고은서가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할 때 뒤에서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 이건 네가 나한테 진 빚이야. 난 그저 마땅하게 돌려받을 뿐이고. 절대 집착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어.”고은서는 그의 말에 응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