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야, 잘됐다. 드디어 돌아왔네...”온하랑은 마치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너무 기뻤다.예전에는 몰랐는데 이번 일을 겪은 뒤 큰 집에 혼자 있으니 너무 쓸쓸하고 무서웠다.“네가 웬일이야? 나를 이렇게까지 반겨주고?”김시연은 캐리어를 구석에 밀어넣으면서 물었다.온하랑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간단하게 말해줬다.그녀의 자초지종을 들은 김시연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이 떡 벌어졌다.그녀가 집에 없는 단 며칠 동안 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났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김시연은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가 다시 감탄하기 시작했다.“다시 생각해 보면 부승민 씨가 참 괜찮은 사람 같기도 해...”지난번에 김시연을 도와 주현을 구해주면서 그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이때 온하랑이 머뭇거리며 말했다.“시연아, 나 아마 못 갈 것 같아...”그녀는 먼저 재단을 설립한 뒤 이곳을 아예 벗어나 다른 곳에서 살겠다고 김시연에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부승민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그녀의 말을 들은 김시연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부승민이 부시아를 앞세워 그녀의 환심을 사려할 때부터 언젠가 이런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더구나 온하랑은 몇 년 동안 부승민을 사랑해왔다.“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너만 행복하다면 난 언제나 널 응원할 거야.”“고마워, 시연아.”온하랑은 감동한 나머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자신의 어떠한 결정도 다 이해해 주고 뒤에서 응원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게 너무 고맙게 느껴졌다.온하랑은 기왕 남기로 결정했으니 재단을 더욱 열심히 운영해 볼 생각이었다.그리고 드디어 밖에 나올 용기가 생겼다.밀착 경호할 수 있는 보디가드를 고용했기 때문이다.로비에 내려오니 경호원이 예전보다 더 많아진 걸 느꼈는데 아마 그녀의 납치 사건 영향이 컸던 것 같다.일을 마친 뒤 집에 돌아오니 김시연은 이미 밥을 다 해놓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냉동실에 만두가 있길래 끓여놨어.”온하랑이 가까이 와보니 저번에 부승민이 빚
심문 끝에 민성주는 이 일을 지시한 사람이 이환이라는 깡패라고 솔직하게 자백했고 또 끈질기게 조사한 결롸 진짜 배후의 사람은 임연지라는 사실을 알아냈다.이 시각 임가희와 임연지는 아직 강남에 남아 있었고 최국환은 경주로 돌아갔다.그는 자신이 강남에 오래 머무를 수 없기에 두 사람은 여기에 남아서 어떻게든 온하랑에게 사과해서 관계를 회복하라고 당부했다.경찰은 임연지가 묶고 있는 호텔 위치를 알아냈고 추적해 본 끝에 아직 호텔 방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곧바로 찾아가서 체포하기로 했다.워낙 비밀리에 조사되었고 또한 온하랑도 쭉 집에 있었던 탓에 임연지는 자신이 계획한 일이 성공했다고 생각하고는 마음껏 먹고 마시고 밖에서 놀다가 지쳐 그제야 호텔에 돌아와서 쉬고 있었다.그러다 누군가의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무심결에 문을 열어줬는데 눈앞에는 두 명의 경찰 제복을 입은 사람이 엄숙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뒤에는 호텔 매니저도 같이 있었다.순간 임연지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면서 반사적으로 문을 닫으려 했다.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을 경찰이 아니었다.그들은 냉큼 문을 박차고 방 안으로 들어간 뒤 임연지 손에 수갑을 채웠다.“임연지 씨 맞죠? 저희는 경찰입니다. 지금 당신이 인신매매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있으니 저희랑 같이 가서 조사받아야겠습니다.”“대...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저랑 아무런 상관이 없거든요. 당장 이 수갑 풀어요. 아니면 절대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임연지는 억울한 척 일부러 그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상관이 있는지 없는지는 가서 조사해 보면 알겠죠.”두 경찰은 그대로 그녀를 끌고 방문을 나섰다.“당신들 혹시 내 고모부가 누군지 알기나 해? 알면 감히 날 이렇게 잡지 못할 것이고 반드시 후회할 날이 있을 거야!”“당신 고모부는 고사하고 설령 아버지가 서정훈이라고 해도 소용없어요!”그중 젊은 경찰인 이동휘가 그녀에게 큰 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서정훈은 연도진의 삼촌이다.이번 인신매매 사건
아무리 임가희가 뭐라고하던 두 사람은 들은체도 하지 않고 그녀를 한쪽에 밀친 뒤 그대로 임연지를 끌고 갔다.하지만 임가희는 끈질기게 그들의 뒤를 쫓아가더니 이동휘를 붙잡고 사람들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여러분, 좀 도와주세요. 이 사채업자 놈들이 시퍼런 대낮에 경찰을 사칭해서 우리 조카를 끌고 가려고 해요! 이게 어디 말이나 됩니까?”“돈을 빌린 건 저 애 아버지인데 우리 연지랑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돈 빌려간 사람을 찾아가야지 우리 연지는 왜 끌고 가냐고요!”호텔 로비에서 임가희의 울부짖는 소리 때문에 금세 구경꾼들이 몰려왔다.임가희는 위에 정장 재킷에 아래는 펜슬 스커트를 입고 있었고 목에는 얇은 스카프 하나를 둘렀다. 그리고 머리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잘 정리되어 귀부인의 느낌이 흠씬 풍겼는데 딱 봐도 품위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그런 사람이 억울함을 호소하니 다들 쉽게 믿는 눈치였다.이동휘는 임가희를 또다시 밀치며 말했다.“저리 꺼져. 경고하는데 한 번만 더 내 앞을 막으면 그때는 진짜 당신도 같이 체포할 거야!”이때 구경꾼 중에 웬 아저씨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앞에 나와 한마디 끼어들었다.“정말 깡패예요? 이건 너무 하잖아요. 누가 빌렸으면 그 사람한테 가서 따져야지 이토록 연약한 아가씨를 잡아가서 뭐하려고요? 저 겁먹은 모습 좀 보세요. 그리고 감히 경찰을 사칭하다니, 제가 이미 신고했으니 두고 보세요!”“저 여자 말에 속은 거예요. 저희는 진짜 경찰이고 저 여자는 지금 범죄 사건에 연루되어서 체포해 가는 것뿐이에요.”“저 여자가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데요?”“납치 사건이요.”“납치요?”그 아저씨는 듣자마자 너무 어이없는 나머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오히려 그쪽이 납치하려는 것처럼 보이는데요?”경찰들은 할 말을 잃었다.“...”임가희는 임연지가 진짜로 이 일에 가담했다고 생각했고 일단 경찰들에게 연행되고 죄가 확정되면 그야말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하여 어떻게든 임연지를 잡아가지 못하게 만든 다음 당장 외국으
“제가 신고했어요.”김인우는 자진해서 한 발짝 나서며 말했다.“저 사람들이 경찰을 사칭해서...”“사칭은 개뿔!”오민석은 냉큼 일어나더니 김인우에게 수갑을 채우며 욕설을 퍼부었다.그리고 자신의 경찰증을 보여주며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블루 베이 지방 경찰서 오민석이고 지금 공무집행 중입니다. 용의자들의 교활한 수법을 쓰는 바람에...”그는 일부러 옆에 서 있는 김인우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오지랖이 넓은 어떤 사람 때문에 지금 용의자들이 도망친 상황인데 빨리 사람들을 불러서 뒤쫓아야 합니다.”금방 온 세 명의 경찰들은 그가 내민 경찰증을 보더니 김인우에게 물었다.“이 경찰증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요?”김인우는 어리둥절한 나머지 온몸이 굳어졌다.“문... 문제가 없다고요?”경찰들은 그의 물음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용의자가 아마 너무 멀리 도망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세분은 왔던 참에 저희를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네.”그렇게 경찰들은 임연지가 도망쳤던 방향으로 뒤쫓아갔다.떠나기 전에 이동휘는 잊지 않고 김인우에게 경고까지 날렸다.“당신은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 내가 저 사람들을 잡으면 다음은 당신이니까. 아까까지 정의감이 넘치고 좋은 사람인 척했잖아? 만약 이후에 납치 유괴 사건이 또 발생하면 그건 바로 당신이 오늘 범죄자들을 잡지 못하도록 방해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명심해!”김인우는 그의 경고가 두려웠던 나머지 재빨리 강남에서 도망쳤다. 다행히 그는 단지 이곳에 여행 온 여행객이었다.다만 그 젊은 아가씨가 진짜로 사람을 납치 유괴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정말 외모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다시 한번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시간이 흘러도 가끔 그 인신매매 아가씨는 붙잡혔는지 궁금해지기도 했다.만약 아직도 못 잡았다면...비행기 티켓을 구매할 시간도 없었기에 임가희네는 고속도로를 향해 질주할 수밖에 없었다.오민석은 더 이상 이렇게 쫓아가는 건 무리라고 판단해서 재빨리 서
‘근데 지금은 왜 이렇게 변했을까?’‘아무리 전 남편한테 가정폭력을 당했다고 해도 이미 그 사람은 죽었는데 자식은 무슨 죄란 말인가?’‘왜 친딸을 이렇게까지 냉정하게 대할까?’“연지가 감옥에 가게 되어서 오빠한테 미안하다고? 그럼 이런 나쁜 아이로 가르친 건 오빠한테 안 미안해? 이제 동림이더러 일 없으면 그냥 기숙소에 있으라고 해야 겠네!”최국환이 말했다.이건 임가희랑 최동림을 만나지 못하게 하려는 심산이다.임가희는 심장이 순간 내려앉는 것 같았다.“국환 씨, 동림이는 아직 어린 데다가 천식까지 있어서 곁에 엄마가 없으면 안 돼요...”“도우미가 있어서 괜찮아. 그리고 그만하면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닌데 이제 슬슬 독립해야지.”최국환은 뒤돌아서 걸어가며 말했다.“지금 당장 나랑 같이 돌아가. 그리고 내일 부씨 가문에 가서 사과할 준비나 해. 또한 연지를 감옥에서 구해낼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이번 일로 큰 사건까지 연루되어 위에서 사람들을 많이 보냈다고 하니까 쉽게 꺼내기 힘들 거야.”임가희는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아까 임연지가 자신의 팔을 잡고 울먹거리던 게 자꾸 생각나 다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자기 친딸과는 어릴 적부터 떨어져 있었고 그 대신 임연지가 커가는 모습은 곁에서 다 지켜본 사람이라 진작에 임연지를 자기 친딸처럼 생각했다. 근데 어떻게 그녀가 감옥에 잡혀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겠는가?최국환은 구해줄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온하랑은 짬을 내서 경찰서에 들렀다.그리고 민성주 배후의 사람이 임연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전혀 놀라지 않았다.경찰이 낮은 소리로 그녀에게 당부했다.“온하랑 씨,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사건을 위선에서도 매우 중시하고 있으니 아무리 임연지 씨가 배경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법의 망은 벗어날 수 없게 되었어요.”“감사합니다.”“참, 온하랑 씨가 오게 되면 한번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요.”온하랑
경찰서에서 나오자마자 온하랑은 부씨 가문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전화기 너머에서 할머니 오순자의 걱정스러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랑아, 엊그제 그렇게 큰일이 있었는데 왜 할머니한테 말하지 않았니? 네가 하마터면 못 돌아오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할머니한테 서운한 일이 있는 건 아니지?”온하랑이 냉큼 답했다.“아니에요. 제가 할머니한테 무슨 서운한 일이 있겠어요. 그냥 걱정 끼쳐 드리기 싫었을 뿐이에요.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요.”“난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쉽게 놀라는 나약한 늙은이가 아니야. 네 오빠의 일도 나한테는 숨기고 네 일도 나한테 숨기는데 내가 투명 인간이랑 다를 게 대체 뭐야!”“투명 인간이라니요, 이번에는 제가 잘못했어요. 이제부터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제일 먼저 할머니께 말씀드릴게요.”“넌 항상 이쁜 말로 할머니를 달래주네. 참... 오늘 최씨 가문에서 전화가 왔었는데 내일 우리 집에 사과하러 오고 싶대. 할머니는 그 사람한테서 네가 납치될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 최국환 두 번째 아내가 네 친어머니잖아, 그럼 너를 납치 유괴하려 했던 사람이 네 사촌 언니인 거야? 진짜 무서운 사람이네. 그래서 할머니는 네 의견이 듣고 싶어. 네가 만약 거절하면 내일 그 사람들을 오지 말라고 할 거니까.”최씨 가문에서 본가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어쩐지 할머니가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었다.온하랑은 아까 임연지의 태도를 떠올리며 할머니에게 말했다.“할머니, 그냥 그 사람들을 오지 말라고 해요. 어쩌면 최 회장님은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 하겠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만나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요.”‘진심 어린 사과는 개뿔.’사실 김정숙도 만약 그들이 부승민과의 친분이 없었다면 또 온하랑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최국환 같은 사람이 직접 사과하러 올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아니면 진작에 임연지를 감옥에서 구해냈을 것이다.“그래. 그렇게 전할게.”“네.”전화를 끊은 뒤 온하랑은 과일 바구니를 들고 김
안미영은 온하랑과 수다를 좀 더 떨다가 본가에서 나온 뒤 임대료도 받을 겸 백화점에 들렀다.둘째 삼촌의 요식업 회사 외에도 안미영은 몇 채의 아파트와 점포들을 갖고 있었고 모두 세를 준 상태였다. 그리고 이제 월말도 되었으니 임대료를 받으러 가야 했다.안미영네 아파트와 점포들은 대부분 고급단지와 번화거리에 위치했고 세입자들도 모두 몇 년씩 계약을 맺었던 탓에 집세는 반 년치 혹은 1년 치씩 결제했다. 단지 한 지역의 아파트만 약간 평범했는데 위치는 대학교 근처에 있었고 세입자가 돈이 많이 궁한지 집세를 달마다 결제하겠다고 했다.안미영은 원래 매달 돈 받으러 가기 번거로웠던 탓에 그 세입자에게 집을 내주기 싫었지만 대학교 재학 중인 서수현이 늙고 병든 아버지를 간호한다는 소리에 측은하고 기특한 마음이 들어 그냥 계약했다.말 그대로 서수현은 참 효심이 깊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지난번에는 자신이 직접 한 고구마튀김을 가져왔는데 비록 고급진 음식은 아니어도 그 마음이 너무 예뻤다.그 낡은 아파트는 6층 건물이었고 서수현이 계약한 집은 1층이어서 매우 편리했다.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안미영은 문을 두드렸다.“잠시만요.”집안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서 금방 문이 열렸는데 서수현이 고개를 내밀고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이모, 어서 들어오세요.” “그래, 오늘 수업이 빨리 끝났나 봐? 세탁기 돌리고 있어?”안미영은 세탁기가 돌아가는 걸 본 뒤 소파에 앉더니 웃으며 물었다.서수현은 안미영에게 물 한잔을 건네며 답했다.“오늘 오후에는 수업이 하나밖에 없어서 오자마자 청소하고 있었어요. 이모, 여기 물 마셔요.”“그래, 고마워. 아버지 일은 좀 어때?”“좋아요. 지금은 식사가 끝나자마자 일하러 갈 정도로 적극적이에요.”서수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다, 이모. 제가 점심에 찹쌀 빵을 좀 만들었는데 드셔보세요.”아버지의 건강이 비록 호전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약을 먹어야 하는 상태이기에 그를 집에 계속 혼자 있게 할수 없었다. 해서 학교 근처에
저녁, 부현승은 집에 와서 밥을 먹었다.그러다가 테이블 위 접시에 네 개의 찹쌀 빵이 올려져 있는 모습을 보고 당연히 이모님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 집어서 입에 넣었다. 다 먹은 뒤 또 하나를 집어 들고 물었다.“이 찹쌀 빵 너무 맛있는데요.”안미영은 살짝 뿌듯한 얼굴로 웃으며 답했다.“맛있지?”“네, 혹시 어머니가 하셨어요?”“아니, 어느 세입자가 만들어 준 거야. 맛있으면 나중에 더 해달라고 할게.”“아니에요.”부현승은 비록 너무 맛있었지만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할 정도로 부탁하고 싶지는 않았다.“체면 차릴 필요 없어. 내가 만들어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해준 거야. 그리고 아주 친절한 아가씨거든. 지난번에 그 고구마튀김도 그 여자가 해준 거고. 나한테도 저런 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듣고 있던 부현승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그 세입자가 분명 안미영의 재력을 눈치채고 일부러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안미영은 여전히 환상 속에 빠진 채 말을 이었다.“근데 참 불쌍한 사람이야. 엄마는 없고 아빠만 있는데 지금 중병에 걸려서 혼자 아르바이트도 하고 학교도 다니고 있어...”부현승은 무심결에 서혜민이 생각났다.예전에 서혜민의 집은 매우 가난했는데 여동생 두 명에 남동생까지 있는 바람에 그녀는 일찍 학교를 그만두고 나와서 일했다고 말했다.그러다가 안미영에게 입을 삐쭉거리며 말했다.“학교도 다닐 수 있고 학교 근처에 있는 집도 세 들어 살 수 있는 정도면 생활이 꽤 괜찮다는 걸 설명하지 않을까요? 그 사람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안미영은 할 말을 잃었다.“...”“너는 어쩜 그리도 마음이 삐딱하니?”부현승이 답했다.“합리적으로 분석해 드렸을 뿐이에요.”안미영은 단번에 그가 집고 있던 찹쌀 빵을 도로 뺏으며 말했다.“먹지 마.”부현승은 어리둥절한 채 젓가락만 들고 있었다.“...”...아마도 할머니가 최국환의 방문을 거절한 탓인 지 이튿날 최국환은 직접 온하랑에게 전화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