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사이, 연미혜는 시간을 쪼개 두어 번 더 기술 교류 행사에 참석했다.그중 두 번은 임지유와도 마주쳤지만, 이번엔 경민준이 동행하지 않았다.3월이 되자 비가 잦아졌다.이날도 행사장을 나서려던 참에 밖은 이미 빗물로 젖어 있었다.연미혜는 우산을 챙기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차에 둔 채로 내려온 터라 잠시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릴 생각으로 정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아직 입구에 다다르지도 않았는데 익숙한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바로 임지유였다.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던 그녀는 연미혜를 본 순간, 말끝을 흐리며 웃음을 거뒀
식당에 도착해 룸에 자리를 잡고 앉자 하승태가 물을 따르며 물었다.“이번 교류 행사에서 성과 있었어요?”연미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편이에요.”연미혜가 여러 교류 활동에 참여한 건, 얼마 전 유명욱이 자신과 김태훈에게 건넨 자료를 연구하기 위한 영감을 얻기 위해서였다.몇 차례 참석하고 나니 그녀도 나름 새로운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이야기를 나누던 중, 연미혜가 물었다.“수연이는 요즘 어때요?”하승태가 미소를 띠며 답했다.“작년 하반기부터 건강이 많이 좋아졌어요. 올해부터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친구들도 새
연미혜는 강혜원의 눈빛에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마침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순간, 매장 입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도대체 어디 갔던 거야?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전화도 안 받고 지금...”들어오자마자 강혜원에게 호통을 치던 임혜민은, 안쪽에서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는 연미혜를 보는 순간 목소리가 뚝 끊겼고, 순식간에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그때 직원이 다가와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고객님, 주문하신 제품 모두 포장 완료되었습니다. 내역서 확인 부탁드립니다. 총 11억..
강혜원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거실 안으로 경민준이 들어섰다.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뒤, 임지유가 강혜원을 가리키며 소개했다.“고모 딸이야. 강혜원, 혜원이라고 부르면 돼.”경민준은 강혜원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안녕.”강혜원은 지금껏 임지유의 SNS나 지인들의 말로만 경민준을 들어왔을 뿐,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막상 눈앞에서 경민준을 마주하자, 그녀는 단번에 임지유가 왜 그 많은 남자 중에서 경민준을 선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사실 임지유를 둘러싼 남자들은 하나같이 젊고
그때 임지유가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하원 그룹 지금 인재 채용 중이지? 혜원이한테 맞는 자리 있을 거야. 이따가 승태한테 한 번 전화해 볼게.”경민준은 그 말에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부탁해 봐.”‘하승태’라는 이름은 강혜원도 알고 있었다.경민준과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이자, 임지유를 아끼고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라고 들었다.그동안 임지유가 도움이 필요할 때면, 하승태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도와줬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었다.하지만 강혜원은 누구에게도 기대고 싶지 않았다.막 입을 열려던 찰나,
임지유는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임혜민에게 말했다.“승태가 전화 받기 어려운 상황인 것 같아요. 좀 있다가 다시 걸어볼게요.”시간이 흐르고 삼십 분쯤 지났을 무렵 임지유는 다시 하승태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자 이번엔 전화가 연결되었다.“통화 괜찮아?”임지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응. 괜찮아.”하승태는 짧게 대답했다.사실 그는 임지유가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부터 화면을 보고 있었지만, 그때는 일부러 받지 않았다.“무슨 일이야?”하승태가 묻자, 임지유는 가볍게 웃으며 강혜원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지금 하원 그룹에서 사
말을 마친 연미혜는 더는 경민준을 상대하지 않았고 그저 돌아서 차로 향했다.경민준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붙잡으려는 듯 한 걸음 앞으로 나섰지만, 바로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화면을 내려다본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고 연미혜가 차에 타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전화를 받았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김태훈은 경민준이 또다시 연미혜에게 무슨 말을 꺼낼까 잠시 긴장하다가, 그가 스스로 물러서는 것을 확인하고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아무 말 없이 말없이 연미혜가 탄 차량 반대편으로 돌아 올라탔다.차 안.조수석에 앉은 김
경민준과 염성민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연미혜는 알지 못했다.김태훈과 함께 식사를 마친 그녀는 곧장 회사로 돌아가, 남은 업무를 이어갔다.수요일 오후, 고창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이번 주말에 우리 집에 들르지 않을래? 다솜이도 올 거야.”연미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네.”금요일 오후.회의 중이던 연미혜의 휴대전화가 잠깐 진동했다. 잠시 머뭇거리다 화면을 보려던 순간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회의 중이라 신경 쓰지 않았지만 발신자는 등록되지 않은 번호였다.전화를 건 사람은 강혜원이었다. 수요일부터 하원
정범규의 질문에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경민준의 휴대폰이 울렸다.경민준이 잠시 자리를 비워 전화를 받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음식이 하나둘 테이블에 놓이기 시작한 뒤였다.정범규의 물음은 그렇게 흐지부지 넘겨졌다.AI 업계의 국내외 대가들이 밤새워 읽고 있다는 바로 그 논문의 주저자가 지금, 이 자리에서 식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식당 안의 분위기는 묘하게 달아올라 있었다.논문의 핵심 내용과 실험 데이터를 간략히 훑어본 마우재 교수와 그의 박사과정 학생들은 식사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연미혜에게 질문을 던졌다.논문 안에서 궁금했던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김 대표님 말씀이 맞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저도 미혜 씨께 꼭 여쭤보고 싶네요.”손아림은 벙찐 얼굴로 임지유를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그녀의 입을 막은 사람이 다름 아닌 임지유였기 때문이었다.‘언니까지 왜 이런 식으로 연미혜를...’김태훈은 그런 임지유의 대응에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그는 연미혜와 임지유는 겉으로는 말없이 앉아 있어도, 얼마나 서로를 신경 쓰고 있을지 짐작하고 있었다.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진짜... 주저자가 연미혜였다고?’염성민, 손수희, 손아림 모두 인공지능 전공자는 아니었지만, 연미혜가 발표한 논문이 얼마나 대단한 수준인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알 수 있었다.임지유의 박사 지도교수인 캐벳 스미스는 AI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인물인데, 그런 인물이 깊은 관심을 보인 것도 모자라 애제자인 임지유에게도 직접 연락해 꼭 정독하고 연구해 보라고 당부까지 했던 논문이었기 때문이었다.게다가 조금 전에는 마우재 교수의 박사과정 학생까지 나서서 그 논문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으며,
손아림은 눈에 띄게 우쭐한 표정으로 연미혜를 바라보았다.손수희 역시, 딸이 이 자리에서 주목받는 것이 흐뭇해 보였다.하지만 연미혜는 시종일관 똑같은 표정으로 임지유 쪽으로는 단 한 번 쳐다보지조차 않았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고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앉아 있을 뿐, 마치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아무런 존재감도 드러내지 않았다. 당연히 임지유와 마우재 교수 사이 오가는 전문적인 대화에도 낄 자리는 없었다.조용히 말을 아끼는 연미혜와 달리, 임지유는 지금 수많은 전문가에게 주목받고 있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염성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문밖에 서 있던 건 정범규와 하승태였다.정범규가 문을 밀고 들어서며 안에 있던 사람들을 보곤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어머, 무슨 일로 이렇게 대단한 분들이 한자리에 모이신 거죠?”이 레스토랑은 정씨 가문에서 운영하는 곳이었다.정범규는 하승태와 식사하려고 들렀다가, 식당 매니저에게 경민준이 이쪽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인사나 하려고 올라온 참이었다.그런데 막상 와 보니, 낯익은 얼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그 광경에 정범규는 둘이서 조용히 밥 먹는 게 의미 없겠다 싶
‘교류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애초에 김태훈과 임지유 사이엔 교류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하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김태훈 입장에선 굳이 마우재 교수와 얼굴을 붉힐 이유도 없었다.‘어차피 서로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 불과하니...’“앞으로는 교수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그저 적당히 웃어넘기며 대답한 김태훈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마우재 교수는 국내 AI 분야에서도 나름대로 이름이 있는 인물이었다.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 역시, 임지유가 캐벳 스미스 교수의 박사과정 제자라는 이유로 김태훈이 그녀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현승이 반응할 틈도 없이 연미혜의 통신기에 알림이 울렸다.화면을 확인한 그녀는 짧게 ‘데이터센터에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볼게요’라는 말만 남기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연미혜는 예정대로 기술 센터를 떠났다.다음 날 하루는 집에서 휴식을 취했고, 이어지는 그다음 날은 넥스 그룹으로 복귀했다.넥스 그룹과 경문 그룹의 협업은 이제 공식적으로 시작된 상태였다.마침 그녀가 복귀한 날, 김태훈은 경문 그룹과의 협의 미팅에 참석할 예정이었다.이전처럼 단순한 계약 조율이라면 김태훈이
연미혜는 바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현승을 향해 말했다.“죄송해요. 오늘은 같이 식사 못 할 것 같네요...”지현승은 부드럽게 대답했다.“괜찮아요. 다음에 함께해요.”연미혜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고, 지현승은 그녀가 유명욱과 함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 홀로 식당으로 향했다.그는 꽤 오랫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상태였다.연미혜를 본 지 이틀 뒤부터, 마침내 정식 휴가가 시작됐다.하지만 휴가가 시작되기 전인 이틀 동안 그는 다시는 그녀와 마주치지 못했다.집에 돌아와 보니, 가족들도 모두 각자 바쁜 듯 아무도
일요일은 어버이날이었지만, 경다솜은 하루 먼저 토요일에 연씨 가문을 찾았다.경민준의 운전기사가 그녀를 데려다준 것이었다.경다솜이 준비한 어버이날 선물은 손수 만든 카드 한 장이었다.카드에는 ‘어버이날 축하해요’라는 여섯 글자가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예쁘죠? 선생님이 아빠랑 같이 만들어도 된다고 하셨는데요. 아빠가 요즘 너무 바쁘셔서... 도안이나 그림을 그린 것부터, 하트 붙이는 것까지 전부 제가 혼자 했어요.”연미혜는 경다솜이 과제를 하는 모습을 본 지 꽤 되었는데, 그새 글씨가 부쩍 또렷하고 단정해졌다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