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숨기고 떠났더니, 전남편이 무너졌다

임신 숨기고 떠났더니, 전남편이 무너졌다

By:  착순이Ongoing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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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에 부모를 잃은 이하설. 두 집안 할머니들의 약속으로 그녀는 어린 시절에 조이섭과의 혼인을 약속받았다. 열네 살의 이섭은 분명히 하설에게 약속했다. “이제부터 내가 널 지켜줄게.” 하지만... 먼저 약속한 것도 이섭이었고,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 것도 이섭이었다. 결혼 5년. 하설은 끝내 남편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그저 원래 차갑고 무정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의 다정함은 하설이 아닌 다른 한 사람에게만 향하고 있었다. 처절한 진실을 마주한 날, 하설은 손에 쥔 임신확인서를 내려놓고, 대신 이혼서류를 내밀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끝났다. 적어도 하설은 정말 끝났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혼 후, 이섭의 일상은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넥타이는 어디에 있는지, 충전기는 왜 늘 제자리에 없는지, 커피는 어째서 더 이상 예전 같은 맛이 나지 않는지... 동시에 모두가 이하설의 불행을 기다렸다. 버려진 아내의 초라한 결말을 기대했다. 그러나 하설은 무너지지 않았다. 화려하게 다시 일어섰다. 직장에 복귀한 그녀는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고, 국내 기록을 갈아치우며 가장 뜨거운 신예 화가로 떠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 몰래 숨죽인 구석에서 전남편 이섭이 하설을 붙잡고 낮고 절박한 목소리로 매달리는 모습이 목격됐다. “하설아, 내가 뭐가 싫은데? 말해. 다 고칠게.” 차갑게 그를 밀어낸 하설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아직도 날 좋아하는 게 싫어요!” 하설의 대답에 숨이 멎은 듯 굳어 있던 이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죽어도 못 고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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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이하설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안방 문을 밀고 들어서자, 넓은 침대 위에는 남자의 옷가지와 벨트 따위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고, 욕실에서는 쏴아 하고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이섭이 샤워 중이었다.

하설은 시선을 내리깔고 손에 들린 임신 검사 결과지를 바라봤다.

하설은 임신했다.

그것도 쌍둥이였다.

의사에게서 정확한 설명을 들은 순간, 하설은 무심코 생각했다.

어쩌면 이 아이들이 남편인 이섭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이 결혼을 붙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곧 의사의 말이 이어졌다.

뱃속의 아기 둘 가운데 한 명은 심장 박동이 확인되지 않아 수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하설은 곧바로 말했다.

심장 박동이 확인되지 않은 아기는 정리하고, 건강한 아이만큼은 꼭 지키고 싶다고.

하지만 이 수술은 부부 두 사람 모두의 서명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진행할 수 없다고 했다.

하설 혼자서는 결정할 수 없었다.

끼익-

욕실 문이 열리며 이섭이 나왔다. 하체에는 흰 수건 한 장만 두르고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맺혀 떨어졌고,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 선명하게 갈라진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숨이 막힐 만큼 강한 긴장감이 그의 몸에서 흘렀다.

이섭은 하설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처럼 하설 곁을 그대로 지나쳐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잠옷을 꺼냈다.

이섭에게 이하설은 늘 투명인간처럼 존재감이 없었다.

하설도 이제 이섭의 무시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설이 그를 따라가며 말했다.

“나... 할 말이 있어요.”

“나도 할 말 있어.”

이섭의 목소리는 담담하며 서늘하고 멀게 느껴졌다.

하설은 임신 검사 결과지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말했다.

“그럼... 당신이 먼저 말해요.”

이섭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수은이 곧 돌아와.”

하설의 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가 곧 돌아오는구나.’

그렇다면 이제 조이섭 곁에 하설이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하설이 비켜줘야 했다.

“그러니까.”

이섭이 옆으로 고개를 돌려 하설을 날카롭게 바라봤다.

“이제 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고 있겠지?”

지난 5년의 결혼 생활 내내 하설은 끝내 이섭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하설은 제 입으로 그런 말을 꺼내고 있는 자기 목소리를 들었다.

“나와 부수은 사이에서 당신의 선택은 언제나 부수은인 거죠?”

이섭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네가 수은이랑 비교될 거라고 생각해?”

하설의 안색이 조금씩 창백해졌다.

“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나를 이렇게까지 미워해요?”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 아래로 하설이 그를 바라봤다.

“나는 당신이 정식으로 맞이한 아내잖아요.”

“네가 어떻게 나한테 시집왔는지, 제일 잘 알잖아. 어떻게 내 침대까지 올라왔는지는 더 잘 알 테고.”

이섭은 평소 하설과 대화가 많지 않았다.

냉담하게 다른 사람을 밀어내는 데에 유능했다.

그리고 부드러운 말로 더 깊게 상처를 내는 것도 쉬운 일이었다.

유독 결혼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경멸과 혐오가 어린 눈빛으로 하설을 바라봤고, 분노가 섞인 말투로 하설을 몰아세웠다.

하설이 수은을 위해 남겨 두었던 자리를 차지했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하설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혼약은 어릴 때부터 정해져 있었어요. 그날 밤 침대에서의 일은... 정말 어떻게 된 건지 저도 몰라요.”

결혼한 뒤로 이섭은 단 한 번도 하설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래서 하설에게는 임신 소식이 없었다.

이섭의 할머니 박영순은 그 일을 몹시도 답답해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을 기어이 한방에 들게 했다.

하설의 머릿속에 남은 기억은 하나뿐이었다.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이섭의 품 안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잠에서 깬 이섭은 한마디도 없이 하설의 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하설이 아무리 설명해도 이섭은 믿지 않았다.

아이도 바로 그날 생겼다.

단 한 번의 관계만으로.

정말로 쉽게 임신하는 체질이었던 셈이다.

이섭이 싸늘하게 코웃음 쳤다. 실크 잠옷을 걸치며 낮게 말했다.

“할 말 있다며.”

그가 하설 곁을 스쳐 지나갈 때, 하설이 계속 쥐고 있던 종이를 봤다.

하지만 그저 힐끗 한 번 볼 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섭은 창가로 가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 끝이 붉게 타올랐다.

하설은 그의 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아이가 생긴다면, 그러면...”

이섭이 짜증 섞인 말로 끊어버렸다.

“아이로 나를 붙잡으려는 속셈이야? 왜, 침대에 한 번 오른 걸로는 부족했어? 더 욕심나? 난 네가 이렇게 머리 굴리는 여자인 줄은 몰랐는데.”

그는 담뱃재를 털었다.

“5년 동안 현모양처인 척 연기하더니, 이제 더는 못 버티겠나 봐. 드디어 본모습이 나오는군.”

하설은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게 애쓰며 끝까지 물었다.

“나를 싫어하면 내가 낳은 아이도... 싫어요?”

“그래.”

이섭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하설은 마음이 아주 천천히,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

그건 하설의 전부였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마음이었고, 5년 동안 쏟아부은 시간이었다.

그 모든 게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소꿉친구였고, 부부이기도 했지만, 결국 이 관계는 하설 혼자 붙들고 버틴 우스운 이야기였던 셈이다.

미운 사람은 그 그림자까지 밉다는 말이 딱 맞았다.

이섭은 하설을 미워했고, 그래서 하설의 아이까지 미워할 것이다.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주변까지 후하게 대했다.

이섭이 부수은을 사랑하는 동안, 부씨 집안은 수많은 이익을 챙겼고 북강시에서 더없이 번듯하게 자리를 잡았다.

하설은 이제야 깨달았다.

정말로 다 알게 되었다.

그녀는 손에 든 임신 검사 결과지를 들어 올린 뒤, 깊게 숨을 삼켰다.

“이거, 이혼합의서예요.”

이섭의 몸이 아주 조금 굳었다. 그가 뒤를 돌아봤다.

‘먼저 이혼 이야기를 꺼낸다고?’

이건 또 뜻밖이었다.

“이제 놓을게요. 더는 당신을 사랑하고 싶지 않아요.”

하설이 말했다.

“조항도 이미 정리해 뒀어요. 막 당신에게 주려던 참이었어요. 그런데...”

하설은 말을 멈췄다. 곧장 손에 힘을 줘 종이를 찢기 시작했다.

찢어진 종이 소리가 침실 안에 연달아 울렸다.

이섭이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설은 임신 검사 결과지를 잘게 찢어 허공으로 뿌렸다.

하얀 조각들이 천천히 흩날리며 떨어졌다.

이섭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마음 바뀌었어? 이혼 안 하려고?”

“아니요.”

하설이 대답했다.

“조항을 바꿀 거예요. 다시 작성할 거예요.”

“원하는 게 뭐지.”

“돈이요.”

아주 많은 돈.

하설과 아이가 남은 평생을 부족함 없이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돈.

하설은 빈손으로 나갈 생각이 없었다. 자신은 이섭에게 빚진 게 없었다.

그 돈은 하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이었다.

사랑도, 결혼도, 하설은 이섭에게 한 점 부끄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었다.

혼자였다면 미련 없이 아무것도 받지 않고 떠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섭은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하설이 찢어버린 것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이섭이 아이의 생부로 남을 자격... 바로 그것이었다.

하설이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이섭의 이름을 이혼합의서와 수술 동의서, 두 장의 서류 위에 모두 받아내는 것.

하설이 그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아니었다.

심장 박동이 없다니...

엄마가 될 사람에게 그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 하설은 누구보다 또렷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하설은 그 불행을 혼자 견뎌야 했다.

“하.”

이섭의 눈에 하설에 대한 조롱이 스쳤다.

“돈 챙겼으면 깔끔하게 멀리 사라져.”

그는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리고 네가 직접 우리 부모님께 말씀드려. 먼저 이혼하자고 한 건 너라고.”

하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렇게까지 순순히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돈 말고는 다른 조건도 내세우지 않았다.

이섭은 조금 의아했다.

그는 하설이 울고불고 매달리거나, 감정적으로 따져 물을 줄 알았다.

그런데... 하설은 지나치게 담담했다.

‘뭔가 이상해.’

이섭의 속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거친 짜증이 치밀었다.

그는 담배를 몇 번 세게 빨아들여 그 감정을 억눌렀다.

“수작 부리지 마.”

사실... 이 5년 동안, 이섭은 하설에게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조씨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이하설은 지나치게 완벽했고, 흠잡을 데가 없었다.

밖에서는 화사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누구와도 능숙하게 어울렸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빈틈없이 정리했다.

집에서는 다정하고 얌전하게 살림을 돌봤다.

그랬던 하설이 끝내 수를 써서 미뤄져 오던 첫날밤을 억지로 치렀다.

그 일 하나로 이섭은 하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어졌다.

이제 부수은에게 떳떳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말해 봐. 또 뭘 원해?”

이섭이 담배를 비벼 껐다.

“빙 돌리지 말고.”

하설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마지막이에요. 그것 하나뿐이에요.”

이섭이 냉소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쉽게 물러설 리 없겠지.’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지... 물라.’

하설은 눈을 깜빡이며 오랫동안 사랑해 온 남자를 바라봤다.

하설은 이섭의 풋풋했던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늘 곁에 있었다.

교복 입던 시절부터 웨딩드레스를 입은 날까지.

이제 이섭은 권력을 쥐고 누구보다 가장 높은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기세등등했고, 누구보다 눈부셨다.

그런데 하설은 이섭의 눈에 든 적도, 마음에 든 적도 없었다.

그렇게 혼자만 앞을 향해 달려간 사랑은 결국 끝이 좋지 않았다.

“우리 같이 케이크 먹어요. 결혼 5주년이잖아요.”

하설이 말했다.

‘오늘이 결혼기념일이었나?’

이섭이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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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효
정기효
재미있네요 빠른 연재 부탁 드립니다
2026-04-02 19: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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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이하설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안방 문을 밀고 들어서자, 넓은 침대 위에는 남자의 옷가지와 벨트 따위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고, 욕실에서는 쏴아 하고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조이섭이 샤워 중이었다.하설은 시선을 내리깔고 손에 들린 임신 검사 결과지를 바라봤다.하설은 임신했다.그것도 쌍둥이였다.의사에게서 정확한 설명을 들은 순간, 하설은 무심코 생각했다.어쩌면 이 아이들이 남편인 이섭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이 결혼을 붙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하지만 곧 의사의 말이 이어졌다.뱃속의 아기 둘 가운데 한 명은 심장 박동이 확인되지 않아 수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하설은 곧바로 말했다.심장 박동이 확인되지 않은 아기는 정리하고, 건강한 아이만큼은 꼭 지키고 싶다고.하지만 이 수술은 부부 두 사람 모두의 서명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진행할 수 없다고 했다.하설 혼자서는 결정할 수 없었다.끼익-욕실 문이 열리며 이섭이 나왔다. 하체에는 흰 수건 한 장만 두르고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맺혀 떨어졌고,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 선명하게 갈라진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숨이 막힐 만큼 강한 긴장감이 그의 몸에서 흘렀다.이섭은 하설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처럼 하설 곁을 그대로 지나쳐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잠옷을 꺼냈다.이섭에게 이하설은 늘 투명인간처럼 존재감이 없었다.하설도 이제 이섭의 무시에 익숙해져 있었다.하설이 그를 따라가며 말했다.“나... 할 말이 있어요.”“나도 할 말 있어.”이섭의 목소리는 담담하며 서늘하고 멀게 느껴졌다.하설은 임신 검사 결과지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말했다.“그럼... 당신이 먼저 말해요.”이섭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수은이 곧 돌아와.”하설의 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가 곧 돌아오는구나.’그렇다면 이제 조이섭 곁에 하설이 설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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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이섭의 표정만으로도 하설은 알 수 있었다.역시...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이섭은 얇은 입술을 다물었다. 가만히 따져 보니, 어느새 자신은 하설과 5년이나 함께 살았다.이섭은 그 시간이 길고 고되게 느껴지지 않았다.오히려 너무 빠르게 지나가 버렸다고 느꼈다.너무 빨라서 그는 문득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정말 5년이나 지난 거야?’하설이 옅게 웃었다.“결혼 5주년도 축하하고요. 공교롭게도 같은 날, 서로를 좀먹던 이 결혼을 끝내기로 한 것도 축하해요.”하설의 입은 웃었지만 눈에는 물기가 차올랐다.미리 준비해 둔 케이크를 가져왔다. 시트부터 토핑까지 전부 하설이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케이크 위에는 망고가 꽉 찬 가득했다.하설에게는 망고 알레르기가 있고 조금만 먹어도 입안에 물집이 잡혔다.손에 닿기만 해도 작은 두드러기가 올라왔다.하지만 이섭은 망고를 아주 좋아했다.이섭은 하설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모습까지 직접 봤으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사실은... 전혀 기억하지도 못했다.다음 날 식탁에는 또 망고가 올라왔다.오늘 하설은 주방에서 장갑까지 낀 채 과도를 들고, 망고 껍질을 천천히 벗기고 잘게 썰었다. 거기에 하설이 품은 마음 전부를 쏟아부었다.하설은 자신이 이 케이크를 내밀었을 때, 이섭의 눈 안에 서려 있던 찬 기운이 조금쯤은 누그러질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그렇게 되기를 고대했다.하지만... 그것 역시 하설 혼자만의 바람이었다.하설은 케이크를 한 조각 잘라 이섭에게 내밀었다.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발신자 이름을 확인한 이섭의 표정이 금세 누그러졌다.“여보세요, 수은아.”[나 방금 도착했어.]수은의 경쾌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혹시 나 데리러 나올 거야?]이섭이 답하기도 전에 수은이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안 되면 괜찮아. 그냥 택시 타고 가도 돼.]이섭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비행기 시간 내일 아니었어?”[일정 바꿨어. 그래서 좀 일찍 들어왔어. 나... 선배 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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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가정법원.하설은 문 앞에 서 있는 이섭을 단번에 알아봤다.말끔한 정장 차림에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그 얼굴은 몇 번을 봐도 늘 시선을 붙들었다.뚜렷한 윤곽, 높게 뻗은 콧대, 눈매와 미간 사이에는 오래 위에 서 있던 사람만이 지닌 서늘한 기세가 어려 있었다.풋풋하던 소년은 어느새 혼자서도 모든 걸 감당하는 금융업계의 신흥 강자로 자라 있었다.예전보다 훨씬 차분해졌고, 무게감도 깊어졌다.이섭은 손끝에 신분증을 쥔 채 시선을 느슨하게 들어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하설이 그쪽으로 걸어갔다.하설을 보자 이섭의 깊게 잡혀 있던 미간이 조금 풀렸다.이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려 이혼 접수창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하설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이혼 업무를 보는 쪽은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에어컨 온도는 지나치게 낮았고, 그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직원이 두 사람의 신분증을 받아 들었다.“이혼 사유가 어떻게 되십니까?”짧은 한마디에 두 사람 모두 잠시 말을 잃었다.정작 진짜 이유는 입 밖으로 꺼내기가 어려웠다.하설이 먼저 입을 열었다.“감정이 많이 상했어요.”말하면서도 하설의 손가락 끝이 저도 모르게 몇 번 말려 들어갔다.이섭이 무심히 흘겨봤다.그런데 하설의 손가락 위로 붉은 발진이 촘촘히 올라와 있었다.이섭은 눈을 들어 하설의 입가도 봤다.그쪽에도 비슷한 붉은 자국이 번져 있었다.늘 똑바로 보지 않았던 탓에,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이섭의 시선을 느낀 하설이 고개를 숙였다.곧, 이섭의 목소리가 들렸다.“이제 와서 불쌍한 척하는 거야?”하설의 숨이 턱 막혔다.“너 망고 알레르기 있잖아.”이섭이 어젯밤 케이크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이런 식으로 일부러 몸 망쳐서 내가 마음 약해지길 바라는 거야?”하설은 그 앞부분의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기억하는구나.’그런데 이어진 뒷말이, 남아 있던 기대를 한 번에 꺼뜨렸다.하설은 이섭을 보지 않았다.직원을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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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이섭은 고개를 아주 조금 틀어 하설과 서형 쪽을 바라봤다.빛이 닿은 쪽과 그림자에 잠긴 쪽이 반씩 갈린 얼굴이 유난히 음산해 보였다.이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눈빛만큼은 서늘하고도 날카로웠다.차는 서서히 멀어졌다.이섭은 내려가 있던 창문을 다시 닫았다.“대표님.”경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사모님께서 다른 남자와 단둘이 계시다가 혹시라도 기자들한테 찍히고, 그걸로 말이 커지면 대표님이랑 종성에도 이미지 타격이 갈 수 있습니다.”“타격이 제일 큰 건 나보다 이하설 본인 아니야?”“그건... 그렇습니다.”이섭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말했다.“오늘 밤 바로 배서형이랑 호텔이라도 가면 좋겠네. 소문 더럽게 나고, 사람들한테 손가락질이나 실컷 받게. 그러면 유책 배우자로 몰릴 테니까, 이혼할 때 내 돈 한 푼도 못 가져가.”하설은 돈을 원했다.하설이 원하는 건 더 주고 싶지 않았다.차라리 전부 기부하고 말지, 하설한테 쓰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이섭은 보고 싶었다. 자기 없이 이하설이 어떤 모습으로 무너질지.이씨 가문의 형편은 이미 기울 대로 기울어 있었다.게다가 이하빈은 기대할 구석도 없는 인간이었다.그런 상황에서 하설이 무슨 수로 제대로 살 수 있겠는가?하설은 이제 자기 힘으로 날아오를 수 있다고 믿는 눈치였지만, 정작 이 오랜 세월 동안 조씨 가문에 기대어 겨우 체면을 유지해 왔다는 사실은 잊고 있었다.이섭은 하설이 품고 있던 그 보잘것없는 자존심을 언젠가 한 번쯤 꺾어 놓고 싶었다....이씨 저택.이혼하게 된 하설이 몸을 둘 곳은 결국 이곳뿐이었다.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회사도, 지분도, 부동산도 전부 작은아버지 손으로 넘어갔다.남매에게 남은 재산은 이 집이 유일했다.하설은 이섭과 결혼한 뒤 이 집을 떠났고, 이제 다시 돌아와야 했다.거실로 들어서자마자 진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바닥에는 술병과 담배꽁초, 찢긴 파티 장식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카드도 몇 벌, 마작 패까지 흩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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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박영순은 병상에 누운 채 수액을 맞고 있었다.산소마스크까지 쓴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위태로워 보였다.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박영순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하설이 왔니? 우리 하설이 온 거 맞지?”“할머니.”하설은 급히 병상 곁으로 다가가 박영순의 손을 감싸 쥐었다.“저요. 제가 왔어요.”박영순의 흐릿하던 눈빛이 조금씩 또렷해졌다.하설을 바라보던 박영순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네 얼굴 보니까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할머니, 저는 늘 곁에 있어요. 보고 싶다고 하시면 언제든 바로 올게요.”하설은 다정하게 대답했다.“그러니까 몸 잘 챙기셔야 해요. 오래오래 사셔야죠.”“나는 말이야.”박영순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네가 아이 낳고, 내가 증손주 한번 안아 보는 날까지만 살아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하설의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다.“결혼한 지도 벌써 5년이야. 이제는 슬슬 소식이 있어야지.”박영순은 곁에 서 있는 이섭을 흘겨봤다.“이놈아, 내 말이 틀렸냐?”이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내가 묻잖아. 너, 이 자식... 콜록, 콜록콜록...”박영순이 갑자기 심하게 기침을 쏟아냈다. 숨이 차오른 듯 얼굴이 벌게졌다.하설은 얼른 박영순의 등을 쓸어내렸다.‘이 상태에서 사실대로 말해도 될까?’‘이미 이혼 절차를 밟았고, 숙려기간만 지나면 완전히 끝이라는 걸 할머니가 아시면... 또 쓰러지실지도 몰라.’하설이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때, 어깨 쪽으로 따뜻한 체온이 닿았다.익숙한 옅은 민트 향이 코끝으로 스며들었다.이섭이 팔을 뻗어 하설의 어깨를 감싸더니, 힘을 주어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요즘 저랑 하설이 아이 준비하고 있습니다.”이섭이 담담하게 말했다.“별일 없으면 조만간 좋은 소식 있을 겁니다.”박영순은 영약이라도 들이켠 사람처럼 금세 생기가 돌았다. 희고 메마른 얼굴에 생기가 번졌다.“정말이냐?”“네.”이섭이 입가를 살짝 휘었다.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하설의 귓가를 스치듯 입술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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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이섭은 하설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잠깐 내려다본 것만으로도 이섭은 곧 이유를 알아차렸다.이섭의 미간이 더 깊게 구겨졌다.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하설이 없는 며칠 동안, 이섭의 일상은 생각보다 훨씬 더 엉망이었다.서재에서 화상 회의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오면 핸드폰 배터리가 다 닳아 있었다.그런데 충전기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한참을 뒤져도 끝내 찾지 못했다.아침마다 마시는 커피도 문제였다.이섭은 늘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오랫동안 그래 왔다.그런데 가사도우미가 가져오는 커피는 예전 그 맛이 아니었다.원두를 바꿔 보고, 커피 머신도 바꿔 보고, 나중에는 바리스타까지 따로 불렀다.그래도 익숙했던 맛은 찾을 수 없었다.그 바람에 이섭은 일할 때 쉽게 피곤해졌고, 집중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옷차림은 더 심각했다.예전에는 하설이 잠들기 전에 늘 다음 날 입을 옷을 미리 골라 두었다.곱게 다려서 드레스룸 거울 옆에 걸어 두었고, 넥타이와 커프스, 양말, 시계, 벨트까지 전부 골라서 맞춰 놓았다.지금은 달랐다.이섭은 거의 눈 감고 손에 집히는 대로 걸쳤다.어떤 옷이 손에 잡히면 그냥 그걸 입었다.지금 이섭은 매사에 아주 미묘한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하설이 없어서 불편한 것을 들켜 버린 것 같았다.하설을 떼어 내는 건 이섭이 가장 바랐던 일이었다.그리고 틀림없이 가장 옳은 선택이기도 했다.겨우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 때문에 흔들릴 이유는 없었다.시간이 조금 지나면 익숙해질 것이다.생활도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하설이 하던 일쯤이야 누구든 금방 쉽게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결국 집안일해 주던 사람이었을 뿐이니까.하설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섭이 먼저 물었다.“어딜 봐?”하설이 잠깐 멈칫했다.“전남편을 그렇게 빤히 보는 취미라도 생겼어?”이섭이 한 걸음 더 몰아붙였다.“입으로는 안 사랑한다더니, 눈은 솔직하네.”하설은 곧바로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그냥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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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하설은 핸드폰을 세게 움켜쥐었다.“네, 알겠습니다.”하설이 낮게 대답했다.“이번 주 안에는 꼭 병원에 가겠습니다.”[네, 최대한 빨리 오셨으면 좋겠습니다.]통화가 끝나자 하설은 곧장 가방 안을 뒤졌다.이내 수술 동의서를 찾아냈다.하설은 조심스럽게 그 서류를 이혼합의서 사이에 끼워 넣었다.모서리 하나 틀어지지 않게 맞추고, 종이 끝도 반듯하게 정리했다.겉으로 봐도 티가 나지 않았고, 몇 번을 다시 넘겨봐도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자 그제야 손을 내렸다.‘내일... 내일 가져가서 사인만 받으면 돼.’이섭이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하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러니 이섭은 내용 따위 제대로 읽지도 않을 것이다.맨 뒤 서명란만 펴서, 무심하게 이름부터 적어 내릴 게 분명했다....밤.어둠이 내려앉았다.손힘찬이 알려 준 위치와 룸 번호를 따라, 하설은 어렵지 않게 한 고급 클럽에 도착했다.직원이 하설을 룸 앞까지 안내했다.“여기입니다, 손님.”“감사합니다.”북강시는 국내에서 가장 큰 경제도시였다.번쩍이는 불빛도, 돈 냄새도, 그 도시에선 낯설지 않았다.하설도 이곳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었다.하룻밤 최소 비용만 2억 원부터 시작하는 곳.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그 대단한 손힘찬도 비위를 맞춰야 하는 이들이라는 뜻이었다.이씨 가문을 위해서도,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도, 하설에게는 물러설 길이 없었다.하설은 문을 두드린 뒤 안으로 들어갔다.안에는 서넛쯤 되는 남자들이 먼저 자리하고 있었다.모두 손힘찬과 비슷한 또래였다.하설이 들어서자 다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모였다.“어이쿠, 오늘은 뉴 페이스네?”“생긴 건 꽤 얌전하게 빠졌는데.”“담당하는 애가 눈치 좀 생겼네. 맨날 티 나는 여자들만 들이밀더니 오늘은 좀 다르다.”“...”하설은 허리를 곧게 편 채 예의 바르게 웃었다.“오해하신 것 같아요. 저는 오늘 협업 관련해서 말씀드리러 온 직원입니다.”“그 얼굴로 일을 하겠다고?”“저 정도면 그냥 얼굴로 먹고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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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이섭은 문가에 꼿꼿이 서 있었다.빛과 그림자가 엇갈려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다만 이섭의 주위로 서늘한 기운이 짙게 감도는 것은 확실했다.룸 안은 순식간에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조용해졌다.승택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형, 여긴 어쩐 일이야?”이 자리에 있는 대표들도 뒤따라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한 명 한 명이 이미 부담스러운 인물인데, 지금 들어오는 사람은 그보다 더한 존재였다.이섭은 평소에도 만나려면 줄을 서서 약속을 미리 잡아야 했고, 그마저도 쉽게 얼굴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그런 이섭이 지금 이 문 앞에 서 있었다.서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저는 하설 씨와 계약할 생각입니다. 조 대표님께서 문제 삼으실 이유가 있습니까?”“있습니다.”“조 대표님 손이 생각보다 더 멀리 닿으시네요. 관여하시는 범위도 꽤 넓고요.”이섭은 턱을 아주 조금 들어 올렸다.목소리는 차갑고, 사람을 누르는 힘이 있었다.“그럼 한번 해 보세요. 이하설 씨랑 계약하는 거.”“해보겠습니다.”서형이 곧바로 답했다.서형은 하설 손에 들린 펜을 가져가 뚜껑을 열었다.지금이라도 바로 서명할 듯한 기세였다.그런데 하설이 더 빨랐다.하설은 손바닥으로 계약서 서명란을 눌렀다.“안 돼요.”하설은 서형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이섭이 나선 이상 이미 단순한 계약 문제가 아니었다.하설은 서형까지 끌어들여 피해주고 싶지 않았다.서형의 회사는 이제 막 성장하여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이섭의 견제와 압박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면, 앞으로 한 걸음 내딛는 일조차 쉽지 않을 수 있었다.서형도 하설을 바라봤다.“괜찮아.”바로 그때, 이섭의 목소리가 다시 떨어졌다.“이하설, 이리 와.”“형, 형.”승택이 두 사람 사이로 슬쩍 나서며 분위기를 풀어 보려 했다.“그게, 내가 보기엔...”“너도 꺼져.”승택은 코끝을 한 번 문지르더니 입을 다물었다.이섭은 조씨 가문의 현 가주이자, 모든 권한을 한 손에 쥔 사람이었다.승택이 감히 맞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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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수은의 목소리는 그날의 화재 이후 많이 망가졌었다.그날 이후로 수은의 음색은 거칠고 허스키해져서, 듣기에 편한 소리와는 거리가 멀어졌다.그런데 지금 들리는 목소리는 예전보다 훨씬 맑아져 있었다.해외에 머무는 동안, 이섭이 수은의 목 상태를 위해 적잖은 정성과 돈을 들였다는 걸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완전히 예전 같지는 않아도 분명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선배, 이 색이 더 예뻐? 아니면 이 디자인이 더 괜찮아?”“아, 어떡하지? 나는 둘 다 좋은데.”“선배가 골라 줘.”하설은 저런 식의 사랑스러운 응석을 흉내 낼 수 없었다.이섭 앞에서 하설은 늘 다정했고, 얌전했고, 알아서 배려할 줄 알았고, 단정했다.그런데 수은이 가진 저 생기만큼은 하설에게 없었다.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이섭의 시선이 머무는 사람은 언제나 수은이었다.이섭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렀다.“네가 하는 건 다 괜찮아.”하설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온기였다.이섭은 하설에게 늘 차갑게만 말했다.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이렇게까지 달랐다....하설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문득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그해, 이섭은 전교 1등, 북강시 전체 수석이라는 이름으로 울서대학교에 합격했다.학교 전체가 들썩일 만큼 큰 화제였다.수많은 후배들이 이섭을 동경했고, 목표로 삼았다.하설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어릴 적 정해진 혼약이 있었다고 해도 하설은 알고 있었다.자신이 이섭과 너무 멀어지면 안 된다는 걸.이섭은 너무 눈부신 사람이었다.그러니 하설도 평범한 자리에 머물 수는 없었다.그때 이섭이 말했다.“하설아, 울서대학교에서 기다릴게.”그 시절 이섭의 목소리에는 지금 수은에게 건네는 것과 비슷한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그 한마디는 하설이 고등학교 3년을 버티게 만든 힘이었다.하설은 죽어라 공부했다.걸어갈 때도 단어를 외웠고, 밥을 먹을 때도 문제를 떠올렸고, 잠들기 전까지 문제집을 붙잡았다.그렇게 악착같이 버틴 끝에, 하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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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이섭의 얼굴은 아무렇지도 않았다.표정에는 어떤 변화도 비치지 않았다.지금 이섭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하설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이섭의 재산 규모는 이미 외부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수천억 원대.종성그룹 지분만 해도 그의 자산 절반을 차지했다.나머지 절반은 개인 투자와 전 세계 곳곳에 보유한 부동산이었다.해외 여러 도시에 이섭 명의의 개인 저택도 있었다.상식적으로 따지면, 이섭의 법적 아내였던 하설은 그의 재산 절반까지는 아니더라도 수백억, 많게는 수천억 원을 요구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그런데 하설이 입에 올린 금액은 고작... 20억 원이었다.하설이 입을 열었다.“나는 현금이 필요해요. 20억 원은 내 계좌로 바로 입금해 주면 돼요. 차는 지금 내가 타고 다니는 BMW 미니, 그 차 가져갈게요.”결혼 5년 동안, 이섭이 하설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라고 할 만한 건 그 차 한 대뿐이었다.사실 선물이라고 하기도 애매했다.애초에 마음을 담아 건넨 물건은 아니었으니까.그날도 이섭이 롤스로이스에서 내렸고, 맞은편에 BMW 전시장이 있었다.박영순이 곁에서 무심하게 말했다.“네 차들은 전부 너무 무겁고 딱딱해. 하설이한테는 안 어울려. 요즘 여자애들은 미니 좋아한다더라. 작고 귀엽고 몰기도 편하대. 네가 하설이한테 하나 사 줘.”박영순이 한마디 하면, 이섭은 대개 거스르지 않았다.그 자리에서 이섭은 경준에게 카드 결제를 지시했고, 차 한 대가 바로 출고됐다.그 일 하나만으로도 하설은 오래도록 기뻐했다.그 차를 무척 아꼈다.그래서 이혼을 하게 된 지금, 조씨 가문 본가에서 하설이 가장 가지고 나오고 싶은 것도 결국 그 차였다.그게 하설이 요구한 전부였다. 조금도 과하지 않았다.오히려 체면도 제대로 서지 않는 수준이었다.이섭은 장운구 변호사가 숫자 ‘0’을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그런데도 하설은 분명히 20억 원이라고 말했다.“더 문제 있으세요?”이섭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하설이 먼저 물었다.“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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