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열 살에 부모를 잃은 이하설. 두 집안 할머니들의 약속으로 그녀는 어린 시절에 조이섭과의 혼인을 약속받았다. 열네 살의 이섭은 분명히 하설에게 약속했다. “이제부터 내가 널 지켜줄게.” 하지만... 먼저 약속한 것도 이섭이었고,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 것도 이섭이었다. 결혼 5년. 하설은 끝내 남편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그저 원래 차갑고 무정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의 다정함은 하설이 아닌 다른 한 사람에게만 향하고 있었다. 처절한 진실을 마주한 날, 하설은 손에 쥔 임신확인서를 내려놓고, 대신 이혼서류를 내밀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끝났다. 적어도 하설은 정말 끝났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혼 후, 이섭의 일상은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넥타이는 어디에 있는지, 충전기는 왜 늘 제자리에 없는지, 커피는 어째서 더 이상 예전 같은 맛이 나지 않는지... 동시에 모두가 이하설의 불행을 기다렸다. 버려진 아내의 초라한 결말을 기대했다. 그러나 하설은 무너지지 않았다. 화려하게 다시 일어섰다. 직장에 복귀한 그녀는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고, 국내 기록을 갈아치우며 가장 뜨거운 신예 화가로 떠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 몰래 숨죽인 구석에서 전남편 이섭이 하설을 붙잡고 낮고 절박한 목소리로 매달리는 모습이 목격됐다. “하설아, 내가 뭐가 싫은데? 말해. 다 고칠게.” 차갑게 그를 밀어낸 하설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아직도 날 좋아하는 게 싫어요!” 하설의 대답에 숨이 멎은 듯 굳어 있던 이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죽어도 못 고쳐.”
View More승택은 뜻밖이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형, 이렇게 큰일인데 형은 아무 얘기도 못 들었어?”이섭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그 사람이 뭘 하든 알아서 하게 두면 돼. 난 간섭 안 해.”이혼한 사실은 아직 조씨 가문에 알려져서는 안 됐다.괜히 말이 새어나가 박영순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곤란했다.지금 박영순 몸 상태로는 큰 충격을 버티기 어려웠다.이섭과 승택은 사촌이었지만, 사적으로 자주 어울리는 사이는 아니었다.오히려 승택은 서형과 더 가까웠다.둘이 따로 만나 어울리는 날도 많았다.“문제는...”승택이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서형이 계속 형수 일에 힘을 보탠다는 거야. 꽤 많이 도와주고 있어. 갤러리에도 자주 나타나고.”만년필을 쥐고 있던 이섭의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이섭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승택이 다시 입을 열었다.“형도 알잖아. 내가 서형이랑 친하니까 대충 사정을 좀 알아. 서형이 형수 갤러리에 이름 좀 실어 주려고, 유명한 화가들 섭외하느라 여기저기 인맥 다 쓰고 있어. 사람들한테 부탁도 엄청 하고. 이건 좀... 너무 마음을 쓰는 수준 같아서.”승택은 잠시 말을 골랐다.“근데 나도 참 애매해. 서형이는 내 친구고, 형수는 형 아내고. 내가 중간에 끼어 있으니까 뭐라 하기도 어렵고. 형, 바쁘지 않으면 형이 직접 좀 챙겨. 그래야 괜한 말 안 나와.”“둘은 같은 학교 출신이고, 선후배이기도 해.”이섭이 차분하게 말했다.“그 정도는 이상할 것도 없어. 네가 너무 앞서간 거야.”승택은 뒤통수를 긁적였다.“그래? 형, 혹시 형수랑 싸웠어?”“아니.”이섭은 단번에 잘라 말했다.“근데...”승택이 침을 한번 삼켰다.“부수은 씨도 귀국했잖아...”“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이섭이 승택의 말을 끊었다.“돌려 말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승택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아니야, 아니야. 됐어. 내가 괜한 소리 했네. 형, 난 먼저 갈게.”승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서둘러 회의실을
이홍도는 조카 남매에게 단 한 푼도 흘러가는 걸 바라지 않았다.그 돈은 결국 전부 딸 이청희에게 남겨 줄 생각이었다.하설은 하빈보다 훨씬 영악했다.여기저기 함정을 파 두면서도, 정작 자기 발 밑에는 빠져나갈 길을 꼭 남겨 두는 타입이었다.하설이 이씨 가문 본가를 나설 때, 얼굴의 미소는 한층 더 환해져 있었다.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이홍도는 거실 창가에 서서 하설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설마 자신이 반평생 넘게 세상 물정 다 겪은 늙은 여우가 되고도, 하설에게 한 방 먹을 줄은 몰랐다.이번에는 분명 이홍도가 방심했고, 하설을 얕봤다.그래도 괜찮았다.이건 아직 시작에 불과하니까.이제부터 지켜보면 된다.과연 젊은 물결이 앞 세대를 밀어낼지, 아니면 끝내 오래 묵은 생강이 더 맵다는 걸 보여 주게 될지.하설은 이홍도에게서 이른바 ‘투자금’을 받아내자마자 제일 먼저 전기차 한 대를 샀다.그것도 가장 저렴한 모델이었다.작고 짧은 차체에, 가격도 2천만 원 선에 불과한 경형 전기차.길에서는 흔히 ‘꼬마 전기차’라고 부르는 급이었다.차가 없으면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너무 좁았다.하설은 차를 몰고 다니며 전시를 열 공간을 알아보기 시작했다.마음에 드는 장소를 찾고, 건물주를 만나 임대료를 조율했다.인테리어 업체를 찾아가 디자인을 상의했고, 여기저기 인맥을 동원해 국내에서 가장 이름난 최정상급 화가들과도 접촉했다.하설은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다.오히려 온몸에 의욕이 넘쳤다.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큰 행복이었다.하설은 매일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왔다.바쁘게 움직이는 생활이 조금도 싫지 않았다....종성그룹.월요일 오전 9시.정례 임원 회의가 열리는 시간이었다.회의는 이섭이 직접 주재했다.임원들은 이미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다.찰칵-가벼운 소리와 함께 구두 굽이 바닥을 울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낮고 단정한 리듬이었다.빠르되 흐트러짐이 없었고, 힘이 실려 있었다.회의실 안
얼마 지나지 않아 이홍도는 표정을 추슬렀다.역시나 싶었다.하설은 아무 일도 없이 찾아올 아이가 아니었다.이홍도는 그걸 진작 알고 있었다.이 조카딸은 그 조카 놈보다 훨씬 낫다.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다만 아쉬운 건 여자라는 점이었고, 이미 혼약이 정해진 몸이라는 점이었다.결국 크게 물결을 일으킬 수는 없다고 이홍도는 판단했다.이홍도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뒤, 늘 쓰던 핑계를 다시 꺼냈다.“하설아, 너는 여자잖니. 회사 운영이 어디 쉬운 줄 아니? 게다가 밖에 나가 사람 만나고 술자리 끼고 접대하고, 그런 걸 네가 할 수 있겠어? 괜히 그런 고생할 필요 없다. 조 서방이나 잘 챙기고 사는 게 다른 것보다 낫지.”“여자면 어떤가요. 여자가 언제까지 남자한테 기대서만 살아야 해요?”하설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게다가 청희도 여자잖아요. 작은아버지한테는 외동딸 하나뿐인데, 나중에는 결국 작은아버지 자리도 이어받아야 하잖아요.”이홍도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이청희.대학은 외국에서 다녔고, 최근 막 졸업했다.머지않아 귀국할 터였다.청희가 돌아오기만 하면, 이홍도는 분명 본격적으로 청희를 키울 생각일 것이다.그렇게 되면 하빈이나 하설에게 돌아올 자리는 더더욱 없어질 게 뻔했다.이홍도는 태연한 척 대답했다.“에휴, 청희는 너처럼 팔자가 좋지 않아서 그래. 좋은 혼처 하나 든든하게 잡은 것도 아니고, 결국은 자기 힘으로 살아야 하니까. 청희가 조 대표님 같은 남자랑 결혼만 한다면, 내가 무슨 회사 일을 시키겠니.”“작은아버지 말도 틀린 건 아니지.”최영주가 하설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끼어들었다.“너는 몸부터 잘 챙기고, 아이 가질 준비나 잘해. 아이 낳는 게 제일 중요하다. 일이라는 건 이섭이 정도 되는 집안이면, 바깥은 그 사람이 맡고 너는 안을 챙기면 그걸로 충분해.”예전의 하설이라면 아마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그때는 정말 그렇게 믿었다.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너무 순진했다는 걸 하설은 뼈저리게 깨달았
햇빛 아래에 비춰 보니 금 간 자국은 더 선명했다.그래도 이만큼이라도 살린 게 어디냐 싶었다.불행 속에서 겨우 건진 다행이었다.하설은 값을 치르고 정중히 인사한 뒤, 이씨 가문 별장으로 돌아갔다.예상대로였다.평소에도 소파에 드러누워 햇볕이나 쬐던 하빈은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하설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바로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향한 곳은 이씨 가문 본가였다.본가 집사는 하설을 보자마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아... 아가씨께서 오셨네요, 하설 아가씨.”하설이 이곳에 오는 날은 명절이나 집안 행사가 있을 때뿐이었다.평소에는 문턱도 밟지 않는 곳이었다.하설과 작은아버지 이홍도네 식구 사이는, 겉으로만 웃고 지내는 전형적인 관계였다.속은 전혀 달랐다.최영주가 아직 살아 있는 이상, 이씨 가문 사람들 모두 적당히 연기하며 사는 것이 최선이었다.겉으로는 화목한 집안처럼 보이게.그래야 최영주의 마음도 덜 상할 테니까.이홍도는 세상을 떠난 형과 형수의 재산과 회사를 비롯한 모든 자산을 움켜쥐고 있었다.게다가 오랫동안 하빈과 하설이 다시 힘을 얻어 자리를 되찾을까 봐 경계해 왔다.앞에서든 뒤에서든 압박했다.하빈은 또 하빈대로 영 미덥지 않았다.하설은 사랑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던 시절을 보내고, 결혼해서 전업주부 노릇을 하느라, 거기에 여자라는 이유까지 겹쳐 회사 일에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그러니 이홍도는 지금껏 아주 편하게 살아온 셈이었다.“네.”하설은 고개를 끄덕였다.“할머니 집에 계세요?”“예, 계십니다. 사모님께서 점심잠에서 막 깨셔서 지금 차 들고 계십니다.”하설은 객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할머니.”하설이 달콤하게 불렀다.“저 왔어요.”최영주는 그 목소리를 듣고 반갑게 고개를 들었다.“우리 하설이 왔어? 어머, 진짜네. 너는 온다는 말도 없이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왔니?”“할머니 보고 싶어서 왔죠.”하설은 환하게 웃었다.맑고 밝은 웃음이었다.그 웃음만 보면, 하설이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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