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작전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일부 인원을 대한민국 서북, 서남, 동북 세 곳에 파견하겠어.”역천신이 천천히 계획을 밝혔다.“자원하는 사람이 있어?”역천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건장한 두 중년 남성이 앞으로 나섰다.“천신님, 저희 둘이 서북으로 가겠습니다.”이어서 세 명의 인물이 서남으로 향하겠다고 나섰다.그러나 동북으로 가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역천신은 손가락으로 두 명을 가리키며 말했다.“너희 둘이 가. 남은 사람들은 모레 나와 함께 크루즈를 타고 보해로 이동할 거야. 대한민국 국안부가 우리 존재로 벌벌 떨게 만들어야 해, 알겠어?”...진서준과 국안부 인원들은 멸용 조직이 이미 세 갈래로 병력을 나누어 파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그래서 그날 밤 진서준과 신용수 세 사람은 또다시 허탕을 치고 말았다.올림푸스 신전의 인물들이 밤새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오늘 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다려 보자. 만약 이번에도 오지 않는다면 난 보해로 떠나야겠어.”신용수는 보해 쪽 상황이 내심 걱정되었다.보해는 수도와 너무 가까워서 무슨 일이 생기면 큰 문제가 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신전 사람들이 오지 않으면 저 역시 여길 떠나겠습니다.”진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보탰다.진서준이 떠날 예정이라 하자 신용수가 물었다.“어디로 가려는 건가?”“보해로 갈 겁니다.”그 말에 신용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그곳은 별로 추천하지 않아...”멸용 조직이 공격을 감행할 때 보해는 최대의 전장이 될 것이다.그때가 되면 국안부의 호국장군이 전부 그곳에 집결할 것이고 팔급 이하의 대종사가 그곳에 가는 건 죽으러 가는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굳이 가겠다고 한다면 아무도 널 막을 수는 없을 거야.”신용수는 담담하게 웃으며 한마디 보탰다.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바이올렛은 중간에 차에서 내렸다.“옷을 좀 사러 갈게.”바이올렛은 차에서 내린 이유를 설명했다.어느새 바이올렛이 준비한 옷을 이미 다 입었기 때문이다.결
도시 외곽의 버려진 공장에 도착하자 차 문이 열리며 바이올렛이 밖으로 내동댕이쳤다.타닥, 타닥...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을 밟는 하이힐 소리가 바이올렛의 귀에 들려왔다.바이올렛은 목에 막혀있던 핏덩이를 뱉어낸 후,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사람을 바라봤다.그리고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순간, 바이올렛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너였구나.”눈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유연비였다.그리고 유연비 옆에는 바이올렛을 납치한 유씨 가문의 4대 금강이라고 불리는 대머리 괴한 네 명이 함께 서 있었다.최근 며칠간 유경풍은 유연비에게 틈만 나면 진서준을 처리하라고 다그쳐왔다.아무래도 유경풍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단, 신용수가 보는 앞에서만 아니면 된다는 조건이 있었다.마침 바이올렛이 혼자 나와 있는 걸 포착한 유연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걱정 마, 우린 널 다치게 하진 않을 거야. 단, 네가 좀 협조해 줘야 할 것 같아.”유연비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유연비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이런 미소를 지으면 분명 뭔가 나쁜 일이 벌어진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내가 뭘 하면 되는데?”유연비의 의도를 대충 짐작한 바이올렛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김평안을 불러, 네 목숨을 대가로 그놈 목숨을 받는 거야.”유연비는 바이올렛의 턱을 들어 올리며 조용히 웃었다.이처럼 잔혹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을 보니 유연비가 얼마나 음침하고 위험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바이올렛은 잠시 고민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김평안에게 전화는 해볼게. 하지만 김평안이 올지는 장담 못 해. 이유도 단순해, 난 김평안과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거든. 오히려 우리 사이엔 네가 생각지 못한 큰 갈등이 있어.”바이올렛은 진서준이 자기를 구하러 올 거라고 여기지 않았다.요즘 진서준은 해외 이족들의 자세한 침략 계획에 대해 많은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바이올렛이 죽건 말건, 진서준에게는
바이올렛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죽음을 조용히 기다리기 시작했다.당당한 용란 백작이 이런 곳에서 죽게 될 줄은 바이올렛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이곳에서 죽으면 자기 시신을 거둬줄 사람조차 없을 것이다.반 시간이 흘렀다.길 위엔 몇 대의 차만 지나갔을 뿐, 어느 차도 멈추지 않았다.유연비가 시간을 확인하며 말문을 열었다.“이제 더는 기다리지 못하겠어. 마지막 10분이야. 남길 말이라도 있어?”바이올렛은 천천히 눈을 뜨고 유연비를 바라보며 말했다.“네게 비밀을 하나 알려줄게.”“무슨 비밀?”“사실 저 사람 이름은 김평안이 아니야.”바이올렛이 신비로운 말투로 말했다.약간 피곤해 보이던 유연비는 순간 흥미를 보이며 질문을 퍼부었다.“무슨 뜻이야? 김평안이 아니라니? 그럼 그놈이 누군데?”“그 녀석은 김평안이라는 이름도 가짜 이름이고 지금의 얼굴 역시 진짜 모습이 아니야.”죽을 각오를 다 한 바이올렛은 모든 걸 털어놓기로 했다.“사실 그 녀석의 진짜 이름은 진서준이야. 20대 초반의 청년이지.”진서준이라니, 유연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자기 귀를 의심했다.“그놈 이름이 진서준이라고?”“그래, 혹시 그 녀석을 알아?”유연비의 반응이 이렇게 큰 것을 보자 바이올렛도 조금 놀랐다.“알지, 당연히 잘 알지!”유연비는 미친 듯이 웃었다.“정말 어딜 찾아도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돌아서면 뒤에 있다고 하더니,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어. 김평안 그놈 건방진 모습이 진서준이랑 똑같다 했더니만, 역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네. 이제 안성에 발을 들인 이상, 그놈은 살아서 나가긴 글렀어.”바이올렛 역시 미소를 지었다.“진서준, 네 원수가 내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많구나.”“저 여자 당장 죽여. 그리고 이 소식을 얼른 아빠한테 전해.”유연비는 가볍게 웃으며 4대 금강에 지시했다.대머리 금강이 바이올렛 앞으로 걸어오더니 그녀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쉭...그 순간, 뒤쪽에서 날카로운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유연비는 진서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진서준에게 있어 가족의 목숨은 그 무엇보다 소중했다.유연비는 진서준의 여동생 진서라의 목숨을 쥐고 있었기에 진서준이 자기를 해칠 엄두도 내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하지만 구지범이 이미 진서준을 만났고 진서준 또한 구지범이 자기와 같은 스승을 모셨다는 사실을 안다는 건 유연비가 알 수 없었다.진서라를 구할 방법을 진서준은 이미 완전히 터득했다.아홉 가지 약재 중 현재 세 가지를 모았고 이제 여섯 가지만 더 모으면 진서라의 체내 독은 완전히 제거될 수 있다.“저놈 당장 죽여! 절대 살려두지 마!”피바다에 쓰러져 있는 유연비는 분노에 차서 외쳤다.유연비의 날카로운 두 눈은 핏물에 젖은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유연비의 명령을 듣자 4대 금강이 진서준을 포위해 도망갈 길을 차단했다.육급 절정의 횡련 종사를 한꺼번에 상대하게 된 진서준은 긴장한 눈빛을 보였다.이 네 사람은 이전에 진서준이 임해에서 마주했던 해외 이족들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했다.이 금강들을 쓰러뜨리는 건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려울 것이다.“진서준, 왜 날 구하러 온 거야?”바이올렛은 진서준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바이올렛은 진서준이 자기를 구하러 올 리 없다고 생각했다.지금의 바이올렛은 진서준에게 큰 도움도 되지 않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포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진서준은 4대 금강을 힐끗 쳐다본 후 바이올렛에게 시선을 돌렸다.“개를 패더라도 주인을 봐야 하지 않겠어? 하물며 지금 넌 내 하인이잖아.”진서준의 말에 바이올렛은 기가 차면서도 웃음이 나왔다.고작 이런 허무맹랑한 이유로 자기를 구하러 왔다니 기막힐 노릇이었다.바이올렛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진서준을 보며 말했다.“진서준, 난 네가 정말 싫지만 오늘 네가 한 일을 보고 너에 대한 인상이 조금 달라지긴 했어.”“다들 뭐 해? 멍하니 서서 헛소리나 듣지 말고 얼른 움직여!”유연비는 4대 금강이 진서준과 바이올렛의 대화를 들으며 멍하니 서 있는 모습
“저 여자도 같이 죽여!”유연비는 바이올렛이 전장에 참여하자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유연비가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이 다른 금강이 이미 바이올렛을 향해 달려들었고 결국 금강 두 명이 바이올렛을 동시에 공격해 왔다.육급 절정 횡련 대종사 두 명의 공격에 맞서는 건 바이올렛에게 벅찬 일이었다.쿵쿵!귀청이 터질 듯한 굉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고 땅바닥에는 수많은 구덩이가 생겨났다.진서준은 유씨 가문 금강들과 계속 싸우며 지나치게 많은 영기를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오늘 밤에는 북오런 사람들과도 한 판 겨루어야 했다.만약 지금 힘을 너무 많이 소비하면 오늘 밤 전투는 더욱 힘들어질 터였다.진서준은 금강의 주먹을 빌려 몸을 뒤로 밀쳐내며 순식간에 백 미터가량 떨어졌다.“가자.”바로 이어진 진서준의 말이 바이올렛의 귀에 들렸다.바이올렛도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려 진서준과 함께 멀리 도망쳤다.“놈들을 절대 놓치지 마!”바닥에 쓰러져 있던 유연비는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쳤다.유연비는 체내의 피가 거의 다 빠져나가고 있는 데다, 진서준과 금강 네 명이 대량으로 발산하는 위압감에 시달려야 했다.유연비의 의지가 강하지 않았다면 이미 정신을 잃고 기절했을 것이다.진서준과 바이올렛은 실력으로는 4대 금강을 이길 수 없지만 속도를 따지고 볼 때 금강들을 절대적으로 압도했다.4대 금강은 30초 동안 두 사람을 쫓아가다가 결국 두 사람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더는 추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4대 금강은 돌아가서 유연비를 얼른 데리고 가 치료하기로 했다.“가자.”그러나 유연비를 데려가려던 순간, 멀리서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푸른빛을 띤 검기가 유연비를 향해 날아들었다.4대 금강은 검광을 보자 본능적으로 옆으로 피했다.푸슉!또다시 한쪽 팔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이제 유연비는 완전히 불구가 되었고 극심한 고통에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4대 금강은 표정이 굳어졌고 눈에는 분노의 기운이 어렸다.진서준이 그들 눈앞에서 유연비
나라를 지키는 호국장군을 문지기로 부려 먹는 사람은 아무래도 진서준이 유일할 것이다.진서준도 겸손하게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감사합니다, 진군님.”곧이어 진서준은 본인의 방으로 돌아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진서준의 손바닥 위에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단약 한 알이 자리하고 있었다.단약을 응시하는 진서준의 눈에 유유한 감정이 서렸다.이 단약은 진서준이 성약당의 영약으로 직접 만든 것이다.진서준은 보해로 떠나기 전에 전투를 통해 경지를 한 단계 올리려 했으나, 최근 잦은 싸움 덕에 그의 실력이 급속도로 상승했다.오늘 유씨 가문의 4대 금강과 맞서 싸운 일은 진서준의 실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주었다.지금이 바로 경지를 돌파하기에 최적의 순간이었다.단약을 삼키자 진서준의 단전 안에서 거대한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진서준은 즉시 장청결을 다루어 영기를 자신의 온몸으로 끌어들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진서준의 이마에는 콩알만 한 땀방울이 맺혔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온몸을 휘감았다.진서준은 이러한 대경지의 돌파는 신체와 정신 모두에 큰 시련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이 고통을 버텨내지 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피가 몸속에서 솟구치고 영기가 요동치고 있었고 푸른빛과 붉은빛이 진서준의 몸을 둘러싸며 빛나기 시작했다.방 밖에서 이 강력한 기운을 느낀 신용수는 미소를 지었다.“대한민국에 천재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구나. 아쉽게도 이토록 번창한 시대를 옛 부주님께서는 보지 못했지...”...유씨 가문.딸이 두 팔이 없는 폐인 상태로 돌아온 모습을 본 유경풍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무슨 일이야? 연비가 어떻게 이 지경이 된 거야?”유경풍은 순간 놀라움과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진서준이라는 자가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다.”금강 중 한 명이 대답했다.“뭐? 진서준이라고? 내가 죽이라고 한 사람은 진서준이 아니라 김평안이었어. 그런데 왜 갑자기 진서준이 튀어나온
오랜 침묵 끝에 신용수는 한마디를 내뱉었다.“김평안은 지금 경지를 돌파 중이니, 돌파가 끝난 후 다시 여기로 와.”과연 유경풍의 예상대로 진서준이 경지 돌파 중이었다.유경풍은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병든 김에 목숨까지 빼앗겠다는 각오로 진서준을 습격하려 했으나 문제는 바로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신용수였다.신용수를 무시하고 강제로 문을 박차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진군님,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딸이 처참하게 당한 모습을 보셨다면 진군님도 제 마음을 이해하실 겁니다. 제 자식들은 많지만 제게 효도하고 말 잘 듣는 건 연비뿐입니다. 연비의 아버지로서 딸의 원수를 갚아주지 못한다면 제가 무슨 면목으로 연비를 보겠습니까?”유경풍의 말에는 억울함과 당당함이 함께 담겨 있었다.신용수는 유경풍의 말을 듣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 미소가 정작 유경풍의 눈에 들어오자 가슴이 떨리는 걸 억제할 수 없었다.유경풍은 이 사람이 호국장군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경성의 4대 가문조차 감히 이런 말투로 호국장군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하물며 서북의 왕이라는 서경풍이 이런 태도로 호국장군을 대하다니, 사실 이건 너무 무모한 짓이었다.“나는 호국장군으로서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 조금 전에 나는 김평안의 수련을 돕기 위해 문지기를 서겠다고 약속했으니 김평안이 폐관 수련을 마칠 때까지 너희는 절대 들어갈 수 없어. 기다릴 수 없다면 뒤에 있는 네 명을 명령해 날 공격하라고 해. 다만, 그럴 경우 너희 유씨 가문이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어.”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신용수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서서히 뿜어져 나왔다.쿵!복도에 놓인 유리병이 그 거대한 기운의 충격을 받고 순식간에 산산조각 났다.그 유리 조각은 흩어지기도 전에 곧바로 가루로 부서져 사라졌다.유경풍의 옷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고 그의 뒤에 있던 4대 금강도 위협을 느끼며 불안해져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4대
서울시 금영사에서 헤어진 후, 진서준은 배수정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굳게 믿었다.하지만 반달 만에 두 사람은 이렇게 공교롭게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배수정도 진서준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진서준을 보자마자 배수정의 평온하던 얼굴에 순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그러나 그 놀라움도 한순간일 뿐, 이내 얼굴에서 사라졌다.배수정은 옆에 있던 붉은 가사 입은 스님에게 말을 건넨 뒤, 진서준을 향해 걸어왔다.“이렇게 빨리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배수정은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예전과는 달리, 진서준을 바라보는 배수정의 눈빛은 더욱 맑아졌고 눈 속에 깊이 배어 있던 감정의 흔적은 사라지고 대신 더 차분한 기운이 묻어났다.그 모습을 본 진서준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묘한 감정을 느꼈다.“그러게요.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네요.”진서준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런데... 소림에 가 있는 거 아니었나요?”“오늘 스승님을 따라 나온 거예요.”배수정은 아까 그 스님을 가리키며 대답했다.그때 스님은 현지의 돈 많고 명망 높은 인물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다들 스님에게 아부하는 듯한 공손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진서준은 심지어 그 스님에게서 은은히 느껴지는 거대한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배수정 씨 스승님이 보통 분이 아니네요...”진서준이 솔직하게 말했다.“스승님은 사원의 부사주예요. 대한민국 무도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오늘 서북으로 오신 거예요.”배수정은 차분히 설명했다.사람들은 흔히 평화롭고 번화한 시대에서 도를 볼 수 없고 난세에서 부처를 볼 수 없다고 하지만 대한민국 중부의 소림은 정반대였다.25년 전 대한민국 무도가 대재난을 겪었을 때, 열여덟 나한이 절반이나 쓰러졌다.지금 부주지께서 대한민국 무도를 위해 직접 나섰다는 사실만 봐도 소림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진서준은 배수정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배수정 씨는 이제 무인이 되었나요?”“아니요.”배수정은 살짝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