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운기는 기절하지는 않았지만 우도운보다 나을 것도 없었다. 두 다리는 부들부들 떨리며 말을 듣지 않았고 도망칠 용기도 없었다.진서준은 방금 박운기의 눈앞에서 대놓고 사람을 죽였다.평소 칼날 위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면 갑자기 누군가가 자기 앞에서 죽는 걸 목격하면 두려움에 떠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었다.서정훈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의 정신력은 박운기보다 훨씬 강했기에 두려움에 벌벌 떨 정도는 아니었다.“서준아, 너 그렇게 대놓고 그 사람을 죽이는 건... 좀 너무한 게 아니야?”진서준이 서울시 시장 앞에서 사람을 죽인 건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이었다.진서준은 서정훈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저 사람은 섬나라 사람입니다. 무단으로 우리나라에 침입했으니 제가 국안부 상경이라는 신분으로 사후 보고할 권리가 있습니다.”국안부 상경은 물론, 심지어 호국사도 오다 하유를 죽일 권리가 있었다.진서준이 본인 입으로 국안부 상경이라고 밝히는 순간, 서정훈의 눈은 휘둥그레졌다.“너, 너 국안부 사람이었어?”국안부는 시장처럼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들만 알 수 있는 기밀 사항이었다.서정훈은 국안부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신분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한낱 시장에 불과한 자기는 그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그런데 마침 자기가 잘 아는 후배가 국안부 고위 인물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맞아요.”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고 이내 박운기를 바라보았다.머릿속이 이미 엉망진창이 된 박운기는 진서준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하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제발 절 죽이지 말아 주세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 진짜예요!”진서준은 박운기의 반응에 헛웃음이 나왔다.“내가 묻기도 전에 네가 먼저 모른다고 딱 잡아뗀다고? 내가 뭘 물어볼지 알기라도 해?”이전에 최해준이 말했던 간첩을 잡겠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진서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추측이 떠올랐다.명주시 박씨 가문이 외국 세력과 결탁했을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 박운기의 협박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그럼 박씨 가문 사람들이 서울시로 올 때까지 기다려보자.”서정훈은 쌀쌀하게 한마디 한 후, 휴대폰을 꺼내 시청에 전화를 걸었다.잠시 후, 정장을 입은 일행이 호텔에 도착했고 서정훈이 명령을 내리자마자 바로 박운기를 체포했다.돌아오는 길에 서정훈은 진서준의 손을 잡고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서준아, 오늘 정말 고마워. 우리 아들 병을 치료해 줘서 우리 서씨 가문에 후손이 없을 가능성은 사라졌어. 게다가 지금은 또 이렇게 악당을 잡아줘서 서울시를 구해줬잖아. 진짜 이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서정훈를 보며 진서준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서 시장님, 그렇게까지 고마워하실 건 없어요. 저는 단지 우리나라와 고향을 위해 힘을 쓴 것뿐이에요.”“사실 나중에 네가 서울에서 머리 아픈 일이라도 생기면 내가 배후에서 널 후원할 생각이었어...”서정훈은 이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벌써 날 훌쩍 뛰어넘어 국안부 사람이 된 건 생각지도 못했구나... 정말 먼저 난 머리보다 후에 난 뿔이 무섭다는 말이 하나도 틀린 것 같지 않구나.”서정훈의 점심 식사 초대를 거절한 후, 진서준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드디어 돌아왔구나.”진서준이 나타나자 허사연은 즉시 일어나 반갑게 맞이하며 물었다.“다친 데는 없어?”“아무 일도 없어, 섬나라에서 온 벌레가 날 다치게 할 일은 없어.”진서준이 덤덤하게 말하자 허사연은 멈칫하며 물었다.“섬나라 사람이라고? 그 노인 말이야?”“응, 공교롭게도 전에 그 사람 형도 내가 죽였거든. 지금쯤 둘이 저승에서 재회했을 거야.”진서준이 웃으며 말하자 허사연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넌 뭐 스스로 좋은 일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응, 당연히 좋은 일이지.”진서준은 호텔에서 일어난 일을 천천히 털어놨고 다 듣고 난 허윤진은 주먹을 꽉 쥐며 이를 악물었다.“내가 그때 거기 있었으면 그놈에게 주먹 두 방 날렸을
명주시는 지난 세기 외국에 개방된 주요 도시 중 하나로, 바다와 가까운 위치 덕분에 발전 속도가 매우 빠른 도시였다.불과 30년도 채 되지 않아 명주시는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주목받는 도시로 성장했다.수많은 국내 기업 순위 500위 내의 대기업이 명주시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심지어 경성도 명주시 앞에서는 다소 뒤처지는 느낌이었다.허성태의 재산은 서울시에서 으뜸으로 손꼽혔지만 명주시에 오면 아예 언급할 가치도 없었다.명주시에는 허성태보다 더 부유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다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명주시 무도계 무인들도 실력이나 수량이 절대 경성에 뒤지지 않았다.그리고 가문들의 관계도 매우 복잡해서 경성처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지 않았다.얼핏 보기에는 박씨 가문과 황씨 가문이 명주시 명문대가의 정점에 서 있지만 사실 그 뒤에는 음모와 갈등이 얽혀 있어 수많은 가문이 이 두 가문을 넘어설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진서준은 국안부가 명주시의 질서와 사회 안정을 위해 특별히 구급 대종사를 파견해 이곳을 지키고 있다고 예전에 진서훈한테서 들은 적이 있었다.그 목적은 명주시 악당들의 폭동을 방지하고 해외의 강자들 공격을 막기 위해서였다.비행기는 공중에서 두 시간을 돌고 난 뒤, 명주시 북쪽 외곽 공항에 착륙했다.진서준은 비행기 창문을 통해 도시 외곽에 우뚝 솟은 고층 빌딩들을 주시했다.이 화려한 도시를 보며 진서준은 본인이 시골에서 막 도시로 온 촌뜨기 같은 느낌을 받았다.진서준이 이런 느낌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서울시와 명주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었다.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 홀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그중에는 형광봉을 든 연예인 팬들도 있었다.진서준은 혼자 군중 속을 걸어갔다. 진서준이 오가는 모습은 다른 사람들과 별 다를 바 없었지만 자세히 보면 진서준에게는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이 물씬 났다.이번에 명주시에 온 진서준은 인피면구를 쓰지 않고 자기 진짜 얼굴을 그대로 드러냈다.김평안이라는 가명은
“넌 물론 자제할 수 있겠지. 근데 우리는 여우 같은 여자가 널 유혹할까 봐 걱정인 거야.”서지은이 서둘러 해명했다.“어느 여우가 나 같은 한 푼도 없는 거지를 유혹하겠어?”진서준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요즘 여자들은 다들 현실적이거든. 특히 이런 대도시에서는 더욱 그래.”명주시에 와서 분투하는 사람들 대다수는 젊고 예쁜 여성이었다.아마 막 졸업한 여대생들은 남자들 외모에 관심이 많을 수 있지만 이 대도시에서 혹독한 반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나면 돈이 최고라는 생각이 그들 뇌리에 깊이 박힐 것이다.서지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의했다.“네 말도 일리가 있어.”서지은의 아버지는 서지은에게 회사를 하나 맡겼었고 그 회사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서지은은 돈에 목매어 딴 데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을 꽤 많이 봤었다.“어차피 여기 온 이상 나도 널 막무가내로 돌려보낼 순 없지.”진서준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서지은이 웃으며 답했다.“네가 날 쫓아내려고 해도 난 안 가.”“호텔은 예약했어?”진서준의 질문에 서지은이 뜻밖의 대답을 들려줬다.“아니야. 근데 우리 서씨 가문은 이전에 명주시에 별장을 하나 샀거든. 크지는 않지만 우리 둘이 살기엔 충분할 거야.”진서준은 그 말에 순간 움찔했다.역시 강남에서 가장 잘나가는 가문은 스케일이 달랐다. 자산이 많은 건 알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두 사람은 길가에서 택시를 잡았다.“명주 동호로 가 주세요.”택시 기사는 마흔 중반의 중년 남자였고 명주 지역 사투리로 물었다.“명주 동호요? 두 분은 잘사는 집 귀한 도련님과 아가씨인가 보군요.”택시 기사의 말에는 부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명주 동호의 별장이 명주 시내에서 가장 비싼 곳은 아니지만 가격이 결코 싸지 않았고 그 가격은 무려 최저 평당 1억 2천만 원이었다.인테리어 비용까지 포함해서 별장 한 채를 사려면 최소 100억은 들어가야 했다.물론 이건 이 구역에서 가장 낮은 가격이었고 보통 사람은 평생을 분투해도 화장실 하나 못 살 가격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 택시 기사와 진서준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택시는 벌써 명주시 동호 별장 구역 입구에 도착했다.여기는 고급 주택 단지라 택시가 들어갈 수는 없었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렸다. 서지은은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진서준의 팔을 다시 한번 꼭 끼며 두려운 표정으로 물었다.“서준아, 아까 그 택시 기사 말이 사실일까? 동호 안에 물괴가 정말 있을까?”일반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귀신이나 괴물 같은 것을 더 두려워하는 성향이 있었다.아까 택시 기사가 물괴가 있다고 하자 서지은은 본능적으로 이사를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 별장을 사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고 싶었던 것이다.진서준이 서지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면 아마 깜짝 놀랐을 것이다.고급 별장이란 사치품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대한민국 전체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너도 꽤 많은 일을 겪었잖아. 아직도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감이 잡히지 않아?” 진서준이 웃으며 되물었다.서지은은 그 말을 듣고 이내 금운 운대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순간 서지은은 섬뜩한 기운이 솟구치며 몸을 부르르 떨었고 진서준의 팔을 더욱 꽉 잡았다.이 순간 서지은은 진서준과 하나가 되어버리고 싶었다.서지은의 탱탱하고 풍만한 가슴이 진서준의 몸을 단단하게 누르자 진서준은 이내 몸에서 반응이 일어났다.“걱정 마, 물괴가 진짜 있다고 해도 내가 널 꼭 지켜줄게.”진서준은 다른 손으로 서지은의 어깨를 톡톡 치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그럼 밤에 잘 때는 어쩌지? 아까 택시 기사가 밤에 사건 사고가 더 자주 일어난다고 했잖아.”서지은은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진서준을 마주 보기 부끄러워했다.“서지은은 지금 말을 빙빙 에둘러 하며 명확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물괴에 대한 두려움도 진짜였고 진서준과 한방에서 밤을 보내고 싶은 마음도 진짜였다.서지은의 의도를 파악한 진서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괜찮아, 밤에도 널 지켜줄 수 있
보통 사람은 필요할 수 있지만 진서준은 손원순 풍수사의 굿이 필요하지 않았다.진서준은 오늘 밤 동호에 가서 그 호수 안에 전설속의 물괴가 있는지 확인할 계획이었다.“우리는 필요 없어요.”진서준은 다시 한번 보안 팀장의 말을 끊었다.진서준이 자기 말을 믿지 않자 보안 팀장은 한숨을 내쉬며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만, 나중에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기면 제가 미리 경고하지 않았다고 원망하지 마세요.”보안 팀장은 이 두 사람이 수백억짜리 별장도 통 크게 사면서 왜 돈을 조금만 들여 자기 생명을 보호하려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동호의 괴담은 명주시 상류층 사람들 대다수가 알고 있었다.심지어 외지 사람들도 이곳에서 별장을 살 때 이 괴담에 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손원순은 오래전에 이미 동호에 와서 자세히 살펴본 적이 있었다. 유심히 살펴보고 난 손원순은 이 호수 안에 살기가 강하게 응집되어 있고 원혼들이 자주 나타나서 온갖 잡귀신이 이 호수에서 자라기 쉽다고 말했다.양기가 약한 사람이라면 호수 주변에 왔다가 쉽게 피해를 볼 수 있다고도 했었다.이곳 업주들 대다수가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매일 거듭되는 악몽과 몽유병 같은 이상한 현상이 반복되자 손원순 풍수사에게 굿을 요청했다.보안 팀장의 말을 들은 진서준의 표정이 순간 차가워졌다.“혹시 지금 날 위협하는 건가요?”“아닙니다, 오해입니다.”보안 팀장은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그냥 선의의 귀띔을 한 것뿐입니다. 오늘 밤을 여기서 보내면서 뭔가 이상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괜찮고요, 뭔가 이상이 있으면 내일이라도 저한테 연락하세요. 제가 우리 회사 관리팀장에게 부탁해 손원순 풍수사를 연락할 수 있도록 할게요.”이 남자는 단지 보안 팀장일 뿐, 손원순 풍수사와 같은 최상층 유명 인사와 연락할 수단이 없었다.오직 별장 단지를 관리하는 회사 관리팀장만이 손원순 풍수사와 연락이 닿을 수 있었다.진서준도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서지
“이 자식들 정말 손이 많이 가네.”동호 별장 단지의 관리팀장 최승준이 한숨을 쉬며 중얼댔다.최승준의 이 일은 사실 괜찮은 보수를 받고 있어 매달 수입은 거의 2천만 원에 달했다.다른 별장 단지보다 훨씬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동호에서 귀신과 괴물이 떠돌고 있기 때문이었다.이곳에서 사람이 괴물 때문에 목숨을 잃었을 때 유가족들이 와서 크게 소란을 피우곤 했다.이곳 별장을 살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지위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다.그래서 매번 소란이 일어날 때마다 최승준은 머리가 아파 터질 지경이었다.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최승준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어서 그는 유가족들의 욕받이 역할이나 하고 억지로 웃으며 목숨을 잃은 업주의 별장을 대신 팔아주곤 했다.진서준과 서지은 같은 젊은 청년은 최승준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진서준이 어느 명문대가의 외동자식인데 여기서 재수 없게 죽게 된다면 유가족들이 찾아와 최승준을 때리고 욕하는 걸로 쉽게 끝날 일이 아니었다.진짜 세력이 어마어마한 가문이라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최승준도 목숨을 잃은 청년과 함께 생매장할 수도 있었다.그러니 보안 팀장의 전화를 받은 최승준이 이곳으로 급히 달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별장 단지 입구에 도착하자 보안 팀장이 최승준을 기다리고 있었다.“팀장님, 그 젊은 커플은 13번 별장에 있습니다.”“알았어요.”“근데 팀장님, 그 남자는 말이 잘 안 통하네요. 아까 제가 좋게 좋게 설득하니 이내 화를 버럭 내더라고요.”보안 팀장이 진서준에 대해 불평했다.보안 팀장은 분명 그 청년을 생각해 주는 차원에서 한 말이었지만 뜻밖에도 청년은 말을 듣기는커녕 보안 팀장에게 찬물을 끼얹어 버렸다.“요즘 청년은 본래 다들 다혈질이에요.”최승준은 이내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아참, 방금 그 두 사람과 말다툼한 건 아니죠?”“물론 싸우진 않았죠. 여기 사는 사람들과 제가 어떻게 감히 시비를 걸겠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인간관계를 잘 다루는 편인
하지만 뜻밖에도 진서준은 이미 이곳에 뭔가 이상한 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선생님, 전 선생님을 절대 속이지 않았다고 보장할 수 있습니다. 손원순 풍수사의 굿은 효과가 뚜렷합니다. 그 풍수사가 굿을 하고 나면 귀신이나 괴물 같은 불미스러운 것들은 절대로 선생님 앞에 나타나지 않으실 겁니다.”최승준은 마지막까지 설득하려고 애썼다.이 청년이 아직도 요청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아마도 손원순 풍수사의 실력을 믿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히지만 진서준은 여전히 고개를 흔들며 거절했다.“그런 사람이 와서 굿을 할 필요는 없어. 난 충분히 내 힘으로 이걸 처리할 수 있어.”“네? 선생님 스스로 해결한다고요?”최승준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진서준을 놀라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왜? 믿지 않아?”진서준은 빙그레 웃으며 되물었다.최승준은 불신이라는 두 글자를 얼굴에 적어 놓은 것만 같았다.아무래도 진서준은 일부러 허세를 부리며 최승준을 놀리는 것 같았다.손원순 풍수사는 거의 백 년 동안 굿을 연구해 왔던 터라 지금처럼 강력한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그런데 겨우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애송이 진서준은 감히 손원순 풍수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 리 없었다.“선생님, 존함이 어떻게 되세요?”최승준이 뒤늦게 진서준의 이름을 물었다.“진서준.”그 이름을 들은 최승준은 살짝 놀랐고 목소리도 한층 더 진지해졌다.“진 선생님, 저는 절대 농담하는 게 아닙니다...”“됐어, 알았으니까 얼른 가 봐.”진서준은 손을 내저으며 대화를 끊으려 했다.“내 말이 믿기지 않으면 오늘 밤 8시에 동호 호숫가로 와서 직접 확인해.”최승준은 그 말에 답답해 울분이 터질 것 같았다.이건 그냥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었다.굿을 하지 않았는데 감히 밤에 동호에 간다니,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좋아요, 진 선생님. 오늘 밤 동호에 꼭 가겠습니다.”설득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이 오늘 밤 손원순 대가를 직접 모셔야 할 것 같았다.최승준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