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은 이미 주해천을 잃었으니 주자청은 내일 4대 종문 대회에서 은청준이 또 죽는 걸 원하지 않았다.“이장로님, 걱정 마세요. 꼭 조심할 겁니다.”은청준이 다짐했다.그때 진서준이 질문을 던졌다.“신농 쪽 은범이 문제를 일으키려는 거야?”“어떻게 알았어?”은청준이 진서준을 바라보며 의아해했다.“신농에 있을 때 그놈이 네게 뭐라 했었어?”“그 녀석이 직접 말한 건 아니지만 누군가가 내게 말한 적이 있어.”진서준이 담담하게 말했다.은범이 신농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하나는 진서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은청준 때문이었다.은범은 자기가 은청준보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너 아는 게 참 많네.”은청준이 코웃음을 쳤다.“네 말이 맞아. 은범이 내게 시비를 걸긴 했지만 그놈이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똑똑히 알아.”은청준은 의외로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은범이 말한 예전의 은범으로 간주하지 말라는 경고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설령 은범에게 30년을 더 준다고 해도 은범이 자기를 넘을 수는 없다고 확신했다.은청준의 자신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요 몇 년 동안 은범만 실력이 올라간 게 아니라 은청준도 수련에 집중했기 때문이다.“그래도 신중하게 대하는 게 좋을 거야. 은범의 실력은 이제 너와 견줄 만해.” 진서준이 진지하게 경고했다.“헛소리 마! 우리 대선배를 어찌 신농 쪽 허접한 인간이랑 비교할 수 있어?”“맞아, 괜히 남의 기세 올려주면서 우리 대선배 깎아내리지 마!”“네가 못난 거지, 우리 청준 선배를 네 기준으로 평가하지 마!”진서준의 말에 제자들이 일제히 반발했다.“시끄러!”주자청이 얼굴을 굳히며 언성을 높였다.“김평안 씨가 은청준을 위해 충고해 주신 건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은범이 신농 시험을 통과했다는 건 그만한 재능이 있다는 뜻이야. 그러니 방심은 금물이야.”은청준은 주자청의 훈계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장로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진서준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유지수, 여긴 왜 온 거야?”“별일 없으면 널 찾으면 안 돼?”유지수가 입꼬리를 올리며 태연하게 되물었다.“난 네가 날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나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그 표정이 너무 재미있거든.”그 말을 듣자 진서준의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고 손가락 관절이 우두둑 소리를 냈다.이 여자는 진짜 한 대 제대로 쥐어박고 싶었다.“꺼져.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니야.”진서준이 싸늘하게 경고했다.“할 말만 하고 갈 거야.”유지수가 담담하게 대응했다.“할 말 있으면 빨리해. 헛소리 말고.”“너란 남자 참 거칠다니까.”유지수가 미소 지으며 본론을 꺼냈다.“내일 대회에서 괜히 무리하지 마. 내가 맡긴 세 가지 임무를 끝내기 전까지 넌 절대 죽으면 안 돼.”“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진서준이 코웃음 쳤다.진서라 체내의 독이 곧 제거될 텐데 지금 죽을 일은 없었다.게다가 아버지를 구해야 했고 무엇보다 이 여자를 제거할 기회도 찾아야 했다.“용전이랑 임배의 실력 만만치 않아. 이번에 오는 길에 장로님들이 직접 말씀하셨어. 반드시 전력을 다해서 승리하라고 말이야. 그러니까 괜히 정면으로 맞붙지 않는 게 좋을 거야.”유지수가 의미심장하게 충고했다.“할 말 다 했어?”진서준은 싸늘한 표정으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정말 정 없는 남자네. 우리 그래도 한때 꽤 오래 연인이었잖아?”유지수가 능청스럽게 옛일을 들춰냈다.“지난 일 꺼내지 마. 그땐 내가 눈이 멀어서 너 같은 걸 좋아한 거야.”진서준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그때 진서준은 이 여자를 위해 감옥에서 3년이란 시간을 허비했다.그런데 이 여자는 진서준이 감옥에 들어가자마자 자기를 감옥에 처넣은 그 악질 놈과 결혼했고 심지어 그 악당과 짜고 진서준 어머니까지 해치려고 했다.이 원한은 유지수가 살아 있는 한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진서준이 이 정도로 큰 악의를 보이는데도 유지수는 그저 담담하게 웃어넘겼다.3년 전의 일은 유지수가
“그 은청준, 들은 바로는 은씨 가문의 젊은 세대 중에서 무도 천부가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하더라. 작년에는 곤륜에서 특례로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했어.”“지금 1년 넘게 수련했으니 실력이 아마 전에 비해 몇 배는 강해졌을 거야.”“그 은범이라고 하는 사람이 신농에 들어갔다는 건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거겠지. 근데 내가 보기엔 은청준을 넘는 건 힘들 거야.”두 사람이 등장하자 구경꾼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대다수 사람은 은청준을 더 높게 평가했다.은청준은 곤륜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무도계에서 명성이 자자했다.지금은 곤륜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 수련을 했으니 실력이 급격히 성장했을 게 뻔했다.반면 은범은 아무런 유명세도 없었기에 자연히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은범이 링에 올라서자 두 사람 사이에는 강렬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신농도 점점 대중화되는 거 같네, 개나 소나 다 들어가는 걸 보니.”은청준이 먼저 싸늘하게 웃으며 도발했다.이 말이 나오자마자 신농 사람들의 분노가 폭발했다.은청준의 이 말은 신농을 모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의 실력을 깍아내리는 말이기도 했다.용전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은범에게 소리쳤다.“은범아, 저놈을 이기면 내가 돌아가서 네 공을 제대로 인정해 주마.”“용전 선배, 그렇게 번거로울 필요 없습니다. 제가 무조건 저 녀석을 이길 거니까요.”은범의 눈에는 전투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은청준, 넌 자만심에 빠져서 날 항상 무시했지. 내가 네 앞에 서 있는데도 넌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는구나. 내가 이번 4대 종문 대회에 참가한 목적은 단 하나, 바로 나 은범이 너와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주는 거야.”은청준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개미는 아무리 훈련해도 여전히 개미야. 기껏해야 실력이 좀 강한 개미일 뿐이지. 은범아, 난 다섯 번만 공격할 거야. 그걸로도 널 이기긴 충분해. 예전 집에서 했던 것처럼 말이지.”은청준의 입가에 비웃
이번 대회는 그들 4대 종문의 체면을 건 싸움이었다.은청준이 만약 진다면 곤륜의 체면이 바닥을 칠 것이다.게다가 곤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진서준 혼자서 이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지는 마지막까지 지켜봐야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다 다크호스가 될 수 있는 법이죠.”주자청의 말에 진서준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그저 링만 바라보았다.슥...은청준이 허리춤에서 보검을 뽑았다.반면에 은범은 두 손을 비운 채 은청준을 바라보았다.“네 무기는 어디 갔어?”은청준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예전 은씨 가문에서 은범은 종종 검을 사용했었다.“난 이제 그런 겉만 번지르르한 물건은 안 써.”은범이 냉랭하게 한마디 대꾸했다.그 이유는 진서준이 바로 검을 사용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은범은 진서준과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굴욕스러웠기에 다시는 검을 쓰지 않기로 했다.“겉만 번지르르하다고? 오늘 그 겉만 번지르르한 물건 아래서 패배할 거야.”은청준이 비웃으며 공격을 준비했다.“청준 선배가 전력을 다하려 해.”은청준이 검을 뽑자 곤륜 사람들은 전부 흥분하며 소리쳤다.“청준 선배 검술은 일반 검술이 아니야. 듣자 보니 곧 동북 검선과 맞붙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하던데?”“한 가지 확실한 건 이따가 무조건 눈이 즐거울 거야.”“청준 선배가 검을 뽑는 속도는 총알보다 두 배 빠르다더라.”곤륜에서 은청준이 검을 사용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왜냐하면 검술이 은청준 비장의 카드였기 때문이었다.지금 은청준은 4대 종문 대회에서 첫 출발부터 전력을 모두 쏟아내기로 했다.그래야 다른 사람들에게 기세로 압도할 수 있을 것이다.“지금부터 네가 우리 차이가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 알게 될 거야.”은청준이 한쪽 무릎을 살짝 구부린 뒤 갑자기 온몸이 튕겨 나갔다.슉!순식간에 은청준은 총알처럼 날아가 은범에게 돌진했다.은청준은 우렁찬 목소리로 포효하며 단숨에 필살기를 사용했다.그러자 검의 그림자가 여러 겹 겹
검만 빼 들면 사람을 다치게 한다더니, 최강의 필살기라더니, 다 헛소리였다는 말인가?공격 다섯 번만 들이댔는데 별다른 명성도 없는 사촌 동생에게 패했다고?”주자청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이번에는 곤륜이 정말 큰 망신을 당한 셈이었다.“은범아, 잘했어! 너 진짜 우리 신농의 자랑이야!”“멋졌어, 은범아! 누가 다시 우리 신농이 개나 소나 다 들어갈 수 있는 종문이라고 헛소리하면 방금 이 맞대결에서 은범이 보인 표현을 보라고 하면 되겠어.”“곤륜은 한물갔네. 개나 소나 다 들어가는 종문이야.”신농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뻐하며 환호했다.용전의 입꼬리도 자꾸만 올라갔고 진서준을 비롯한 신농 제자들에게 도발과 경멸이 섞인 시선을 보냈다.“은청준, 가슴속에 잘 기억해 둬. 난 더 이상 예전의 은범이 아니야. 또 날 무시했다가는 혼뜨검이 날 줄 알아!”은범은 무대 위에 서서 목 놓아 외쳤다.오랜 세월 동안 마음속에 쌓였던 분노가 조금 전 은청준이 날아가면서 완전히 풀려나갔다.20년이 넘는 치욕이 이제서야 복수로 풀린 것이다.“다들 얼른 청준 선배를 들어 오세요.”조슬기가 급히 말하자 곤륜 사람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바로 은청준을 옮기기 시작했다.은청준은 얼굴이 죽은 듯했다.신체적인 상처보다 은청준이 받아들일 수 없는 건 정신적인 상처였다.자기는 은씨 가문에서 실력이 가장 강한 청년이었는데 지금은 평소에도 모두에게 무시당했던 은범의 공격 다섯 번만으로 패배한 것이다.무도의 길이 막힌 것 같았다.은청준의 무인으로서의 앞길도 이제 완전히 끝장난 것과 같다는 의미였다.“푸흡!”그때, 은범이 갑자기 피를 왈칵 토해냈다.“은범아, 괜찮아?”신농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무대 위로 뛰어올랐다.“난 괜찮아, 방금 너무 힘을 줘서 반동을 받았을 뿐이야.”은범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방금 은범이 날린 주먹 세 방은 전력을 다해 날린 것이었다.은청준이 조금만 더 경각심을 높였더라면 누가 이기고 누가 질지 장담할 수 없
진서준이 확신에 찬 선언을 하는 걸 보면 이 시골 의사의 실력이 절대 약하지 않다는 걸 의미했다.어쩌면 진서준을 내보내면 정말 이길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이게 바로 그 김평안이야?”“그냥 일반 사람 같아 보이네?”“예전에 신농에 갔다던데, 어떻게 다시 나왔지?”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수군대기 시작했다.“김평안, 너 신농의 배신자잖아.”무대에 올라서자마자 신농 사람들은 진서준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욕을 퍼부었다.“신농에 들어간 후 몰래 도망치다니, 이런 뻔뻔한 사람은 처음 봤어.”“지금, 또 곤륜에 붙었어? 오늘 우리는 하늘의 뜻을 대신해 널 없애버릴 거야.”“유자성, 그놈을 죽이지는 말고 그대로 생포해 신농에 데려가서 장로님들께 처벌받게 해.”용전이 한마디 했다.신농 사람들의 분노를 보자 관중들은 전부 충격을 받았다.“전해지던 말이 진짜였네. 이 김평안은 진짜 신농에서 도망친 거였구나.”“도대체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한 거지? 대한민국 5000만 인구 중에서 신농에 들어갈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인데 이 녀석이 다시 도망쳐 나왔다고?”“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절대 이해할 수 없지. 그런 비정상적인 생각을 말이야.”무대 위에서 유자성은 진서준을 바라보며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김평안, 네가 무대에 나올 배짱이 있을 줄은 몰랐어. 오늘 난 신농의 형제들을 대신해 널 제압하고 신농 장로님들에게 끌고 가서 심판을 받게 할 거야.”“날 심판한다고?”진서준은 그 말이 우스웠다.“네가 걱정해야 할 건 네 목숨이야.”진서준은 유지수를 죽일 수 없지만 유자성은 죽일 수 있었다.“뭐, 너 날 죽일 망상이라도 하는 거야? 농담도 정도껏 해.”유자성의 표정은 경멸로 가득 찼다.“오늘 내가 신농에서 쌓은 수련을 제대로 보여주마. 신농이 왜 4대 최고 종문으로 불리는지 똑똑히 알게 될 거야.”찌지직!유자성의 근육이 갑자기 부풀어 오르며 옷을 찢어버렸다.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근육을 본 사람들은 소름이 끼쳤다.“대박, 신농 사람들 근육이 이 정
검을 손에 잡은 진서준이 발을 살짝 내디디자 제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그 뒤로, 무대 위에 진서준의 그림자가 여러 개 나타났다.링 아래의 사람들은 진서준이 여러 명 무대에 나타난 걸 보고 깜짝 놀랐다.이 그림자들은 실체감이 없긴 했지만 얼핏 보면 진짜 사람인 것 같아 진서준 본체를 도저히 구별할 수 없었다.유자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았고 가슴속에서 위기감이 솟구치기 시작했다.유자성은 손을 뻗어 그림자 하나하나를 향해 거세게 내리쳤다.내리친 후에야 유장은 그 그림자들이 전부 가짜였음을 깨달았다.“유자성, 네 뒤를 조심해!”용전이 갑자기 크게 외치며 귀띔했다.그 말을 들은 유자성이 즉시 뒤를 돌아보자 언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진서준이 그의 뒤에서 공격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진서준의 참선검은 유자성의 몸에서 불과 5c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푸슉!날카로운 검이 유자성의 어깨뼈를 관통하자 시뻘건 피가 쏟아지며 바닥을 적셨다.유자성은 이를 악물며 신음을 간신히 참고 손바닥으로 참선검을 내려쳤다.그러고는 힘의 반동력을 이용해 진서준과의 거리를 급히 벌렸다.“치사하긴 짝이 없구나. 나랑 정면으로 싸울 용기가 없어 이런 허튼짓을 해?”유자성은 피가 철철 흐른 어깨를 흘끗 보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자성은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충격을 억누를 수 없었다.유자성은 이미 삼급 횡련 대종사급의 실력이었기에 저격총조차 그의 피부를 뚫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진서준이 단 한 번 날린 검격에 당해 이런 꼴이 되었다.역시 세상에 보기 드문 검인지라 그 날카로움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유자성은 모든 공을 참선검에게 돌렸다.“이 검이 네 몸에 정통으로 닿았다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진서준은 담담한 말투로 슬슬 약을 올렸다.“개소리 집어치워. 정정당당하게 정면으로 싸우면 네가 감히 날 다칠 수 있기나 할 것 같아?”유자성이 굳은 얼굴로 호통쳤다.“이 김평안, 생각밖으로 좀
유자성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한 치 더 길면 실력도 그만큼 더 강하다는 소리, 들어본 적 있어?”진서준이 갑자기 검을 뽑아내 휘두르자 피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너... 너...”유자성이 진서준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분하고 원통한 기색이 역력했다.하지만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유자성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쓰러졌고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금세 바닥을 적셨다.“김평안! 너 감히 4대 종문 대회에서 검을 휘둘러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 누가 허락했어?”용전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진서준을 향해 분노의 고함을 질렀다.“눈멀었어? 방금 저놈이 날 죽이려고 날린 공격 못 봤어?”진서준이 되물었다.“저놈이 날 죽이려고 드는데 난 저놈을 죽이면 안 돼? 너희 신농이 본래 이렇게 거만한 놈들이었어?”용전은 화가 치밀어 올라 억지를 부렸다.“네가 무슨 신분인지 주제 파악이나 돼? 감히 우리 신농 제자와 비교하려고 들어? 넌 그저 하찮은 목숨이야. 죽어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불교 성지에서 사람을 죽인다고? 부처님이 벌하는 게 두렵지도 않아?”용전은 또다시 진서준에게 큰 죄목을 덮어씌우며 소림의 원한을 끌어들이려고 했다.그러자 승려 여러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용전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소림은 용전의 말대로 불교 성지가 맞았다.“난 불교를 믿지 않아. 근데 왜 두려워해야 하지?”진서준이 싸늘하게 대꾸했다.“평온 씨, 이 미친놈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세요.”용전은 배수정에게 화살을 돌렸다.“제가 당장 링에 올라 저놈을 생포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용전은 작년에 들어온 신입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번 대회에 참가할 자격이 없었다.그래서 이렇게 빙빙 에둘러 말하며 링에 올라갈 변명거리를 찾은 것이다.“이번 대회에서 살인을 금지한다고 규정한 적은 없어요.”배수정은이 차분하게 입을 열자 모든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이 평온 승려는 대놓고 김평안을 옹호하는 듯싶었다.“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