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 며칠째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길을 나설 수가 없습니다. 백 리 안에서는 이 객잔 하나밖에 찾지 못했습니다.”오백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고, 봉구안은 말의 고삐를 쥐고 뒤따랐다.눈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다른 손으로 얼굴을 가려도 소용없었다. 눈발이 매섭게 얼굴을 후려치고,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얼렸다.객잔에 들어서자마자 싸늘하게 식었던 몸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어서 오십시오! 차 한 잔 하시겠습니까? 끼니만 드실 건가요, 아니면 방을 잡으시겠습니까?”객잔 주인이 따뜻한 차를 들고 다가와 물었다.“방을 잡지. 두 개. 그리고 술 두 병에 소고기 네 근을 내오도록 하거라.”봉구안은 털썩 자리에 앉으며 머리카락에 묻은 눈을 털어냈다.“알겠습니다, 나리!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객잔 주인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이곳에는 봉구안 일행뿐만 아니라 몇몇 장사꾼들도 폭설에 발이 묶여 있었다.그들은 마차 가득 물건을 싣고 길을 떠나야 했기에, 봉구안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장사꾼들은 둥글게 둘러앉아 술을 마시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이 눈이 언제 멈출까? 이번 물건을 제때 배달하지 못하면 큰 손해를 보게 생겼어.”“그러게 말이야. 올겨울 교역이 활발해 한몫 잡으려 했는데, 이런 날씨라니. 하늘도 참 야속하군.”봉구안도 이 눈이 빨리 그치길 바랐다.서여국의 문제를 하루라도 빨리 소욱과 상의해야 했다.오백은 마구간으로 가서 직접 말에게 먹이를 주고 난 뒤, 본능적으로 뒤뜰을 한 바퀴 돌았다. 돌아와서는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마마, 저 장사꾼들이 가져온 짐에는 별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봉구안은 무심히 장사꾼들을 흘겨보고는 오백에게 말했다.“이만 너도 앉아서 쉬거라. 음식도 좀 먹고…”밖에서는 여전히 거센 눈보라가 창문을 때렸다.밤이 깊었지만, 봉구안은 마음이 복잡해 쉽게 잠들지 못했다.추운 날씨 때문인지 몸도 으슬으슬 떨렸다.그때, 문득 소욱의 모습이 떠올랐다.그가 자신의 차가운
약 거래.봉구안이 오랫동안 추적해 온 사건이었다.하지만 실마리조차 잡지 못한 채, 막다른 길에 부딪히고 있었다.그런데 이런 작은 객잔에서 뜻밖의 단서를 발견하게 될 줄이야.봉구안의 시선이 날카롭게 번뜩였다.장사꾼은 그들의 반응을 살폈다.이제야 상자 속의 물건이 무엇인지 알게 된 듯한 모습이었다.그럼 됐다.어떤 말은 해야 하고, 어떤 말은 삼켜야 하는지… 이제야 감이 잡혔다.“당신들, 대체 누구야! 약쟁이이라니, 무슨 헛소리야! 나는 표사야! 저건 내가 다른 도시에 옮겨 치료받게 할 환자일 뿐이라고!”“크읏!”갑자기 목이 조여왔다.숨이 턱 막히는 순간,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살기가 서린 차가운 눈빛.그 순간, 장사꾼은 확신했다.이 여인은 망설임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존재였다.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말이다.……밤이 길었다.동이 틀 무렵, 객잔 주인이 따뜻한 물을 들고 객잔의 각 방을 돌았다.그러다 한 방 앞에 섰을 때, 문이 열렸다.그런데 어제와는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문틈으로 보이는 차가운 입술.객잔 주인은 순간적으로 피비린내를 맡았다.착각인가?하지만 곧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이곳은 외진 곳에 있는 객잔. 별의별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었다.굳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객잔 주인은 재빨리 몸을 돌려 떠났다.방 안에는 두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그리고, 침대 위. 한 명의 장사꾼이 손발이 묶인 채 웅크리고 있었다.봉구안은 책상에 앉아, 피가 묻은 단도를 천천히 닦고 있었다.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새어드는 새벽빛. 하지만 그녀의 분위기는 여전히 어둡고 깊었다.장사꾼은 겁에 질려 눈을 질끈 감았다.입에 재갈이 물려 있어, 흐느끼는 듯한 소리만 새어 나왔다.오백은 침대 옆에 서서 검을 안은 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그의 발밑에는 나무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그 안에는 약쟁이가 들어있었다.위험한 존재였다.당장 풀어둘 수도 없었다.봉구안은
문이 열리자, 예상대로 소욱이 서 있었다.봉구안은 손에 쥐고 있던 단도를 내려놓고,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소욱 역시 단 한순간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마치, 조금이라도 눈을 돌리면 그녀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원래대로라면 그는 곧장 서여국으로 향해야 했다.하지만 은위로부터 그녀가 남제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주저 없이 이곳으로 발길을 돌렸다.다행히도, 눈보라가 그녀를 붙잡아 두었다.“부인…”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있었다.그래서 호칭을 바꿨지만, 담긴 감정만큼은 그대로였다.봉구안은 방 안에 외부인이 있는 만큼, 소욱을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그리고 오백에게 계속 감시를 맡긴 뒤, 객잔 주인에게 은화 한 덩이를 건넸다.주인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오늘 밤, 자신이 본 것도, 들은 것도… 그 무엇도 기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방 안으로 들어서고 문이 닫히자마자, 소욱이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그의 외투는 눈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축축한 모피 깃이 목덜미에 닿자 싸늘한 감촉이 전해졌다.봉구안은 그를 가볍게 밀어내고, 손수건을 꺼내 눈을 닦아주었다.“어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눈보라가 심한데, 몸은 괜찮으십니까?”소욱은 심한 눈 공포증을 앓고 있었다.그런데도 이 험한 날씨를 뚫고 직접 찾아오다니… 그녀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소욱이 그녀의 손목을 조용히 잡았다.그의 눈빛에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나는 괜찮다.”“그보다… 서여국의 일은 어떻게 된 것이냐? 너 정말…”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하지만 봉구안이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답이 되지 않을까.그녀가 선택한 것은 서여국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었다.그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소욱은 다시 한 번 그녀를 끌어안으며 낮게 속삭였다.“구안아, 너는 언제까지나 내 황후다.”봉구안은 그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음을 직감했다.“서여국의 이야기는 차근차근 말씀드리겠습니다
봉구안은 방금 들은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소욱이… 자신의 황부가 되겠다고?“지금 진심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예상치 못한 말에 그녀는 얼떨떨했다.그러나 소욱의 표정은 농담이 아니었다.“널 찾으러 오기 전에,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다.”“남제와 서여국은 결국 하나가 될 것이다.”“그렇다면, 나는 단지 너를 따라 처가에 몇 년 머무는 것뿐이지 않겠느냐.”“소주와 정국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나면…”“처가요?”봉구안은 어이가 없어 그의 말을 끊었다.“그걸 혼인 후 친정에 가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겁니까?”소욱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이쯤 되면, 황제가 바쁜 정무에 치여 현실 감각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그러나 소욱은 변함없이 단호했다.“내 말은 전부 진심이다. 결국, 네 선택은 두 가지뿐이다. 이제 결정하거라.”봉구안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듣자 하니, 폐하께서는 저를 몰아세워 선택을 강요하고 계시는군요.”“그리고 황부라니… 설마 제가 그걸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소욱은 곧장 미간을 좁혔다.“그럼, 네 계획은 무엇이냐?”“설마 서여국에서 다른 사내를 황부로 세울 생각인 것이냐?”같은 주제를 두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대화였다.봉구안은 이마를 짚으며 피곤한 기색을 드러냈다.“소욱… 아니 폐하 그만하세요.”그녀는 화가 나서 그의 이름을 그대로 불렀다.이미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데, 소욱이 터무니없는 논리로 몰아붙이니 더 이상 감정을 다스릴 힘조차 없었다.그러나 소욱은 그녀의 손을 단단히 잡으며, 진심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구안아, 너는 내게 미안해할 필요 없어.”“남제는 이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당분간 큰 위기는 없을 것이다.”“오히려, 서여국이 소주와 정국을 평정하고 남제와 연합하여 북연을 견제한다면, 우리는 더욱 강력한 동맹이 될 수 있다.”“그렇다면, 내가 너를 따라 서여국으로 가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너는 황제
소욱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신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남제가 북연과 다른 나라들을 정복할 수 있다면, 서여국만큼은 내가 지키도록 하마.”“하지만 내가 막는다고 해서, 후대 황제들이 이를 탐내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서여국이 남제와 대등할 만큼 강해지지 않는다면, 결국 남제에 종속될 수밖에 없겠지.”“십 년 내에 스스로 강해지지 않는다면, 서여국의 멸망은 시간문제일 것이다.”“그 원인이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비롯될 가능성이 크겠지.”그의 말은 완곡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분명한 경고였다.그녀를 사랑하는 한, 서여국을 위해 힘을 쏟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남제와 서여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는 서여국을 포기할 생각이었다.허나 오직 서여국이 강해져야만 남제의 야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소욱은 말을 마치고, 혹여나 그녀가 화를 낼까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가락에 깍지를 끼웠다.“구안아, 미안하다.”“내가 남제의 힘을 서여국을 위해 기꺼이 소모하겠다고는 약속할 수 없겠구나.”봉구안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알고 있습니다.”“애초에 제가 원한 것도 그런 약속은 아니었어요.”“다만, 저와 서여국의 관계를 떠나서 지금 남제와 서여국이 맞서 싸우는 것은 결코 현명한 선택이 아닙니다.”“첫째, 북연과 동산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저희는 협력해야 합니다.”“둘째, 서여국은 여성 중심 사회입니다. 남제가 정복한다 해도, 제대로 다스리긴 어려울 겁니다.”소욱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걱정 마라.”“지금 당장은 서여국을 공격할 생각이 없다.”“하지만 네가 서여국을 지키고 싶다면, 반드시 강한 나라로 만들도록 해라.”봉구안은 가볍게 웃었다.‘이게 바로 내가 아는 소욱이지.’그가 '황부' 운운하며 장난을 치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의 그는 본래의 날카로운 본능을 드러내고 있었다.……오랜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서로를 더욱 갈망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먼 길을 오셨는데, 배고프지 않
이틀 후, 거센 눈보라가 잦아들었다.소욱은 이미 조정의 업무를 마무리한 상태였고, 더 이상 궁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애를 태우느니 직접 동행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장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한편, 약쟁이 매매 사건의 관련자들은 모두 수도로 압송되었으며, 그들과 함께 발견된 약쟁이 또한 황성으로 보내졌다.봉구안과 소욱은 그 약쟁이를 직접 확인했다.얼굴이 심하게 손상된 그는, 허름한 천을 몸에 두른 채 골목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그의 눈동자는 흐릿했고,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마치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존재와도 같았다.그런 상태에서 그가 제대로 된 진술을 할 리 없었다.……장주까지는 최소 보름이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그러나 소욱은 그 시간을 단순한 여행으로 보내지 않았다.그는 곳곳을 돌며 백성들의 삶을 직접 살피고, 민정을 조사했다.과거, 여러 나라가 남제를 공격했을 당시 북쪽의 몇몇 성은 일부러 적을 유인하는 데 사용되었다.미리 피신한 백성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집과 터전을 버리고 떠나야만 했다.이에 반해, 북연 군대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자 분풀이하듯 마을을 불태웠다.지금 남제 조정에서는 백성들의 재정착과 피해 복구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소욱은 문서상의 보고만으로는 신뢰할 수 없었다.그의 예상은 정확했다.길을 가며 직접 확인해보니, 조정에서 할당한 복구 비용이 백성들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않았다.더욱이, 몇몇 관리들은 지주들과 결탁하여 땅을 빼앗고 있었다.전란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가난한 백성들을 더욱 착취하고 있던 것이다.풍양현.한밤중, 풍양현 관아에서는 불빛이 일렁였다.몇몇 관리들이 급히 장부를 불태우고 있었다.그들의 얼굴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손놀림에는 불안이 묻어났다.“황제는 서쪽으로 갔다더니, 왜 갑자기 북쪽으로 온 거야?!”“지금 그걸 따질 때냐? 빨리 태워!”“이게 들키면 우리 목이 남아나지 않을 거야!”쾅!그 순간, 문이 거칠게 열리며 찬바람이 방 안으로
장주.연말이 가까워지자, 백성들은 지나간 어려움을 딛고 하루하루를 더욱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고 있었다.거리마다 등불이 걸리고 집집마다 새해를 맞이할 준비로 활기가 넘쳤다.송가.송 대인이 황성에서 돌아오자, 봉장미는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버님, 황후마마의 병은 치료할 방법이 있나요?”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황후마마를 뵙지도 못했다.”순간 봉장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황후의 상태가 더욱 걱정되었지만 당장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그녀는 송려와 함께 약재를 정리하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으나 계속 신경이 쓰였다.그 모습을 눈치챈 송려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부인.”“황후마마께서는 폐하와 함께 직접 여러 지역을 순시 중이시니, 반드시 무사하실 것...”그러나 봉장미의 불안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마마뿐만이 아니에요. 어머니께서도 소식이 없어요.”“분명히 서신을 보내겠다고 하셨는데…”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걱정이 배어 있었다.송려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괜한 걱정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않소.”“장모님께서 가족과 함께 계시느라 잠시 잊으셨을 수도 있으니 말이오.”하지만 봉장미의 얼굴에서는 여전히 근심이 가시지 않았다.그때 급하게 뛰어 들어온 하인이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도련님, 도련님!!! 마님!”“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마님께서 어서 대청으로 오시라고 하십니다!”봉장미는 여전히 낯선 사람을 응대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특히, 송가의 친척들과 마주하는 것은 더욱 부담스러웠다.그녀는 송려의 소매를 잡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서방님, 저는 그냥 가지 않으면 안 될까요?”송려는 그녀의 모습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부인, 걱정하지 마시오.”하지만 하인이 급히 덧붙였다.“도련님, 마님 이번엔 꼭 가셔야 합니다!”“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오셨습니다!”“언니가 왔다고요?!”봉장미는 순간 두 눈을 크게 떴다.아
봉장미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자신이 서여국 황실의 혈통이라는 사실을 말이다.그녀는 머릿속을 정리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언니, 그러니까 서여국은 황실의 혈통이 있어야만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거지?”“황제 자리에 송가의 사람이 앉아 있어야 나라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미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봉장미는 다시금 고민하다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그럼, 어머니는?”“그저 송가의 혈통이 필요하다면, 어머니도 가능하지 않아?”“굳이 나를 선택한 이유가 따로 있는 거지?”그녀는 확신했다.언니가 자신을 황제로 삼으려는 이유가 단순히 혈통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고.봉구안은 잠시 침묵한 후, 부드럽게 말했다.“나는 네가 나를 대신하길 원해.”“첫째, 이모님의 유서에는 나에게 서여국을 맡긴다고 적혀 있어.”“둘째, 서여국의 여러 나라들이 경계하는 것은 바로 이 얼굴이니까.”그녀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봉장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눈빛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현재, 약쟁이 사건을 조사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녀는 서여국을 직접 다스릴 수 없는 입장이었다.그러나 봉장미가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하지만 봉장미는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고 얼굴을 손바닥에 부드럽게 문질렀다.그녀의 눈빛은 한없이 따뜻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언니… 정말 많이 힘들었겠어.”그녀는 오랫동안 가만히 봉구안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몰랐다.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말이다.하지만 단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언니가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결코 자신에게 이런 부탁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을 말이다.그녀는 천천히, 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또한, 그녀의 언니는 남제의 황후였다.남제의 황후인 그녀가 어찌 서여국에 가서 왕이 될 수 있겠는가?“갈게.”“언니, 나를 서여국으로 보내줘.”봉구안은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러자 봉장미는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나는 언니와 다르게 서방님과 함께 갈
"공자님,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다 됩니다!" 연상은 즐겁게 부산을 떨며, 자신의 이런 행동이 소탁에게는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곧, 음식들이 다 되었다. 연상은 미역국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기대에 찬 표정으로 소탁을 바라보았다. "소 공자님, 오래도록 장수하시길 기원합니다. 모용길처럼...""아, 이런! 제 입이 이렇게 험합니다. 모용길 같은 악인과 소 공자님은 전혀 다르시죠." 소탁은 국을 먹지 않고 연상에게 물었다."너는 행복하니?" 연상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저야 당연히 행복하죠. 나쁜 사람들이 인과응보로 벌을 받지 않았습니까.""게다가 오늘 의원께서 말씀하시길, 공자님의 눈이 점차 나아지고 있다고 하였어요.""전 공자님께서 곧 다시 빛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연상아, 너와 나는 이뤄질 수 없는 사이야."소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도 결국에는 이런 말까지 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연상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담담하게 웃었다. "공자님, 저도 알고 있어요. 공자님은 황실의 귀한 분이시고, 저는..." "네 신분 때문이 아니야. 연상아, 난 너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너에게 짐이 되고 싶진 않다."이 말을 듣자마자 연상의 눈에 갑자기 한 줄기 빛이 어렸다. "단지 절 걱정하시는 것 뿐이지, 절 싫어하시는 건 아니군요?" 소탁의 목이 갑자기 조여들었다. "나는..." 그의 일생은 큰 기복이 있었고, 혼자 살아가게 될 운명이었다. 한 번도 인연을 찾을 생각을 해본 적 없었고,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할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연상이란 아이는 그에게 있어 더 과분한 존재였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이 시간 동안 그녀가 곁에 있어 그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사실이었다. "난 너에게 남녀 간의 사랑을 품고 있지 않아. 설령 내가 여자를 찾는다 해도, 그건 아내지 시녀가 아니야." 연상은 그의 말을 듣고 눈이 크게 떠졌다. 시녀? 소탁은 선의로 그녀에게 일깨워주었다
완부옥은 예로부터 여자를 좋아했다. 남자를 대할 때조차도, 가볍게 희롱하거나 농을 던질 뿐이었다.그런 그녀 앞에 서왕이 호의를 드러내자,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게다가… 분명 그도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던가.서왕은 그녀의 반응이 예상보다 격해 당황하며 서둘러 설명했다.“우리는 비슷한 처지가 아니더냐? 같이 사는 건… 서로에게 나쁘지 않지 않느냐.”“네가 떠나면, 난 또 다른 이와 혼인해야 할 텐데… 너처럼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여인은 없을 것이다.”“또다시 나 자신을 숨기며 살아야 할 테니… 차라리 그냥 이렇게 지내는 게 낫지 않겠느냐?”그 말을 들은 완부옥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그 말씀이셨군요.”그가 정말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줄 알고 긴장했건만… 그게 아니라니 다행이었다.……한편 모용길의 죄행이 세상에 밝혀지자, 남제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백성들 또한 믿기 어려워했다.“그 자가 그렇게 오래 살았다고? 분명 불로장생의 술법이 있었던 게지. 폐하께서 그걸 두려워해 제거한 거야.”“약쟁이 사건도 정말 복잡하군. 처음엔 모용욱이 범인이라더니… 이번엔 왜 모용길이 나와? 설마 이번에도 헛다리 짚은 건 아니겠지?”“뭐가 어쨌든 간에 약쟁이는 전부 모용가 짓이란 말이잖아. 그런 집안은 몰아내야지!”분노한 백성들은 결국 모용가로 몰려가 돌과 썩은 달걀을 던지며 고함쳤다.“남제에서 당장 꺼져라!”“모용가 놈들은 천벌 받아야 마땅해! 죄 없는 사람들 고통받게 했잖아!”며칠째 모용가는 백성들의 소란에 시달려, 누구 하나 문밖을 나서지 못했다.……성 외곽의 한 촌락.낡은 농가 안, 여인이 낮은 목소리로 다급히 말했다.“들었어? 약쟁이 사건 피해자한텐 조정에서 보상금을 준다더라. 장순이네도 그랬잖아. 우리도 당장 관청 가자고, 장대복! 내 말 듣고 있는 거야?”장대복은 장순의 친삼촌이었다. 어린 조카를 생각하면 늘 미안함이 앞섰다.“형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그 모자 둘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당신도 알잖아.”
소욱은 미소를 지었다.“부창부수라 하지 않느냐. 함께 손잡고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황부도 결국 한 여자의 지아비이지 않겠느냐.”그 말을 들은 서왕은 한껏 조이던 가슴이 결국 힘없이 내려앉았다.그는 즉시 두 손을 모아 절하며 간언했다.“폐하, 그건 절대 안 됩니다!”“폐하께서는 일국의 군주이십니다. 어찌 여인의 그늘 아래 계시겠습니까?”“이 일이 만에 하나라도 세상에 알려진다면, 조롱과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평소 성정이 온화한 서왕이지만,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기면 은근히 고집이 세지는 성격이었다.소욱은 목소리를 날카롭게 높였다.“그래서 말이지.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서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폐하도 이게 창피한 줄은 아시는구나…’“황후 마마께서는 폐하께서 황부가 되겠다는 걸 허락하셨습니까?”소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황후가 왜 반대하겠느냐? 설마 다른 사내를 맞이해야한단 말이냐?”서왕은 잠시 헷갈려 그 말에 말려들 뻔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황후마마께서도 이 일이 폐하께 불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계신지 여쭈려는 것입니다.”소욱은 눈을 좁히며 말했다.“내 너를 형제로 생각하니까 이런 말도 하는 것이다.”“이미 내가 결정한 일이야. 누구도 바꿀 수 없어.”“너는 그저 국정을 맡아 잘 처리하거라. 내가 황후와 함께 돌아올 때까지 말이다.”그러자 서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하지만 폐하 신도 이번에는 휴가를 청하려 했습니다.”매번 국정을 떠맡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아무리 가까운 형제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지 않겠는가.‘이 나라는 분명 소씨 가문의 일국이지 않는가.’ ‘잠깐… 순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서왕은 방금 스쳐간 생각에 스스로 놀랐다.감히 황제에게 이런 불만을 품다니. 마음으로도 짜증을 내다니, 감히 내가?’소욱은 인내심을 다잡으며 물었다.“휴가를 내겠다고? 무슨 연유냐?”서왕은 몇 초간 머뭇거리다, 정색하며 대답했다.“왕비와 함께할 시간이 필요합니다.”소욱은
서왕의 심문이 시작되자, 손추의 수하였던 자객은 결국 모든 사실을 고백했다.“그… 그 일은 저희가 꾸민 일입니다.”“모용길이 왕가의 피를 원했고, 손추가 직접 그 일을 맡았습니다.”“하지만 그분은 왕이셨고, 무공도 출중하셨습니다. 손추는 선제를 이간질해 부친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결국 모반의 증거를 조작했습니다.”그 뒤의 이야기는 서왕도 이미 알고 있었다.그의 아버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조정에 충성을 다했다.군주의 명이 떨어지면, 신하는 죽는 수밖에 없었다.유배길에 올라서도 그의 아버지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그는 끝까지 선제가 자신의 결백을 밝혀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약쟁이단이 아버지의 목숨을 노릴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진실이 드러났을 때, 서왕은 마치 천근 무게의 짐을 내려놓은 듯 가슴이 후련해졌다.그러나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쓰라림으로 번져왔다.그가 정원으로 돌아오자, 멀리 나무 아래서 완부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서왕은 한 걸음에 달려가 그녀를 와락 안아 올렸다.“이번 일을 해결해줘서… 정말 고맙다!”“드디어 모두가 알게 되었어. 부친께서 얼마나 억울하게 누명을 썼는지…”“선제도 진범을 찾고자 했었지만, 결국 오늘에서야 제대로 밝혀졌어. 정말, 정말 고맙다…”서왕은 거듭 고마움을 표현했고, 완부옥은 조금은 지겨워하며 그를 말렸다.무엇보다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그녀를 직접 껴안을 줄은 몰랐다.조금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완부옥은 조용히 손을 들어 그의 등을 토닥였다.“됐습니다. 됐어요. 그렇게 큰일도 아닌걸요.”“정말 제게 보답하고 싶다면, 폐하께 소환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여쭤봐 주세요.”서왕은 그녀를 놓고,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아직도 포기 못 한 것이냐?!”완부옥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런 게 아닙니다.”“그저 소환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은 것뿐입니다.”“정인이 아니더
세상일이란 참 아이러니했다. 열무신은 한 발 늦게 도착했다. 그가 천옥에 도착했을 때, 모용길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모용길의 시신을 바라보며 열무신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고, 낮은 포효를 내뱉었다. 사람들은 착한 사람은 일찍 죽고 재앙은 천 년을 간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모용길 같은 자는 200살이 넘게 살다가 죽었는데, 맹성주 같은 이는 관례도 치르기 전에 죽임을 당했다. 이를 생각하니 열무신의 증오심이 하늘을 찔렀지만, 이 빚을 누구에게 갚아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너무 감정이 격해져서, 열무신은 천옥을 나서자마자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기절해버렸다.황궁. 봉구안은 임시로 자진궁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녀는 회임 중이었고, 점차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회임이 실감 났다.정말로 아이가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소욱이 정해준 태의는 매일 그녀에게 와서 맥을 짚었다. 최근 그녀의 태상은 안정되어, 더 이상 안태약을 마실 필요가 없고 그저 조용히 쉬기만 하면 되었다.아이의 일에 대해서, 봉구안은 걱정하지 않았다. 약쟁이 사건도 이미 해결되어, 그녀의 큰 근심을 덜어주었다. 현재 유일하게 장미에 대해서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장미의 옛 병이 재발할까 걱정되었다.그것이 만약 재발한다면, 그녀의 몸과 마음에 좋지 않을 터였다.봉구안이 이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황제가 도착했다. 소욱은 약쟁이 사건의 최신 진전을 가져왔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열무신이 붙잡은 그 사람들이 증명할 수 있다는구나. 이미 200년 전에 태조는 돌아가셨고, 부활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하엿다. 모든 것이 모용길의 환상이었던 거야.”“짐은 이 사건의 모든 세부 사항을 대중에게 공개할 생각이다. 모용길이 남긴 큰 돈은 모두 약쟁이 매매로 얻은 것이야. 짐은 이 돈을 피해자들과 그 친척들을 위로하는 데 쓸 것이다.”“이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그는 걱정이 가득했다.봉구안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이 조치는 백성
마지막으로 태조를 다시 보았을 때, 그는 이미 병석에 누워 숨이 끊어질 듯했다. [모용길... 내 아우야, 너는 내 마음을 알지. 짐에겐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이 많다. 새 정치를 세우지 못했고, 태자는 아직 어리지. 난 단지 하늘이 인색해서 짐에게 몇 년을 더 주지 않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단 일 년이라도 짐이 일 년만 더 산다 해도 좋을 텐데... 남쪽의 수해, 북쪽의 기근, 남제는 사방에서 적에 둘러싸여 있고, 북연은 우리를 업신여기며, 내부에는 반적이 있는데... 어찌할까, 염라대왕이 목숨을 거두어 가니, 짐은... 그저 손을 놓을 수밖에 없구나. 아우야, 나라의 일을 모두 네 손에 맡기노니, 너는 태자를 보필하라. 너는 그의 고모부이자, 또한 그의 상부이니. 아우야, 짐은 오직 너만 믿는다.]기억 속의 태조가 눈앞의 그와 겹쳐졌다. 모용길은 낮은 목소리로 흐느꼈다. 그의 눈에 태조의 뒷모습은 무척이나 수척했다."형님! 형님께서 원하던 것을 제가 마침내 이루어냈습니다! 형님께서는 불로장생할 것이고, 이 남제는 반드시 형님의 통치 아래 번영하며, 장차 천하를 통일하여 대업을 이룰 것입니다!"당초 남제가 새로 세워졌을 때 태조는 약속대로 그에게 강산의 절반을 주려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태조의 뜻이 천하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태조와 계속해서 사방을 정벌하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태조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어, 그는 마침내 모든 짐을 내려놓고 평안히 떠날 수 있게 되었다.모용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 바닥에 쓰러졌다. 눈물로 가득 찬 시선 속에서,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그를 데리러 온 것이다. 그는 팔을 뻗어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었다.여인은 몸을 숙여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대고, 그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대인, 남은 길은 제가 당신과 함께 걸을게요." 모용길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리 함께..."
열무신은 이번에도 큰 공을 세웠다.그가 아니었다면, 또 누군가 새로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그는 사로잡은 자객들을 직접 데리고 돌아와 천옥에 넘긴 뒤, 단 한숨도 쉬지 않고 곧장 심문에 들어갔다.자객들은 처음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하지만 모용길이 이미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의 희망도 이미 무너진 셈이었다.이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저희는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폐태자를 노린 건 그 분의 ‘혈’ 때문이었습니다.”그들은 태조 황제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불로장생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태조 황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백골이었습니다. 이백 년 전, 모용길이 시신을 도굴해갔을 때부터 이미 시체에 불과했습니다. 살려낼 수 있을 거라는 건, 망상이었어요!”“애초에 죽은 자였다고요!”그들이 그 이야기를 꺼낼 때, 말투에는 모용길을 조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이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쓸모없는 일에 목숨을 건 그를 그들은 미련한 바보로 여겼다.같이 심문을 진행하던 관리가 물었다.“너희는 어떻게 아는 것이냐?”“태조 황제께서 살아난 적이 없다는 걸 말이다.”“모용길이 그렇게까지 집착한 이유가 뭐였지?”자객들 중 한 명이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모용길이 약쟁이를 만든 건, 그들로 실험해 불로장생의 약을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약을 제조한 의원들은 손수 기록을 남겼고, 그 손책들엔 분명히 쓰여 있었죠. 이백 년 동안 그들이 상대한 건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시체’였다고요.”“아무리 약을 먹여도 살아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입니다.”다른 자객 하나는 공포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모용길은… 이미 오래전에 미쳐 있었습니다. 그는 자주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마치… 마치 그 자리에 태조 황제가 서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에요.”또 다른 자객이 덧붙였다.“그 자는 단지 태조 황제를 살리려 한 게 아닙니다. 자신도 불로장생 하고 싶었던 거에요.”“그리고 그게… 그 자는 정말로 성공했
태황태후는 직접 선조를 만나기 위해 천옥으로 향하려 했다.하지만 황제의 명이 내려져 있었다.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모용길을 접견할 수 없었다.하는 수 없이, 태황태후는 궁으로 전갈을 보냈다.하지만 설령 황제가 허락하더라도 모용길이 누구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그는 오직 태조는 아직 살릴 수 있다는 집념 하나에 사로잡혀 있었다.그런 그가 천옥에 갇힌 지금, 마음은 타들어가듯 초조했다.“그 어린 황제놈은 어딨느냐! 어서 나를 뵈러 오라 하지 못할까!”모용길에게 후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그는 생각했다.이 나라 남제는, 태조와 자신이 함께 세운 나라였다.그런 자신을 막고 있는 소욱 따위가 어찌 감히 군림한단 말인가.천옥에 갇힌 날부터,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소리쳤다.“태조를 살려야 한다! 어서 황제를 데려와라!”하지만 그는 몰랐다.그의 그 모든 고함과 분노는 소욱이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며 그를 흔들기 위한 계략이었단 사실을 말이다.그리고 다섯째 날.천옥의 간수가 냉정한 얼굴로 명을 전했다.“폐하의 어명이십니다.”“모든 죄를 자백하고 문서에 서명하지 않는 한, 이곳을 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죽을 때까지 말입니다.”모용길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허튼소리 마라! 그 어린놈이 과연 알기나 한단 말이냐, 내가 이 모든 짓을 왜 해왔는지를 말이다!”간수는 능청스럽게 웃었다.“나으리, 뭐가 그리 두렵습니까?”“자백했다고 당장 목을 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태조께서 하사하신 면사금패는 아직도 가지고 계시잖아요?”그 말에 모용길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그렇다.면사금패만 있으면, 그는 죽지 않는다.황제 따위가 그를 처형할 권한은 없었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태조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었다.결심이 선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종이와 붓을 가져오너라!”두 시진 후.모용길이 쓴 자백서가 궁으로 들여졌다.그 문서는 곧장 어전으로 올라갔다.문서를 넘겨받은 소욱은 한 장, 또 한 장 페이지를 넘길수
염 신의가 모용길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그의 몸은 웬만한 노인들보다 훨씬 건장했고, 외견상으로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폐하, 이 자가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실성, 즉 정신 착란 증세로 보입니다.”“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너희들이다!”모용길이 즉각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소욱을 향해 고함쳤다.“어서 저놈들을 다 내쫓아라! 나는 태조 폐하를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두 다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하지만 소욱은 모용길의 광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붙잡아 두거라. 절대 도망 못 치게 해야 한다.”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모용길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염 신의는 환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실성이란 곧, 마음의 병입니다.”“이 병은 뇌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죠.”“예컨대, 저희는 백골을 보지만 이 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이 자의 마음속 집착이 깊고, 오래도록 그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병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니, 소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의술이란 외상이나 내상은 다스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속 병, 특히 집착이라는 건 손쓸 수 없는 법이다.그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욱은 여전히 ‘태조를 살려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모용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다.그러나 유일하게 태조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충성과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저 자를 별실에 따로 가둬라. 아무도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명 받들겠습니다!”……자진궁.봉구안은 모용길이 실성 증세를 보였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가 본 그 백골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말인즉, 모용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단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