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꼭두각시 신부의 가면을 쓰고 북강에 들어간 희대의 책사 온보요가, 계산이 통하지 않는 유일한 남자 삭왕 진묵의 곁에서 옥좌를 갈아엎는 이야기. 사랑을 약점이라 부정하던 그녀가 계산을 버리는 순간, 그 사랑이 판의 마지막 수였음이 드러난다.
View More교지는 서리보다 먼저 왔다.
동트기 전, 온부(溫府)의 주칠 대문이 열리고 황명을 받든 내관의 행렬이 마당을 채웠다. 시비들이 떨리는 손으로 온보요에게 예복을 입혔다. 향안이 차려지고, 가문 전체가 마당에 엎드렸다. 늦가을 새벽의 돌바닥은 얼음장 같았다.
내관의 목소리는 높고 가늘었다. 문장은 길었으나 뜻은 한 줄이었다.
온가의 여식을 삭왕에게 시집보내라.
엎드린 등들이 일제히 굳는 것을, 보요는 이마를 조아린 채로 느꼈다. 누군가 숨을 삼켰다. 큰오라비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분노를 누르는 떨림이었다. 북강. 삭풍이 벼려지는 땅. 눈 하나 깜짝 않고 사람을 벤다는 전신의 왕부. 경성 사람들에게 그곳은 유배지보다 먼 곳이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평생 조정에서 다듬어진 평온이었다. 그러나 보요는 알았다. 그 평온 아래에서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를.
그녀는 배운 대로 절했다. 손끝의 각도, 숙이는 깊이, 일어서는 순서까지 흐트러짐 없이. 한 떨기 꽃잎처럼. 온가의 여식은 그렇게 존재해야 했으므로.
내관이 물러가자 온부는 초상집이 되었다. 곳간에서는 혼수가 꾸려지는데 우는 소리 하나 없이 조용한 것이, 오히려 곡소리보다 무거웠다. 둘째 오라비가 사랑채에서 언성을 높이다 아버지의 한마디에 끊기는 소리가 담을 넘어왔다. 보요는 수틀 앞에 앉아 있었다. 바늘은 한 땀도 나아가지 않았다.
해가 지고, 방어멈이 들어와 문을 닫았다. 늙은 유모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가 치맛자락으로 눈가를 눌렀다.
"따라가겠습니다, 아가씨. 이 늙은 몸이라도 데려가셔야지요."
"어멈이 없으면 나는 머리도 못 올리는걸."
보요가 웃자 방어멈은 끝내 소리 죽여 울었다. 그녀는 유모의 굽은 등을 오래 쓸어 주었다. 그 손길만은, 배운 것이 아니었다.
밤이 깊어서야 아버지가 건너왔다. 아버지는 오래 말이 없었다. 등잔 심지 타들어 가는 소리만 방을 채웠다.
"애비가," 마침내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못난 탓이다."
"아버님."
"황상께서는 삭왕을 묶을 끈이 필요하셨다. 하필 그 끈이 어찌······."
말이 끊겼다. 보요는 찻잔을 아버지 앞으로 밀었다. 김이 가늘게 올랐다.
"소녀는 괜찮습니다. 가문에 누가 되지 않도록 조신히 살겠습니다."
물기 없이 잘 다려진 대답이었다. 아버지가 눈을 감았다. 어려서부터 이 아이를 모질게 키웠다. 이런 날이 올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날이 오자,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자거라."
아버지는 그 말만 남기고 돌아갔다.
보요는 시비들을 물렸다.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졌다.
그녀는 경대 앞에 앉아 머리에서 장신구를 뽑았다. 보요(步搖). 걸을 때마다 흔들리며 잘게 소리를 내는 물건.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이것에서 딸의 이름을 따 왔다 했다.
흔들리되, 떨어지지는 말라고.
이름과 같은 것이 손안에서 비로소 조용해졌다.
창밖, 북쪽 하늘은 캄캄했다.
수도에서 북강으로 오르는 군량의 물길. 왕부로 이어지는 역로. 조정의 눈이 닿지 않는 눈 덮인 변경. 머릿속에 펼쳐 둔 지도 위로 그녀는 말 하나를 조용히 옮겨 놓았다. 스무 해를 갈아 온 첫 수였다.
거울 속의 여자가 웃고 있었다.
꽃잎처럼 여리게 웃는 법만 배운 입술이, 처음으로 다르게 휘었다.
"드디어."
내관이 장부를 펴자 소월백은 버들고리의 뚜껑을 반쯤 덮었다. 설란이 손을 넣어 등의 옆구리를 받쳤다."너무 누르면 꽃이 찢어집니다."그는 덮개를 들었다. 궁인이 마른 헝겊을 가져와 빈틈을 채우고 바깥에 끈을 둘렀다. 설란은 묶인 고리를 한 번 흔들어 본 뒤 의자 곁에 내려놓았다.서리가 읽는 물건 이름 사이에서 짐꾼이 손을 들었다."작은 상 두 개는 여기 것이 아닙니다. 부엌에서 가져왔습니다."내관이 장부 끝에 끼운 종이를 넘겼다. 어제 짐을 싸며 부엌에서 빌려 온 상 두 개가 적혀 있었다. 짐꾼은 문밖의 상을 들어 다리 안쪽에 그어진 먹선을 보였다."저 표가 있는 것은 왕부 것이라 했습니다."서리는 붓을 들었다가 부엌으로 갔다. 돌아올 때에는 찬모가 함께 왔다. 그녀는 상 밑을 손으로 쓸고 젖은 자국에 입술을 다물었다."여기서 물동이를 놓으셨지요. 다 말려서 주셔야 합니다."상 두 개는 수레에 오르지 않았다. 짐꾼들이 볕 드는 담 밑에 나란히 세웠다. 소월백은 돌려받은 날을 쓸 칸을 비워 두게 했다. 서리가 먹을 묻히던 붓을 옆에 내려놓았다.여물전 행수는 새로 주문받은 귀로 첫날치 여물을 가져왔다. 내관이 지난 납품값과 별도로 은전을 달아 놓았다. 말 먹이를 받은 마부가 주머니 하나를 열어 코를 댔다. 행수는 입을 떼려다 다물고 기다렸다."이것은 젖었습니다. 마른 것으로 바꿔 오시오."그는 다른 주머니를 풀지 않고 수레에 다시 실었다. 이미 일한 품꾼은 짐을 내린 수만큼 삯을 받아 돌아갔다. 행수는 혼자 밧줄을 당기다가 자기 일꾼에게 다음 삯을 먼저 불렀다.해가 낮아졌을 때 진묵은 곽문과 나누어 보던 종이를 덮었다. 문밖에서 보요가 겉옷을 팔에 걸치고 기다렸다."아직 남았어요?""내일 아침 다시 보면 된다."그는 손을 씻고 나왔다. 온이는 방어멈 곁에서 낮잠이 덜 깬 눈을 비비고 있었다. 보요가 아이에게 어디까지 다녀오는지 말하자 온이는 뒤뜰 쪽을 가리켰다."저기까지만?""한 바퀴 돌고 올게. 어멈이랑 병 먹고 있어."방어멈
앵무는 내려온 등의 고리를 받아 불부터 껐다. 아직 더운 자리가 손가락에 닿아 뒤집어 쥐었다."그릇은 몇 개가 남았어요?"국숫집 아들이 상 밑을 들여다보았다. 빈 사발 두 개와 숟가락 하나가 평상 뒤에 숨어 있었다. 앵무가 그것까지 씻은 뒤에야 주인은 광주리 뚜껑을 닫았다.연소가 닦아 둔 자리에는 국수 두 그릇이 놓였다. 한 그릇의 김이 먼저 잦아들었다. 앵무는 앉으며 제 신의 끈을 풀었다."먹지 그랬어요. 불었겠네.""젓가락을 다 걷어 갔잖아요. 씻어야 한다고.""말씀을 하시지. 여분이 있는데."그녀가 광주리 곁에서 새 젓가락을 가져오며 웃었다. 연소는 붙은 면을 풀었다. 앵무가 국물을 한 숟갈 보태자 이번에는 조금 쉽게 들렸다.앵아는 평상 끝을 잡은 품꾼에게 손을 저었다."그건 둘이 다 먹고 가져와요. 나는 문 열어 줘야 해.""오늘 돌아옵니까?""와야지. 내일 아침 손님 밥상이에요."그녀는 객점으로 뛰지 않고 갔다. 젖은 치맛자락이 발목에 감겼다. 기별전 문 앞에서 기다리던 손님이 잔소리를 시작하자 앵아는 먼저 걸쇠를 열고 안의 등부터 밝혔다.포목상은 제 창고 문을 열어 안쪽 삼베를 만졌다. 마른 것이 보이자 통로에 남은 짚을 가리켰다. 국숫집 아들과 약재상의 일꾼이 나누어 쓸었다. 차양에서 떨어지는 마지막 물은 길 바깥으로 흘렀다.연소가 국물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앵무는 빈 그릇을 가져다준 뒤 자기 자리를 닦았다. 둘은 마른 헝겊을 둘둘 말아 기둥 아래에 두고, 품꾼과 함께 평상을 기별전으로 돌렸다. 수선한 다리가 문턱에 걸리자 연소가 손바닥으로 방향을 짚어 주었다."살짝만 들어요. 다시 깨집니다."앵아가 안에서 문을 받쳤다. 평상을 내려놓은 뒤에야 그녀는 돈주머니에서 운반 삯을 꺼냈다. 연소는 차양 끈을 어깨에 메고 남은 품꾼을 따라갔다. 앵무도 그 뒤를 따라 집으로 향했다.왕부에서는 온이의 젖은 머리끝이 진묵의 손바닥 위에 놓였다. 보요는 마른 무명으로 물기를 눌렀다. 방어멈은 벌써 제 방으로 돌아갔고, 시비는
설란은 불빛 아래서 소매 속 종이를 펼쳤다. 작은 먹점이 찍힌 모서리가 땀에 구겨져 있었다."이제 가져가셔도 됩니다. 끈이 조금 길어요."등 장수가 등 위의 고리를 건넸다. 소월백이 받으려던 손을 멈췄다. 설란이 제 손목에 끈을 감는 동안 그는 옆 가게의 주전자를 피해 섰다."꽃이 없는 것이 더 밝지 않소?""이 꽃을 보려고 산 겁니다."그녀는 등을 눈높이까지 들어 보였다. 하얀 꽃잎 사이로 가느다란 풀줄기가 휘어 있었다. 월백이 고개를 가까이 대자 등 뒤에서 그의 눈썹 그림자가 길어졌다."방에도 이만한 것을 놓고 싶습니다. 침상 곁의 것은 너무 붉어요.""어느 방에 놓겠소?""제가 잠드는 방에요. 폐하께서 책 읽다가 늦게 오시는 그 방."월백이 웃다가 입을 다물었다."짐이 깨웠소?""문 열고도 한참 서 계시잖습니까. 그때 깨요. 들어오실 거면 들어오세요."그는 등 아래 늘어진 끈을 한 번 더 감아 주었다. 손목에서 손가락이 겹쳤다. 설란이 먼저 그 손을 잡았다. 호위 하나가 통로 건너편으로 옮겨 섰고, 내관은 사발을 나르는 일꾼이 지날 자리를 비켰다.보요와 진묵이 돌아왔을 때에는 병을 굽는 가게 앞에 손님 둘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도 뒤에 섰다. 보요의 소매 안쪽에서 아직 익힌 무 냄새가 났다.온이는 진묵이 먹여 준 마지막 숟가락까지 삼키고 부엌 시비에게 빈 사발을 내밀었다. 시비가 먼저 저녁을 먹고 돌아온 뒤에야 방어멈은 아이를 넘겨받았다. 어멈은 낮은 의자에 앉았고 시비는 곁에서 씻을 물을 식혔다. 상엄은 그들 뒤에 남지 않고 제 방으로 갔다."어멈께서는 씻길 때 일어나지 마세요. 머리 말리기 전에는 돌아올게요."보요의 말에 온이는 제 머리를 만졌다. 그리고 어머니보다 먼저 두 손을 흔들었다.장시의 줄이 움직였다. 진묵은 일영이 맞은편 기둥에 선 것을 보고 보요를 안쪽으로 들였다. 이영은 뒤따라온 호위와 자리를 바꾼 뒤 늦은 끼니를 받으러 갔다."춥나?""걷고 싶은데 자꾸 서게 되네요.""안 먹고 갈까.""아니요
"아래로 당기지 말고 기둥을 돌아요."연소가 소리치자 앵아는 끈을 든 채 반 바퀴 돌았다. 국숫집 아들이 뒤에서 차양을 받쳤다. 팽팽하던 천이 낮아지고, 고였던 빗물이 세 사람의 신 앞에 쏟아졌다."이쪽은 더 낮춰야 해요. 또 고입니다."앵아가 매듭을 늦췄다. 연소는 빗물이 통로 바깥으로 흐를 때까지 모서리를 잡고 있었다. 손을 놓은 뒤에도 천을 한 번 세게 눌렀다. 매듭이 움직이지 않자 젖은 앞머리를 쓸었다.앵무가 공시판의 덮개를 닫고 왔다. 팔 아래에는 글 쓰던 판 대신 마른 무명이 끼여 있었다."한쪽만 닦아도 돼요? 안쪽은 아직 젖었는데.""등 종이를 문지르지는 마. 거기 뚫려."그녀는 무명을 도로 접어 손을 닦았다. 앵아가 찌그러진 등 하나를 펴려 하자 등 장수가 가만히 받아 옆으로 뺐다."이것은 오늘 못 씁니다. 불 넣으면 아래가 떨어져요."아직 마른 등만 처마 안으로 걸었다. 젖은 것은 종이를 벗겨 따로 묶었다. 노인 곁에서 풀칠을 돕던 손녀가 대오리를 세다가 입을 내밀었다. 노인은 그 손에 새 종이를 쥐여 주지 않고 빈 바구니를 놓았다."오늘은 그만해. 이것 담고 먼저 먹어."손녀는 남은 풀 그릇부터 덮었다.국숫집 주인이 가져온 긴 상은 통로 반을 차지했다. 약재상의 낮은 상이 그 앞에 놓이자 손님 둘이 마주 지나갈 수 없었다. 마른 쑥단에 팔꿈치가 닿은 사내가 급히 돌아섰다."이 상을 뒤로 밀면 안 됩니까?""뒤는 문턱이오. 주인이 밟지 말랬소."앵무가 두 상 사이에 서 보았다. 약재상은 한숨을 쉬고 광주리를 상 밑으로 내렸다. 국숫집 주인은 그릇을 두 줄 놓던 것을 한 줄로 바꾸었다. 앵아의 평상도 기둥 쪽으로 바싹 붙었다."손님이 몇이나 앉겠어.""안 서 있으면 내 그릇을 못 가져갑니다. 우선 앉을 사람부터 들여요."주인은 아들에게 작은 쟁반을 건넸다. 아들은 첫 그릇을 들고 지나가며 약재상의 쑥단을 팔로 피했다. 이번에는 국물이 넘치지 않았다.처마 끝에 온 설란은 시비가 펴려던 자리를 보았다. 깔개가 놓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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