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경애가 장소월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아이고, 이렇게 좋은 집주인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거야.”은경애는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이곳에서 인삼 전복을 너무 많이 먹어 토하기까지 한 적이 있었다. 가족에게도 먹이고 싶어 가져가 보니 남편이 아주 좋아했다. 다른 사람들 몰래 가져가긴 했지만 장소월의 승낙을 받았었다. 그녀는 나쁜 일은 절대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은경애가 거실 조명을 끄고 깨끗이 씻은 딸기 한 접시를 위층으로 들고 갔다. 자신은 반쯤 시들어가는 것을 먹었고 싱싱한 건 모두 장소월의 방에 가져갔다. 장소월은 참으로 가엾은 아이이다. 사람의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큰 방에서 혼자 외롭게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편하긴 하겠지만 따뜻한 집 같은 느낌은 전혀 없었다.은경애는 방에 돌아온 뒤 무언가 생각났는지 급히 오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 번 걸어서야 전화가 연결되었다.“여보세요, 언니. 아가씨가 돌아오면 알려달라고 해서 전화했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아가씨는 잘 지내고 있어요. 언니는 언제 돌아와요? 너무 보고 싶어요.”“컥컥컥...”“왜 그렇게 기침하는 거예요? 어디 아파요? 이제 괜찮아요?”오 아주머니가 쇠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고질병이 도진 거지 뭐. 아가씨가 잘 지내면 됐어. 잘 보살펴줘. 부탁할게.”은경애가 말했다.“부탁이라니요. 언니가 소개해준 덕에 이렇게 좋은 일자리를 찾았는걸요. 제가 내일 병원에 언니를 보러 갈게요.”밤이 깊어지고 고요함이 내려앉았다.장소월은 화장실에서 나와 처음으로 받은 트로피를 장식장에 올려두었다.돌연 머릿속에 강영수가 그녀에게 준 문제집에 써주었던 글귀가 떠올랐다.이제... 그녀는 성공에 한 발자국 다가선 것 같았다.그녀는 강영수의 선택을 원망하지 않았다. 강영수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김남주를 포기하지 못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필경 그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니 말이다.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과거는 있는 법이다.또한 그녀는
깊은 밤 내리는 비는 뼈를 꿰뚫기라도 할 듯 날카롭고 차가웠다. 장소월은 가디건을 걸치고 문을 나섰고 은경애는 불을 켰다.남자는 어둠 속에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걷고 있었다. 장소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빗속으로 뛰쳐나갔고 은경애는 급히 현관에 꽂아두었던 우산을 펴고 따라 나갔다.장소월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너 어떻게 된 거야? 왜 이 시간에 집에 가지 않고 여기에 있는 거야? 비가 이렇게 오는데 우산은 왜 또 안 썼어? 진봉 비서님은?”초라한 그의 모습에 장소월은 심장이 저려왔다. 누군가 목을 조르기라도 한 듯 답답함까지 몸을 옥죄었다.강영수는 장소월의 몸에 쓰러져버렸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모아 그녀를 꽉 껴안았다. 검은 머리를 적시고 있던 차가운 물방울이 장소월의 하얀 목에 또르륵 떨어졌다. 그녀가 몸을 뒤로 기울이고는 강영수의 등을 두드렸다.“강영수.”은경애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아이고. 정신을 잃었어요.”장소월은 곧바로 그를 부축해 거실 소파에 앉혔다.“아주머니, 뜨거운 물을 가져오세요. 그리고 전연우의 방에서 깨끗한 옷도 가져다주세요.”“아, 네네네...”장소월의 옷도 반이 넘게 젖어있었다. 그녀가 가디건을 벗어보니 군데군데 붉은 핏자국들로 얼룩져있었다. 순간 그녀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대체 왜 이렇게 다쳤단 말인가?그의 정장을 벗겨보니 목에 새겨져 있던 문신이... 전부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많은 흉터가 남아있었고 어떤 곳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그녀는 강영수가 더 위험해질까 봐 두려워 고민 없이 곧바로 그의 셔츠를 벗겼다. 이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녀는 너무 놀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평온했던 마음에 집채만 한 파도가 일렁이는 순간이었다.그의 상반신은 멀쩡한 곳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목부터 손가락까지, 불에 덴 것 같은 자국이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그에게... 대체 무슨 일
강영수는 김남주를 놓지 못했다. 마치 전생에서 백윤서가 죽은 뒤 전연우가 그녀를 놓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장소월은 강영수가 완전히 김남주에게로 돌아간 줄로 알았다. 하지만 왜 이 밤에 그녀를 찾아왔단 말인가?강영수 역시 전연우처럼 마음을 읽기가 어려운 사람이다.그녀는 지금 19살밖에 되지 않은 앳된 소녀였지만, 마음은 두 번의 인생을 살아온 사람만큼이나 깊었다.새벽 4시 26분.불이 켜져 있지 않은 어두운 서재에서 전연우가 차디찬 눈빛으로 CCTV 속 화면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남자의 눈동자 속엔 한 마리의 독사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서재 분위기는 얼음장같이 차갑게 얼어붙었다.그가 분노를 못 이겨 옆에 놓아두었던 컵을 문으로 내던졌다. 커피가 회색 벽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고 바닥은 깨진 유리 조각으로 뒤덮였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무시무시한 우렛소리, 끊임없이 창문을 두드리는 시끄러운 빗소리, 그리고 밤하늘을 가르며 번쩍거리는 번개까지...이 모든 것이 남자의 소름 끼치는 표정에 더해지니 실로 공포스러웠다.무언가 깨지는 소리에 잠이 깬 백윤서가 다급히 서재로 달려왔다.“오빠!”컴퓨터 화면 불빛에 비친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백윤서는 깜짝 놀랐다.“오빠, 왜 그래요? 아까...”“나가!”전연우가 이를 꽉 깨물고 소리쳤다.백윤서는 걱정되는 마음에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섰다.“난 그냥 오빠가 걱정돼서...”“내 말 못 알아들어? 다시 한번 말할게. 내 허락을 받기 전엔 서재에 들어오지 마.”백윤서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알... 알겠어요.”억울함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녀는 자신의 상한 기분을 분출하기라도 하는 듯 방을 나서고는 쾅 하고 서재 문을 닫았다.그때 책상 위 핸드폰이 진동했다.번호를 확인한 전연우는 창가로 걸어갔다. 한 손으로 핸드폰을 잡고 다른 한 손은 호주머니에 넣은 채 조용히 상대의 말을 기다렸다.핸드폰 너머로 여자의 미치광이 같은 울부짖음이 들려왔다.“강영수가 돌아갔어요. 분
김남주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아직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백윤서는 문밖에서 전연우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충격 때문에 온몸에 힘이 빠져버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공포에 사로잡혀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조금의 소리도 내지 못하는 그 모습은 무시무시한 비밀이라도 알게 된 것 같았다.백윤서는 자신의 오빠가 이토록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가 사람을 죽인다고? 왜 그녀의 목숨을 요구한단 말인가?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백윤서의 기억 속의 전연우는 그녀가 거의 굶어 죽어갈 때 밥 한 끼를 가져다주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무릎을 꿇어 애원한 사람이다.버려진 동물을 불쌍히 여겨 항상 집으로 데려와 보살핀 사람이고, 장씨 집안에 입양된 뒤엔 매해 보육원에 기부해 아이들에게 교과서를 나누어준 사람이다. 그는 절대 그런 나쁜 일은 하지 못한다.백윤서는 자신이 어떻게 방으로 돌아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침대에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있은 뒤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남자는 전화를 끊은 뒤 다시 책상 위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장소월이 강영수의 상처를 모두 치료하고 나자 날이 밝아왔다. 밤새 소나기가 내리고 바람이 기승을 부렸으니 바닥엔 떨어진 낙엽이 어지럽게 뒹굴고 있었다.은경애가 다가와 말했다.“아가씨도 좀 쉬세요. 밤새 한숨도 주무시지 못했잖아요. 이제 핸드폰 신호도 회복됐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전화했어요. 곧 도착할 거예요.”자리에서 일어서니 몸이 휘청거렸다. 다행히 은경애가 빠르게 움직여 장소월을 잡아주었다.“열이 내렸으니 다른 건 별로 문제 될 게 없어요. 깨어나면 전 나갔다고 전해주세요.”“네. 알겠어요.”은경애가 말을 이어갔다.“아침 식사를 준비했어요. 아가씨, 조금이라도 드세요. 거르면 위가 상해요.”“영수가 가면 아주머니도 집에 돌아가 며칠 쉬세요. 오랫동안 돌아가지 못했잖아요.”장소월은 말을 마친 뒤 방을 나섰다.그녀가 그리 말한다고 해도 정말 그녀에 관여하지 않을 은경애가 아니었다
얼마나 잤을까, 장소월은 돌연 코를 찌르는 술 냄새에 잠이 깼다. 몽롱함 속에서 그녀는 무언가에 강하게 짓눌려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고, 목에선 차가운 촉감이 느껴졌다.그녀가 괴로움에 신음소리를 내뱉으려 한 순간, 폭풍 같은 키스 때문에 다시 목구멍 안으로 되돌아갔다. 남자의 한 손은 그녀의 치마 속을 헤집었고, 다른 한 손은 가슴 위 봉긋 솟아오른 새하얀 봉우리를 움켜쥐었다.장소월은 어렸을 때부터 발육이 남달라 이젠 한 손에 다 담기도 어려웠다.그가 조금의 소중함도 알지 못하는 듯 제멋대로 장소월의 몸을 주물렀다.그녀는 그저 고통스럽게 앓은 소리를 낼 뿐이었다.통증은 천천히 그녀를 잠에서 깨게 만들었고, 그의 차가운 숨결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방안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어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으나 남자의 체취는 그녀에게 너무나도 익숙해 이 파렴치한 남자가 전연우임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그는 항상 이렇듯 그녀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걸 즐겼다. 그녀가 잠들어 있을 때 시작해 조금씩 힘을 더하며 울음을 터뜨릴 때까지 괴롭히는 걸 특히나 좋아했다.매번 그녀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울부짖을 때도 멈추기는커녕 더더욱 흥분하며 그녀의 몸을 탐했다.장소월은 그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았던가.그녀가 두 손으로 전연우를 때리며 희미하게 소리를 질렀다.“이.. 이러지 마.”그 소리는 마치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았다.전연우에겐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허리를 감싸던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전연우가 돌연 그녀에게서 입을 떼고 한 손으로 그녀의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거친 숨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지럽혔다.“오빠를 도와줘. 알았지?”장소월의 가슴이 격렬히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녀는 두 다리 사이로 남자의 거물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꼈다.전연우는 그녀가 명기라고 말한 적이 있다. 몇 번이고 잠자리해도 처음 하는 것처럼 흥분이 차올랐다.그는 심지어 그녀의 몸에서 죽어도 좋을 거라는 말도 했
온 힘을 다해 몸부림친 탓에 그녀의 이마는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어느새 얇은 잠옷 치마는 갈기갈기 찢겨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반짝반짝 빛나는 새하얀 피부와 수줍은 듯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은 전연우의 아랫배가 또다시 꿈틀거리게 만들었다.남자는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녀를 꿰뚫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아래위로 훑어보았다.장소월은 그를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리고 창문을 쳐다보았다. 그 바람에 유혹적으로 움푹 패인 쇄골이 선명해졌고 남자는 참지 못하고 또다시 입술을 파묻고 자신만의 흔적을 남겼다.은경애가 집에 돌아갔으니 장소월이 아무리 저항해도 빠져나갈 수 없다.이 별장엔 그들 두 사람밖에 남아 있지 않다.장소월의 결말은 이미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다. 어찌 됐든 그녀의 몸은 이미 더럽혀졌다. 전연우는 몸에 들어가는 마지막 단계까지는 진행하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만약 통제력을 잃어버린다면 그것 또한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장해진이 집을 떠나니 장씨 집안은 그의 천하나 다름없다.전연우에게 남은 한 가닥의 인내심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남자는 이미 지퍼를 내리고 그 위험한 물건을 드러내고 있었다. 장소월은 그 물건이 턱에 닿자 뜨거움에 몸부림쳤다. 그녀가 눈을 감고 말했다.“나쁜 자식, 일어나.”“쉿, 잠깐이면 돼.”40여 분 뒤.장소월이 그의 셔츠를 집어 들고 가슴과 얼굴에 묻은 끈적한 것을 닦아내고는 그의 얼굴에 던져버렸다.“나 진짜 너 죽여버리고 싶어. 나쁜 자식, 지금 당장 꺼져.”전연우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머리를 덮은 셔츠를 들어 구석에 던져버리고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을 일으켜 침대 위 소녀를 끌어안았다.장소월이 다리를 뻗어 그에게 발길질하려 했으나 전연우는 곧바로 몸을 피했다. 장소월은 그 기회를 틈타 반대쪽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열려고 했다.하지만 그 순간...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또다시 굳게 닫혔다.전연우는 강제로 그녀를 문을 잡고 엎드리게 했다. 아름다운 S라인 곡선이 눈을
그는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고 자는 걸 무척이나 좋아했다. 심지어 그녀가 몸을 돌리려 할 때면 힘으로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도 했다. 때문에 아직까지도 옆으로 누워 잠드는 습관을 고치지 못한 것이다.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0여 년 동안 이어오던 습관은 이미 뼛속까지 익숙해져 쉽게 바뀌지 않는다.장소월은 몸을 돌려 지난날 수많은 여자의 마음을 빼앗았던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그녀 기억 속의 전연우는 마흔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다시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마 젊은 날의 전연우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잊어버렸을 것이다.장소월이 고개를 들고 자세히 그를 살펴보았다.지금의 젊은 전연우와 중년이 된 후 전연우의 두 얼굴이 겹쳐 보였다.마흔 살의 전연우는 더욱 성숙했고 더욱 매혹적이었으며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특유의 여유가 배어 나왔다. 아무리 위험하고 어려운 일에 부딪힌다고 해도 그만 옆에 있다면 모두 해결될 것은 안정감이 느껴져 모든 것을 그에게 맡겼었다.당시 그와 비슷한 나이대 남자들은 모두 몸이 망가졌거나 머리가 벗어졌었다.하지만 그는 초인적인 자제력으로 완벽한 몸매를 유지했다. 때문에 그토록 많은 여자들이 그에게 매달린 것이다. 장소월에게 찾아와 안주인 자리를 내놓으라 호통치던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셀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하지만 그의 눈엔 아무도 담기지 않았다.장소월은 너그럽고 행복한 현모양처인 척 연기하며 아무것에도 연연하지 않고 걸어 다니는 시체처럼 영혼 없이 살았다.기억을 되돌려보면 두 사람에겐 행복했던 순간이 극히 적었다. 대부분 그녀가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하던 나날들이었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다시 평온을 되찾고, 또다시 고통을 호소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장소월은 그를 목졸라 죽이고 싶었으나 그녀의 나약한 힘으론 해낼 수가 없었다. 숨통이 끊어지기 전에 그가 잠에서 깨어났다.장소월은 침대에서 내려와 겉옷을 걸치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녀는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했다. 대체 어떤 방식을 사용해야 예전의 고통에서 걸어 나올 수 있을지
매번 그와 함께 있을 때마다 장소월은 끊임없이 옛 기억이 떠올랐다. 분명 잊었다고 생각했으나 하나하나 그 모습을 드러냈다.당시... 그녀는 어떻게 마음속 고통을 해소했었나?그건 바로 자해였다. 육체의 고통으로 정신적 고통을 덮었다.하지만 자해를 해도 아무런 기분이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더욱 큰 우울감이 몰려올 뿐이었다.장소월은 주방에서 가위를 꺼내 손목을 한 번 그었다. 처음이라 피는 나지 않았지만 마음은 더더욱 아파왔다.두 번째로 그었을 땐 피가 흘러내렸다.핏방울이 뚝뚝 싱크대에 떨어져 물을 빨갛게 물들이고는 함께 하수구로 내려갔다.장소월의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어두운 방 안, 그녀의 미소는 마치 처량한 처녀 귀신의 미소 같았다.세 번째...육체의 고통이 심화되어 정신적 고통이 감소했다.천천히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장소월은 드디어 만족감을 얻었다. 피와 함께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돌덩이도 서서히 빠져나갔다.예전 그녀가 자해를 하는 걸 발견했을 때 전연우의 얼굴엔 조금의 걱정스러움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칼을 들고 그녀의 손을 잡고는 같은 위치를 한 번 더 깊숙이 베었다. 허연 뼈가 다 보일 정도였다.그녀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깨어났을 땐 방안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그는 장소월이 미쳤다고 말했다.사실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그녀는 자신이 병에 걸렸다고 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아마... 아주 긴 시간이 걸려서야 천천히 자신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너 뭐 하는 거야?”차가운 목소리가 시커먼 거실에서 울려 퍼졌다. 이어 전연우가 불을 켰다.눈 부신 빛에 장소월이 눈을 찡긋 감았다.전연우가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의 손에서 가위를 빼앗았다.장소월은 덤덤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번엔 그의 얼굴에서 걱정과 분노의 감정을 보았다.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당장이라도 분노에 폭발해 버릴 듯 위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너 그렇게 죽고 싶어?
한참 고민하던 소현아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천효연의 납작한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음, 그럼 아가씨도 강지훈 씨의 아기를 가져요. 그럼 자꾸 나한테 와서 자지 않을 거잖아요!” 천효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녀는 은빛 치아가 부서질 정도로 이를 꽉 깨물었다. 주변 도우미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바보가 이토록 충격적인 말을 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주인님과 효연 아가씨의 잠자리 빈도를 생각하면, 주인님이 허락만 하셨다면 그들의 아이는 이미 몇 명은 됐을 것이다. 이 바보는 입만 열면 효연 아가씨의 급소를 찌르곤 한다! 규영과 미진도 소현아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천효연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지자 규영이 황급히 나서서 분위기를 무마했다. “효연 아가씨, 저희 현아 아가씨는 어린아이와 같은 분이라 이런 걸 잘 모르십니다. 부디 마음에 두지 마세요.” 소현아는 긴장감에 옷자락을 꽉 말아 쥐며 말했다. “제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나요?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제가 좀 멍청해서 그래요. 혹시 제 말 때문에 화가 난 거라면 말해주세요. 사과할게요.” 그녀는 자신이 조금 떨어지는 지능 때문에 자주 말실수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예전 이것 때문에 자주 괴롭힘을 당했었다. 한때는 차라리 말을 안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상황을 알아차린 엄마가 말해주셨다. 마음속에 말을 담아두면 병이 생기기 마련이니 그냥 용감하게 말하면 된다고 말이다. 그릇된 말을 했을 땐 제대로 사과해서 용서를 빌면 된다고도 하셨다. “맛있는 거 줄게요. 그러니까 화내지 말아요, 네?” 한참을 기다려도 천효연이 대답하지 않자, 소현아는 탁자 위의 간식을 집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천효연의 불쾌한 향수 냄새가 또다시 코를 찔렀다.소현아는 즉시 코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또다시 천효연을 화나게 할까 봐 최선을 다해 참아냈다. 천효연은 자신 앞에 내밀
잔뜩 일그러지는 소현아의 얼굴을 본 천효연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 바보가 먼저 선수를 친다고? 천효연은 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소현아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배를 만지려 했다. “현아 씨, 아기 태어나려면 몇 달 남았어요? 나도 아이 정말 좋아해요. 전에 현아 씨가 임신했다는 걸 알았을 때, 강지훈 씨가 그랬어요. 아기가 태어나면 나더러 맡아 키우라고요.” 농담하듯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소현아를 쳐다보는 그 눈동자엔 독사 같은 살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소현아는 불시에 벌떡 일어섰다. 자신의 말에 자극을 받았다고 생각한 천효연은 득의양양하게 아래턱을 들어 올렸다. 소현아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커다란 눈동자를 사방으로 뒤룩뒤룩 굴리고 있었다. 무척이나 불안하고 다급한 표정이었다. “현아 아가씨!” 규영과 미진이 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애처롭게 서 있는 소현아를 본 그들은 급히 달려왔다. 소현아는 자신의 입을 가리켰다. 규영은 곧바로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 “화장실로 모셔다드릴게요.” 그녀는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소현아를 1층 화장실로 데려갔다. 화장실 안에서 구역질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천효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효연 아가씨, 죄송합니다. 요즘 현아 아가씨의 입덧이 좀 심해요. 임산부라 요즘 많이 예민하십니다. 가까이 가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만약 현아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주인님 성격 아시죠?” 미진은 느긋하게 가져온 음식을 펼쳐놓으며 경고를 담아 공손하게 말했다. 천효연은 눈썹을 치켜들었다.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고작 도우미 주제에 감히 내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고 해?” 미진은 겁을 먹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봐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천효연의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잠시 뒤, 화장실에서 구역질 소리가 멈췄다.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