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구상에 진전이 없고 비까지 내리자 전연우 일행은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 김민준은 장소월과 전연우가 탄 차에 올라 이우림 옆에 자리 잡고는 끊임없이 이우림에게 말을 붙였다.장소월은 김민준이 성실하고 믿음직해 보였다. 하지만 이우림의 속마음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그녀는 그들에게 관심을 끊고 눈을 감았다. 그림 때문에 살짝 짜증이 밀려왔다.남원 별장으로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붓을 잡을 수 없어 초조함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전연우는 그녀를 미술관에 데려가기로 했다.“미술관에 가볼까?”장소월도 지금 집에 있는 건 바람직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마지못해 전연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작업실로 쓰이는 미술관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다. 오히려 그 덕분에 장소월은 머릿속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꼼꼼히 살펴보고 나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런 거장들은 도대체 어떻게 저토록 정교하게 구상하고 완성했는지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두 바퀴를 도는 과정에서 장소월은 충분한 영감을 얻었다. 그녀는 복도 빈자리에 앉아 눈을 살짝 감고 그림의 주제를 마음속으로 구상했다.전연우는 조용히 옆에 앉아 그녀를 묵묵히 지켰다.마침내 주제를 정한 장소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생각났어!”그녀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 그 흐름을 타고 기본 윤곽을 그리려 했다. 구상도 머지않아 자연스레 완성될 것이다.장소월은 사고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저녁밥도 거르며 몰두했다.이우림은 장소월이 바쁠 거라 짐작하고 전연우에게 전화했다.“연우 오빠, 해외 갈 때 저도 같이 가도 돼요? 마침 저도 돌아가야 해서요.”그 속에 담긴 기대가 무엇인지, 이우림 자신만 알고 있었다.화실엔 종이 뭉치 이삼십 장이 휴지통에 버려져 있었다. 장소월은 너무 피곤했는지 붓을 들고 기운 없이 앉아 있었다.언제 잠들었을까... 흐릿한 느낌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안아 올리는 것 같았다. 다시 깨어났을 땐 다음 날 오전 10시였다.장소월은 허겁
장소월은 초조했지만 전연우의 말 또한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일은 다급히 억지로 하려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마치 과거의 기억을 되찾으려 애썼지만 늘 허탕이었던 것처럼 말이다.자정이 지나도록 장소월은 잠이 오지 않았다. 강가엔 그녀와 전연우, 그리고 이우림과 김민준만 남아 있었다.전연우는 장소월에게 이제 그만 자라고 권했지만,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버티자 함께 별구경을 할 수밖에 없었다.이우림의 마음은 여전히 전연우에게 쏠려 있었고, 텐트에서 자는 게 처음이라 약간 두려웠던지라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김민준 역시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줄곧 그곳에 남아 있었다.장소월은 이우림과 김민준이 단둘이 시간을 보낼 기회를 만들어주려 전연우를 끌고 숲으로 향했다.숲에 들어서자 차가운 기운이 밀려왔다. 순간 공포 영화 장면이 떠올라 깜짝 놀라 휘청거리며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전연우는 곧바로 그녀를 부축했다.이곳은 너무 어두워 위험하다는 생각에 그는 장소월을 데리고 강 건너편으로 향했다.두 사람은 손전등도 없이 텐트 옆 불빛에 의지해 넓지만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강 건너편에 도착해 돌덩이 위에 자리 잡고 앉았다.시골이라 기온이 낮은 데다 밤이 되니 미풍까지 불어와 장소월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강 건너편에서 이우림과 김민준은 장소월과 전연우를 등지고 앉아 무언가 대화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쪽에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장소월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이우림의 행복을 바랐다.“김민준 씨가 믿을 만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네.”그야말로 선남선녀였다.전연우는 이런 일은 제삼자가 왈가왈부할 수 없다며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았다.“예전 그림 그렸던 시절에 대해 알고 싶어.”장소월은 이 평온한 분위기에 적절하다고 느껴 오래전부터 품었던 생각을 꺼냈다.전연우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는 간단히 두어 마디 하고는 이제 자야 한다며 다그쳤다.장소월은 그가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리려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신
어둠이 깃들자 따뜻한 황금빛 야간 조명이 운치를 더했다.장소월은 전연우의 품에 나른히 누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운무 마을의 추억이 떠올랐다.이곳의 밤은 운무 마을과 닮은 듯하면서도 달랐다. 하지만 다행히 곁에 있는 사람은 변함이 없었다.이우림은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으려 일찌감치 자리를 비켜준 뒤 직원들과 바비큐를 준비했다. 하지만 멀리서 다정히 기대어 있는 두 사람을 보니 마음에 질투가 스며들었다. ‘내가 더 일찍 돌아왔더라면...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잡념을 떨치려 이우림은 부하직원에게 물었다.“이거 어떻게 굽는 건가요?”이우림은 이씨 가문에서 귀하게 자란 큰딸이었다. 때문에 평소 이런 일은 할 필요가 없었고 친구들과 놀러 가서도 직접 해본 경험이 없었다.직원들은 차분히 가르쳐줬고, 그녀의 마음도 간신히 진정되었다.장소월은 편안함에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때 푸덕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전연우가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의 옆 물통엔 이미 크고 작은 물고기 여섯 마리가 담겨 있었다.“나 오래 잔 거야?”장소월은 호기심에 물통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전연우의 큰 손이 그녀를 막았다.장소월은 손을 거두며 전연우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뭐든 잘하는 만능 재주꾼이다! “오래 안 잤어.”전연우는 낚싯줄을 정리하며 말했다.그때 이우림이 손을 닦으며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왔다.“연우 오빠, 바비큐 다 됐어요.”장소월은 배고픔에 벌떡 일어났다. 바비큐 향이 코를 자극하자 식욕이 솟구쳤다.일곱 명은 세 테이블에 흩어져 앉았다. 이우림은 부사장 김민준의 옆에 자리 잡았다. 김민준은 젊고 유능했지만, 아직 여자친구는 없었다.전연우는 계속 장소월 앞에 고기 꼬치를 놓아줬다. 이우림은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의 앞에도 꼬치가 제법 쌓여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저... 이렇게 많이 못 먹어요.”이우림은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
한 명이 더 있으면 북적북적 재밌을 것이다. 또한 이우림은 온화하고 조용한 것이 장소월이 딱 좋아하는 타입의 사람이었다.별이와 레고 놀이를 하다 보니 벌써 한 시간이 넘게 지나 있었다. 장소월과 전연우는 아래층으로 내려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우림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이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별이와 작별 인사를 하려던 찰나, 익숙한 검은 그림자가 계단에 나타났다. 이우림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겨우 마음을 진정시켰을 때, 전연우가 그녀 앞에 다가와 말했다.“오늘 저녁에 우리랑 같이 캠핑 갈래?”장소월이 직접 한 제안이었으니 전연우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우림은 성격상 남에게 폐 끼치는 걸 싫어했고, 그런 점이 장소월과 잘 맞았다.이우림은 전연우의 뜻인 줄 알고 잠시 안정되었던 심박수가 다시 치솟았고 표정과 행동까지 모두 어색해졌다.아래층으로 내려오다 이우림을 본 장소월은 반갑게 웃으며 달려왔다.“우림 씨, 언제 왔어요! 왜 미리 말 안 했어요?”이우림은 긴장이 풀리며 미소 지었다.“오다가 마침 별이를 만나서요.”별이는 완성한 레고를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분홍색과 보라색이 예쁘게 어우러진 성이었다.“이거 우림 이모랑 같이 만든 거예요!”혼자서도 만들 수 있었겠지만, 이렇게 빨리 완성하진 못했을 것이다.장소월은 곧바로 전연우의 팔을 끌며 말했다.“우리 짐 챙겨야 해.”그러곤 이우림을 보며 물었다.“우림 씨, 캠핑 갈 시간 있죠?”캠핑이 장소월과 전연우가 함께 계획한 것임을 깨닫자, 이우림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솟구쳤지만 애써 괜찮은 척 대답했다.“있어요.”저녁 캠핑 장소는 도심에서 두 시간 거리의 교외 공터에 위치해 있었다. 산과 물이 가까이 있는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었다.이 공터는 아름다운 자연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캠핑지로 이만한 데가 없었다.차는 운전기사가 몰았다. 장소월, 전연우, 이우림은 첫 번째 승용차에 탔고, 회사 고위 임직원들은 뒤차에 탔다. 모두 합쳐 일
국제 전시회 초대장을 받은 장소월은 깜짝 놀랐다.“이 초대장이...”얼마 전 뉴스에서 국제 전시회 광고를 본 장소월은 전화로 표 예매를 문의했었다. 그 결과 무려 3년 전에 예약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쩌면 전연우라면 이 표를 구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와 냉전을 벌이는 중이라 부탁하지 않았다.장소월은 마음속으론 설레면서도 겉으론 태연한 척했다.“이거 구해줬다고 내가 너 용서할 거라 생각하지 마!”입으론 차갑게 쏘아붙였어도 속으로는 이미 전연우를 용서했다.전연우는 별다른 감정 없이 말했다.“식은 죽 먹기야.”거들먹거리는 그의 모습에 장소월은 초대장을 내려놓았다. 까짓거 가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전연우는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은 듯 표를 집어 그녀 품에 억지로 쥐여줬다.장소월은 마지못해 표를 받으며 말했다.“네가 억지로 준 거야. 내가 달라고 한 거 아니야.”전연우는 다정하게 그녀를 끌어안으며 말했다.“그래, 그래.”이우림이 장소월과 쇼핑 약속을 잡으려 전화했을 때, 그녀는 설렘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우림 씨, 이틀 뒤에 나 해외 전시회 보러 가요!"이 전시회가 어떤 것인지 익히 알고 있는 이우림은 분명 전연우의 도움이 있었을 거라고 짐작했다.“아, 맞다.”장소월은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이 표, 전연우가 구해준 거예요.”전시회가 다가올수록 장소월은 고민에 빠졌다. 이번 전시회엔 수많은 업계 거장들이 걸음 할 예정이었고, 그중엔 그녀가 존경하는 래빈 대가도 있었다. 그에게서 배움을 얻으려면 반드시 작품 하나는 가져가야 했다.하지만 책상에 흩어진 그림들을 아무리 둘러봐도 적합한 건 보이지 않았다.하여 장소월은 새 작품을 준비하기로 했다. 하지만 전시회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사흘뿐이었다.이우림은 갓 구운 빵과 손으로 갈아 만든 커피 두 잔을 들고 화실 문 앞에 도착했다. 장소월이 전연우와 이야기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지금 머리가 텅 빈 느낌이야...”장소월은 우울한 표정으로
전연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한 주에 한 번씩은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든 그가 제안했다.“하루에 한 번으로 바꾸는 건 어때?”전연우는 최근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매일 회사로 출근해야 했다. 때문에 점심시간엔 좀처럼 집에 갈 시간을 내지 못했다.장소월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꿈이 크시네!”두 사람의 그런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이우림의 눈에 상처로 다가왔다. 순간 그녀와 전연우 모두 학생이었던 시절의 옛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때 풋풋하고 아름다웠던 모습은 이미 역사 속으로 조용히 사라져버렸다.이제 전연우는 가정을 꾸렸고, 이렇게 예쁜 아내도 있다. 그녀가 돌아온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장소월은 옆에 멍하니 서 있는 이우림을 보고는 미안한 마음에 말했다.“우림 씨, 우리랑 같이 카페 가서 잠깐 앉을래요?”이우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전연우는 옛 이웃이었고, 지금은 장소월과 자매처럼 가까이 지내고 있으니 관계를 더 돈독히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전연우는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흘깃 보며 말없이 뜻을 전했다.장소월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잔뜩 신이 나 있던 표정도 순식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전연우는 곧바로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고는 급히 일어나 달래기 시작했다.“이틀 동안만 일 마무리하고 너랑 시간 보낼게.”장소월도 딱히 뭐라 할 순 없었다. 최근 이우림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겁긴 했지만, 가끔은 전연우가 그리운 것도 사실이었다...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자 이우림은 옆에서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먼저 가겠다고 말하려 할 때, 장소월이 다가와 그녀를 붙잡았다.“우림 씨도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우리가 밥까지 가져왔는데, 이 사람은 커피 한 잔도 안 사준다는 게 말이나 돼요?”이제 이우림은 완전히 두 사람 사이에 휘말려 들고 말았다. 불편하면서도 씁쓸하기 그지없었다.전연우는 그녀가 진심으로 화났다는 것을 알고는 가까이 다가가 계속하여 어르고 달랬다.이우림은 소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