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간의 계약 연애

14일간의 계약 연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4
By:  고독한포켓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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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보름만 제 애인인 척해 주시죠. 원하는 건 뭐든 들어드릴 테니." ​14일간의 시한부 가짜 연애. 그 아슬아슬하고 잔인한 비즈니스의 톱니바퀴가, 그렇게 소리 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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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한소율 대리."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심하게 불리는 이름. 둔탁하게 울리는 남성의 음성은 낮고 명확했다.

​서울 도심 한복판, 태성그룹 사옥 18층 기획본부 TF팀장실. 유리창 너머로 석양이 지는 도심의 마천루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고, 널찍한 원목 책상 뒤에는 차도현 팀장이 앉아 있었다.

​칼같이 떨어지는 슈트 핏, 조금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는 또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상대를 단번에 압도하는 냉철한 눈빛. 그는 태성그룹 내에서 '걸어 다니는 성과급'이자 동시에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 AI'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네, 팀장님. 부르셨습니까?"

​소율은 품에 안고 있던 서류를 다잡으며 정갈하게 답했다. 그녀의 단정한 슬랙스 차림과 흐트러짐 없는 자세는 3년간 차도현의 완벽주의를 근거리에서 버텨낸 유일한 부하직원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도현은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깊고 그윽한 눈동자가 소율의 얼굴에 정면으로 닿았다. 보통의 직원들이라면 그 눈빛만으로도 절절매며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반성부터 했겠지만, 소율은 익숙하다는 듯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단단해 보이는 표정 뒤로, 소율의 마음속에는 조용한 파문이 일고 있었다.

​3년이었다. 이 남자의 가장 근거리에서 그가 밤을 새워 만든 기안서를 검토하고, 그가 좋아하는 쓰디쓴 아메리카노의 취향을 맞추며, 그가 비즈니스 파트너들과 나누는 날 선 대화들을 백업해 온 시간이. 그리고 그 3년 동안, 소율이 단 한 번도 이 남자에게 티 내지 않고 차곡차곡 숨겨온 감정의 깊이가 딱 3년이었다.

​‘차도현을 향한 짝사랑.’

​그것은 소율에게 지극히 위험하고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스스로 완벽한 가면을 썼다. 사사로운 감정 따위는 일절 품지 않는, 오직 능력과 성과로만 대화하는 완벽한 부하직원의 가면. 덕분에 도현은 소율을 기획본부 내에서 가장 신뢰하는 파트너로 꼽았고, 소율은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자리에 앉지."

​도현이 맞은편 의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소율은 조용히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직감적으로 무언가 이례적인 상황임을 알 수 있었다. 퇴근 시간을 불과 10분 남겨둔 시점, 업무 보고가 아닌 개인 면담 형식의 호출이었기 때문이다.

​도현은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규칙적인 타격 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소율의 예상을 완전히 비껴갔다.

​"한 대리. 혹시 지금 만나는 사람 있습니까?"

​"예?"

​소율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평소 사생활에 대해서는 일절 묻지 않던 도현이었기에 더욱 뜻밖이었다. 소율의 눈동자가 흔들렸으나, 그녀는 이내 일정한 톤을 되찾았다.

​"없습니다. 업무에 지장을 줄 만한 개인적인 사정은 전혀 없습니다."

​"아니, 업무에 지장을 주는지가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닙니다. 말 그대로 연애 여부를 묻는 겁니다."

​"…솔로입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도현은 가만히 소율을 응시했다. 마치 가장 가치 있는 투자처를 물색하는 투자자의 눈빛이었다. 이내 그는 상체를 앞으로 살짝 기울이며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와 연애를 좀 해줘야겠습니다."

​"…예?"

​소율의 입에서 허망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도현의 얼굴을 살폈지만, 거기에는 농담의 기색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완벽하게 계산된 사업 제안을 할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잘못 들으신 게 아닙니다. 정확히는 '연애를 하는 척'을 해달라는 뜻입니다. 기한은 오늘부터 딱 14일 동안."

​"팀장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설명이 필요하겠군요."

​도현은 서류 봉투 하나를 밀어냈다. 봉투 안에는 고급 호텔의 레스토랑 예약 내역과 몇 장의 인적 사항 서류가 들어있었다.

​"회장님—내 할머니께서 마침내 시한폭탄을 터뜨리셨습니다. 이번 주말부터 매일같이 정략혼 맞선 자리를 잡아두셨더군요. 내가 거절할 수 없도록 이사회 안건까지 들먹이면서 말입니다."

​태성그룹 이혜민 회장. 그룹의 실권자이자 도현의 할머니인 그녀가 도현의 정략결혼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은 바 있었다. 하지만 도현이 이렇게 몰려 있을 줄은 몰랐다.

​"저는 회장님의 뜻대로 오너가 간의 결탁으로 이뤄지는 정략혼에 응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무작정 거절하기엔 현재 추진 중인 신사업 건으로 이사회의 지지가 절실한 상황이죠. 그래서 회장님의 시선을 돌릴 확실한 명분이 필요합니다."

​도현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내가 이미 마음에 둔 여자가 있고, 그 여자와 심각하게 교제 중이라는 명분. 그렇다면 회장님도 강제로 맞선을 추진하진 못할 겁니다. 어설픈 배우를 고용했다간 5분 만에 회장님 정보망에 걸려 넘어갈 테고, 내 사생활과 성향을 잘 알면서도, 입이 무겁고,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망치지 않을 사람이 필요합니다."

​도현은 손가락으로 소율을 가리켰다.

​"그게 바로 한소율 대리입니다."

​소율은 목구멍이 바짝 타들어 가는 느낌을 받았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망치지 않을 사람.'

​도현의 그 평가가 가슴을 찌릿하게 파고들었다. 자신이 그를 3년 동안 짝사랑해 왔다는 사실을, 이 남자는 정말 꿈에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지극히 완벽하게 감정을 숨겨온 대가가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팀장님, 저는 팀장님의 부하직원입니다. 사적인 일로 직원을 동원하시는 건—"

​"물론 공짜로 해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도현이 소율의 말을 끊었다. 그는 서류 봉투 옆에 또 다른 기안서 한 장을 올려놓았다. 그 서류의 제목을 본 소율의 눈이 크게 그어져 열렸다.

​[태성그룹 유럽 지사(프랑스 파리) 신규 프로젝트 기획안 - 담당 팀장: 한소율]

​소율의 오랜 숙원이자 꿈. 입사 이래 그녀가 밤낮없이 준비해 왔던 유럽 지사 파견 및 프로젝트 총괄 기안서였다. 실력은 충분했으나, 기수와 나이 때문에 상부에서 번번이 승인을 미루고 있던 건이었다.

​"한 대리가 이 프로젝트에 얼마나 공을 들여왔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사회 결의가 필요한 건이지만, 내 권한과 승인으로 이번 달 내에 파견 발령을 확정 지어 주겠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수고비 명목으로 별도의 보상금도 지급하죠."

​소율의 호흡이 가빠졌다. 이것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함정이었다.

​파리 지사 파견. 그것은 소율의 커리어에 있어 엄청난 도약이 될 기회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남자를 향한 헛된 짝사랑을 물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완전히 끊어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명분이기도 했다.

​'14일.'

​딱 보름도 되지 않는 시간이다. 이 14일 동안 그와 연인인 척 지내고 나면, 소율은 미련 없이 이 남자의 곁을 떠나 파리로 갈 수 있다. 3년간 숨겨왔던 내 마음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어쩌면 하늘이 준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소율은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이 떨림이 도현에게 들릴까 두려울 정도였다. 소율은 입술을 침으로 적신 뒤, 도현을 직시했다.

​"조건이 있습니다."

​도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거절이 아닌 조건 제시. 도현의 입꼬리가 호의적으로 올라갔다.

​"말해봐요."

​"첫째, 철저하게 비즈니스 관계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회사 내에서는 기존과 동일하게 팀장과 부하직원으로 행동합니다. 둘째,  회장님이나 외부 시선이 있는 곳에서만 최소한의 연기를 합니다. 셋째… 계약이 끝나는 14일 차가 되는 날, 즉시 파리 지사 파견 발령을 발령해 주십시오."

​도현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합리적인 조건이군요."

​도현은 서랍에서 미리 준비해 둔 서류 두 장을 꺼냈다. 그 서류의 상단에는 정갈한 폰트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14일간의 계약 연애 합의서]

​"미리 작성해 두었습니다. 한 대리가 말한 조건도 추가하도록 하죠."

​도현은 펜을 들어 서류에 몇 가지 조항을 즉석에서 수정해 적었다. 그리고 그 계약서를 소율 쪽으로 밀어주었다. 소율은 계약서의 조항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본 계약은 차도현(갑)과 한소율(을) 간의 14일간 위장 연애 관계를 규정한다.

​'을'은 '갑'의 정략혼 피하기 위한 연인 대행 업무를 충실히 수행한다.

​'갑'은 그 대가로 '을'의 유럽 지사 파견을 보장하고 성과급을 지급한다.

​[핵심 조항] 상호 간에 사사로운 감정 과입을 금지하며, 공사 구분을 엄격히 준수한다. 계약 기간 중 물리적·감정적 선을 넘지 않는다.

​계약 만료일(14일 차) 이후, 양사는 아무런 미련 없이 본래의 상하 관계 및 파견 절차를 진행한다.

​4번 조항, '사사로운 감정 과입 금지.'

​그 글자가 소율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 이 계약서를 직접 작성한 도현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만년필을 소율에게 건넸다.

​"서명하시죠, 한 대리."

​소율은 도현이 건넨 만년필을 받아 들었다. 그 만년필은 소율에게 지극히 익숙한 촉감을 선사했다. 3년 전, 소율이 TF팀에 정식 발령받던 날 도현이 팀원 전체에게 나눠주었던 저가형 브랜드 만년필이었다. 다른 팀원들은 진작에 버리거나 잃어버렸지만, 소율만큼은 3년 내내 필통 속에 소중히 품고 다니며 손때가 묻도록 써온 바로 그 만년필.

​도현은 당연하게도 자신이 3년 전에 준 펜이라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소율은 만년필을 꽉 쥐었다.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한소율. 이걸로 끝내는 거야.'

​3년 동안 혼자 태우고, 혼자 아파했던 짝사랑. 이 14일 동안의 가짜 연애를 끝으로, 내 모든 미련을 이 계약서와 함께 태워버리자. 그리고 미련 없이 파리로 떠나는 거야.

​쓱, 쓱.

​정막을 가르는 펜촉 소리와 함께, 소율의 정갈한 서명이 계약서 하단에 새겨졌다.

​자신의 서명이 적힌 계약서를 확인한 도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계약서 한 부를 챙겼다.

​"협조해 줘서 고맙습니다, 한 대리."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켓을 걸쳤다. 그리고 소율에게 계약서 사본을 건네며, 단호하고도 철저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기억해요, 한 대리. 계약서 4번 조항. 감정 과입은 금지입니다. 서로 감정 소모 없이, 딱 비즈니스답게 깔끔하게 끝냅시다."

​도현은 먼저 팀장실 문을 열고 나갔다.

​홀로 남겨진 팀장실. 유리창 너머로 완전히 어둠이 내린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소율은 손에 쥔 계약서 사본과 오래된 만년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감정 과입 금지….'

​그녀는 나지막하게 읊조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세요, 도현 씨. 당신이 말 안 해도… 이미 내 마음은 부서질 대로 부서져서, 더 이상 과입될 감정도 없으니까요."

​14일간의 시한부 가짜 연애.

그 아슬아슬하고 잔인한 비즈니스의 첫 번째 톱니바퀴가, 그렇게 소리 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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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네요 감사합니다
2026-10-27 09:4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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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결제 해서 봤는데 같은 내용이라 멘붕 이 왔는데 삭제 예정이 떴네요 내 코인 아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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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32화가오늘 136~137화랑 똑같은내용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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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가빠르고 몰입감이 최고입니다 역시 인기가 많다는게딱 답이나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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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계약서에 서명하고 맞이한 첫 토요일 아침. ​소율은 평소보다 훨씬 일찍 눈을 떴다. 침대 헤드에 매달린 시계가 오전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3년간 출근길마다 입었던 단정한 슬랙스와 블라우스 대신, 옷장 안에 걸린 옷들을 하나씩 꺼내어 침대 위에 늘어놓았다. ​‘진짜 연인처럼 보일 것.’ ​계약서에 명시된 비공식 2번 조항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오늘 도현과 약속된 일정은 청담동의 한 셀렉트숍 방문 및 인근 레스토랑에서의 점심 식사였다. 단순한 주말 데이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회장님의 눈을 속이기 위한 ‘연인의 자격 검증’ 무대였다. ​소율은 무난한 파스텔톤 카디건과 플리츠스커트를 골라 입었다. 거울 앞에 서서 입술에 핑크빛 립스틱을 얹자, 평소 오피스 룩으로 무장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부드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할 수 있어, 한소율. 그냥 업무의 연장선일 뿐이야.’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주문을 걸었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생경한 떨림까지 완전히 눌러 담을 수는 없었다. ​오전 11시, 청담동의 프라이빗 쇼룸 앞. ​소율이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익숙한 검은색 세단이 도로변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내린 도현은 평소의 각 잡힌 정장 차림이 아니었다. 짙은 네이비색 카디건에 슬림핏 슬랙스를 매치한 그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접근하기 쉬워 보였지만, 그 특유의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는 그대로였다. ​"일찍 왔군요, 한 대리." ​차에서 내린 도현이 소율을 향해 걸어왔다. 그의 시선이 소율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렸다. 소율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깔끔하고 보기 좋지만… 조금 더 화려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예?" ​"회장님은 내 취향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내가 여자친구가 생겼다면 어떤 스타일을 선물했을지, 감시원들이 보고서에 적어 올릴 텐데 이 정도는 너무 평범해요." ​도현은 쇼룸의 유리문을 열며 소율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쇼룸 내부는 최상위 VIP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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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월요일 아침의 기획본부 TF팀은 여느 때처럼 전쟁터와 같았다. ​새롭게 시작되는 유럽 시장 교두보 확보 사업과 하반기 이사회 안건 준비로 팀원들은 걸음을 바쁘게 옮겼다. 그 치열한 업무의 중심에는 여전히 서늘한 카리스마를 내뿜는 차도현 팀장과, 그의 지시를 칼 같이 수행하는 한소율 대리가 있었다. ​"한 대리, 10시 이사회 서류 출력하고 2분기 매출 분석표 재검토해서 보고해요." ​"네, 팀장님.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사무실 내에서 두 사람의 호칭은 완벽하게 '팀장님'과 '한 대리'로 돌아와 있었다. 지난 주말 청담동의 화려한 드레스숍과 레스토랑 테라스에서 나눴던 "도현 씨", "소율 씨"라는 호칭은 마치 꿈결 속 환상이었던 것처럼 싹 사라져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갭에 소율의 마음 한구석은 가끔 쓸쓸해졌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차도현은 완벽하게 공사 구분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계약서 4번 조항인 '감정 과입 금지'를 지키는 비즈니스 파트너의 미덕이었으니까. ​그러나 오후 5시가 넘어갈 무렵, 도현이 메신저로 보낸 단 한 줄의 비밀 메시지가 소율의 평정심을 다시 흔들어 놓았다. ​[차도현 팀장: 오늘 퇴근 후 내 집으로 갑니다. 저녁 식사 겸 2차 작업이 있습니다.] ​소율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타자를 치던 손가락을 멈췄다. 도현의 집이라니. ​[한소율 대리: 팀장님 집 말씀이십니까? 혹시 다른 외부 장소가 아니라요?] ​[차도현 팀장: 회장님이 비서를 시켜 내 개인 SNS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연애를 시작했다면서 아무런 커플 사진도 없다는 걸 의심하더군요. 오늘 밤 가짜 커플 계정을 개설하고 연출 사진을 몇 장 찍어 올릴 겁니다. 외부 장소는 눈이 많으니 내 집이 가장 안전합니다.] ​도현의 메시지는 철저히 이성적이었고 타당했다. 주말 산책로에서 찍힌 스냅사진 하나만으로는 회장님의 집요한 의구심을 완전히 끌어내릴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소율은 가슴을 짓누르는 어지러움을 누르며 짧게 답장을 보냈다. ​[한소율 대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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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도현의 펜트하우스 거실에서 일어났던 그 아슬아슬한 사고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이질적이고 팽팽한 정적이 감돌기 시작했다. ​"계약서 조항… 지키기가 생각보다 어렵군요." ​그 나직하고 서늘한 음성이 소율의 귀에 닿았던 순간, 도현은 이내 자신의 행동에 당황한 듯 허리를 감싸 쥐었던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정돈했다. ​"오늘은 이쯤 하죠. 사진은 내가 선별해서 커플 계정에 올리겠습니다. 늦었으니 택시를 불러주죠." ​그것이 4일 차 밤의 전부였다. 도현은 지극히 이성적인 정적이 자신의 이성을 집어삼키는 것이 두려운 사람처럼 빠르게 소율을 집 밖으로 배웅했다. 택시에 올라탄 소율은 창밖에 멍하니 서 있는 도현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빛은 낯선 열기에서 다시 단단한 얼음 벽으로 돌아가 있었다. ​ 계약 5일 차, 화요일. ​오전 출근길부터 도현의 태도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평소에도 냉철하고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 팀장이었지만, 오늘은 지독할 정도로 사무적이고 차가웠다. ​"한 대리, 3분기 해외 사업 전략 기안서 폰트 크기랑 줄 간격이 안 맞습니다. 기본 양식 재확인하고 다시 올리세요." ​"팀장님, 그 양식은 지난주 이사회 보고용으로 승인받은 표준 서식입니다만." ​"내가 새로 가이드라인을 내렸을 텐데요. 내 지시대로 재작업하세요." ​사무실 안의 다른 팀원들도 얼어붙을 만큼 도현의 지적은 매서웠다. 소율은 가슴속에서 서운함과 황당함이 불쑥 솟구쳤지만, 곧바로 도현의 의도를 파악했다. ​'선 긋기.' ​도현은 전날 밤 자신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스스로가 정한 '감정 과입 금지'라는 4번 조항을 지키기 위해, 역으로 소율에게 철저하게 사무적인 차가움으로 벽을 치는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소율은 서류를 거두어들였다. 3년 동안 그를 짝사랑하면서 터득한 단단한 자존심이 고개를 들었다. 차도현이 원하는 게 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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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자신 앞에서는 매번 긴장하거나, 단단하게 경계 태세를 갖추거나, 비즈니스용 미소만을 보여주던 한소율이었다. 그런데 저 남 대리라는 녀석 앞에서는 저렇게 눈꼬리를 접어가며 편안하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심지어 남 대리가 소율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장난을 치자, 소율 역시 자연스럽게 남 대리의 팔을 가볍게 치며 타박하고 있었다. ​스윽- ​도현의 미간이 완전히 찌푸려졌다. ​'남궁혁 대리. 입사 3년 차, 기획 2팀. 일 처리는 나쁘지 않으나 사적으로 친밀감을 과도하게 표출하는 경향이 있음.' ​도현의 머릿속에서 남 대리에 대한 정보가 차갑게 정리되었지만, 가슴 밑바닥에서 요동치는 본능은 철저히 이성을 압도하고 있었다. 지독하고 불쾌한 열감. 그것은 다름 아닌 '질투'였다. ​소율은 도현의 차가운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남 대리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 맞아! 너 파리 지사 파견 신청서 냈다며? 진짜 가는 거야? 가면 나 심심해서 어쩌냐." ​"아직 확정은 아니야. 그래도 준비는 꾸준히 하고 있어." ​"가게 되면 내가 파리 여행 갈 테니까 가이드 해줘야 된다, 진짜!" ​"알았어, 맛있는 거 사주면 생각해 볼게."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도현의 참을성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승인해 주기로 약속한 그 '파리 파견' 건을, 저 남 대리라는 녀석과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얘기하고 있는 모습이 지독하게 신경을 긁었다. ​쿵-! ​도현이 물잔을 테이블 위에 다소 거세게 내려놓았다. 왁자지껄하던 회식자리의 분위기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팀장님?" ​팀원들이 일제히 도현을 바라보았다. 도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계를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1차는 여기까지 하죠.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차비는 법인카드로 결제해 둘 테니 남아서 더 마실 사람들은 마시도록." ​"와! 팀장님 최고입니다!" ​팀원들이 환호하는 사이, 도현은 소율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내꽂았다. ​"한 대리." ​소율이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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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남 대리 앞에서도 그렇게 웃습니까? 남 대리가 어깨를 잡고 손을 대도 그렇게 가만히 있어요?" ​"팀장님이 무슨 자격으로—" ​"자격?" ​도현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이 소율의 입술로 떨어졌다. ​"14일 동안 넌 내 애인이야. 적어도 이 계약이 끝날 때까지는, 넌 내 눈 앞에서 다른 놈 보고 웃지 마." ​억지와 질투, 그리고 인정할 수 없는 끌림이 뒤섞인 도현의 선언. ​두 사람의 호흡이 밤공기 속에서 뜨겁게 부딪치며, 6일 차 밤의 어둠이 지독하게 깊어가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내던져진 도현의 목소리는 밤공기보다 서늘했고, 동시에 끓는점 직전의 물처럼 뜨거웠다. ​소율은 손목을 잡아챈 도현의 손아귀 힘에 눌려 숨을 헐떡였다. 도현의 눈동자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타오르는 불꽃을 안고 있었다. 언제나 냉정하고 이성적인 계산만을 해대던 그 차도현이, 오직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팀장님… 이거 놓으세요." ​소율이 손목을 비틀어 빼내려 하자, 도현은 놓아주기는커녕 오히려 악력에 힘을 주어 소율의 몸을 제 가슴 앞으로 더욱 밀착시켰다. 두 사람의 조용한 마찰음 사이로, 하늘에서 우르릉하는 불길한 뇌성이 울려 퍼졌다. ​"안 놓는다고 했습니다, 한 대리." ​"지금 무슨 억지를 부리시는 겁니까? 남 대리는 제 동기일 뿐입니다. 제가 누구와 웃고 누구와 대화하든, 그건 제 사생활입니다. 계약서 어디에도 제 일상적인 인간관계까지 통제받아야 한다는 조항은 없었습니다!" ​소율의 또렷한 반박에 도현의 눈썹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사생활?" ​도현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 사생활 때문에 회장님이 붙인 감시망에 오점을 남기게 된다면, 그건 더 이상 사생활이 아니라 업무 태만입니다. 내 계약 파트너로서의 자격 문제라고요." ​"핑계 대지 마십시오!" ​소율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가슴 밑바닥에서 3년 동안 쌓여온 설움이 울컥 터져 나왔다. ​"오늘 회식 자리에 감시원은 없었습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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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도현은 핸들을 꺾어 차를 차선 밖으로 돌렸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제 집 방향이 아닌데요." ​소율이 물었지만 도현은 답하지 않았다. 차는 불과 5분 거리에 있는 익숙한 빌딩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며칠 전 가짜 커플 사진을 찍기 위해 방문했던 도현의 펜트하우스 건물이었다. ​"내려요." ​"팀장님 집에는 안 갑니다. 비가 그칠 때까지 차에 있겠습니다." ​"감기 걸려 골골대다 이사회 서류 구멍 낼 작정입니까?" ​도현이 냉정한 어조로 받아쳤다. ​"옷 말리고 비 그칠 때까지만 있는 겁니다. 쓸데없는 고집 피우지 말고 따라오세요." ​도현은 차에서 우산을 꺼내지도 않은 채, 조수석 문을 열어 소율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거절할 틈도 주지 않는 단호한 행동이었다. 띠리릭- ​펜트하우스의 도어록이 열리고, 두 사람은 거실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 조명이 켜지자 빗물에 젖은 두 사람의 몰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도현의 고급 와이셔츠는 젖어서 몸에 딱 붙어 어깨와 가슴 근육의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고, 소율 역시 젖은 블라우스가 살갗에 달라붙어 속옷 라인이 어렴풋이 비쳐 보이고 있었다. ​도현이 소율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그의 눈동자가 커지며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도현의 목울대가 크게 꿀컥 움직였다. ​"…잠시 기다려요." ​도현은 드레스룸으로 들어가더니 커다란 타월 두 장과 자신의 하얀색 오버핏 드레스 셔츠 한 장을 가지고 나왔다. ​"욕실로 들어가서 씻고 나오세요. 젖은 옷은 세탁기에 넣고, 당장 입을 옷이 없으니… 내 셔츠라도 걸치고 나와요." ​도현이 셔츠와 타월을 소율의 품에 쥐여주었다. ​"팀장님 옷을 입는 건 좀…." ​"그럼 그 축축하고 투명하게 젖은 옷을 계속 입고 있겠다는 겁니까?" ​도현의 날 선 지적에 소율은 자신의 옷 상태를 깨닫고 뺨을 발갛게 물들였다. 소율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로 씻고 나온 소율은 거울 앞에 섰다. ​도현이 준 드레스 셔츠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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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도현의 손가락이 소율의 뺨으로 올라왔다. 그의 서늘한 손끝이 소율의 턱선을 따라 내려가, 헐렁한 셔츠 깃 너머로 드러난 소율의 쇄골 라인을 살포시 스쳤다.​소율은 몸을 스르르 떨며 숨을 삼켰다. 도현의 손길이 닿은 피부마다 불꽃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이건 선을 지키는 게 아니라… 나더러 이성을 잃으라고 부추기는 겁니다, 한소율 대리."​도현의 눈동자에 위험하고 지독한 소유욕이 넘쳐흐르고 있었다.​회식 자리에서의 질투, 남 대리를 향하던 소율의 환한 웃음에 대한 분노, 그리고 지금 제 눈앞에서 자신의 옷을 입고 떨고 있는 이 여자를 향한 거부할 수 없는 본능적인 욕망.​도현은 마침내 제 가슴속을 괴롭히던 감정의 실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이것은 비즈니스도, 계약도, 회장님을 속이기 위한 연기도 아니었다.그는 한소율이라는 여자를, 지독하게 가지 오고 싶어 하고 있었다.​도현의 얼굴이 소율의 입술을 향해 천천히, 그리고 거침없이 내려앉기 시작했다.​소율을 벽으로 몰아세운 도현의 시선은 소율의 발그스레해진 뺨을 지나, 떨리고 있는 붉은 입술 위에 찰거머리처럼 얽혀 있었다. 도현의 허벅지와 소율의 슬림한 다리가 헐렁한 셔츠 자락 너머로 아슬아슬하게 밀착해 있었다. 그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뜨거운 열기와 옅은 향수 향이 소율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소율은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3년이었다. 이 남자를 바라보며 혼자 마음을 졸이고, 혼자 눈물을 삼키고, 단 한 번만이라도 그 냉철한 눈동자에 자신이 비춰지길 꿈꿔왔던 시간.​하지만 지금 도현의 눈빛에 깃든 것은 자신이 그토록 열망하던 다정한 애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체 모를 소유욕과 통제력을 잃은 자의 오기, 그리고 남궁혁 대리를 향했던 소유격 질투의 파편에 불과했다.​'아니야. 속으면 안 돼, 한소율.'​소율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서러운 통증이 솟구쳤다.​이 남자는 자신을 사랑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이 만들어놓은 '계약'이라는 틀 안에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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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그래. 연기도 아니고, 회장님을 속이기 위한 연출도 아니야."​도현이 한 걸음 더 밀착했다. 이제는 소율의 가슴과 도현의 가슴 사이에 종이 한 장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분풀이? 그래, 분풀이라고 치자. 내가 왜 저딴 남궁혁 같은 놈 하나 때문에 내 이성을 잃고, 업무에 집중도 못 하고, 지독한 불쾌감에 시달려야 하는지… 나도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으니까."​도현의 커다란 손이 소율의 턱을 낚아채듯 감싸 쥐었다. 소율이 놀라 눈을 크게 뜬 순간, 도현이 나직하게 읊조렸다.​"내가 미쳐가고 있다면, 그 원인은 전적으로 너한테 있어, 한소율."​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도현의 입술이 소율의 붉은 입술 위로 거침없이 내리덮였다.​"읍…!"​소율의 짧은 비명이 도현의 입 안으로 그대로 삼켜졌다.​그것은 폭류와도 같은 입맞춤이었다. 삼켜버릴 듯 깊고, 자비 없는 거친 충돌이었다. 도현은 소율의 턱을 그러쥔 손에 힘을 주어 고개를 고정시키고, 단숨에 그녀의 치열을 가르고 혀를 밀어 넣었다.​소율은 밀려드는 도현의 압도적인 체온과 강렬한 감촉에 뇌리가 하얗게 탈색되는 느낌을 받았다. 소율의 손이 도현의 어깨를 밀어내려 애썼지만, 도현은 소율의 가녀린 허리를 단단한 팔로 감아올려 제 몸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소율의 발꿈치가 붕 떠오를 정도로 강렬한 밀착이었다.​"하읏… 읏…."​소율의 가느다란 숨소리가 도현의 거친 호흡과 얽혀 들었다.​도현의 입술은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화와 질투로 점철된 거친 공격이었으나, 소율의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입안 가득 퍼져나가자 도현의 입맞춤은 순식간에 열렬하고 지독한 탐닉으로 변해갔다.​도현은 소율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천천히 핥아 올리고, 깊숙하게 혀를 섞으며 소율의 숨결 하나하나까지 전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듯 집요하게 파고들었다.​"읏… 도현… 씨…."​소율의 밀어내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도현의 단단한 어깨에 얹힌 소율의 손가락이 주르륵 미끄러지더니, 이내 그의 젖은 와이셔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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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창밖을 가득 채우던 폭우가 잦아들고, 펜트하우스의 커튼 틈새로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도현은 소파 위에서 눈을 떴다. ​전날 밤, 7일 차의 키스 이후 어색함과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거실에서, 도현은 소율에게 침실을 내어주고 자신은 거실 소파에 누웠었다. 밤새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입술 끝에 남아있는 소율의 감촉, 촉촉하던 숨결, 그리고 그녀가 흘린 눈물의 서늘함이 잔상처럼 뇌리에 번갈아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계약서 4번 조항은 오늘부로 파기야, 한소율.' ​자신이 내뱉은 그 한마디는 결코 순간의 기분에 휩싸인 헛소리가 아니었다. 차도현이라는 남자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완벽한 이성의 통제력을 내려놓고 본능에 이끌려 건넨 진심이었다. ​도현은 몸을 일으켜 정돈되지 않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한소율…." ​침실 문을 나직하게 부르며 다가갔다. 하지만 살짝 열린 침실 문 사이로 보이는 침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도현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식탁 위에는 도현의 셔츠가 정갈하게 접혀 올려져 있었고, 그 옆에 메모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팀장님. 세탁된 옷이 다 말라 먼저 출근합니다. 셔츠는 깔끔하게 세탁해 두었습니다. 어제 일은 폭우와 분위기로 인한 비즈니스상의 해프닝으로 묻겠습니다.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해프닝.' ​도현은 메모지에 적힌 그 세 글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턱관절이 경련하듯 강하게 굳어졌다. 전날 밤, 두 사람의 모든 이성을 짓밟고 터져 나왔던 그 뜨겁고 열렬했던 키스를, 한소율은 단 한 줄의 메모와 함께 '해프닝'이라는 단어로 치부하고 도망쳐버린 것이었다. ​도현의 가슴 밑바닥에서 실소와 함께 걷잡을 수 없는 허탈함이 솟구쳤다. ​"해프닝이라…." ​도현의 손 안에서 메모지가 구겨졌다. 그 차가운 선 긋기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베여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은 이 기나긴 가짜 연애의 반환점에서 비로소 진짜 감정을 자각했는데, 그녀는 여전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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