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Chapter 591 - Chapter 600

752 Chapters

제591화

문을 닫자마자 유건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굵은 핏줄이 툭툭 뛰기 시작했다. 시연이 자신의 품에 안겨 있던 모습만 떠올려도 속에서 무언가 폭발할 것 같았다.“고유건, 너 진짜 미쳤다. 짐승이 따로 없네.”그는 작게 욕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시연은 아픈데, 그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유건은 방에서 나왔다. 그가 부탁한 호텔 측의 얼음찜질팩과 생강차도 마침 도착했다. 유건은 얼음팩을 시연의 이마에 조심스레 얹어주고, 생강차를 한 숟갈씩 떠서 입에 가져다 댔다. 아플 땐 유난히 말을 잘 듣는 시연이었다. 유건이 물 마시라고 하면 그녀는 얌전히 마셨고, 알코올 솜으로 몸을 닦아줄 때도 저항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유건은 점점 녹초가 되어갔다. 그 정성은 점차 효과를 보기 시작했고, 결국 밤엔 시연의 상태도 조금 나아졌다. 베개에 기대어 잠든 그녀의 눈가엔 마른 눈물 자국이 살짝 맺혀 있었다. 유건은 그제야 한숨 돌리며 조용히 그녀 곁을 지켰다. 하지만 그는 방심하지 않았다. 30분 간격으로 체온을 체크했고, 그때마다 시연을 살짝 깨워 물을 마시게 하고, 얼음팩도 계속 갈아주었다. 그렇게 새벽을 지나, 시연의 체온은 다행히 더 오르지 않았다. 곧 동이 트려는 시간이었다. 유건은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그저 시연을 바라보는 눈빛엔 절박함과 집착이 뒤섞여 있었다. ‘다행이야... 내가 와서.’ 그가 오지 않았다면, 지난밤 시연 곁에서 지킨 건 은범이었을 것이다. ‘그럼 내가 시연에게 한 모든 일들을... 노은범이 했겠지?’ 그 끔찍한 상상을 하자마자 유건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쭉 흘렀다. ...아침 7시, 시연의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시연은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몸이 한결 가벼워졌고, 막힌 코도 많이 나아졌다. 이어서 팔을 뻗으며 일어나려는데, 유건이 급히 그녀를 붙잡았다.“일어나긴 왜 일어나?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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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2화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시연은 유건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진짜 괜찮다니까요. 그냥... 조금 나른할 뿐이에요.”“시연아.”유건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단호하고 냉정한 톤이었다.“나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야. 협의하자는 것도 아니고.”그리고 시선이 자연스럽게 시연의 아랫배로 향했다. 그 시선 하나에, 시연은 숨을 삼켰다.“너, 너 자신은 둘째치고... 얘한테까지 무심할 거야?”아이 이야기까지 나오자, 시연의 눈빛엔 망설임이 번졌다.“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 이건 일이니까...”‘지금 상황에선 내가 나서야 해...’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데...’유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연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기다려.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이 문제는 그리 복잡한 일이 아니었다. 유건은 바로 양석현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간결하면서도 공손하게 상황을 설명했다.“양 교수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시연이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습니다. 몸이 너무 안 좋아졌네요.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네, 감사합니다...”전화기 너머에서 양 교수는 무언가를 길게 말했다. 시연은 가만히 입술을 다문 채 기다렸다. 두 손은 자연스럽게 아랫배에 모아졌다.“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유건은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내려놨다.“양 교수님이 뭐라고 하셨어요?”“병가를 내주셨어. 바로 다른 사람을 보내시겠대. 그러니까 너는 그냥 푹 쉬어.” 유건은 시계를 확인했다.“지금 아직 7시도 안 됐어. 대체 인원 도착해서 준비하면 충분해.”세미나는 9시 반 시작이었다. 시간상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시연은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배를 감싸 안았다.“고마워요.”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한마디에 유건의 가슴이 묘하게 저릿해졌다.‘이젠... 우리 사이가 이렇게나 멀어진 건가?’ ‘‘고맙다’ 같은 말이 이렇게 남처럼 들리다니.’“고마워할 필요가 없어. 별것도 아니잖아.”표정 하나 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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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3화

“아...”시연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놀란 눈으로 유건을 올려다봤다. 이내 눈동자 깊숙이 깔린 공포감이 그대로 드러났다. ‘방금... 진짜로 넘어졌으면 어쩔 뻔했어... 아이까지...’“놀랐지?”유건은 미안함과 자책이 가득한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 사실, 유건 역시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놀랐다. 턱 끝을 시연의 머리 위에 살며시 대고, 조용히 중얼거렸다.“미안해, 내 잘못이야.”‘네가 손을 뿌리쳤어도, 내가 끝까지 잡았어야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너한테 판단을 맡긴 내가 바보지.’잠시 생각을 정리한 유건은 망설임 없이 긴 팔을 뻗어 시연을 그대로 안아 올렸다.“꺅!”몸이 허공에 뜨자 시연은 짧게 비명을 지르며, 반사적으로 유건의 목을 두 팔로 감았다.따뜻하고 단단한 품속, 시연은 어느새 어리고 여린 고양이처럼 유건 품 안에 조용히 안겨 있었다.‘왜 이렇게... 익숙하고 편하지...?’유건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물처럼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차까지 안고 갈게. 금방이야.”말을 내뱉자마자, 유건은 조금 후회했다. ‘아니, 너무 가깝잖아? 차를 더 멀리 대라고 할 걸 그랬어...’ 지한이 차 옆에 서 있다가 타이밍 맞춰 문을 열어줬다. 유건은 허리를 숙여 조심스럽게 시연을 차 안에 내려놓았다.그녀는 문득, 시트 위에 놓인 작은 쿠션 하나를 발견했다. ‘예전엔 이런 거 없었는데... 설마, 날 위해 준비한 건가?’곧 유건도 차에 올라탄 후, 운전석의 지한에게 조용히 말했다.“출발하자. 그리고 천천히 가. 시간은 충분하니까.”“네, 형님.”차는 조용히 눈길을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밖에선 여전히 눈이 퍼붓는 중이었지만, 차 안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시연이 롱패딩을 벗자, 유건은 바로 담요를 꺼내 그녀 무릎 위에 덮어주었다.“한 시간 정도 걸리니까 잠깐 눈 좀 붙여.”그 순간, 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정돈된 이목구비, 잔잔한 눈빛. 그제야 의문이 떠올랐다.“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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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4화

지금 살고 있는 집 근처에 도착할 즈음, 시연이 눈을 떴다.“도착했어요?”“거의 다 왔어.”유건은 살짝 아쉬웠다. ‘이렇게 금방 깨다니... 좀 더 자도 되는데.’“조금만 더 누워 있어. 도착하면 깨울게.”“이젠 안 잘래요.”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고, 곧 임진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진아야, 나야... 응, 나 도착했어. 혹시 골목 입구 쪽으로 나올 수 있어? 눈이 와서 미끄러질까 봐. 고마워.”그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유건의 눈빛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도착도 하기 전에 이미 다 정해둔 거야.’‘결국... 나랑은 끝까지 선 긋겠다는 거네.’차가 골목을 돌자, 시연의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저기 세워줘요.”시연은 고개를 돌려 유건에게 미소를 지었다.“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진아가 날 데리러 올 거라서, 이만 여기서 내릴게요.”“그래.”유건은 간신히 목을 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혀끝이 씁쓸했다. ‘왜 이렇게 입안이 쓰디쓴 거야...’길 건너, 빨간 롱패딩을 입은 진아가 아이처럼 방방 뛰며 이쪽으로 달려왔다.“시연아!”차에서 막 내리는 시연을 향해 손을 흔들며 외쳤다.“거기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마! 우리 아가 다치면 안 되잖아. 아가야, 이모가 왔어!”시연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모! 잘 들려요!” 유건은 차 안에서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연이 진아의 팔짱을 끼고, 조심스레 발을 옮기며 단지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까지.그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그는 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앞자리에서 지한이 힐끔 유건을 보았다. ‘형님이 형수님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건 누가 봐도 뻔한데...’‘왜 그렇게 혼자 아닌 척하는 건지... 참 답답하네.’ 지한은 이를 악물고 속으로 외쳤다. ‘이래서야 어찌 제대로 풀리겠냐고요...’그때, 유건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화면을 한 번 보고, 곧장 받았다.“네, 할아버지.”전화기 너머로 낮고 단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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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5화

유건은 할아버지의 말에 눈을 크게 떴고, 머릿속이 순간 새하얘졌다.“할아버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흥.”고상훈은 비웃듯 콧소리를 내뱉고, 차갑게 손자를 곁눈질했다.“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서 묻는 거냐?”“할아버지...”“유건아, 난 아픈 거지, 죽은 게 아니야!”단호하게 떨어지는 목소리. 분노와 실망이 뒤섞인 톤이었다.“너, 또 그 여자 연예인이랑 엮였지? 맞냐, 아니냐?”“그게 아니라... 소미 씨가 그때 다쳐서...”유건은 급히 해명하려 했지만, 고상훈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변명 같은 건 필요 없어!”고상훈은 짜증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안다. 시연이랑 따로 산다는 것도... 내가 몰랐을 것 같냐? 결국 다 그 여자 때문이잖아. 그러고도 네 주제에 시연이가 외도했다고 몰아세워?”그 말에 유건은 할 말을 잃었다. ‘그때,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나는...’고상훈의 시선이 이번엔 시연을 향했다. 그 눈빛엔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가득했다.“시연아, 할아버지가 정말 미안하다.”“아니에요... 할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시연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을 막았다. 목이 콱 멘 듯했다.‘이런 말을 들으려고 여기 온 게 아닌데...’“넌 좋은 아이야. 그건 내가 제일 잘 안다.”고상훈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유건을 향해 돌아섰다.“시연이가 바람을 피웠다고? 그건 그냥 핑계야. 네가 책임을 회피하려고 만든 말이지.”“할아버지...”유건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딱히 내놓을 말도 없었다.‘맞아, 결국 내가 잘못한 거니까.’ “제 잘못입니다.”유건도 더는 변명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시연을 오해했고, 다그쳤고, 상처 줬으니 말이다.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됐어.”고상훈은 깊은숨을 내쉬며 말했다.“애초에 넌 시연이랑 결혼할 생각이 없었잖아. 그걸 내가 억지로 밀어붙인 거고. 결국 이 모든 잘못은 나한테 있는 거다.”그는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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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6화

“할아버지, 또 올게요.”시연은 조용히 인사한 뒤 고개를 숙였다.“그래, 그래. 우리 착한 아가.”고상훈은 인자한 미소로 시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시연은 단 한 번도 유건을 보지 않았다. 그저 고상훈에게 인사를 끝내고 곧장 병실 밖으로 돌아섰다.“시연아...”유건이 본능적으로 뒤따르려는 순간, 고상훈의 낮고 묵직한 한마디가 방 안을 가르며 울렸다.“멈춰라!”“넌, 무슨 자격으로 쫓아가냐?”“할아버지...”유건의 발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혼란스러웠다. 머릿속도, 가슴도 엉망이었다.‘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왜 하필 지금... 할아버지는 이렇게까지...?’“따라가지 마.”고상훈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긴말을 내뱉은 뒤의 피로감이 얼굴에 역력했다.그는 유건을 바라보며 말했다.“넌 네 아이가 너처럼 자라길 바라는 거냐? 커서도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살아가길 원해?”유건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쪼여 드는 듯했다. 숨이 막혔고, 가슴 한가운데가 찢기는 기분이었다.‘나처럼...?’그 말은 유건에게 치명적이었다. 고상훈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반드시 해야 할 말이기에 던졌다.“한 가지만 약속해라.”고상훈은 더 이상 차가운 말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친, 마지막 당부처럼 낮고 느린 말투였다.“그 여자 연예인? 좋다, 네가 좋다면 만나라. 나도 더 이상 참견하지 않으마. 하지만 내 눈앞엔 절대 데리고 오지 마. 우리 집안엔 한 발짝도 들이지 마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엔 절대로.”‘너는 선택했고, 나는 그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대신, 내 마지막 자존심만은 지킬 거다.’그 말이 끝나자, 고상훈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인제 그만 가봐. 피곤하구나. 쉬어야겠다.”유건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목은 뜨겁고, 가슴은 무겁고, 머릿속은 멍했다.‘나는 지금, 모든 걸 잃은 건가?’...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시연을 따라 병실을 나섰다. 배가 많이 불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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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7화

병가를 낸 김에, 시연은 아예 집에서 푹 쉬기로 마음먹었다. 임신 후반기인 만큼, 몸 상태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곤란했다. ‘지금은 무리하지 말고, 그냥 자는 게 제일 좋은 휴식이지.’그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히 요기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낮에도 마찬가지. 계속 잠을 자던 시연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무렵에서야 속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커튼을 젖히자, 창밖엔 눈이 이미 멎어 있었다. 하지만 풍경은 오히려 더 쓸쓸하고 차가워 보였다.‘배고프다...’그 순간, 시연은 문득 컵라면이 당겼다. ‘가끔 한 번쯤은 괜찮겠지. 너무 자주만 아니면...’이어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달걀도 있고 채소도 조금 남아 있었다. 적당히 끓여 먹기 딱 좋은 상태.그녀가 준비를 시작하던 중,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유건이었다.“여보세요?”[집이야?]“네, 왜요?”[나 지금 네 아파트 1층이야. 올라갈게.]“알겠어요...”시연은 별다른 거절 없이 대답했다. ‘이혼 관련해서 정리하러 온 거겠지.’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 벨이 울렸다.문을 열자, 카멜색 롱코트에 같은 톤의 머플러를 두른 유건이 서 있었다. 워낙 잘생긴 얼굴에 깔끔한 옷차림이라, 말 그대로 ‘탑모델’ 그 자체였다.“들어와요.”시연은 돌아서며 말했다.“슬리퍼가 큰 게 없네요. 그냥 양말 신고 들어와도 돼요. 집이 따뜻해서 안 추울 거거든요.”유건은 조용히 거실 소파에 앉았고, 시연은 부엌에서 물을 따라왔다.“여기... 물이에요.”유건에게 컵을 건네며 덧붙였다.“따뜻한 물이에요. 당신 위 약하잖아요. 더군다나 요즘 추워서 찬물 마시면 안 돼요.”순간 눈빛이 흔들린 유건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말했다.“날 걱정하는 거야?”시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마실 거예요, 말 거예요?”그 표정을 눈치챈 유건은 바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마실게.”조용한 공간에, 컵을 탁 놓는 소리가 났고 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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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8화

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 맑고 커다란 눈엔 어딘가 천진난만한 분위기가 맴돌았다.“여기 오자고 한 건 당신이니까, 오늘 당신이 사는 거죠?”“응...?”유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당연하지. 근데 왜 그런 걸 물어?”“그냥 확실히 해두려고요.”시연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고는 아직 옆에 있는 직원 눈치를 보며 작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앞으로 나 혼자선 이런 데 못 올 거예요. 오늘 제대로 배 채우고 가야죠.”그 말에 유건의 손이 잠시 멈칫했고, 표정도 살짝 굳었다.‘앞으로 못 온다니, 왜 이렇게 쉽게 선을 긋는 거야?’“아냐, 네가 먹고 싶으면 언제든 데려올게.”그가 조용히 말했다.“말이라도 고마워요.” 시연은 웃었지만,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근데... 굳이 다시 데려오진 마요. 혹시 장소미가 알게 되면...? 아마 속이 터져라 질투하겠죠? 그건 당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에요.”‘또 장소미...’미간을 살짝 떨던 유건이 입을 열었다.“시연아, 우리 일이랑 다른 사람은 아무 상관 없어.”“네?”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유건을 바라봤다. 곧 이해한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결국, 장소미 편을 들겠다는 거네. 우리 관계가 여기까지 온 게 그 사람 때문은 아니라는 뜻... 그래, 알아. 다 내 탓이지 뭐.’“나도 장소미를 탓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 이혼하는 건... 애초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잖아요. 나도 잘 알고 있어요.”유건의 시선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게... 네가 알고 있는 전부라고?’‘아니야, 사랑... 없었던 건... 너 하나뿐이었어.’그때, 직원이 음식 카트를 밀며 들어왔다.“고 대표님, 사모님, 실례하겠습니다.”테이블 위에 따뜻한 음식이 하나둘 차려졌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시연은 코끝을 찌푸리며 군침 도는 표정으로 말했다.“먹어.”유건은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고, 곧장 시연이 접시에 반찬을 덜어줬다.직접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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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9화

“시연아!”유건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시연을 그대로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눈을 떼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 눈동자에는 걱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어디 아파? 또 불편해?”시연은 눈을 꼭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또야... 이 어지러운 느낌...’ ‘눈앞이 자꾸 흔들려...’세상이 좌우로 출렁이는 듯한 익숙하면서도 낯선 어지럼증이 다시 찾아왔다. “시연아?”아무런 대답 없는 시연에 유건의 불안은 점점 커졌다.“조금만... 잠시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잠깐 기다리자고? 이 상태에서 어떻게 기다려?’유건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고, 두 팔로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며 말했다.“기다릴 수 없어. 병원 가자.”시연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유건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재빨리 차로 향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그가 평소 신뢰하던 사설 산부인과였다.예약하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오늘 밤 근무는 오선화 교수였다. 시연은 검진실 침대에 누워 있었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유건 앞에 오선화가 나타났다.그녀는 양팔을 가볍게 감싸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유건을 훑었다.“어머, 고 대표님. 그렇게 바쁜 분이 오늘은 웬일이세요?”그 말투에는... 분명한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유건은 바로 기억해 냈다. 며칠 전, 오선화 교수에게 전화가 온 적 있었다. 하지만 당시 시연과 냉전 중이던 그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땐 감정이 너무 엉켜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그리고 바로 표정을 차분히 가다듬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교수님, 지난번 연락하셨을 때 못 받아서 죄송합니다.”“됐어요.”오선화는 쿡 웃고 고개를 살짝 저었다.“고 대표님이 사과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고 대표님의 아내와 아이에게 해야죠.” ‘그게 무슨 뜻이지?’유건은 직감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그 말의 속뜻을 읽으려는 듯,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교수님, 돌려 말하지 마시고... 솔직히 말씀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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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0화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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