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Chapter 571 - Chapter 580

756 Chapters

제571화

집에 돌아온 시연은 서둘러 박스를 꺼내 큰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졸업 논문과 관련된 모든 자료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원본 USB까지 포함해서, 단 하나도 빠짐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건 전부 시연이 직접 발로 뛰며 모은 결과물이었다. ‘절대 버릴 수 없어. 아무 데나 놓는 것도 싫어.’ 이 자료들만 있으면,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안했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그 자료들을 들고 양석현 교수에게 찾아갔다. “교수님, 여기 있습니다.” “그래.” 양석현은 자료를 꼼꼼히 넘겨보며 미묘하게 안도의 빛을 띠었다. “이 정도면, 정은주가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못할 거야. 고작 입으로만 떠든다고 다 되는 줄 아나?” “네.” 이제 남은 건 학교와 병원의 조사 결과였다. 그날 오후, 양석현이 다시 연구실로 돌아왔을 때,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길한 예감이 점점 커졌다. “아직 단정하긴 이르지만...” 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하게도, 정은주 쪽에서도 뭔가 자료를 제출했더라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 사람이? 자료를?’ ‘거짓으로 나를 모함한 사람이,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나도 정확히는 몰라. 나는 네 담당 교수이고, 이번 사건은 학교와 병원이 직접 조사하는 부분이라 나한테는 공유가 안 됐거든. 아무튼 좀 기다려보자.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게 돼 있으니까.”“네...” ...그렇게 이틀이 흘렀다. 시연은 불안함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하루하루를 견뎠다. ‘뭔가, 진짜 잘못될 것 같아... 정말 큰일 나는 거 아닐까...’ 그리고 셋째 날, 결국 소식이 전해졌다. 양석현 교수는 무거운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봤다. 말을 꺼내기 어려운 듯,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연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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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2화

“아직 끝난 거 아니야. 내가 있잖아. 방법을 찾아볼게.” “감사합니다, 교수님.” 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새로운 증거를 내놓지 못하면, 아무리 양 교수라 해도 오래 버티기 힘들다는 걸. ‘교수님께서 아무리 힘이 있어도, 결국 학교와 병원이 결정권을 쥐고 있는데...’ 역시나, 다음 날 아침. 시연은 병원으로부터 직무 정지 통보를 받았다. “시연아.” 양석현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직 절망할 단계는 아니야. 우리... 같이 더 고민해 보자.” “네, 교수님.”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시연은 이미 마음속으로 체념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뭘 더 할 수 있지...?’ 그녀는 애써 정신을 붙들며, 작게 웃음을 지었다. “교수님, 괜히 걱정 끼쳐드렸네요.” “그런 말은 하지 마라.” 양석현은 손을 저으며, 시연을 다시 찬찬히 바라봤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결국 입을 열었다. “이 일... 고 대표한테 말했니?” “네...?” 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 교수를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녀가 말할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유건에게 말해야 할 이유가 대체 뭐가 있을까... ‘우린 원래부터...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잖아.’ 양석현은 장미리 사건 이후, 제자와 고유건 사이에 묘한 거리감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상하지 않니? 정은주가 널 고발해서 얻을 게 뭐가 있을까?” 시연은 그 말에 눈을 번뜩였다.‘그러고 보니... 그 애가 이걸로 뭘 얻는다고?’은주도 논문이 자기 거라는 걸 명확하게 입증할 수 없을 터였다. 그녀가 이렇게 나선 건 그저 시연에게 더러운 오명을 씌우기 위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얻을 것도 없는데 왜 굳이 이런 짓을 했을까?” 양석현은 의아한 얼굴이었다. “혹시 너, 정은주랑 사이 안 좋았니?” “설마요.” 시연은 미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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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3화

시연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내가... 이 사람한테 뭘 잘못했나?’ “아이고야!” 옆에서 군고구마 리어카를 밀던 아주머니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 임신한 처자가 왜 그렇게 길을 멍하니 걸어? 부르는데도 못 들었잖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시연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제가... 잠깐 정신이 없어서요.” “됐고, 다음부턴 조심해. 홑몸도 아니잖아.” 시연은 다시 고개를 들었고, 그제야 유건의 얼굴이 왜 그렇게 굳어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화냈구나... 하지만 이 사람...’‘이제 제발, 이 손 좀 놓아주면 안 되나?’“고마워요. 정말 괜찮아요.” 유건은 그런 시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허탈한 듯 비웃으며 말했다. “정말... 네 몸은 네가 제일 안 챙기는구나?”“길에서 그렇게 멍때리고 다니면 어쩌자는 건데?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 ‘또... 혼난다.’ 시연은 고개를 툭 떨구고,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천천히 귀에 꽂았다. “아무 생각 안 했어요. 그냥 잠깐 정신이 나갔어요.” 그러고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거 보니까... 할아버지 뵈러 가는 길이죠?” “응.” 유건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짧게 대답했다. “아침 식사 같이하려고.” “그럼 얼른 가봐요.” 시연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할아버지 기다리시겠네요.” 유건은 그대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사실, 그는 말하고 싶었다. ‘같이 갈래?’ ‘우리... 진짜 오랜만에 같이 가는 거잖아.’ ‘할아버지도 몇 번이고 물어보셨어. 왜 요즘은 너희 둘이 같이 안 오냐고...’ 하지만 유건은 말이 안 나왔다. 며칠 전, 시연이 전화했을 때. 문자를 보냈을 때. 그는... 아무것도 답하지 못했다. “응, 알겠어.” 결국 유건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그럼, 잘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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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4화

‘도대체 누가 감히, 시연의 직책을 정지시킬 생각을 했단 말이야?’ ‘누가 그런 짓을 해? 제정신이야?’ [그게요... 시연이가 신고를 당했어요.] 하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했다. 그리고 그 뒤로,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건에게 설명했다. 유건은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쥔 손만 꾹 움켜쥘 뿐이었다. “알았어.” 짧은 대답 후, 전화를 끊기 직전. “근데, 이번 일... 왜 나한테 바로 말 안 했어?” 하은은 사실상 유건의 부탁으로 시연을 챙기고 있었다. 이렇게 큰일이 벌어졌는데, 아무 얘기도 없었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게...] 하은은 목소리를 낮추고 망설였다. [두 분... 자주 보시잖아요. 시연이가 직접 말할 줄 알았어요.] 유건은 그 말을 듣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마워, 끊을게.” 뚝-전화가 끊긴 뒤, 하은은 핸드폰을 꼭 쥔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있었다. ‘고 대표님이... 시연이 직무가 정지된 것도 몰랐다니.’ ‘확실해, 둘 사이에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설마... 헤어진 건가...?’ ‘...’유건은 여전히 핸드폰을 쥔 채, 가만히 입술을 움직였다. “힘든 일이 생겼고, 혼자 해결할 수도 없는데... 왜 나한테 말 안 해?” ‘아니면... 이젠 나 말고, 의지할 사람 생긴 건가?’ ‘예를 들면 노은범이라든가...’ ...시연의 집. 아침을 간단히 먹은 임진아는 다시 나섰다. 다른 학과 친구들에게 정은주에 대한 정보를 수소문하러 간다고 했다. 진아가 나간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현관 벨 소리가 울렸다. 띵동-“갑니다, 가요!” 시연은 진아가 뭔가 놓고 갔나 싶어 얼른 문을 열었다. “뭐 두고 갔어?” 그런데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유건이었다. 시연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왜... 이 사람이 여기...?’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그녀에게, 유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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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5화

시연은 유건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왜 이렇게 흥분해...?’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갑자기 그 사람을 왜 끌어들여요?” 유건의 표정이 순식간에 더 굳어졌다. 그리고 비웃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뭐야, 노은범 얘기 좀 했다고 벌써 마음이 아파?” “뭐라고요?” ‘진짜 또 시작이네. 이 사람, 또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어.’ 시연은 그저 어이가 없었다. 논문 문제로 정신이 탈탈 털리고 있는 와중에 유건의 질투까지 받아줄 마음은 없었다. “할 말 다 했으면 이제 나가줄래요? 진짜 피곤해요.” 말 끝나기 무섭게, 시연은 푹 하고 소파에 앉았다. 유건을 더는 쳐다보지도 않고,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원래 물 한 잔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됐어, 개한테 물 떠줄 이유는 없잖아.’ 그 모습을 본 유건은 눈썹을 실룩였다. ‘화났네... 또...’ ‘첫사랑이란 게 이래서 무서운 건가? 말 한마디 했다고 바로 정색이네.’ 하지만 화를 내면서도, 유건은 마음이 불편했다. 아무래도 시연과 싸우려고 온 게 아니었으니까.“그렇게 급하게 내쫓진 마.” 유건은 겨우 억누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말 다 안 했어. 안 나갈 거야.” ‘와... 진짜 철면피.’ 시연은 속으로 혀를 찼지만, 말하진 않았다. 그 순간, 유건이 살짝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낮고 단호한 톤으로 말했다. “내가 도와줄게. 이 일... 나만이 해결할 수 있어.” “네?” 시연은 얼떨떨했다. ‘뭐야, 이 분위기 전환은 또 뭐야?’ ‘소리치고, 질투하고, 어이없는 말만 하더니... 결국은 도와주겠다고?’ “됐어요.” 남자를 빤히 바라보던 시연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도움 안 받아도 괜찮아요.” “거절한다고?” 유건은 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딱히 놀라지도 않았다. ‘이래야 너답지. 너라면 무조건 혼자 하겠다고 해야 하니까.’ “왜?” 시연은 말없이 눈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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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6화

유건은 무심하지만 분명한 시선으로 시연의 아랫배를 바라보았다. “마음 다잡고, 감정 조절 잘해야 해.” 시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네... 알고 있어요.” 유건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고, 현관 쪽으로 두 걸음 정도 걷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도 없긴.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물 한 잔도 안 줘?” “그... 그건...” 시연은 당황해 입술을 달싹였다. 사실, 주려고 했는데... 분위기 때문에 놓쳤던 거였다. “목말라요? 지금 줄게요...” “됐어.” 유건은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다음에 마실게. 좋은 소식 들고 올 테니까.” 시연은 그를 문까지 배웅했다. “조심히 가요. 잘 가고요.” “응.” 문이 닫히고, 그가 완전히 사라졌다.시연은 현관 앞에 서서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긴 숨을 내쉬었다.‘결혼 생활은... 정말 엉망이었지만, 그 사람, 나한텐 꽤... 잘해주긴 했어.’ ...그날 밤, 유건이 다시 찾아왔다. 문을 열자, 시연은 별말 없이 그를 집 안으로 들였다. 아침에 유건이 했던 그 한마디 ‘물 한 잔도 안 주냐’가 마음에 남았던지, 이번엔 먼저 말을 꺼냈다. “물 가져올게요. 근데 우리 집엔 얼음이 없는데... 괜찮아요?” 유건은 평소에 얼음이 가득한 찬물을 좋아했다. “괜찮아, 오늘은 안 마셔도 돼.” 유건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은 아침보다 조금 더 부드러웠다. “밥은 먹었어? 나 배고파. 같이 먹자.” 시연은 바로 거절하려 했다. 이미 대충 만두 몇 알로 때운 상태였으니 말이다. 마음이 복잡해 식욕도 없었고, 그냥 넘기려던 참이었는데, 유건이 곧바로 덧붙였다. “할 말 있어.” “논문... 때문이에요?” “당연하지.” 그렇게 말하니,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잠깐만요. 핸드폰이랑 열쇠 챙겨 올게요.” “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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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7화

시연은 유건이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그래, 설령 정은주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미안하다, 내가 일부러 그랬다’고 인정한다고 해도...’‘이미 소문은 퍼질 대로 퍼졌고, 회자될 만큼 회자됐어.’ ‘결과가 어떻게 나든, 내 이름 옆에는 평생 ‘표절 의혹’이 따라다닐 거야.’ “그런데... 진짜 증거 있어요?” 시연조차 내놓을 수 없는 걸 유건이 어떻게 가지고 있다는 걸까? “지금은 안 알려줄 거야.” 유건은 슬쩍 웃으며 말을 아꼈다. “결과 나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그때가 되면... 너도 알게 될 거야.” 말을 마친 그는 다시 시연의 그릇에 반찬을 툭 얹었다. “좀 더 먹어. 요즘 들어 너... 살 빠진 거 같아.” “그래요? 잘 모르겠는데요...” “확실히 빠졌어.” ...식사가 끝나고, 유건은 시연을 집에 데려다줬다. 그러고는 혼자 클럽으로 향했다. 그곳엔 지하, 강석, 정빈 등 익숙한 얼굴들이 모여 있었다.잠시 후, 주재호 변호사도 도착했다. 주재호는 다른 이유로 온 것이 아니라, 오직 유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 대표님.” “앉아.” 유건은 정장 재킷 단추를 풀며, 그대로 소파에 몸을 던졌다. “진행 상황은?” “계획대로 잘 진행 중입니다.” 주재호는 침착하게 보고를 이어갔다. “사모님과 정은주 씨가 각각 제출한 자료는 모두 과학수사팀으로 넘겨졌습니다.” “결과는 언제 나와?” “정확한 날짜는 장담 못합니다. 하지만 최대한 신속하게 처리해 달라고 했고, 이미 수사팀도 야근 중입니다.” “좋아.” 유건은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지하는 유건을 한 번 쓱 쳐다보고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야.” 바에 기대앉아 있던 강석이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주 변호사까지 끌어들이고, 수사팀까지 동원하고... 그깟 논문 표절 신고 하나에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야?” “오버하게 둬.” 지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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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8화

유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젊은 조교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시연을 향해 고개를 숙여 눈을 맞췄다.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밖에서 기다릴게. 너무 긴장하지 마.” “그래요.” 시연은 짧게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시연과 은주는 조교의 안내를 따라, 옆쪽에 있는 작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이미 의대 학장과 부학장, 그리고 양석현 교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시연의 눈이 양석현과 마주쳤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은근한 미소로 응답해 줬다. 바로 그때, ‘괜찮아질 거야.’ 시연은 이유 없이 그렇게 느꼈고,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고유건이...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어떻게 여기까지 끌고 온 거야?’ “앉으시죠.” “네.” 시연과 은주는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학장은 두 사람 앞에 똑같은 문서를 한 부씩 내려놓았다. “이건 감정 결과 보고서예요. 원본은 학교 쪽에서 보관 중이고, 이건 사본이에요.” 시연은 고개를 숙여 문서를 펼쳤다. 감정서 첫 장엔, 검토 대상이 명시되어 있었다. 양측이 제출한 원고지, 수기로 작성한 것과 프린트된 자료. 그리고 USB 저장 매체. 결과란에는, 선명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A안 자료의 경우, 손글씨와 인쇄 상태 모두 오래된 것으로 감정됨. 가장 이른 기록은 약 1년 반 전으로 추정.] ‘맞아, 나는 정확히 1년 반 전부터 졸업 논문을 준비했었지.’ 그 사실이 고스란히, 종이와 펜 자국에 남아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걸... 감정으로 증명해 낼 수 있다니.’ 시연은 숨을 들이쉬고, 다음 장을 넘겼다. USB 역시 복구 흔적을 통해 분석되었고, 가장 오래된 파일 기록은 약 6개월 전으로 확인되었다. 반면 B안 자료, 그러니까 정은주가 제출한 자료는 훨씬 단순했다. 모든 종이와 USB 기록, 가장 이른 흔적조차 고작 ‘2주 전’이었다. 모든 자료의 아래에는 G시 지방경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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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9화

“고마워요.” 시연은 조금 가까이 다가서며 중얼거렸지만, 이는 진심을 담은 한마디였다.말로 다 못 담는 감정이, 그 짧은 말에 담겨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이 과학수사팀에 의뢰할 수 있다니, 생각조차 안 해봤어.’ 아니, 설령 생각한다고 해도 그건 시간과 자원이 엄청나게 드는 일이었다. 반년, 일 년, 어쩌면 그 이상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진실이 밝혀진다 한들, 잃어버린 시간과 기회, 명예는 절대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그런 일을 유건은 단 며칠 만에 해냈다. ‘이 사람에겐 내가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어. 난 그걸 자꾸만 느끼게 된다고.’ 자신도 모르게, 시연은 고개를 들어 유건을 바라봤다. 크게 차이 나는 키 때문에, 시연은 고개를 젖혀야 했다. 그리고 그 눈동자엔 무의식적으로 존경과 의지의 감정이 어렸다. 그건 시연조차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었다.하지만 유건은 단박에 느꼈다. 그래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시연 쪽으로 몸을 숙였다. 조금 더 가까이. “혹시 지금... 나 좀 멋있다고 생각한 거야?” 시연은 멍해졌다. ‘뭐지, 지금 질문... 나만 이상하게 들리는 거야?’ 게다가 너무 가까웠다. 유건의 숨결이 얼굴에 닿았고, 그 온기에 시연의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뜨거워...’ 시연은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네...” 진심을 담아, 아주 조심스럽게. 그 순간, 유건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얘 지금... 얼굴이 붉어졌나?’ “시연아!” 갑자기 흐느끼는 목소리가 회의실 쪽에서 터졌다. 눈가가 시뻘게진 은주가 울면서 두 사람 쪽으로 뛰어왔다. 유건은 망설임도 없이 시연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뒤로 살짝 감췄다. 거의 반사적으로. 보호 본능 그 자체였다. “경고하는데, 내 아내한테 가까이 오지 마.” 은주는 멈칫했고, 눈물 젖은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저... 뭐 하려고 했던 거 아니에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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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0화

말을 마친 유건은 웃음을 거두고, 날카롭게 내뱉었다. “빨리 꺼져.” 은주는 유건의 눈빛에 숨이 턱 막혔다. 그 안에 담긴 서늘한 분노가 피부를 찌르는 듯했다. “그래요... 인정 안 할 거면 갈게요!” 울먹이며 뒤돌아선 은주는 그대로 뛰쳐나갔다. 은주가 사라지자, 남은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 시연은 입술을 꾹 다물고,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 분위기, 왜 이렇게 민망하지...’ “저기, 그게...” 유건은 식은땀이 날 정도로 당황했다. 해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서둘러 말을 꺼냈다. “오해하지 마. 그날 클럽에는 지하랑 거래처 사람들이 있었고...”“굳이 설명 안 해도 돼요.” 시연은 황급히 손을 저었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우리 사이에 그런 설명까지 필요하진 않잖아요. 법적으로만 안 끝났지, 서로의 감정은 이미 끝났으니까.”‘당신 마음은... 장소미를 향하고 있잖아.’ ‘이제 와서 해명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 말을 들은 유건은 얼어붙은 듯 시연을 바라봤고,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끝났다고?’ 둘 사이에 감돌던 공기가 더 묘하게 얼어붙었다. 시연은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장소미도 아니잖아요... 오히려 다행이죠, 뭐. 장소미였으면, 아까 그 상황을 설명할 겨를도 없었을걸요?”그 말에 유건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하... 그 이름을... 왜 굳이 지금 꺼내는 건데.’ 시연도 순간 후회했다. ‘말... 잘못했나?’ ‘괜히 분위기 풀어보려다 더 망친 것 같아...’이렇게 생각한 시연이 헛기침하자, 유건이 먼저 말을 꺼냈다.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그는 먼저 걸음을 옮겼고, 시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남자를 따라갔다. 차 안. 출발한 뒤에도 유건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운전만 할 뿐. 남자의 손은 단단히 핸들을 쥐고 있었다. 표정은 차분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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