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Chapter 651 - Chapter 660

731 Chapters

제651화 사과해야 했다

민여진은 눈치를 채고는 말없이 차에 오른 뒤 안전벨트를 매었다.이동하는 내내 박진성은 끊임없이 기침을 했다. 때로는 숨이 넘어갈 듯, 마치 장기를 다 토해내려는 것처럼 거세게 쿨럭거렸다.서원도 듣다못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약국에 들러 약이라도 사시는 게...”“운전이나 해.”박진성은 차갑게 잘라 말했다.“시간 낭비하지 마.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 해.”서원은 어쩔 수 없이 페달을 더 깊이 밟았다.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탑승수속이 시작된 뒤였다. 서원은 민여진에게 항공권을 내밀며 말했다.“여진 씨, 좀 있다가 승무원에게 말씀드리면 퍼스트 클래스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뭐지?’뜻밖의 말에 민여진은 멈칫했다.“그럼 두 분은요? 같이 안 타세요?”“그럴 리가요.”서원이 머뭇거렸다.“퍼스트 클래스 자리가 하나밖에 안 남아서요. 저와 대표님은 비즈니스석입니다.”너무나도 절묘한 우연이었다.민여진은 의아했으나 더 캐묻지 않았다. 그녀는 승무원의 안내를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눈을 붙이고 잠시 쉬다가 깨어나니 입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퍼스트 클래스 구역은 텅 비어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그녀는 승무원에게 물을 부탁하며 물었다.“퍼스트 클래스는 꽉 찼다고 들었는데 사람이 왜 이렇게 없죠?”“꽉 찼다니요?”승무원은 부드럽게 웃었다.“빈자리는 많아요. 잘못 들으신 것 같아요.”‘잘못 들었다고? 분명 서원이 그렇게 말했는데.’민여진은 그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는 승무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창밖을 바라보았다.시야에서 뿌연 빛이 끝없이 번져갔다. 오래전부터 먹지 않은 약이 떠올랐다. 뇌 속의 혈전을 완화해 주는 약이었다.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기내의 공기는 따스했지만 몸은 순간적으로 싸늘해졌다.박진성을 증오하고 그와 멀어지는 것, 이혼 서류를 손에 쥔 뒤 각자의 길을 가는 것, 이것이 가장 나은 결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사이의 오해는 많은 원망 속 하나의 작은 파편에 불과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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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2화 난 진심으로 걱정하는 거야

다행히 별장에 직접 올라갈 필요는 없었다.서원이 안전벨트를 풀며 물었다.“대표님, 서류들은 어디에 두셨습니까?”박진성이 몸을 일으켰다.“내가 가져올게.”서원이 곧장 막아섰다.“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날도 춥고 제가 가는 게 더 빠를 겁니다.”박진성은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신분증은 서재 맨 오른쪽 서랍에 있어. 혼인관계증명서는...”박진성은 멈칫하더니 덧붙였다.“혼인관계증명서는 침실 베개 밑에 있어.”‘베개 밑?’민여진은 순간 멍해졌다가 금세 정신을 차렸다. 가슴 언저리가 저릿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혼인관계증명서를 베개 밑에 숨겨두었다니... 왜지?’이해할 수 없었다.처음 증명서를 발급받았을 때, 그녀는 자신의 것을 정성스럽게 면포에 싸 두었다. 그러나 박진성은 무심하게 거실 탁자 위에 내던졌고 두 번 다시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그의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버티는 것에 불과했다. 혼인관계증명서 역시 이혼할 때 써먹을 도구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가장 보이지 않는 구석에 처박아둬야 했다.서원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차 문을 닫고 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뒤쪽에서 박진성의 목소리가 한발 빠르게 들려왔다. 차가운 말투였다.“오해하지 마.”“베개 밑에 둔 건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야. 너랑 이혼할 준비를 진작에 해뒀으니까 저번에 양성에 왔을 때 서랍에서 미리 꺼내서 베개 밑에 둔 거야. 언제든지 쉽게 꺼내 쓰려고.”적당히 합리적인 대답이었다. 민여진도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이게 정답이어야 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응.”박진성은 말없이 창문을 열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차 안에 연기가 퍼지진 않았지만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소리는 민여진의 귀에 또렷이 들어왔다.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아직 기침하잖아. 그러니까 담배는 피우지 마.”담배를 입술에 가져가던 박진성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대로 빨아들였다. 그는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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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3화 이혼

박진성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그 납치 사건에 대해서는...”“대표님, 민여진 씨.”언제 나왔는지 모를 서원이 차 문을 열며 말했다.“필요한 것 다 챙겼습니다.”“그래.”박진성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짧게 말했다.“가자.”서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다시 시동을 걸었다.구청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정오가 되는 시간이었다.민여진은 정신을 추스르고는 서원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얼떨떨함과 아득함이 한꺼번에 스쳐 갔다.‘이제 정말 이혼하는구나.’불과 2년밖에 안 되는 결혼 생활이었지만 반평생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완전히 정리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모든 것이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민여진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 사이, 박진성도 차에서 내렸다. 둘은 함께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직원이 물었다.“혼인신고 하러 오셨어요? 앞쪽 창구로 가시면 됩니다.”박진성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아니요. 이혼하러 왔습니다.”“이혼이요?”직원은 놀란 기색으로 그들을 훑어보았다.“너무 잘 어울리셔서 그만... 이혼 창구는 저쪽입니다.”“감사합니다.”박진성이 먼저 걸음을 옮겼고 민여진은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절차는 혼인신고와 다르지 않았다. 복잡한 것도 없었다. 책자 같은 것이 손에 떨어지는 순간, 그녀는 험난했던 결혼 생활이 끝났다는 것을 실감했다.차에 오르자 마음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서원이 물었다.“민여진 씨, 이제 어디로 모실까요? 귀국 항공편은 오늘은 매진이라 내일로 예약하셔야 합니다. 우선 별장으로 모셔다드릴까요?”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천천히 움직였다.그녀는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는 물었다.“어느 별장으로 가는 거예요?”서원이 대답했다.“당연히 대표님 댁이지요.”그곳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남아 있었다. 민여진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입을 열기도 전에 박진성이 말했다.“호텔로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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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4화 네가 원하는 건 다 해줬는데

민여진은 잠깐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 박진성의 방문을 두드렸다. 한참 뒤, 안쪽에서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문 열려 있어.”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기침 소리는 더 뚜렷하게 들려왔다. 박진성은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지도 않은 채,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서원아, 내려가서 물 좀 떠 와.”민여진은 대꾸도 없이 발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끓여둔 물이 없었기에 주전자를 올려 물을 데우고는 작은 약상자까지 챙겨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그녀가 내민 컵을 받으려 몸을 일으킨 순간, 박진성의 시선이 그녀의 가늘고 흰 손가락에 닿았다. 그제야 눈길이 얼굴로 옮겨졌다.“왜 네가...”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오늘 민여진이 이 집에 머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서원은 진작에 퇴근했을 시간이었다.민여진은 대답하지 않고 약상자를 침대 곁에 내려놓으며 물었다.“기침약은 어디 있어?”박진성은 답하지 않았다. 물을 반쯤 마시고는 곧장 몸을 다시 눕히며 말했다.“나가.”민여진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박진성, 지금은 고집부릴 때가 아니야. 이렇게 심하게 기침하는 걸 약도 안 먹고 그냥 두면 병원에 가야 할 거야.”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낮게 이어 말했다.“아니면 박 여사님께 전화할까?”이정화는 박진성의 건강에 예민한 사람이었다. 박진성의 상태를 알면 곧장 병원으로 데려가려 할 것이 분명했다.박진성의 눈빛은 그제야 움직였다.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꿰뚫을 것처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민여진은 시선을 떨구고 되물었다.“기침약, 어디 있어?”“없어. 다 유통 기한 지나서 못 먹어.”“유통 기한이 지났다고?”민여진이 멈칫했다.“왜?”박진성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왜긴, 그 약상자는 원래 네가 챙기던 거였잖아. 네가 떠난 뒤로는 아무도 손대지 않았으니 당연히 유통 기한이 지났을 수밖에 없지.”민여진은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서원 씨께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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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5화 대표님께서 얼마나 아끼는지

서원이 운전을 서두른 덕에 도착까지 십여 분도 걸리지 않았다.2층으로 올라가자 민여진이 수건을 적셔 박진성의 이마를 찜질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서원의 기척에 그녀의 어지럽던 표정이 겨우 침착함을 되찾았다.“서원 씨... 얼른 봐 줘요. 박진성 어떡하죠?”서원은 망설임 없이 다가섰다. 박진성은 의식을 잃은 채 불에 달군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고 차갑고 뜨거운 기운이 번갈아 몸을 덮친 탓에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앞머리는 폭삭 젖은 상태였고 깊게 찌푸린 미간에 달라붙어 있었다.서원은 그의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퇴원 수속을 밟을 때 병원에서는 끝까지 만류했었다.“민여진 씨, 병원으로 가야 합니다.”서원은 망설임 없이 박진성에게 외투를 입히고는 그를 업고 계단을 내려갔다.서원은 잠시 멈춰 서서 물었다.“민여진 씨, 시간이 늦었습니다. 먼저 쉬시겠습니까? 내일 아침 공항에 모셔다드리겠습니다.”민여진은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녀는 애써 감정을 눌러 담으며 말했다.“이 상황에 제가 어떻게 그냥 가겠어요. 병원에 같이 가요.”뜻밖의 대답에 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병원에 도착하자 의사는 곧바로 병실을 마련하고 약을 처방했다.민여진은 병실 문 앞에 홀로 서 있었다. 새벽의 공기는 차가웠고 인적도 드물어 정적은 더 짙게만 느껴졌다.서원이 다가와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민여진 씨, 너무 걱정 마세요. 대표님은 너무 오래 무리하신 탓에 몸이 버티지 못한 겁니다. 병원에 왔으니 이제 괜찮을 거예요.”민여진은 어지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원이 머뭇거리며 물었다.“사모님 쪽에는... 알려야 할까요?”사모님은 곧 이정화를 뜻했다. 아들의 심각한 몸 상태를 어미가 모르는 것도 옳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민여진은 망설였다.“요즘 건강은 어떠세요?”서원은 사실대로 말했다.“좋지 않습니다.”민여진이 말했다.“그럼 굳이 말씀드리지는 마세요. 지금 상황은 여사님이 알아도 딱히 달라질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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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6화 꿈에서까지 매정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

“이런 말은 제 앞에서만 하세요. 난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지만 박진성이 들으면 화낼 거예요.”서원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민여진은 대화를 더는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시간이 늦었으니 돌아가서 쉬세요. 박진성은 내가 지킬게요. 오랫동안 자서 그런지 피곤하지 않으니 여기서 밤을 새워도 괜찮아요.”서원은 난처한 기색이었다.“밤새 지켜야 할 겁니다. 제가 사람을 불러오죠. 민여진 씨는 먼저 돌아가서 쉬셔도 돼요.”“아니에요.”민여진은 단호히 거절하며 병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는 담담했다.“이건 내가 빚진 거예요.”사랑은 이미 끝났으니 더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박진성이 자신을 구하러 온 일은 마음속 깊은 곳에 가시처럼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걸 어떻게든 뽑아내고 싶었다.상처는 드러나야 아물고 그래야 덧나지 않는다.서원이 자리를 비우자 민여진은 주위를 더듬으며 침대 곁에 앉았다.가쁘고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열에 들뜬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간호사가 들어와 주사를 뺄 때, 그녀를 보고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앞을 못 보지 않으세요? 왜 혼자 환자를 돌보게 했대요?”“제가 원해서 남은 거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 돌보는 거, 보통 일이 아니에요. 몸 상태를 수시로 살펴야 하고 열이 내렸는지 더 올랐는지 계속 확인해야 하죠. 환자는 지금 의식이 없는 상태니까 대부분은 보호자가 먼저 알아차려야 해요. 눈이 불편하시면 쉽지 않을 텐데.”민여진은 난처한 듯 손바닥을 움켜쥘 뿐이었다. 간호사가 곧 덧붙였다.“제가 삼십 분에 한 번씩 들를게요. 마침 제가 근무하는 날이라서요.”“고맙습니다.”간호사가 나가자 비로소 호흡을 고르게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놓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곧은 자세로 앉아 이따금씩 손바닥으로 박진성 이마의 열을 짚었다.밤이 깊어질 때쯤, 열은 서서히 내려갔다.손을 거두려던 찰나, 손끝이 실수로 그의 코끝을 스치게 되었다. 그녀의 손끝은 홀린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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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7화 내가 밉지?

민여진의 몸이 굳어졌다. 단순히 자기 이름이 불려서 그런 게 아니었다. 박진성의 말이 선명히 귀에 남았다.“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셨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대표님께서 민여진 씨를 얼마나 아끼는지요. 그렇다면 대표님은 민여진 씨가 무슨 결정을 내려도 화내실 리 없습니다. 아마 속으로는 기뻐하실 겁니다.”서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정신이 아득해진 그녀는 다시 자리에 몸을 기댔다. 박진성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가락을 감싸고 있었고 정신을 잃을 때까지 힘을 풀지 않았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정신을 차린 박진성의 눈에 낯익은 천장이 들어왔다. 놀랍진 않았다. 자기 몸 상태는 본인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입안은 바짝 말라 있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데 곁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깼어? 물 좀 마실래?”‘이 목소리는...’박진성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리며 소리의 주인을 찾았다.그녀는 어제 입던 옷 그대로 머리를 올려 묶은 채 창가에 앉아 있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그의 물음에 민여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여기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어제 네가 쓰러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나였잖아. 그러니 사람 불러 널 병원으로 데려오고 그 곁에 있어 주는 건 당연한 거야.”그녀는 태연히 물었다.“목마르지?”박진성의 머릿속은 하얗기만 했다. 겨우 목소리를 되찾은 그가 말했다.“목말라.”“물 갖다 줄게.”물컵이 앞에 놓였을 때, 그는 눈앞의 여자가 정말 민여진이라는 걸, 어제 본 게 헛것이 아니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그런데 왜 아직도 이곳에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오늘 아침 비행기라고 하지 않았어?”그녀는 느릿하게 말했다.“서원 씨한테 부탁해서 시간 바꿨어.”박진성이 떨리는 손끝을 감추며 물었다.“왜?”“은혜는 갚아야지.”“은혜?”박진성은 숨을 잠시 참았다.‘나에게 그런 자격이 있었던가.’민여진은 그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주먹을 가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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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8화 왜 울고 계세요

‘오늘 이후로 난 너한테 빚진 게 없으니 너도 나 찾지 마.’가볍게 흘러나온 말이 사람의 가슴을 이토록 깊이 후려칠 줄은 몰랐다.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오른 박진성은 힘겹게 물었다.“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네가 감옥에서 겪은 일을 내가 전혀 알지 못한다면 어떡할 거야?”“뭐라고?”민여진은 순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고 말했다.“박진성, 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네가 몰랐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날 감옥에 밀어 넣어 남의 죄를 덮어쓰게 만든 것도 너고, 어머니를 지켜주지 못해 스무 살 남짓했던 나를 고아로 만든 것도 너야.”그녀는 마치 장부를 읽듯 그의 죄목을 하나하나 짚어내더니 담담하게 덧붙였다.“그러니 네가 몰랐다고 해서 그 죄가 씻기는 건 아니야.”“그래...”박진성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미안해.”민여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짧게 뱉었다.“정신이 든 것 같으니 난 이만 가봐야겠네.”“그래.”그녀가 발을 옮겨 문을 열고 나가려던 순간, 박진성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민여진!”그녀의 몸이 굳었다.“사랑해.”철컥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밖은 사람들로 붐볐고 흩어진 말소리들이 끊임없이 귀에 흘러들었다. 민여진은 기억을 더듬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복도의 중간까지 갔을 때, 서원이 마주 달려왔다.“민여진 씨!”그녀는 멈춰 섰다. 눈앞까지 다가온 서원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멈칫했다.“왜 울고 계세요?”‘운다고? 내가 울고 있나?’민여진은 뜨거운 무언가가 눈가에서 흘러내리다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손끝으로 만져보니 축축했다.미련도, 벅찬 감정도 아닌 비참함일 뿐이었다.6년 전, 아니, 어쩌면 12년 전의 민여진이라면 그 세 글자에 모든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그 사랑을 기다리며 살아왔다. 그러나 그렇게 모든 것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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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9화 사랑해는 스페인어로 어떻게 말해?

탑승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오른 민여진은 자리에 앉았다. 눈꺼풀이 감길 만큼 졸렸지만 이상하게 잠은 오지 않았다.이륙을 알리며 휴대폰을 비행기 모드로 전환하라는 안내가 나오던 순간, 짧은 진동이 손끝에 전해졌다. 누군가가 문자를 보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그녀의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앞을 볼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을 터였다.예전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일인데 오늘은 어쩐지 손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무심결에 승무원에게 휴대폰을 내밀며 조용히 말을 꺼냈다.“저기요, 실례지만 문자 내용 좀 읽어주실 수 있을까요? 눈이 보이지 않아서요.”승무원이 휴대폰을 받아 문자 내용을 확인했다. 화면을 본 순간, 짧은 정적이 흘렀다.“왜 그러시죠?”승무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외국어네요. 스페인어 같은데 제가 잘 몰라서요. 필요하시다면 다른 분께 여쭤봐 드릴까요?”“스페인어요?”승무원은 곤란하다는 듯 머뭇거렸다.“비슷한 언어들이 많아서 정확히는 잘 모르겠어요. 원하시면 다른 승무원한테 물어봐 드릴 수 있어요.”그 순간, 민여진은 문득 박진성이 떠올랐다. 그는 스페인어에 능했다. 대학에서 전공한 것이 아니라 그저 무언가에 몰두하면 끝을 보려는 성격 탓이었다.회사의 프로젝트가 스페인 쪽과 연결되자 그는 하루 종일 스페인어 학습지를 붙잡고 살았다. 근무시간 외에는 손에서 학습지를 놓지 않을 정도였다.가끔 그녀의 시선이 우연히 학습지에 머물게 되면 그는 짧게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귀찮다는 듯 퉁명스러운 태도였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 옆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곤 했다.“뭐 하는 거지?”박진성이 고개를 들어 까맣게 빛나는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거절하지는 않고 짧게 덧붙일 뿐이었다.“내 흐름을 끊지 마. 오늘은 빨리 쉬어야 해.”“방해 안 할게.”그녀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글쎄 요즘 나랑 얘기 자주 하는 아주머니가 한국계 스페인인이더라고. 몇 마디라도 배워서 얘기하면 기뻐하시지 않을까?”박진성이 의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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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0화 나랑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이제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아무리 바빠도 여진 씨 한마디면 언제든지 달려올 수 있는데 말이에요.”민여진은 그 말에 마음이 저릿해졌다.“고마워요.”“고맙기는요! 얼른 타요.”그녀가 조수석에 앉자 장정아가 무심하게 물었다.“그쪽 일은 다 정리된 거예요?”“네.”민여진의 표정은 놀랄 만큼 차분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담담하게 말했다.“다 끝났어요.”“잘됐네요. 그럼 오늘은 뭐 할 거예요? 뭐라도 먹으면서 축하할까요?”“아니요.”그녀의 미소에는 피곤한 기색이 숨어있었다.“밤새 한숨도 못 잤어요. 좀 쉬고 싶네요. 돌아가서 푹 자고 난 뒤에 얘기해요.”장정아는 놀란 눈길을 보냈지만 그녀의 결정을 존중해 주었다. 그녀는 곧장 민여진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얼른 들어가서 쉬어요.”“네.”민여진은 장정아가 차에 오르는 걸 확인한 뒤 문을 닫았다. 방금까지 힘주어 올려놓았던 입꼬리가 그제야 스르르 풀렸다. 그녀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휴식은 거의 이틀 가까이 이어졌다.휴대폰은 꺼둔 채 침대에 누워 대충 끼니를 때우며 시간을 보냈다. 하루쯤은 더 필요할지도 몰랐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침대에서 뒤척이던 중, 아래층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은 몸을 일으켰다. 장정아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틀 내내 연락이 없었으니 걱정할 것이 분명했다.그녀는 옷장에서 아무 옷이나 걸치고는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을 열었다.“가요.”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자 커다란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 큰 키와 단단한 어깨를 보아낼 수 있었다. 여성의 실루엣은 아니었다.민여진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수축하며 얼어붙었다.“임재윤?”떨리는 입술에서 이름이 흘러나왔다.“정말 너 맞아?”임재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민여진은 달려 들어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얼굴은 눈물로 흥건히 젖었다.“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 혼자 두고 가지 마. 이제는 더 이상 떨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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