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차가운 심장이라도 따뜻한 온기로 녹여주면 언젠가는 변할 줄 알았다, 그래서 민여진은 박진성의 꼭두각시 아내로 2년을 살아왔다. 그런데 그 끝은 차디찬 이혼서류 한 장이었다. “걔가 일어났어. 그 아이 대용이었던 넌 이제 필요 없어졌어.” 민여진에게는 마음을 전혀 내어주지 않던 그가 돌아온 건 오로지 민여진을 제 첫사랑 대신 감옥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감옥에서 갖은 고초를 당한 민여진은 배 속의 아이도 잃고 얼굴도 알아볼 수 없게 변한 채 실명까지 당해버렸다. 그녀는 악몽 같았던 짧디짧은 두 달을 버텨내며 박진성에 대한 마음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2년 뒤, 민여진은 박진성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길을 걷다가 우연히 그를 보게 되었다. 첫사랑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 할 그가 웬일인지 민여진을 보자마자 화를 내며 달려들었다. 박진성은 자신이 이러면 민여진이 전처럼 다시 저를 봐줄 줄 알았는데 그녀의 눈에서는 더 이상 사랑이 느껴지지 않았다. “민여진, 어떻게 해야 다시 나한테 돌아올 거야? 말만 하면 내가 뭐든 다 들어줄게!” “2년 전엔 당신이 준 구리반지도 아까워서 잘 못 꼈는데, 이젠 아니에요. 당신이 뭘 준대도 난 안 돌아가요.”
Lihat lebih banyak“그때 저는 해외로 나가야 했어요. 애초에 국내에서는 뭘 해보려는 계획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어요. 되도록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게 낫겠다 싶었죠.”“그럼 왜 돌아온 거예요? 그것도 박진성이 가장 어려울 때 말이에요.”“민여진 씨?”진시우는 민여진의 날카로운 말투에 잠시 멈칫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제가 돌아온 이유는 간단해요. 하나는 어머니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마음을 정리했기 때문입니다.”진시우는 한숨을 내쉬었다.“민여진 씨, 저희 어머니의 죽음은 진시호와 그의 어머니랑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그때 저는 아직 어렸고 나 자신을 지키면서 어머니의 원한을 갚을 방법이 없었어요. 지금은 나이도 먹었고 생각도 정리되었습니다. 제가 돌아온 이유는 당연히 국내에 뿌리를 내리고 어머니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입니다.”민여진은 잠시 멈칫했다. 진시우와 진시호 사이에 이런 사정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죄송해요, 제가...”“괜찮아요.”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저도 제 일을 최대한 감추고 싶었거든요. 여진 씨가 몰랐던 건 당연한 일입니다. 오해가 있었다면 당연히 설명해야 하고요. 박진성을 위해 돌아왔다는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에요. 저는 그와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민여진 씨가 박진성의 아내로서 제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리가 없죠.”민여진은 절망과 혼란 속에 눈을 감았다.맞았다. 그녀는 박진성에게서, 또는 그 어떤 정보 속에서도 진시우의 존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비록 남남 같은 부부의 관계였지만 박진성이 어울리는 사람들은 민여진도 알고 있었다.“그럼... 시우 씨랑 박진성이 서로 연을 끊은 척 연극을 벌였다고 정아 씨가 그러던데, 그건 무슨 의미예요?”민여진은 창백해진 얼굴을 애써 숨기며 물었다.“정아 씨는 하 비서님의 소꿉친구예요. 아는 정보가 꽤 정확할 텐데 나를 속일 리가 없잖아요...”진시우는 바로 이해했다.“아, 오늘 여진 씨
민여진의 손이 풀리자 장정아는 팔을 문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진시우의 얼굴을 똑바로 볼 용기가 없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맞아요. 저랑 여진 씨가 서로 나서겠다고 아웅다웅했어요.”진시우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그럼 저는 큰 기대를 해야겠군요. 미인 두 분이 다투면서까지 제 밥상을 차려주겠다고 하시니, 이런 복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네요.”그가 미인이라는 말을 입에 담자 장정아의 얼굴은 금세 화사해졌다. 조금 전 민여진과 있었던 일 따위는 잊은 듯, 수줍게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먼저 반죽하러 들어갈게요.”그녀는 대야를 들고 부엌으로 사라졌다. 자리에 남은 민여진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움직이지 않았다.진시우는 외투를 벗으며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민여진 씨.”그의 부드러운 부름에 민여진은 고개를 들었다. 웃음을 머금은 얼굴이 다가왔다.“무슨 일 있어요? 제대로 못 쉬신 거예요? 아까 들어올 때부터 내내 안색이 좋지 않으시더라고요.”“제대로 못 쉬긴 했어요.”민여진은 심호흡을 하며 침착하려 애썼다. 장정아가 남긴 말이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끝을 움켜쥐고 입을 열었다.“진시우 씨, 조금 전 어디 다녀오신 거죠?”“저요?”그는 잠시 머뭇거렸다.민여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박진성, 깨어났나요?”그는 이미 예상한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직입니다. 요즘 몸이 좋지 않아 열이 오래 갔는데 제가 돌아오기 전에 겨우 가라앉기 시작했더라고요.”민여진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물었다.“그 사람을 아직도 신경 쓰시는 모양이에요. 이미 연을 끊으신 사이 아닌가요? 싫어하신다면서 왜 계속 마음을 두시는 거죠?”진시우는 물을 따라 마시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저는 박진성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와는 이미 연을 끊었지요. 하지만 이곳에서 그는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게다가 저 때문에 병을 얻어 고열에 시달리게 된 겁니다. 아무리 냉정하다 해도 지금 같은 때 모
“네!”장정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민여진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아직 모르고 계셨어요? 그럼 제가 슬쩍 알려드릴게요. 도련님이랑 박진성 씨는 사이가 아주 각별해요. 팬티까지 공유할 수 있는 사이일 거예요. 전에 박진성 씨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독엔에 계시던 도련님이 제일 먼저 달려왔거든요. 그 일 때문에 진씨 가문 식구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민여진은 잠시 멈칫했다.“그게 언제 일이죠?”장정아는 손가락을 접어가며 날짜를 헤아렸다.“정확히는 기억 안 나는데 아마 작년쯤일 거예요. 그 무렵 도련님은 독엔에서 사업을 시작해서 거의 들어오질 않았거든요.”그 말이 끝나자 민여진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기는 서서히 사라졌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반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잘못 기억하신 게 아닐까요?”장정아는 눈을 깜빡이며 잠시 당황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왜 그러세요? 갑자기 심각하게 말씀하셔서 깜짝 놀랐잖아요. 무슨 실수라도 한 줄 알았네요. 이런 일은 워낙 인상이 깊어서 잘못 기억했을 리가 없어요.”민여진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지만 미간은 서서히 찌푸려지기 시작했다.“진시우 씨랑 박진성, 몇 년 전에 틀어진 사이 아니었어요?”“거 봐요.”장정아는 턱을 살짝 치켜들며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모르시나 봐요. 신기하네요, 도련님이랑 그렇게 가까운 사이이시면서 이걸 모르세요?”민여진은 산소가 부족한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제가 뭘 모른다는 겁니까?”“둘이 틀어졌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에요.”장정아는 물을 한 모금 삼키며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그건 진시우랑 박진성이 짜고 친 자작극이었죠. 진시호를 속이려고요. 안 그랬다면 도련님 곁에 박진성이 있다는 건 분명히 눈에 띄었을 거고 그럼 진시호랑 어머니께서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예요. 도련님이 독엔에서 오랜 시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이것 때문이고요.”“말씀하시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민여진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입술을 꼭 깨문
그는 말을 이었다.“하지만 납치 같은 건 나랑 아무 상관 없어. 물론 넌 믿지 않겠지만.”해탈한 듯한 그의 말투가 민여진의 마음 한편을 스치고 지나갔다. 작은 벌레가 살갗을 기어다니는 듯한 불편함이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곳에서 당장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절박하게 차올랐다.또 시작이었다. 박진성은 지치지도 않고 늘 그렇게 불쌍한 척을 했다. 이곳에 더 있다가는 그의 무력한 얼굴에 또다시 속아 넘어가고 말 것이 분명했다.“이만 갈게.”민여진은 짧게 말을 남기고 방에서 빠져나왔다.문을 닫고 벽에 등을 기댔을 때야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눈을 깊게 감았다가 다시 뜨고 나서야 겨우 서 있을 힘이 생겼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위치를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겼다.엘리베이터 안에는 이미 사람이 있었다. 누군가가 층을 묻자 민여진은 창백한 얼굴을 갈무리하며 대답했다.“1층이요. 감사합니다.”버튼이 눌리고 그녀는 휴대폰을 꼭 쥐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그녀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때, 프런트에서 다급하게 오가는 무전기 소리가 들렸다.무슨 의식이 없다느니, 구급차를 불러라느니, 여기서 사고가 나면 안 된다느니, 이와 같은 말들이 오갔다.민여진은 저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눈치 빠른 직원 하나가 그녀를 발견하고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박진성 씨 방에서 나오신 건가요?”그의 이름이 들리자 민여진은 본능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네. 왜요?”“박진성 씨 방이 열려 있어서 저희가 들어갔는데 박진성 씨께서 카펫 위에 쓰러져 계신 걸 발견했어요. 열이 너무 심해서 의식도 없으시고요. 이미 구급차는 불렀습니다만... 친구분이세요? 아니면 애인이신가요? 혹시 동행해 주실 수 있을까요?”박진성이 방에서 쓰러졌다니, 아까 박진성이 뱉었던 말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내가 오늘 여기서 아파 죽는다면 그걸로 네 원한이 좀 풀리겠어?”일부러 불쌍한 척했던 게 아니었다. 박진성은 정말 심각했던 거였다.“저는...”민여진은 순간 머뭇거렸다
몸의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상처가 더 괴로운 법이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뼈마디는 날카로운 칼끝에 스치는 듯했다.박진성은 길게 숨을 토해내고 손에 든 물을 끝까지 들이켰다.민여진은 빈 컵을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박진성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휴대폰은 침대 머리맡 서랍에 있어.”민여진은 곧장 몸을 움직였다. 서랍을 열자 정말 휴대폰이 있었다. 그가 이렇게 쉽게 내줄 줄은 몰랐다. 하지만 표정은 곧바로 차갑게 굳어졌다.“더 볼 일 없으니 난 이만 가볼게.”그녀는 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민여진.”등 뒤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그녀는 걸음을 멈췄으나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박진성은 옅은 웃음을 섞으며 말했다.“내가 오늘 여기서 아파 죽는다면 그걸로 네 원한이 좀 풀리겠어?”아파 죽는다니, 순간 멍해진 민여진은 곧 정신을 차렸다.박진성은 제 목숨을 내던질 리 없었다. 그는 언제나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건 그저 동정심을 끌어내려는 어설픈 연기일 뿐이었다.민여진은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박진성,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마. 네가 죽든 살든 나와는 아무 상관 없어. 네 죽음 앞에서 난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아. 나한테 중요한 건 단 하나야. 네가 내 삶에 조금도 얽히지 않는 것.”박진성이 억눌린 기침을 삼키며 불분명한 웃음을 흘렸다.“그래... 내가 일부러 널 그곳에 버려둔 게 아니라고 설명해도 넌 계속 이렇게 외면할 생각이야?”“그만해! 변명을 어디까지 늘어놓으려는 거야? 박진성, 난 바보가 아니야!”그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여진은 붉어진 얼굴로 몸을 돌렸다. 가슴속에서 들끓는 분노가 더는 제어되지 않았다.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사과 한마디 없었다. 변명과 협박만 덧칠하듯 이어졌다.그는 아직도 그녀를 몇 마디 말로 달래기만 하면 풀어지던 4년 전의 어리석은 여자로 보고 있었다.민여진은 온몸이 떨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두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그래, 내가 앞을
이런 식으로는 도무지 안 되겠다 싶어 결국 민여진은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더욱 차갑기만 했다.“박진성, 도대체 뭘 바라는 거야. 사람을 미칠 때까지 괴롭혀야 속이 풀리겠어?”박진성은 힘없이 웃었다.“민여진, 나 아파. 정말 못 견디게 괴로운데 옆에는 아무도 없어. 그냥 너 보고 싶어서 그래. 나 걱정하지 않는 거 알아. 그래도 작은 부탁인데 못 들어주겠어?”민여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박진성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네가 날 비열하다고 욕해도, 뻔뻔하다고 욕해도 상관없어. 네가 오기만 하면 폰을 넘겨줄게. 안 그러면 폰은 물론이고 이혼도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그는 호텔 주소 하나만 남기고 전화를 끊어버렸다.민여진은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무슨 일이에요?”주인아주머니가 다급히 물었다.“괜찮아요. 이번 것도 같이 계산해 주세요.”밖으로 나오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린 듯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박진성이 불러준 호텔 이름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피할 수 없는 악몽처럼 그녀를 괴롭혔다.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택시를 세워 주소를 말하고 호텔에 도착하자 직원이 바로 그녀를 알아보았다.“민여진 씨죠? 모셔다드릴게요.”“네.”엘리베이터는 곧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직원은 문 앞에서 멈춰 섰다.“여기가 박진성 씨 방입니다. 저는 들어가기 어려우니 직접 들어가시면 됩니다.”직원이 카드키로 문을 열어주었다.민여진은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손을 더듬어 불을 켜니 복도의 조명이 희미하게 켜졌다. 그제야 겨우 시야가 트였다.그때, 안쪽에서 기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갈라진 목소리가 힘겹게 흘러나왔다.“민여진, 너 맞아?”전화로 들리던 것보다 훨씬 탁하고 지쳐 있는 목소리였다.민여진은 시선을 내리고 벽을 짚으며 걸어갔다. 침대 위에 박진성이 누워 있었다.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휴대폰은? 어디 있어?”박진성은 몇 초간 말없이 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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