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차가운 심장이라도 따뜻한 온기로 녹여주면 언젠가는 변할 줄 알았다, 그래서 민여진은 박진성의 꼭두각시 아내로 2년을 살아왔다. 그런데 그 끝은 차디찬 이혼서류 한 장이었다. “걔가 일어났어. 그 아이 대용이었던 넌 이제 필요 없어졌어.” 민여진에게는 마음을 전혀 내어주지 않던 그가 돌아온 건 오로지 민여진을 제 첫사랑 대신 감옥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감옥에서 갖은 고초를 당한 민여진은 배 속의 아이도 잃고 얼굴도 알아볼 수 없게 변한 채 실명까지 당해버렸다. 그녀는 악몽 같았던 짧디짧은 두 달을 버텨내며 박진성에 대한 마음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2년 뒤, 민여진은 박진성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길을 걷다가 우연히 그를 보게 되었다. 첫사랑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 할 그가 웬일인지 민여진을 보자마자 화를 내며 달려들었다. 박진성은 자신이 이러면 민여진이 전처럼 다시 저를 봐줄 줄 알았는데 그녀의 눈에서는 더 이상 사랑이 느껴지지 않았다. “민여진, 어떻게 해야 다시 나한테 돌아올 거야? 말만 하면 내가 뭐든 다 들어줄게!” “2년 전엔 당신이 준 구리반지도 아까워서 잘 못 꼈는데, 이젠 아니에요. 당신이 뭘 준대도 난 안 돌아가요.”
View More칼날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민여진의 얼굴을 훑던 박진성이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아니, 민여진. 우리 사이는 나만 끝낼 수 있어.”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진성이 민여진의 손목을 꽉 잡아 그녀를 차로 밀어 넣었고는 쾅 문을 닫았다.당황한 민여진이 문을 열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앞은 보이지 않았고 박진성의 향기만 더욱 짙어졌다. 그 짙은 향기에 그녀는 숨이 멎을 것처럼 몸이 떨려왔다. 꿈쩍도 하지 않는 문에 민여진은 자기를 보호하듯 몸을 웅크린 채 두 눈으로 박진성을 죽어라 노려보았다.“박진성, 뭐 하는 거야?”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공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이 그녀에게 끊임없이 얘기하고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진정해야 한다고, 무너지지 말라고.그런 민여진을 보며 박진성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그는 지금 임재윤이 아니라 박진성이었다. 어떻게든 포악한 박진성의 모습을 남김없이 보여줘야 했다. 그래야만 박진성에게서 임재윤을 완전히 박리해 민여진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그랬기에 박진성은 민여진의 얼굴을 억지로 들어 올려 시린 말투로 입을 열었다.“우리 부부잖아. 반년이 넘도록 만나지도 못했는데 당연히 조용한 곳에서 얘기를 좀 나눠야지.”눈물이 고여있던 민여진의 눈은 박진성의 말에 혐오의 기색을 드러냈다.“난 진성 씨와 할 얘기 없어.”민여진은 누구보다 진심으로 박진성을 죽도록 원망하고 있었다.박진성이 씁쓸한 기분을 꾹 참아내며 민여진에게 더 바짝 다가갔다.안 그래도 협소한 공간에 바짝 붙어있으니 상대방의 작은 주름마저 똑똑히 보일 만큼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박진성이 차갑게 말했다.“민여진, 넌 내가 그렇게 미워? 얘기 좀 나누는 것도 싫을 만큼? 잊지 마. 네가 죽은 척했던 그 시간 동안 미친 듯이 널 찾은 사람도 네가 살아있길 바랐던 사람도 나뿐이었어. 나 말고 일편단심으로 널 대할 사람이 또 있을 것 같아?”“그래...”민여진은 그저 실소
이 사람이 임재윤일 리가 없었다. 임재윤은 지금 머나먼 독엔에 있었고 돌아오려고 해도 꼬박 하루를 비행기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니 임재윤이 경찰서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하지만 임재윤이 아니라면 눈앞에 아른거리는 실루엣은 왜 이렇게 이상할 정도로 익숙한 걸까?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인 것처럼...손끝을 파르르 떤 민여진이 떠보듯 물었다.“재윤이야?”하지만 민여진 앞에 서 있던 박진성의 얼굴이 이미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민여진이 오늘 경찰서에 나타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또 이렇게 마주칠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한 적 없었다.그 짧은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스쳤다.‘내가 임재윤이라고 인정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아니라고 대답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그냥 지나가?’바로 그때, 복도의 한쪽 끝에 있던 문채연이 갑자기 발버둥 치며 사무실에서 뛰쳐나왔다. 그녀는 박진성을 향해 절망에 찬 절규를 내뱉었다.“진성 씨, 진성 씨. 다시 한번만 기회를 줘.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나 다시는 그런 짓 안 할게.”문채연은 박진성과 민여진 앞으로 다가가 통곡했다. 비록 경찰들이 곧바로 문채연을 제압했지만 그녀가 내뱉은 모든 말들은 이미 민여진의 귀에 가시처럼 박혀버린 후였다.민여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진성 씨? 박진성?’‘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박진성이라고?’민여진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흐릿하던 안개가 검은색으로 응집되어 온몸을 감싸자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려왔다.박진성과 마주치다니!놀란 표정을 짓던 박진성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민여진?”드디어 마음을 진정한 박진성이 복잡한 기색을 지우고 고개를 들자 뚜렷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칼날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역시 살아있었네.”그 익숙한 목소리는 마치 가늘고 단단한 실처럼 민여진의 목을 칭칭 감았다. 공포에 질려 두 눈을 커다랗게 뜬 그녀는 몰아치는 질식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내가 왜 너한테 이러면 안 되는데? 넌 민여진에게 똑같이 했었잖아.”그 말에 문채연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잔뜩 당황한 채 서럽게 울며 가여운 모습으로 동정을 사려 입을 열었다.“어떻게 여진 씨와 우리의 8년을 비교할 수 있어? 우린 8년을 만났어. 민여진이 뭔데!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했었는지 잊은 거야? 난 그저 작은 실수를 한 것뿐이잖아. 민여진도 무사한데 왜 진성 씨는 고작 이런 실수도 날 용서해 주지 않는 거야?”“고작? 실수?”박진성이 믿기 어렵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문채연은 또다시 박진성에게 기대어 울먹였다.“진성 씨, 내가 잘못했어. 내가 진성 씨를 너무 사랑해서 질투가 났어. 그래서 잠깐 미쳐서 여진 씨에게 그런 짓을 한 거야. 내가 여진 씨에게 사과할게. 보상도 할게. 진성 씨, 제발. 날 포기하지 말아 줘.”박진성이 차가운 눈으로 문채연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손이 막 박진성의 손에 닿으려던 그 순간, 그가 재빨리 손을 피했다.문채연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모든 인내심을 소진한 박진성이 이곳에 온 목적을 문채연에게 전했다.“민여진이 감옥에서 집단 구타를 당한 것도 네가 지시한 거야?”“뭐?”마지막 한 방울의 눈물이 문채연의 눈가에 고였다.이미 2년 전의 일이었다. 박진성이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진작 잊고 살았을 일이었다.그 일까지 캐낸 것을 보니 민여진 그 여자에게 단단히 홀린 모양이었다. 그는 지난 일을 전부 들출 생각인 것 같았다.“여진 씨가 감옥에서 구타를 당한 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손바닥을 꼭 맞잡은 문채연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때 난 여진 씨와 친분도 없던 사이였어. 그런 내가 여진 씨에게 얼마나 큰 원한이 있어서 아이까지 유산시키려고 했겠어. 그럴 리가...”박진성의 두 눈이 날카롭게 반짝였다.“난 민여진이 감옥에 유산했다고 얘기한 적 없는데?”문채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말실수했다는 생각에 그녀가 곧바로 변명했다.“내가 추측한 거야. 임신한
“질투가 났어. 하지만 진성 씨... 내가 여진 씨에게 질투를 느끼는 건 너무 당연한 거 아냐? 내가 진성 씨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잖아. 사람은 충동적으로 멍청한 짓을 하기도 하니까. 게다가 난 이미 반성하고 있어.”고개를 든 박진성의 짙은 눈동자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눈앞에서 서러운 눈물을 떨구는 여자의 얼굴이 더는 불구덩이 속의 그 얼굴과 겹쳐 보이지 않았다.이 여자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굴 수 있는 걸까?“질투 때문에 민여진을 납치하고, 질투 때문에 네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거야?”문채연이 잔뜩 당황한 채 말했다.“난 사람 죽인 적 없어. 민여진 씨 멀쩡하게 살아있잖아. 난 민여진 죽인 적 없다고.”“문채연. 정말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해?”박진성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강렬한 분노를 꾹 참으며 핏기가 서린 두 눈으로 여자를 빤히 쳐다보았다.“네 돈을 받은 인간들이 정말 널 위해 평생 그 비밀을 간직해 줄 거라 생각했어? 그 사람들이 누구 때문에 널 도와준 건지 잊은 거야?”“문채연, 너한테 너무 실망이야. 넌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야.”“어쩌면 난 처음부터 진짜 네 모습을 몰랐던 걸지도 모르겠어. 너의 위선이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속였어. 민여진이 너에게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 하지만 여진이는 너 때문에 죄를 뒤집어쓴 채 감옥살이를 해야 했고 심지어 가짜 죽음으로 자신을 숨겨야 했어.”“하지만 그 모든 짓의 원흉인 넌 여진이에게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아. 심지어 여진이를 죽이려고까지 했지. 대체... 대체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지독할 수 있는 거야.”문채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박진성이 성까지 붙여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순간 문채연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알고 있는 게 분명해... 박진성이 모든 걸 알고 있어.’“민여진이 너한테 그래? 민여진이 고자질한 거지?”눈이 빨갛게 달아오른 문채연이
“네.”나긋한 태도로 대답하던 임재윤은 뭘 떠올린 것인지 날카롭게 눈빛을 빛냈다.“저도 그러려고 했어요. 시간 내서 잘 얘기해 보려고요.”...전화를 끊고 머리를 베개에 묻은 민여진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임재윤과 함께 독엔에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하지만 지금 그녀의 신분으로는 떳떳하게 임재윤과 함께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아내로 임재윤의 부모님을 만난다면 고개조차 들 수 없을 것 같았다.그녀는 하루라도 빨리 박진성과의 혼인 관계를 끝내고 싶었다.진시우에게 들킬 수는 없었던 탓에 다음 날 점심이 되어 그가 집을 나서서야 민여진은 천천히 방에서 나와 옷을 갈아입고 문을 나섰다.손을 들어 택시를 잡은 그녀가 차에 올라탔다.“주성로 경찰서로 가주세요.”같은 시각, 경찰서에는 불청객이 도착했다.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경찰서로 들어섰다. 하나둘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본 경찰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박... 박진성 씨?”경찰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고 박진성은 여유롭게 어깨의 물기를 털었다. 검은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문채연은 어디 있어요? 만나고 싶은데.”박진성이 테이블 앞에 앉아 기다리자 잠시 후, 수갑을 찬 문채연이 문 앞에 나타났다. 기고만장하던 전과는 달리 혈색 하나 없는 얼굴에 입술에도 각질이 잔뜩 했다. 고작 며칠 사이, 문채연은 무말랭이처럼 삐쩍 말라 있었다.자리에 앉아 있는 박진성을 보고 나서야 문채연은 기쁨의 눈빛을 반짝이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진성 씨, 진성 씨. 드디어 날 보러 온 거야? 진성 씨는 역시 날 도와줄 줄 알았어. 나 얼른 여기서 꺼내 줘. 여긴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야. 더러워 죽을 것 같아.”눈물범벅인 채로 하소연하는 문채연과 달리 박진성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함을 유지했다.“진성 씨...”그제야 차가운 박진성의 태도를 눈치챈 문채연이 불안한 마음을 안고 그에게 물었
임재윤을 본 이정화가 자조 섞인 말투로 말을 내뱉었다.“아들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네. 사고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1년 내내 만나지도 못했을 거야, 그렇지? 넌... 넌 내가 그렇게 원망스럽니?”그녀의 말에는 수많은 슬픔과 체념이 담겨 있었다. 민여진을 보내야 했던 그 시간 동안, 그녀는 너무 많은 고난을 겪어내야 했다. 가족들과의 의견 충돌, 그리고 파탄.임재윤의 표정은 여전히 냉담했지만 말투가 조금은 수그러들었다.“괜한 생각하지 마세요. 바빠서 그런 것뿐이에요.”“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지나가는 길에라도 엄마 보러 오는 것도 안 돼?”임재윤이 말이 없자 이정화가 한숨을 내쉬며 자책했다.“여진이를 쫓아내는 게 널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했어. 어렵게 생긴 가족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오히려 마지막 남은 희망을 끊어내는 일이 됐어. 그러니 내가 지금 이런 꼴이 된 것도 다 내 벌이겠지.”“그런 말씀 마세요.”임재윤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반듯하던 미간에 주름이 짙어졌다.“오래오래 사셔야죠.”기침을 내뱉은 이정화가 코웃음을 흘렸다.“이런 몸으론 장수하긴 글렀어. 게다가 문채연도 있잖니. 엄마한테 사실대로 얘기해 줘. 문채연이 정말 사람을 납치한 거야?”임재윤이 어두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네.”“누군가가 자기를 납치범으로 모함하는 거라고 했지만 저는 그 말 안 믿어요. 만약 정말 모함을 당한 거라면 그렇게 다급하게 어머니께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겠죠. 지난번 교통사고도 그렇고 이번에도 또...”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이정화는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아파왔다.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그래서 넌 어쩔 생각이야.”문득 민여진의 모습을 떠올린 임재윤이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정말 잘못을 했다면 민여진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혈색이 조금은 돌아온 이정화가 말했다.“이번에야말로 채연이에게 너무 실망했어.”문채연을 민여진으로 착각했던 이정화는 아무리 문채연에게 불만이 있었어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