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남편도, 아들도 내 발밑에 매달렸다: Chapter 41 - Chapter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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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화

건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여기가 자기 집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은주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아, 그건 미안... 근데 여기 진짜 내 가게 맞거든? 그러니까 지금은 사장으로서 말하는 거야. 내 바는 무례한 손님 안 받아. 당장 나가줄래?”“너 지금 누구더러 나가라는 거야?”선재는 목소리를 높이며 앞으로 나서려 했고, 그 순간 태현이 재빨리 선재의 팔을 잡아당겼다.“야야, 진정해. 윤제 형 보고 있잖아.”윤제는 얼굴에 묻은 술을 닦으며 조용히 일어났다. 그의 눈가는 술기운에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그는 은주를 매섭게 노려보며 낮게 말했다.“서은주,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예진이 편이라도 들겠다는 거야?”은주는 비웃듯 윤제를 내려다봤다.“아니, 네가 뭔데 내가 편을 들어야 하지? 예진이는 지금 누구 말도 듣고 싶지 않다는데, 내가 뭐 하러 네 눈치를 보겠냐?”그녀는 팔짱을 끼고 시선을 쏘아붙였다.“여긴 공공장소고, 나는 장사하는 사람이라서 그래. 입만 열면 여자를 깎아내리고, 무례한 말만 쏟아내는 사람들이 내 가게에 앉아있는 꼴은 못 보겠으니까 나가달라는 거야.”‘내가 한 말... 누굴 향한 말인지 뻔하잖아. 바보가 아니고서는 모를 리가 있나.’순간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윤제는 은주를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예진의 가장 가까운 친구, 입도 거칠고 성격도 거침없기로 유명했다.애초부터 윤제는 은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술집이나 전전하면서 놀기 바쁜 여자.애초에 윤제와는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였다.그는 예전부터 이미 여러 번 예진에게 경고한 적도 있었다.“서은주 같은 애랑은 거리를 둬.”예진은 겉으론 ‘알겠다’고 했지만, 뒤에선 여전히 은주와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지내는 사이였다.지금 은주의 반응은, 딱 예진에게서 힘을 얻은 듯한 태도였다.윤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조언 하나 할게. 괜히 앞장서서 나설 필요 없어. 이혼은 우리 부부 문제고, 우린 가족이야. 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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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술병이 깨져서 바닥에 유리 파편이 널브러진 통에, 술집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되었다.30분 뒤, 동부경찰서 수정지구대.예영호는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찢어진 외투를 걸친 채 여전히 눈을 부라리고 있는 서은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그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 넷, 그중에서도 얼굴이 퉁퉁 부은 송선재는 얼굴이며 목까지 손톱 자국으로 가득했고, 심지어 상처에는 피까지 맺혀 있었다.예영호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서은주 씨, 이번 주에만 벌써 두 번째네요. 근데 이번엔 한 명도 아니고 남자만 네 명이나? 정말 무슨 무협 소설 여주인공도 아니고. 이쯤 되면 상 받으셔야겠어요.”은주는 말장난 같다는 듯 눈을 치켜뜨며 벌떡 일어났다.“하, 웃기지 마세요. 난 그냥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길 가다 여자 욕하고 조롱하는 인간들, 그걸 보고도 모른 척하면 내가 사람이 아니지.”‘이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이 사회에서 여자를 얼마나 우습게 아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아?’예영호는 손을 들어 진정시키며 물었다.“알겠어요. 그럼 이번에도 친구분 번호 남기실 거예요?”은주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번엔 우리 오빠 번호 남길게요. 집에 알리셔도 돼요. 내가 다 감당할 수 있으니까.”조사실 반대편.태현은 선재의 얼굴을 힐끔 보다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푸하하하하하! 야, 송선재. 진짜 레전드다. 너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여자한테 이렇게까지 당하냐?”선재는 붓고 긁힌 얼굴을 거울에 비추며 씩씩거렸다.“너 지금 웃음이 나오냐? 이게 사람 얼굴이냐고! 아프다고, 아프다고 이 자식아!”태현은 웃음을 애써 참으며 눈가를 닦았다.“미안한데 너무 웃겨. 네가 맞은 게 웃긴 게 아니라... 그 여자가 진짜 상남자 뺨칠 정도야. 야, 나 서은주 누나 팬 할래. 진심이야.”윤제와 건우도 처음엔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태현의 웃음에 전염된 듯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선재는 입술을 깨물며 이를 갈았다.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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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경찰서에서 아내와 관계가 있다는 남자를 마주쳤다는 사실만으로 참았던 윤제의 분노가 다시 끓어올랐다.그리고 주먹을 불끈 쥔 채 속으로 씹듯 중얼거렸다.‘이게 진짜... 고예진, 너 지금 날 뭐로 보는 건데?’‘이젠 대놓고 눈앞에서 이 짓까지 하라고?’바로 그때, 경찰서 입구 쪽에서 민혁이 헐레벌떡 들어섰다.은주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빠르게 달려왔다.“은주야, 너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응... 괜찮아... 크게 안 다쳤어...”민혁은 은주의 온몸을 구석구석 살펴보며 겨우 한숨 돌렸다.그러고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한마디 했다.“이제 싸움도 해? 그것도 혼자서 네 명이랑?”‘우리 은주가 이 정도였나... 어릴 때부터 욱하는 성격인 건 알았지만...’‘진짜 어지간해야지, 경찰서까지 오는 건 좀 아니지 않나...’은주는 평소 무서울 게 없던 성격이지만, 민혁 앞에서는 조금 다르다.어릴 적부터 워낙 무섭고 엄격했던 오빠였기에, 은주도 순간 몸이 바짝 굳어졌다.“오빠, 나 억울해... 진짜로 사정이 있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번엔 제발 도와줘야 해.”민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너란 애는 진짜...”그제야 민혁은 예영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대충 상황은 오기 전에 파악했습니다. 그쪽에서 어떻게 정리할 계획인지 좀 들어볼 수 있을까요?”예영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일단 변호사님이시니까, 안쪽으로 들어가서 당사자 측과 조율을 해보시죠.”그렇게 해서 예영호는 민혁을 데리고 조사실 안쪽 사무실로 들어섰다.문을 열자마자, 안에 있던 윤제와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 모두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어졌다.‘뭐야... 이 둘이 아는 사이야?’‘잘 됐네. 아주 작정했구만. 고예진, 네가 아무리 발뺌해도 소용없어. 그 속이 이제 다 훤히 들여다보여.’윤제는 얼굴에 냉기가 서리며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근데 그놈이 지금 서은주의 오빠라고? 아주 걸작이네.’민혁은 태연하게 맞은편 의자에 앉았고, 예영호가 조심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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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민혁의 단호한 말에 선재는 더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치며 소리쳤다.“승산이 없다고요? 당신이 뭔데요?! 판사라도 되는 줄 알아요? 법이 당신 집안 규칙입니까?”민혁은 무표정하게 웃으며 재킷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소개가 늦었네요. 제 명함입니다.”탁-테이블 위에 얌전히 올려진 명함.선재는 비웃듯 힐끔 집어 들고 읽다가 그만 표정이 굳었다.“서... 서민혁? 최근 몇 년 사이 대형 로펌에서 핫한 그 ‘서민혁’? 설마 당신이... 진짜 그 사람이에요?”민혁은 가볍게 한쪽 눈썹을 올렸다.“뭐 문제 있습니까?”그 순간, 태현과 건우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윤제도 조용히 선재 손에서 명함을 뺏어와 들여다봤다.그리고 그제야, 예진이 왜 그렇게 ‘이혼’을 밀어붙였는지 감이 왔다.‘그래서 확신이 있었던 거군.’‘고예진... 설마 이 남자 뒤에 서 있는 거야?’‘말도 안돼... 돈 없다고 도망간 여자가...’‘변호사 하나 붙었다고 이제 날 상대로 이겨보겠다고?’태현이 선재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야, 이 서민혁... 우리 아버지도 법무팀장으로 스카우트하려 했던 사람이야. 그 정도로 독하다고 소문났어.”건우도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그리고 너희 집 지금 다음 투자 라운드 준비 중이잖아. 이 타이밍에 기사라도 하나 나면, 삼촌이 널 그냥 두실까? 게다가 상대가 단순한 술집 여사장이면 몰라도, 서민혁 여동생이면 얘기가 달라지지.”선재는 말없이 숨을 꾹 눌렀다.‘망할... 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 이런 인간을 건드린 거야...’아버지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하지만 사과? 그건 자존심이 도무지 허락하지 않았다.‘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어? 때린 건 그 여자인데, 내가 사과를 해? 말이 되냐고.’선재가 어떻게든 버티려고 할 때, 그동안 침묵을 지키던 윤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이 일, 사과는 어렵겠네요. 어찌 됐든 먼저 손을 쓴 쪽은 서은주 씨니까. 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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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예영호는 모든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그리고 속으로 감탄했다.‘서은주... 겉보기엔 그냥 드세고 말만 많은 애인 줄 알았는데...’‘이 정도 배경이면 그 자신감도 이해되지.’친구든, 오빠든, 누구 하나 만만한 사람이 없었다.은주가 아무리 성격이 거칠어도 결국은 누구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확실한 근거가 있었다.민혁이 조사실에서 나오자, 은주는 벌떡 일어나 민혁 쪽으로 달려갔다.“오빠, 어땠어?”민혁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선택지는 셋. 5억 배상하든가, 사과하든가, 법정에서 보든가.”은주는 민혁의 어깨를 퍽 치며 버럭 소리쳤다.“야, 오빠 미쳤어? 고작 5억에 날 팔아넘겨? 선택지 같은 거 줄 필요 없어, 바로 고소 때려!”‘지금이라도 다시 들어가서 머리채 한 번 더 잡고 나올까?’민혁은 은주의 눈빛을 보고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네가 그 말 하는 순간, 아버지가 여기까지 날아오시겠다. 술집 운영에, 경찰서까지 들락거리며 난동에 싸움질까지... 괜찮으면 그냥 아버지한테 다 말할까?”그 말에 은주의 어깨가 순식간에 움츠러들었다.말없이 의자에 주저앉은 그녀는 점점 목을 숙이더니 결국 후드 모서리까지 얼굴을 파묻었다.‘아빠가 알면... 진짜 끝장이야.’한편, 선재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진짜 이 꼴을 서은주한테 당했다고? 이게 무슨 재수 없는 날인가...’5억이야 협상용이라 해도, 이 시점에서 고소라도 들어가면 현재 추진 중인 사업 투자 건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그보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진짜 사람 하나 매장되는 거야.’머리를 굴려봐도 지금 상황에서 가장 간단하고 현실적인 해결책은 딱 하나였다.사과.하지만, 그게 제일 어려웠다.‘내가?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 이 꼴 당하고도 내가 고개를 숙여야 해?’그때, 태현이 조용히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야, 네가 왜 괜히 여자한테 겁준다고 나섰다가 일을 키우냐.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끝내. 남자 체면이 뭐 그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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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화

그때,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민혁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표정은 아까보다 한층 더 냉정해져 있었다.“지금 말한 거, 확실해? 오늘 일은 예진 씨를 욕한 게 이유라는 거지?”은주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그럼, 오빠. 내가 뭐 할 일 없어서 괜히 사고 치겠어? 그 인간들 입에서 나온 말, 내가 다 못 참겠더라니까!”민혁은 아무 말 없이 은주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그 눈빛엔 차가운 결심이 담겨 있었다.“좋습니다. 송선재 씨, 지금부터 어떤 사과도, 돈으로도 이 문제 해결 안 합니다. 이제 우리가 선택할 방법은 딱 하나예요. 법정에서 만나죠.”그 말과 함께 민혁은 은주의 손을 이끌고 그대로 밖으로 걸어나갔다.“아니, 잠깐만요! 뭐야! 아까까지는 사과하면 끝난다고 했잖아요!”선재는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어안이 벙벙했다.건우와 태현도 당황해 서로를 바라봤다.“이게 왜 또 이렇게 되는 거지?”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윤제를 향했지만,윤제는 얼굴이 굳어 있는 채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리고 그 어떤 반응도 없이 천천히 그 자리를 떠났다.‘그래, 서민혁. 고예진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나서겠다고?’‘좋아, 어디까지 가나 보자. 넌 날 너무 얕봤어.’...차 안.은주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민혁을 바라봤다.“아니 오빠, 아까는 아빠한테 들키면 안 된다고 했잖아. 그래서 사과 받고 끝내자며. 근데 왜 갑자기 고소야? 그 사람들 사과했잖아!”민혁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조용히 조작하며 대답했다.“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넌 신경 꺼. 아버지한테도 절대 안 들키게 할 거니까 걱정 마.”‘근데... 뭔가 이상한데. 이 오빠... 원래 이 정도까지 나가는 사람 아닌데...’은주는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정신이 너무 복잡해서 차마 뭐가 이상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근데 오빠, 예진이한텐 말하지 마. 괜히 알면 또 예진이가 자책할까 봐...”민혁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지만, 운전대를 잡은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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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윤제의 집에서 아침에 일어난 이안의 피부는 다소 진정된 듯 보였다.하지만 여전히 입맛은 없었다.유순자가 정성껏 차려준 아침밥도, 이안의 입에는 도통 맞지 않았다.‘엄마가 해주던 밥이 더 맛있는데... 이건 다 맛 없어.’윤제는 전날 밤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아린은 이안의 상태를 문자로 윤제에게 간단히 전하고,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기로 했다.차를 타고 가는 길, 아린은 이안이 계속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문 걸 보고 잠시 차를 세웠다.근처에 있는 김밥 전문점 앞이었다.아린은 조수석에 앉아 있는 이안을 향해 말했다.“조금만 기다려, 금방 다녀올게.”금세 김밥 한 줄과 따뜻한 두유를 들고 돌아온 아린은, 포장을 뜯으며 말했다.“이안아, 고모랑 같이 맛있는 거 먹고 갈래?”이안은 냄새를 맡는 순간,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고모, 이안이 이런 거 안 먹어. 엄마가 먹지 말랬어.”아린은 그런 이안의 코끝을 살짝 건드리며 웃었다.“안 먹어보고 어떻게 알아? 엄마가 못 먹게 했다고 다 나쁜 건 아니야.”그리고는 김밥을 한 입 베어 물었다.“음... 진짜 맛있다. 이걸 안 먹다니, 엄마가 너무했네.”이안은 그런 아린의 모습을 힐끔 보며 속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진짜 그렇게 맛있어 보이진 않는데... 근데 냄새는 좋다...’결국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김밥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한 입 베어 물자, 이안의 눈이 동그래졌다.“고모! 이거 너무 맛있어!”아린은 뿌듯하게 이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치? 고모가 절대 거짓말 안 한다고 했잖아.”이안은 입에 기름 묻히며 연신 먹기 바빴고, 다 먹고 나서는 두유까지 꿀꺽 마셨다.“근데 고모, 이거 아빠랑 엄마한테 비밀이야. 엄마가 이런 거 절대 먹지 말랬거든.”아린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응응. 절대 말 안 해. 앞으로도 고모가 맛있는 거 잔... 뜩 사줄게, 알겠지?”“응! 고모 최고!”아린은 이안의 입가를 휴지로 닦아주며, 아이가 환하게 웃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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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그날 예진은 처음으로 깨달았다.이 집에서 자신이란 존재는 없어도 그만인 사람일 수 있다는걸.처음 이안을 위해 요리를 시작했을 때, 예진은 언제나 아이의 건강을 최우선순위에 두었다.양념 하나, 재료 하나를 선택하는 데에도 조심스러웠고, 온 정성을 쏟아부었다.그런데도 이안은 매일 투덜댔다.이건 싫다, 저건 맛없다.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찡그리는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게 일상이었다.그런데 이제, 밥 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갑자기 엄마를 찾다니.‘이제 와서? 이젠 내가 필요하다는 거야?’예진의 마음 한켠이 서늘하게 식었다....예진은 이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더는 아무 감정도, 미련도 느껴지지 않았다.“밥해줄 사람 없으면 순자 할머니한테 부탁해. 아니면, 네가 새로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한 사람한테 말하든가.”예진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이안도 아린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이안은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뻣뻣이 들고,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뭐야, 엄마가 왜 이렇게 말하지? 내가 뭘 잘못했는데...’예진의 차가운 말투에, 어린 아이의 자존심이 꿈틀댔다.“이런 일은 당연히 엄마가 해야지. 엄마는 그동안 집에만 있었잖아. 아빠가 벌어온 돈으로 먹고 살면서. 지금 엄마가 입고 있는 새 옷도, 아빠가 사준 거 아니야? 그러니까 엄마는 당연히 집에서 일을 해야지!”이안의 말에 예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예전 같았으면, 그런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저리고, 자신이 전업주부를 선택한 게 과연 옳았는지 깊이 자책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예진은 알고 있었다. 가족이란 이름 아래 있는 사람들조차, 자신을 그렇게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나는 그냥, 부윤제가 벌어주는 돈으로 간신히 목숨이나 연명하는 무가치한 존재였구나.’그 어떤 말도, 그 어떤 설명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예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마음이, 조용히 무너져 내릴 뿐이었다.예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맞아. 그동안은 아빠가 돈 벌고, 엄마는 집을 지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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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화

세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잠시 후 옆에 앉아 있던 남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고예진 씨, 혹시 24시간 핸드폰을 켜 두고, 필요할 땐 언제든 연락을 받을 수 있는 근무 방식도 괜찮은가요? 직무 특성상, 지방이나 해외로의 출장도 있을 수 있습니다.”예진은 순간 당황해 고개를 들었다.‘24시간 대기...? 아니, 그냥 변호사 비서 아니었어? 이런 게 일반적인 조건인가?’의아했지만, 지금은 어떤 일이든 구할 수 있다면 감지덕지였다.‘그래, 어차피 집에도 돌아갈 생각은 없고... 지금은 뭐든 해야 해.’예진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네. 가능합니다.”이미 기대는 하지 않았다.자격증도 없고, 공백기도 길고, 무엇보다 사회 경험이 전무했다.‘이번에도 아니면 다시 구직 사이트 들어가서 알아봐야겠지.’하지만 뜻밖에도, 면접관 셋은 또다시 조용히 눈빛을 주고받더니, 이내 중간에 앉아 있던 인사팀장이 입을 열었다.“고예진 씨, 축하드립니다. 내일부터 출근하시면 됩니다. 이따가 인사팀 직원이 입사 절차 안내해드릴 거예요. 수습 기간은 한 달이고, 이후 정규직 전환됩니다.”예진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네? 벌써... 합격인가요?”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네, 합격입니다.”예진이 멍하니 앉아 있자, 인사팀장이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갔다.“수습 기간 급여는 세후 160만 원, 정규직 전환 후에는 세후 230만 원입니다. 이후 프로젝트 단위로 성과 수당도 지급됩니다. 이 조건, 괜찮으신가요?”예진은 속으로 거의 울컥할 뻔했다.‘처음부터 이렇게 순조로울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진짜 현실이야?’그 순간, 멍하니 있던 예진이 벌떡 일어나 머리 숙여 인사했다.“좋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예진은 허리를 숙인 채, 처음으로 ‘나도 어딘가에 필요한 사람이구나’ 하는 벅찬 감정을 느꼈다....그 시각, 윤제는 막 법원에서 이혼소송 관련 1차 공판 날짜가 적힌 송달장을 받고 나오는 길이었다.‘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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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예진은 그제서야 깨달았다.‘그날은 너무 다급했어...’급하게 집을 나온 탓에 옷가지랑 개인 소지품 몇 개만 챙기고, 책은 무거워서 손도 못 댄 채 온 상황이었다.이제 막 일을 시작하려는 참인데, 다시 법률 지식을 복습하려면 그 책들이 꼭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다시 사려면 돈도 만만치 않고... 거기 밑줄 치고 메모해둔 것들도 중요한데...’예진은 윤제를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책이 발목을 붙잡았다.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알겠어. 지금 가서 가져갈게.”전화를 끊고, 예진은 사무실을 나와 익숙한 동네로 가는 버스를 탔다.‘다신 가고 싶지 않은 곳인데...’퇴근 시간이라 차는 막혔고, 가는 길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예진은 도착해서 보니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거실 소파에 윤제가 앉아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날카로운 눈으로 예진을 바라보고 있었다.유순자 여사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일부러 비워놨겠지.’예진은 아무 말 없이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서재 쪽으로 걸어 들어가, 큰 박스를 펼치고 책을 하나둘씩 담기 시작했다.‘여기 있는 책들 전부 내 시간이자 노력의 결과고, 내 자존심이야.’하지만 조용했던 계단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올라왔다.뒤늦게 따라 올라온 윤제가 문 앞에 서 있었다.그리고 다음 순간, 남자의 발이 박스를 그대로 걷어찼다.책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무거운 소리와 함께 예진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지금 뭐 하는 거야?”예진이 차갑게 그를 노려봤다.윤제의 표정은 왜곡되어 있었다.“진짜 가려고? 그렇게 쉽게? 이혼하면 다 끝이라고 생각했어?”‘이 사람, 아직도 현실을 못 받아들이는 거야?’예진은 침착하게 허리를 펴고 말했다.“내가 여기 온 건, 책 가지러 온 거야. 당신한테 감정 소모하러 온 거 아니니까, 방해하지 마.”윤제는 예진의 그 눈빛에 말문이 막혔다.예전 같으면 미안하다며 풀 죽을 예진이었다.그런데 지금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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