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예진은 처음으로 깨달았다.이 집에서 자신이란 존재는 없어도 그만인 사람일 수 있다는걸.처음 이안을 위해 요리를 시작했을 때, 예진은 언제나 아이의 건강을 최우선순위에 두었다.양념 하나, 재료 하나를 선택하는 데에도 조심스러웠고, 온 정성을 쏟아부었다.그런데도 이안은 매일 투덜댔다.이건 싫다, 저건 맛없다.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찡그리는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게 일상이었다.그런데 이제, 밥 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갑자기 엄마를 찾다니.‘이제 와서? 이젠 내가 필요하다는 거야?’예진의 마음 한켠이 서늘하게 식었다....예진은 이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더는 아무 감정도, 미련도 느껴지지 않았다.“밥해줄 사람 없으면 순자 할머니한테 부탁해. 아니면, 네가 새로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한 사람한테 말하든가.”예진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이안도 아린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이안은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뻣뻣이 들고,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뭐야, 엄마가 왜 이렇게 말하지? 내가 뭘 잘못했는데...’예진의 차가운 말투에, 어린 아이의 자존심이 꿈틀댔다.“이런 일은 당연히 엄마가 해야지. 엄마는 그동안 집에만 있었잖아. 아빠가 벌어온 돈으로 먹고 살면서. 지금 엄마가 입고 있는 새 옷도, 아빠가 사준 거 아니야? 그러니까 엄마는 당연히 집에서 일을 해야지!”이안의 말에 예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예전 같았으면, 그런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저리고, 자신이 전업주부를 선택한 게 과연 옳았는지 깊이 자책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예진은 알고 있었다. 가족이란 이름 아래 있는 사람들조차, 자신을 그렇게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나는 그냥, 부윤제가 벌어주는 돈으로 간신히 목숨이나 연명하는 무가치한 존재였구나.’그 어떤 말도, 그 어떤 설명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예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마음이, 조용히 무너져 내릴 뿐이었다.예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맞아. 그동안은 아빠가 돈 벌고, 엄마는 집을 지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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