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 카운트다운, 너를 버릴 시간: Chapter 81 - Chapter 90

221 Chapters

제81화

“괜찮아요, 아버지. 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렇게 오래됐잖아요. 이제는 익숙해졌어요.”임서율은 짧은 침묵 끝에 그렇게 말했다.사실은 귀의 청력이 돌아왔다는 걸 말하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그 사실이 차주헌에게 새어 나가면 어쩌나 마음속에서 경고등이 울렸다.지금은 어떤 작은 틈도 허용할 수 없었다.“그래도 검진은 받아야 해.”임규한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입 모양을 읽을 수 있다고 해도 소리를 못 듣는 건 결국 네 세계의 일부가 닫혀 있는 거야. 지인이 소개해준 A국 의사야. 한 번쯤 연락해 봐. 비용은 내가...”“아빠.”차갑고 날 선 목소리가 대화를 가로막았다.임유나였다.“얘 귀 그렇게 된 거 아빠 잘못도 아니잖아요. 치료해줘야 할 사람은 우리 가족이 아니라 얘 남편이죠. 차주헌이 그렇게 큰 회사 하는데 아내 치료비 하나 못 대요?”그녀의 말끝엔 노골적인 분노가 서려 있었다.이 시점에서도 임규한이 임서율을 챙긴다는 사실은 도무지 참기 어려웠다.‘친딸도 아닌데... 아빠는 왜 늘 임서율 편이야? 모든 불행은 얘가 들어온 순간부터 시작됐잖아.’임규한의 눈빛이 서늘하게 식었다.“그만해, 유나야.”낮고 단호한 목소리였다.“서율이가 네 친언니는 아니지만 이 집에서 몇 년을 같이 지냈잖아.”임유나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고 입술을 깨물며 억울함을 드러냈다.“아빠... 임서율만 아니었으면 내가 그렇게 밖에서 고생하지도 않았고 동생도 안 잃었어요...”그때, 거실 한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유나 말이 맞아. 저 재수 없는 애만 아니었어도 내 아들이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이렇게 모를 일은 없었을 거야.”임서율이 고개를 들었다.계단 위에서 한 여자가 내려오고 있었다.고가의 실크 드레스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을 정갈히 틀어 올린 모습.피부는 세월을 비켜간 듯 반들거렸고 눈매엔 싸늘한 적의가 서려 있었다.정설아.임규한이 재혼한 뒤, 이 집안의 여주인이 된 여자.임서율의 새엄마이기도 했다.
Read more

제82화

임서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차주헌과의 관계는 이미 마음속에서 조용히 끝을 맺은 지 오래였다.그래서 더더욱 이 집에서조차 그 이야기가 언급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다들 오해하신 것뿐이에요.”그녀가 덤덤하게 말하자 정설아는 비웃음을 터뜨렸다.“정말 태연하다, 넌. 남편이 밖에서 딴 여자랑 놀아나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 있다니.”“그만해. 지금 그런 말 할 상황 아니잖아.”임규한이 말끝을 자르듯 끼어들었다.그러고는 임서율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서율아, 일단 위로 올라가자. 내 서재로 가자꾸나.”그제야 정설아도 물러섰고 임서율은 계단을 향해 조용히 발을 내디뎠다.그러나 순간, 발끝이 무언가에 걸렸다.“...읏.”임서율은 생각이 너무 많아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탓에 몸이 앞으로 쏠리며 동시에 이마가 계단 모서리에 부딪혔다.“턱...!”짧은 비명도 나오기 전, 이마가 찢기며 숨이 턱 막히는 고통이 퍼졌다.반사적으로 손으로 이마를 감싸쥐자 손바닥에 뜨겁고 끈적한 감촉이 느껴졌다.피였다.“어머! 언니, 미안해.”임유나가 과장된 목소리로 외쳤다.“설마 진짜 넘어질 줄은 몰랐지 뭐야.”입을 가리고 놀란 척하는 그 모습은 오히려 더 노골적인 비웃음 같았다.“아니, 이렇게 넓은 데서 혼자 넘어지다니. 좀 조심하지 그래?”임규한이 급히 달려왔다.“서율아, 괜찮아? 이마에 피가... 아줌마 불러서 약 좀 갖고 오라 해야겠어.”“괜찮아요.”임서율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그냥 올라가요, 아버지. 정말 괜찮아요.”임규한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진짜 괜찮겠니?”“네. 아무 일 아니에요.”그녀는 아버지를 더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정설아의 아들이 사라진 날, 그 고통과 분노가 고스란히 아버지에게 향해 있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서재에 도착한 임서율은 조심스럽게 선물 상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아버지, 생신 축하
Read more

제83화

임서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한때는 절대 자신을 상처 주지 않겠다고 끝까지 지켜주겠다고 말하던 남자.그가 결국 자신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 사람이 되었다.남자의 약속은 결국 그 순간뿐이었다.시간이 흐르면 마음도 말도 바뀔 수 있는 법이니까.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메시지를 적기 시작했다.손가락은 같은 자리를 맴돌았고 몇 글자 겨우 눌러 보내고 나서야 손바닥이 젖어 있는 걸 느꼈다.[응, 일 봐.]메시지를 보낸 뒤, 임서율은 조용히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임규한은 그녀의 표정에서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다.“서율아, 무슨 일 있니? 주헌이 때문이야?”그녀는 곧장 눈빛을 거두고 평정을 되찾았다.“아뇨, 아버지. 주헌이가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대요. 오늘은 못 온다고... 다음에 같이 식사하자고 하더라고요.”임규한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요즘 젊은 사람들 바쁘지. 그래도 밥은 좀 먹고 가라.”“괜찮아요. 저도 처리할 일 있어서요. 식사는... 다음에요.”하지만 임서율은 그 ‘다음’이 정말 올 수 있을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그녀의 목소리엔 어느 순간, 깊은 망설임이 서려 있었다.임규한은 더는 묻지 않았다.지금 이 집에는 할아버지 임태규가 머물고 있었고 그와 마주쳤다간 또 다른 말썽이 일어날 테니까.임서율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임규한은 덧붙였다.“서율아, 이마 다친 거 꼭 치료해. 그냥 넘기지 말고.”“네.”짧게 대답한 그녀는 서재 문을 열고 나섰다.그런데 이상하게 문이 닫히는 순간 눈가가 뜨겁게 젖어들었다.계단을 내려가던 임서율은 현관 쪽으로 향했다.하지만 그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임유나였다.“뭐야, 벌써 가?”임서율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스쳐 지나가려 했다.하지만 임유나는 그 눈빛 하나에도 본능적으로 불편함을 느꼈다.‘나는 진짜 딸이고 쟤는 주워온 애에 불과한데... 왜 저렇게 당당한 건데?’분노가 끝까지 치밀어 오른 임유나는 결국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우리 본가가 네가
Read more

제84화

정설아는 두 팔을 가슴에 끼고 섰다.짙은 루즈가 칠해진 입술이 비죽이 올라가 있었고 눈매엔 교활한 빛과 자신만만한 오만함이 번졌다.“말이 참 세네? 그냥 확인 좀 해보자는 건데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쁠 일인가? 모를 때 뭔가 빠졌을 수도 있잖아.”임서율은 등을 곧게 펴고 그녀를 정면으로 응시했다.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엔 결연함이 몸 전체엔 날이 바짝 선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분명히 말했죠. 가져간 적 없다고. 그리고, 나. 당신네 집 목걸이 몇 개 때문에 체면 구길 만큼 한심하게 살지 않아요.”정설아의 얕은 웃음엔 싸늘한 기류가 스며 있었다.“그럼 좀 협조하지 그래? 끝까지 거부하면... 강제로라도 확인해야겠네?”그녀가 눈짓을 하자 방미란과 유영희가 어깨를 움츠리며 성큼 다가왔다.두 가정부가 임서율의 양팔을 잡으려는 순간, 임유나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다가왔다.“내가 확인할게. 주머니부터...”퍽!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서율의 발끝이 날카롭게 뻗었다.정확히 임유나의 복부를 가격한 그 순간, 그녀의 몸이 휘청이며 계단 아래로 구르듯 떨어졌다.“꺄악!”난간에 머리를 부딪친 임유나가 비명을 질렀다.주변은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방미란과 유영희는 손도 못 쓰고 멈춰 섰다.그녀가 이렇게까지 행동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하지만 임서율은 물러서지 않았고 힘을 실은 두 팔로 그들을 밀쳐내 벽 쪽으로 내던졌다.“아악!”“허리, 아이고 허리야...!”가정부들이 쓰러지자 임서율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웃었다.그 미소는 차갑고 날카로웠으며 경멸이 그대로 묻어났다.“네까짓 것들이 감히 날 의심해? 설령 내가 뭘 갖고 싶었다 해도 도둑질 같은 더러운 방법은 택하지 않아. 그러니까 감당도 못 할 짓 하지 마.”그녀는 차분히 옷깃을 정리했다.그 동작마저 위압감이 느껴질 만큼 침착하고 날카로웠다.정설아는 그제야 숨을 가다듬으며 다가왔고 얼굴엔 분노와 당혹이 뒤엉켜 있었다.“네가 지금 이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너 때문에 우리 아들이 실종
Read more

제85화

‘이런 걸 아빠도 모를 텐데... 임서율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임유나의 눈빛이 흔들렸다.‘설마 사람을 시켜서 날 미행이라도 했다는 거야? 그게 아니면 이렇게 정확할 리가 없어...’하지만 그 의심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흔들렸는지를 받아들여야 했고 임유나는 차라리 고함치며 도망치는 편을 택했다.“무슨 헛소리야!”임유나는 입술을 말아 물고 비웃듯 말했다.“임서율, 너 차주헌한테 차인 거잖아. 평소엔 발에 껌처럼 붙어 다니더니 오늘은 혼자네? 첫사랑이랑 붙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지?”임유나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뭐... 너처럼 귀머거리인 여자를 누가 데리고 다니겠어. 같이 다니면 당연히 민망하겠지.’그 순간, 임서율의 눈썹 사이가 천천히 찌푸려졌고 맑고 고요한 눈동자에 뿌연 분노가 일렁이기 시작했다.이 집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피하고 싶었던 바로 그 상황.그 모든 이유가 지금 이 순간에 응축되어 있었다.임서율은 말없이 임유나에게 다가갔다.임유나는 위축된 듯 고개를 피했지만 임서율은 그대로 그녀 앞에 섰다.그리고 조용히 압박감 가득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찰나, 그녀의 손끝이 임유나의 턱을 툭 들어올렸다. 가벼운 접촉이었지만 그 안엔 묵직한 냉기와 경고가 담겨 있었다.임유나는 움찔하며 입술을 달달 떨었다.“...뭐, 뭐 하는 거야. 여긴 임씨 본가야! 네가 함부로 날뛸 곳 아니거든!”임서율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하나만 말할게. 자존심은 남이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지키는 거야. 넌 아직도 과거에 갇혀서 날 원망하고 질투에 눈이 멀어 있어.”임유나의 눈가가 덜컥 떨렸다.“그러니까 차라리 네 수준에 맞는 자리로 돌아가. 그게 너한테도 편하고 덜 창피할 거야. 지금처럼 계속 날 따라다니면서 기를 죽이려 해봐야 밖에서는 네 무리조차 널 무시할 테니까.”그녀는 손끝으로 임유나의 턱을 툭 놓았다.그 힘에 임유나는 중심을 잃고 하이힐이 휘청이며 비틀거렸다.다시 자세를 바로잡은 임유나는 분노로
Read more

제86화

“하도원이랑... 요즘 네가 엮였단 얘기 들었다.”임태규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요즘 돌아가는 상황이 너한텐 썩 유리해 보이지 않더구나. 모두를 위한 방향을 고민해본 적은 있겠지?”그 말은 겉으론 배려 같았지만 임서율은 알았다.임태규가 저렇게 조용하고 친절하게 말을 시작할 때, 그 속엔 언제나 계산이 숨어 있었다.그녀는 더는 돌려 말할 생각이 없었다.“할아버지,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바로 하세요. 설마 오늘 저랑 점심까지 같이 드시고 싶은 건 아니시죠?”임태규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잔잔히 웃었지만 그 미소는 뒷목이 서늘해질 만큼 냉정했다.“...참 안타깝구나.”임서율은 그 ‘안타깝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누구를 향한 건지 생각하며 짧게 웃어 보였다.그러나 곧 얼굴에선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게 식어버렸다.“나는 네가 하도원과 유나를 연결해줬으면 한다.”임태규는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중개인으로 네가 나서줬으면 해.”임서율의 표정이 굳었다.그 말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그녀를 찔러왔다.놀란 건 임유나도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잠깐 동그랗게 눈을 뜬 채, 얼어붙은 표정으로 임태규를 바라봤다.과거, 임태규는 임유나를 차주헌과 엮으려다 실패한 전적이 있었다.그때는 예의와 품격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임유나는 배제되었다.하지만 지금 임태규의 말은 그녀 마음 한구석의 균형을 맞춰주는 듯했다. 임서율은 곧장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그건 못 하겠습니다.”그 말에 임유나의 입꼬리가 서서히 굳었고 눈빛엔 억울함과 분노가 겹쳐졌다.“님서율, 너는 이미 차주헌이랑 결혼했잖아. 내가 네 남자를 뺏겠다는 것도 아니고그냥 소개만 해달라는 거야. 그게 그렇게 힘들어?”임서율은 피식 웃으며 싸늘하게 받아쳤다.“난 하 대표님이랑 그럴 만큼 가까운 사이 아니야.”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임태규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임태규는 평생 누군가의 거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임씨 가문에서도 아니라는 말은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
Read more

제87화

“중간에서 연결 정도는 해드릴 수 있어요. 그치만... 하 대표님이 임유나 씨를 마음에 들어 하실지는 장담 못 하겠네요. 그분, 원래 까다롭고 변덕도 심해서요.”말을 던진 임서율은 담담했다.임태규는 한동안 입을 다문 채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 정도면 충분하지.”그는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임서율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이 집에, 이 공기 속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았다.“임유나한테 곧 연락 갈 거라고 전해주세요.”현관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눌리던 가슴이 풀리듯 숨이 쉬어졌다.응접실의 공기는 그토록 넓은 공간임에도 유난히 숨막혔었다.임서율은 무심코 이마를 만졌고 따끔한 상처가 손끝에 닿았다.“...참, 긁어도 세게도 긁었네.”하지만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임유나의 손등에도 똑같은 상처 하나쯤은 남았으니까.택시를 부르려 핸드폰을 꺼내려던 순간, 문자가 도착했다.양지우였다.[오늘 아버지 생신 축하하러 간 거지?]임서율은 뭔가 있나 싶어 곧장 답장을 보냈다.[응. 왜? 무슨 일 있어?]잠시 뒤, 짧고 강한 메시지가 화가 난 듯한 이모티콘과 함께 도착했다.[강수진 인스타 좀 봐.]임서율은 눈살을 찌푸리며 인스타그램을 열었다.30분 전, 강수진이 올린 사진 하나.‘앞으로 생일마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사진 속에는 해변에서 남자의 팔에 안겨 웃고 있는 강수진의 뒷모습이 보였다. 남자의 얼굴은 찍히지 않았지만 그 손가락, 특유의 마디 굴곡과 희미한 반지 자국.차주헌이었다.임서율은 짧게 숨을 들이켰고 입꼬리가 천천히 비틀리듯 올라갔다.“이게 당신이 말한 ‘일’이었구나.”그는 알고 있었다.임씨 집안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 안에서 그나마 차주헌이 곁에 있어야 눈치라도 본다는 것도.그런데 그는 그걸 알면서도 자기 여자의 생일을 챙기기 위해 그녀를 그 지옥 한가운데에 혼자 남겨둔 채 떠났다. 임서율은 조용히 인스타그램을 닫고 택시를 호출했다.가는 길, 양지우에게 문자를 보냈다.[최근
Read more

제88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임서율은 가장 먼저 이마에 난 상처를 간단히 정리했다.거울 속 자신을 한 번 바라보고 아무 말 없이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였다.짐을 정리하려던 찰나, 현관문이 열렸다.차주헌이었다.“왜 이렇게 일찍 왔어?”임서율은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물었다.그는 열쇠를 무심히 탁자에 툭 던지고 양복 재킷을 벗으며 그녀를 바라봤다.“그냥 잠깐 다녀왔어.”차주헌은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들고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그리고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이마에 붙은 반창고였다.그는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차주헌은 아무 말 없이 무릎을 반쯤 꿇고 상처를 조심스레 살폈다.“...어디서 다친 거야?”걱정이 묻어 있는 목소리였지만 임서율은 멍하니 그를 내려다봤다.‘진짜 걱정일까. 아니면 연기일까.’만약 연기라면 이쯤 되면 상 줘야 할 정도로 능숙했다.“별거 아니야. 그냥 넘어졌어.”임서율은 더 이상 진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임유나와 정설아, 그 이름들을 끄집어내는 것 자체가 의미 없게 느껴졌다.그는 더 이상 그녀의 뒤에서 막아줄 우산이 아니었다.차주헌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혹시 네 동생이랑 새엄마가 그런 거야?”임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시선이 여전히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그 순간,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만약 그렇다 해도 당신이 뭘 해줄 수 있는데? 대신 싸워줄 거야?”그 말에 차주헌의 입이 굳었다.예전에 한종서가 그녀를 모욕하고 짓밟던 그때도 그는 한 번도 나서지 않았고 끝까지 외면했었다.하지만 하도원은 달랐다.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사람’이 상처받는 걸 앞에 두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그에 비해 차주헌은 늘 계산했다.관계와 위치 그리고 미래.그런 그에게 중요한 존재가 아닌 임서율은 언제든 희생될 수 이는 카드에 불과했다. “내가 네 편 들어서 따지고 들면 지금은 네가 좋을지 몰라도... 나중엔 그 사람들이랑 사이가 완전히 틀어질 수도 있어. 정말 괜찮겠어?”말은 그녀를 위하는
Read more

제89화

임서율은 숨이 턱 막혔다.차주헌이 애초부터 자신을 연회에 데려갈 생각조차 없었다는 사실이 방금 전까지 아무 말 없던 그의 태도를 명확히 설명해주고 있었다.그는 서둘러 강수진과의 ‘공식 자리’를 만들어내려 했던 것이다.그래야 언젠가 강수진이 자신을 대신하더라 세간의 비난에서 빠르게 빠져나올 수 있을 테니까.그 순간, 욕실 문이 열렸다.물기가 묻은 머리로 나온 차주헌은 침대 옆 탁자 앞에 서 있는 임서율을 보자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녀의 손엔 그의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그는 주저도 없이 다가와 그녀의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챘다.“이젠 남의 폰도 들여다보는 거야?”순간 놀란 임서율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그의 과한 반응에 말문이 막혔지만 곧 침착하게 응수했다.“화면이 켜져 있길래. 중요한 메시지인 줄 알고 본 거야. 근데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차주헌은 자신의 반응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는지 숨을 고르며 억지로 목소리를 낮췄다.“...미안. 요즘 회사 일 때문에 좀 예민했어. 너한텐 안 그러고 싶었는데...”그는 핸드폰 화면을 슬쩍 확인하며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내일 연회가 있어. 너 이마도 다쳤고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수진이가 나랑 같이 가기로 했어. 경험도 쌓고 앞으로 네가 하던 일도 나눠서 하면 너도 좀 편할 거고.”임서율은 반박하지 않았다.어차피 이건 그가 오래전부터 짜놓은 시나리오였다.“응.”그녀는 짧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차주헌은 자신이 너무 날카롭게 굴었다는 자각 때문인지 괜히 미안한 얼굴로 그녀를 안았다.따뜻한 손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부드럽게 위로하는 듯 움직였다.“서율아, 미안해. 아까는 내가 좀 흥분했어. 요즘 오아시스 프로젝트 때문에 회사가 뒤숭숭해서...”하지만 임서율은 가만히 안긴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차가운 미모 속에 감정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괜찮아. 수진 씨가 가면 되지.”차주헌은 애써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며칠은 집에서
Read more

제90화

하룻밤 내내 임서율은 조용히 차주헌을 피했다.그가 다가오면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켰고 표정엔 그저 피로만 얹혀 있었다.차주헌은 무언가 감지한 듯 손끝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마주 보게 했다.“왜 그래? 어디 아파?”임서율은 눈길을 피하며 낮게 답했다.“배가 좀... 아파서. 그냥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차주헌은 곧장 핸드폰을 꺼내 캘린더를 확인하더니 의아한 얼굴로 눈썹을 찌푸렸다.“너 그날이 12일 아니었어?”임서율의 손끝이 순간 멈췄다.그녀는 분명 2일이었다.12일이라니, 대체 누구의 주기를 적어둔 걸까.답은 하나였다.강수진.그러나 임서율은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요즘 생활이 좀 불규칙해서 그런가 봐. 컨디션이 들쭉날쭉하더라고.”차주헌은 별 의심 없이 그녀의 아랫배에 손을 얹어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지금도 아파? 우유랑 핫팩 사다줄까?”임서율은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정말 아픈 건 아니었다.단지, 그가 정말 그렇게 해줄지 궁금했을 뿐이었다.그녀는 눈썹을 살짝 찌푸려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럼... 부탁할게.”차주헌은 장난스레 그녀의 뺨을 꼬집으며 웃었다.“남편한테 뭘 그렇게 정중해.”임서율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래도 예의는 필요하니까.”그가 외출 준비를 위해 옷을 갈아입던 중 침대 옆 탁자에 놓인 핸드폰이 진동했다.임서율은 습관처럼 그쪽을 바라봤고 화면에 뜬 이름은 익숙하고도 낯익었다.‘강수진.’새벽 두 시.그 시간에 전화를 거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다.임서율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받아. 혹시 급한 일일 수도 있잖아. 강수진 씨 입장에선 당신밖에 기댈 사람이 없을 테니까.”차주헌은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 이렇게 늦은 시간에?”“주헌아... 와줄 수 있어? 열이 너무 심해서... 머리도 깨질 것 같고 혼자선 감당이 안 돼...”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수진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떨려 있
Read more
PREV
1
...
7891011
...
23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