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길에 오른 너와 나의 모든 챕터: 챕터 31 - 챕터 40

100 챕터

제31화 조금만 더 자

시아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창밖이 훤히 밝아 있었다.전날 하루가 너무 벅찼고, 결혼 전날 밤도 거의 잠을 못 잤던 터라 이렇게까지 깊이 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하지만 오늘은 하씨 가문으로 시집온 첫날. 이렇게 늦게 일어나는 건 예의가 아니다.급히 일어나려던 순간 누군가의 게으른 목소리가 들렸다.“조금만 더 자.”시아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지호가 아직 안 일어났다.시아는 조심스레 숨을 들이켰다. “날도 밝았는데 너무 늦게 일어나면 안 되죠.”그래도 몸을 일으키려 움직이자 남자의 팔이 이불 너머로 시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피부에 직접 닿지 않았지만 그 온기는 시아의 온몸에 전달되었다.움직일 수 없게 된 시아는 그대로 멈춰버렸다.“너무 일찍 일어나는 게 더 문제야.”지호의 목소리가 더 가까워졌다.비록 등지고 있었지만 어젯밤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은 느껴졌다.시아는 조심스레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지호 씨 부모님이 뭐라고 하실 수도 있잖아요...”“일찍 일어나면 더 뭐라 하실걸.”지호는 목덜미 가까이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어젯밤에 내가 할 일을 안 했다고 할 거야.”“...”시아는 말문이 막혔다.그 이후로는 말이 없었다. 지호가 정말 다시 잠든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허리를 감싼 팔이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저... 화장실 좀 가야 하는데. 손, 잠깐만 풀어주시면...”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잠든 건가?’어쩔 수 없이 지호의 팔을 들어 올리려 했는데 팔이 생각보다 묵직했다.좀 더 힘을 주려던 찰나 갑자기 허리가 확 당겨졌다.시아의 몸이 돌면서 순식간에 지호의 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눈앞에 남자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코끝이 닿을 듯 가까웠고,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혹시... 어젯밤에 못 했던 걸 지금 하려는 건가?’몸이 굳어 아무것도 못 했다.그녀는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이렇게 환한 대낮엔 더 어색했다.창밖 햇살이 커튼을 통해 은은히 들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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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출산 얘기

시아와 지호가 1층으로 내려갔을 땐 하씨 가문의 식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전날은 하객이 많아 제대로 인사도 못 했기에 오늘 아침엔 일일이 소개해 주었다.모두들 시아를 유심히 바라봤고, 특히 시선은 여자의 목으로 쏠려 있었다.시아는 그제야 지호가 남긴 흔적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건 어젯밤에 꽤나 잘 지냈다는 일종의 표시였다.다들 아침을 마친 상태였지만 지호와 시아의 자리는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식사는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고, 식탁에는 각종 디저트, 요리들로 가득했다.“작은 사모님, 이건 사모님 드실 국입니다.”식탁을 돌던 가사도우미가 지호와는 달리 시아에게 국을 건넸다.“감사...”시아가 인사하려던 순간, 지호가 옆에서 눈을 흘겼다.“벌써부터 보양이야?”‘보양?’시아는 국 안을 들여다보았다. 은은하게 풍기는 약재 향이 났다.“당연히 보양해야지. 그래야 내가 증손자 빨리 볼 수 있지.”목소리의 주인공은 지호의 할머니였다. 은발에 초록빛 저고리를 입은 모습은 마치 드라마 속 대비마마 같았다.“맞아, 보양해야지. 시아 너무 말랐어.”지호의 어머니인 안영도 덧붙였다. 듣기로는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는 말이지만 결국엔 같은 뜻이었다.‘결혼 둘째 날 아침부터 출산 얘기를 들을 줄 몰랐어.’하지만 문제는 시아와 지호가 이름만 부부라는 점이었다. 뭘 낳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시아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숙이고 조심스럽게 지호를 바라봤다.“마셔. 애를 안 낳아도 마실 수는 있는 거야.”지호는 여전히 날이 선 말투였다.어제오늘을 겪으며 시아는 확신했다. 지호에 대한 첫인상은 완전히 착각이었다. 시아가 알던 ‘도움 주는 착한 남자’는 없었다.“그럼 당신이 대신 마시지 그래요?”시아는 주저 없이 쏘아붙였다.“내가?”지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나는 그런 능력이 없어서 마셔봤자 소용없거든.”“...”아무리 마시고 싶지 않아도 시아는 이 국을 마셔야 했다. 너무 많은 시선이 옆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시아와 지호가 아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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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여자 복은 넘치는 남자

“지호 씨, 우리 어떻게 SNS 친구가 되었어요?”메시지를 잘못 보낸 것은 시아도 인정하지만, 지호가 자기 친구 목록에 없었다면 그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도무지 지호가 언제부터 친구 목록에 있었는지 그녀는 기억나지 않았다.지호는 앞을 보며 운전하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이 남자의 얼굴을 반쯤 비추며 명암을 만들었다. 마치 이 남자의 이중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듯했다.지호의 손가락이 운전대를 가볍게 두드렸다.“그걸 나한테 묻는 거야? 나도 묻고 싶은데.”시아는 순간 말을 잃었다. ‘본인도 모른다고?’“제가 하지 않았다는 건 확실해요.”시아의 답은 확고했다.지호와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다.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은, 전에 지호가 무슨 생각에 시아를 도왔는데 고맙다고 말하자 그저 무심하게 ‘응' 하고 사라졌던 사람이었다.‘전화번호도 모르는데 어떻게 친구 추가가 됐을까?’게다가 시아는 SNS를 자주 활용하지도 않는다. “SNS 친구, 나밖에 없어?”지호가 불쑥 물었다.“그건 아닌데요.”지호가 고개를 돌려 시아를 보았다. 묘하게 날카로운 시선이었다.“근데 왜 나한테 보낸 건데?”시아는 숨이 조금 가빠졌다. ‘실수라고 말하면 어떻게 생각할까?’‘아, 몰라.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괜히 일 키우지 말자.’“지호 씨가 목록 맨 위에 있었거든요.”“고정 설정이라도 했나?”남자의 자존감은 여전히 하늘을 찔렀다.“아니요, 그냥...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맨 위에 있더라고요.”“그럼 내가 맨 위가 아니었으면 그 메시지 다른 사람한테 갔을 수도 있다는 거네.”지호가 계속 물었다. 그가 질문을 던질 때마다 시아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아마도요.”애초에 그 메시지는 지호한테 보낼 의도가 아니었다.지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런데 요양원이 거의 다 와갈 즈음 그는 방향을 바꿨다.시아는 급히 말했다.“길 잘못 들었어요.”“아냐. 우리 집 조상님들 묘지로 가려면 여기서 꺾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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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왜 그렇게 저를 보세요?

지호가 돌아왔을 땐, 손에 쇼핑백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는 그걸 뒷좌석에 던지듯 놓고 운전석에 앉았다. 시아의 목을 스윽 훑어보며 시동을 걸었다.“고마워요.”시아는 목에 고풍스러운 실크 스카프를 둘렀다. 스카프는 시아의 외투와도 잘 어울렸고, 무엇보다 지호가 오늘 아침에 남긴 자국을 가릴 수 있었다.“내가 한 일은 내가 처리해야지.”지호는 시아의 감사 인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거절하면 뭐 어때, 자기가 저지른 일인데, 당연히 책임도 지는 게 맞지.’이렇게 생각하고 시아도 태연하게 받아들였다.둘은 말 한마디 없이 요양원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고 보니 외할머니가 이미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외할머니의 애타는 눈빛에 시아는 눈가가 시큰해졌다.예전엔 결혼식 날 왜 그렇게 많은 신부가 우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결혼식은 단순한 형식일 뿐이지만 어떤 것들의 본질은 변해 버린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시아는 외할머니에게 달려가 안겼다. 마치 어제 하루 떨어졌던 게 아니라 수십 년 만에 재회한 것처럼 말이다.“결혼했는데도 애기 같구나.”외할머니가 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외할머니 앞에선 언제나 애기죠.”시아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그 사이 지호도 다가와 시아가 들고 온 쇼핑백을 외할머니를 돌보던 간병인에게 건넸다.“저랑 제 아내의 결혼 선물입니다.”간병인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쇼핑백을 받았고, 그 안을 들여다보더니 눈을 반짝이며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외할머니 돌보느라 수고가 많으신데 나중에 꼭 제대로 감사인사 하겠습니다.”지호는 그 짧은 말로 충분히 의도를 전달했다. 간병인은 이 요양원의 직원일지 몰라도 현재 외할머니를 가장 가까이에서 돌보는 사람이고, 실질적인 ‘책임자'였다.시아는 지호의 배려에 놀랐다. 이 임시 남편, 생각보다 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전 승준과 함께할 땐 이런 세심함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아마도 일부러 얘기 나눌 시간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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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네 엄마는 속은 거야

시아의 손에 작은 상자 하나가 놓였다. 외할머니가 보관함에서 꺼내온 것이었다.“이건 네 엄마가 남긴 거란다. 정확히 말하자면 네 아버지가 너희 엄마에게 준 거야. 벌써 이십년도 넘었지...”외할머니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젊은 나이에 남편과 딸을 모두 잃은 여자에게 이 이야기는 언제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주제였다.작은 상자는 생각보다 묵직했고, 시아는 도무지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걸 지켜보던 외할머니가 다정하게 등을 떠밀었다.“열어보렴.”외할머니의 표정이 너무 아파 보여서, 시아는 손을 꼭 모아버렸다.“외할머니, 저 사실 알고 싶지 않아요.”외할머니는 웃으며 말했다.“바보야. 자기 출생을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니. 어릴 땐 안 알려준다고 울기까지 해놓고선. 괜찮다. 이젠 나도 다 내려놨고, 언젠가는 네가 알아야 할 일이다. 내가 이걸 무덤까지 가져갈 순 없잖아.”“외할머니...”외할머니는 시아의 손을 펴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심호흡을 한 뒤, 시아는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붉은 천이 곱게 싸여 있었고, 천을 펼치자 네 잎 클로버 모양의 금실 목걸이가 나왔다. 아래엔 둥근 조각의 에메랄드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조각은 어딘가 독특했다.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 일반적인 디자인은 아니었다.“예쁘구나.”외할머니가 감탄했다.시아 역시 인정했다. 아무 데서나 살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잘 보면 안쪽에 네 엄마 이름이 새겨져 있을 거야.”외할머니의 말에 시아는 조심스럽게 펜던트를 집어 들었다. 겉을 아무리 봐도 아무 글자도 없었는데, 펜던트를 눌러보니 뚜껑처럼 열렸다. 안쪽에 작게 새겨진 ‘연’이라는 글자 하나가 있었다.시아의 어머니의 이름은 강이연이고, 외할머니는 엄마를 늘 ‘이연'이라고 불렀다.“그 목걸이를 준 사람은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이었단다. 네 엄마가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곳에서 만났고, 집에도 몇 번 도와주러 온 적 있어. 겉보기엔 성실하고 괜찮은 사람 같았는데 결국 너희 엄마를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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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이렇게 빨리 새 직장 구했어?

시아는 잠시 숨을 고르며 대답하지 않았다. 전화는 자동으로 끊겼지만 곧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승준의 비서인 나성주의 전화였다.몇 초간 망설이다가 시아는 조용한 곳으로 이동해 전화를 받았다.“나 비서님... 제가 인수인계서에 다 기록해두었을 텐데요. 정말 못 찾으셨어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가서 확인해볼게요.”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자 손에 패를 쥔 지호가 보였다. 그런데 다른 노인들은 여전히 잘 놀고 있었다.‘패가 한 장 없는데도 저렇게 잘 놀다니.’시아는 나성주의 다급한 말이 신경 쓰여 지호 쪽으로 다가갔다.“지호 씨, 회사에 잠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지호의 눈빛이 무심하게 스치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이렇게 빨리 새 직장 구했어?”시아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사직한 걸 알면서도 저렇게 말하는 건 일부러 그랬다는 뜻이고, 그 변덕스러운 성격에 굳이 반응할 필요도 없었다.“아니에요. 전 직장에서 인수인계에 문제가 생겨서요. 좀 도와주러 다녀올게요.”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일은 끝까지 책임져야지.”그 말이 괜히 이상하게 들렸다. 시아는 말을 덧붙이려다 말고, 몸을 돌렸다.지호가 말했다.“데려다줄까?”거절할까 했지만 가야 할 곳이 승준이 있는 회사라는 생각에 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시아가 걸음을 떼려던 순간, 지호의 손이 옆으로 뻗어왔다. 남자의 손끝에 있던 패가 시아의 코끝을 툭 건드렸다.“할아버지, 패 가지세요.”그렇게 말하며 지호는 패를 테이블에 다시 내려놓았다.회사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었고, 모두의 시선이 몰려왔다.어제 결혼식도 결혼식이지만 무엇보다 시아 곁의 지호 때문이었다. 모두가 지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지금 지호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 나성주가 다가왔고, 그 옆엔 승준도 있었다.어제의 충돌로 인해 남자의 얼굴 한쪽이 심하게 부어 있었다.시아한테 다가오려고 했던 승준은 지호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시아가 회사에 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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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계속 제자리인 사람은 없어

시아는 정리해둔 자료를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지만 성주가 말한 그 파일은 찾을 수 없었다.자료 폴더에 분명히 넣어뒀던 기억이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나 비서님, 지금 제가 만진 것 말고 다른 사람이 이걸 건드린 적 있나요?”시아의 물음에 성주는 눈을 피하며 말했다.“저뿐이에요... 다른 사람은 없었습니다.”“정말 못 찾으셨어요?”시아의 단정한 눈빛이 묘한 압박을 해주었다. 평소 부드럽던 여자의 모습과 달리, 지금은 확고한 권위가 느껴졌다.성주는 시아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마침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승준이 들어왔다. 성주는 승준을 보자마자 조용히 빠져나갔다.그 순간 시아는 모든 걸 깨달았다. 파일이 없어진 게 아니라 승준이 시아를 불러들이려 한 방식이었다.시아는 책상 위에 손을 얹고 있다가 조용히 손을 떼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시아야.”승준이 여자의 팔을 잡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시아는 한 발 옆으로 비켜나가며 그 손길을 피했다.두 사람 사이에 생긴 거리, 시아의 차가운 눈빛, 승준은 그 안에서 자신이 더 이상 시아에게 아무 의미 없는 사람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미안해. 이런 방법밖에 생각나지 않아서... 하지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이 사무실에서 시아는 3년 넘게 일했다. 승준이 이 건물을 인수한 후로 줄곧 여기서 일했고, 시아의 흔적은 회사 곳곳에 남아 있었다. 승준과의 기억도 물론.하지만 지금 시아는 과거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눈을 들어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어제 한 말로는 부족했나요?”“아니.”승준이 시아 앞에 한 걸음 다가오자, 시아는 눈살을 찌푸렸다.그건 분명한 거부였고, 거리를 두겠다는 뜻이다. 예전의 시아는 이러지 않았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상처를 주었어도 옛정이 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무정할 수가 있지?’시아가 변했다는 사실이 승준의 가슴을 날카롭게 찔렀다.“그럼 빨리 말하세요.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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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죽지 않았어

이미아. 시아에게는 너무 오래된 이름이었다.너무 오래돼서, 이제는 이름을 들어도 어쩐지 낯설기까지 했다.시아는 승준을 바라보았다. 승준이가 갑작스레 미아를 꺼낸 건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어쩌면 오늘 이렇게 시아를 속여 오게 만든 이유도 그것일 것이다.“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승준은 여자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그 이름이 여전히 시아에게 상처가 된다는 걸 알아챘지만 멈출 수 없었다.그는 시아를 붙잡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시아가 또다시 상처받을까 두려웠다.“미아, 죽지 않았어. 지금은 해외에서 요양 중이야.”그 말은 분명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시아의 마음을 흔드는 말이기도 했다.부진영이 예전에 말한 이야기를 들은 후, 승준은 미아에 대해 철저히 조사했다.그제야 승준은 깨달았다. 시아가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지내며,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던 이유가 단지 도도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시아의 상처는 너무 깊었다. 어릴 적 그 사건은 시아의 삶 전체에 먹구름을 드리웠고, 감히 다시 들춰볼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시아의 어두운 눈동자에 반짝임이 일었다. 그동안 미아의 소식을 찾아 헤맸지만 단 한 번도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다.지금 미아가 요양 중이라는 말을 들으니, 비록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알 수 없었지만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내려간 듯한 기분이었다.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구 대표님. 알려줘서 감사합니다.”시아는 조심스럽고도 예의 바르게 감사를 전했다.그러나 승준은 시아가 자신을 철저히 경계하고 있는 눈빛에 가슴이 먹먹해졌다.승준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그럼, 지금까지 누가 미아를 돌봐왔는지 궁금하지 않아?”시아는 시선을 돌렸다. 책상 위의 목련화, 미아가 가장 좋아하던 꽃이었다.시아가 직접 선물해준 화분이었지만 처음 받은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렸다.죽자마자 같은 걸 또 샀고, 지금 여기 있는 것도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이 꽃은 여전히 같아 보이지만 결코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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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그 손 잘못 잡으신 것 같은데요?

시아의 시선이 남자의 얼굴에 멈췄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날카로운 선, 만약 외모에 정답이 있다면 아마 그건 지호의 얼굴일 것이다.잘생긴 외모에 탄탄한 집안, 원하는 여자라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을 남자가 단지 시아의 한마디에 결혼을 선택했다. 어제 처음 지호를 봤을 때부터 시아에게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그리고 지금, 막 그 답을 찾았다.하지만 한쪽 말만 믿을 수는 없었다. 억측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여 MG그룹 빌딩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지호한테 물었다.“미아 지금 상태가 어때요?”지호의 단정한 얼굴엔 전혀 놀람이 없었다.“그 사람이 다 얘기했나 보지?”시아는 걸음을 멈췄다. 봄이지만 아직 찬 바람이 부는 날씨에 바람이 여자의 머리카락과 목에 두른 스카프를 함께 날렸다. 조금 전 승준 앞에서 급하게 푼 시아의 스카프를 대충 묶었기에 외할머니댁에 갈 때처럼 정성스럽게 매지도 않았다.지호가 손을 들어 그 스카프를 만졌다. 시아는 피하지 않았다. 아까 승준이 시아를 만지려 했을 땐 피하려 했지만, 지금 눈앞의 사람은 달랐다. 명목상일지라도 자기 남편이니까.지호는 스카프를 단정히 매주었고, 정성스럽게 예쁜 리본까지 묶어줬다.“좋은지 나쁜지는 당신이 직접 보면 되지 않겠어?”시아는 남자의 담백한 대답에 조금 놀랐다. 바로 인정할 줄은 몰랐고, 더구나 미아를 만나러 가는 것에 허락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지난 7년 동안 미아는 세상에서 사라진 사람처럼 흔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진짜... 가서 봐도 돼요?”확신이 서지 않아 시아가 되물었다.미아는 시아 마음속의 상처였다. 아무도 볼 수 없지만 시아 본인은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히려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지호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두 시간 후에 그곳으로 가는 비행편이 있어.”공항에 도착할 때까지도 시아는 이 모든 게 꿈같이 느껴졌다. 마치 지난 7년 동안 수없이 꾼 나쁜 꿈속에 있는 기분이었다.“시아야, 따라가면 안 돼.”승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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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사모님이랑 어디 가시나요?

“승준아!”은채는 얇은 베일이 달린 패션 모자를 썼다. 몸에는 우아한 샤넬 투피스를 걸쳤으며, 얼굴엔 절묘하게 계산된 미소가 피어 있었다.그녀는 승준이 시아 손목을 거칠게 잡고 있는 걸 보고도 전혀 이상한 기색 없이 오히려 싱긋 웃으며 다가왔다.“네 여권, 내가 찾아놨어. 더 이상 시아 씨한테 폐 끼칠 일은 없겠네... 아, 아니지. 이제는 하씨 가문 사모님이지. 지금은 네 비서가 아니네.”은채는 하지호를 향해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하 대표님, 사모님이랑 신혼여행 가시는 거예요? 공교롭게도 우리도 신혼여행 가는 길이에요.”승준은 말없이 시아의 손목을 놓았다. 은채는 아무렇지 않게 승준의 팔짱을 꼈고, 마치 오랜 부부처럼 친밀한 태도를 보였다.“우린 세도나에 가는데, 하 대표님은 사모님이랑 어디 가시나요?”승준의 냉랭한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은채를 향한 시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하지호와 강시아의 목적지가 세도나인데...’‘은채도 거기 따라가겠다는 건가?’‘거기서 또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거지?’이 결혼 자체가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은채는 승준을 사랑했지만 미워하기도 했다. 물론 시아에 대한 증오도 더해졌다.하지호든 진은채든 두 사람 모두 시아에게는 저마다의 의도가 있었다. 승준은 이 상황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지호는 조용히 시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시아 손목에 남은 자국을 부드럽게 쓸었다.“가자. 시간이 다 됐어.”지호는 은채를 무시했다. 승준에게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시아의 손을 잡고 떠났다.“봤지? 하지호는 너보다 훨씬 더 남자다워.”은채가 승준의 정곡을 찔렀다.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타격했다.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지호의 손은 단 한 번도 시아를 놓지 않았다.승준과 은채도 같은 항공편, 심지어 같은 클래스에 탑승했다. 자리도 멀지 않았다. 시아와 지호가 앉은 좌석의 왼쪽 뒤 세 번째 줄이었다.시아는 모든 게 은채의 계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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