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시 태어난 구공주, 그녀의 당찬 인생: Chapter 11 - Chapter 20

100 Chapters

제11화

쾅 하고 소리가 나며 이경은 낡은 침상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정신을 가다듬고 곧장 몸을 일으켜 앉으니 눈앞에는 검은 옷에 얼굴까지 가린 남자가 서 있었다.온몸을 감춘 차림새에 그의 체격이나 얼굴을 짐작할 수 없었다.그 남자의 시선이 자신의 어깨에 머무르는 걸 느끼고 나서야 이경은 윤세현이 던져준 외투가 어느새 어깨에서 흘러내렸다는 걸 알아차렸다.순간, 희고 고운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지만 딱 거기까지였다.이경은 전혀 당황하지 않은 표정으로 느긋하게 외투를 다시 끌어 올려 여미고 허리끈까지 단단히 동여맸다.침상 옆에 서 있는 남자는 그 모습조차 막지 않았지만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는 노골적인 혐오가 스며 있었다.“구공주가 행실이 방탕하고 남자를 셀 수도 없이 거쳐 왔다고 하더니 소문이 과장은 아닌 모양이군.”이경은 굳이 해명할 생각이 없었다.이런 자 앞에서 겁먹은 티라도 내면 오히려 더 얕잡아보고 마음껏 장난칠 것이 뻔했다. 오히려 느긋하고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게 가장 좋은 방어였다.그 남자의 멸시 섞인 시선을 외면하지 않고 이경은 오히려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안타깝구나, 너라도 조금만 더 괜찮게 생겼다면 이 몸도 한 번쯤 널 옆에 둘 만했을 텐데 말이야.”“염치없는 년!”검은 옷의 남자가 냉소를 내뱉으며 노골적으로 혐오를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이경을 한 번 더 흘겨보고는 더는 보고 싶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이경은 바로 그 반응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상대의 무공이 상당해 지금 당장은 도저히 빠져나가기 힘들 테니 누군가 자신을 구하러 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 스스로 살아남을 궁리를 해야 했다.입가에 더 선명한 미소를 머금으며 이경은 일부러 유혹하듯 말했다.“굳이 그렇게 미워할 것 있어? 나 정도면 어디 가도 미인 소리를 들어. 너도 한 번쯤은 내 곁에 있고 싶지 않아?”그가 더 노골적으로 싫어할수록 이경은 더 요염한 웃음을 짓고 일부러 농을 걸었다.“전에 내 곁에 있던 자들은 한 사람도 내 매력에 빠지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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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이경은 가면을 쓴 여인이 누구인지도 자신과 무슨 원한이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위기가 목까지 닥쳐 있었다.건장한 남자 둘이 우락부락한 어깨를 앞세워 성큼 다가오더니 그 중 한 명이 거친 손으로 이경을 내리치려 했다. 이경은 짧은 숨을 들이쉬며 눈빛을 굳혔고 손이 닿기 직전 몸을 비틀어 순식간에 공격을 피했다.가면을 쓴 여인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뜨며 속삭였다.“언제 이런 경공을 익혔느냐?”뒤에서 따라온 검은 옷 남자가 머뭇거리며 눈치를 봤지만 가면 여인은 거칠게 그를 밀쳐냈다.“아가씨, 저 여인은 도련님께서 붙잡으신 포로입니다. 아무래도...”“닥쳐라!” 그녀는 다섯 손가락을 서서히 굽혀 힘을 주었고 매서운 눈초리로 이경을 노려보았다.“세자 저하가 알려준거냐? 네가 감히 세자 저하 곁을 맴돌았던 것이냐!”이경은 속으로 짐작했다. 이 여인, 혹시 윤세현과 얽힌 사람 중 하나인가. 그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그 냉랭한 태도가 싫기도 했지만 누가 봐도 그만큼 잘생긴 남자는 드물었으니 주변에 여자가 많다는 소문도 의심할 바가 없었다.바로 그때, 옆에 있던 남자가 손을 발톱처럼 뻗어 이경의 팔을 움켜잡으려 들었다.거리가 가까워 피하기 쉽지 않았으나 이경은 상대의 손이 닿기 직전 손목을 비틀어 단번에 반격했다.“아악!”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몇 걸음 뒤로 휘청거렸다. 피가 손가락 사이로 뚝뚝 흘러내렸고 손목 힘줄이 단칼에 끊어진 것이 분명했다.그는 고통에 휘청거렸고 말을 더듬더니 얼굴에는 이제 막막함과 절망만이 남아 있었다.“아... 아가씨...” 가면을 쓴 여인은 이경의 손끝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비녀가 들려 있었고 끝에는 아직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그럼에도 이경은 한 치의 동요도 없이 촛불 아래 서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잔혹한 위협 속에서도 눈빛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두려움이나 애원조차 없이 담담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또 다른 남자도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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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방에 들어서는 순간, 방 안의 공기 전체가 단숨에 짓눌린 듯 묵직해졌다. 가면을 쓴 여인은 끝까지 이경을 노려봤지만 이 남자 앞에선 한마디 말도 내뱉지 못했다.검은 옷 남자가 손짓 한 번 하자 문을 지키던 이들이 조용히 밖으로 사라졌고 팔이 다친 건장한 남자 둘도 울상만 남긴 채 뒤따라 나갔다.가면 여인은 마지막까지 미련을 못 버리고 문간에 망설였으나 그가 무심히 한 번 눈길을 주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얼어붙어 결국 아무 말 없이 쫓기듯 물러났다.이제 방에는 오직 둘만이 남았다. 이경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자를 예리하게 바라보았다.그는 힘이 센 것이 아니라 밖에서도 모두가 두려워할 만큼 무서운 사람임이 분명했다. 아까 그 오만하던 가면 여인조차 이렇게 벌벌 떠는 걸 보면 과연 정체가 무엇일지 속으로 의문이 이어졌다.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비웃듯 말했다.“아까 네가 나를 네 방에 들이려 했지? 지금이라도 내 마음이 바뀌면 어떡할래, 받아줄 거냐?”숨이 턱 막힐 만큼 강한 기운이 밀려왔지만 이경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눈을 가늘게 떴다.“그래,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내가 마다할 일도 없지.”그렇게 말하며 이경이 먼저 다가서서 순식간에 그의 목을 감아 안았다.그는 잠깐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경이 아무리 대담하다 해도 결국 뻔뻔한 계집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러는 사이, 이경의 팔은 이미 그의 목을 감았고 몸을 가까이 밀착시켜 조용히 속삭였다.“어때, 내 몸 괜찮지 않냐?”그는 본능적으로 이경을 떼어내려 했으나 그 순간 이경은 손목을 비틀어 머리카락에 숨겨 두었던 비녀를 꺼내 번개같이 그의 목덜미를 그었다. 그러자 얇고 붉은 선이 또렷하게 생겼고 이경의 손놀림이 얼마나 빠르고 맹렬했는지 단번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만약 그의 몸에 강한 내공이 흐르지 않았다면 비녀 끝이 혈맥을 뚫고 들어가 생명을 위협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붉은 자국은 이내 선명한 핏방울이 되어 그의 목을 타고 미끄러져 내리더니 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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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이 남자 또 속았네.’똑같은 수를 두 번이나 당하다니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이경의 긴 손가락이 누른 곳은 그조차도 몰랐던 숨겨진 혈 자리였다. 손끝이 닿는 순간,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거대한 몸이 한순간 휘청이며 결국 한쪽 무릎을 꿇었고 몸의 절반이 저릿저릿하게 굳어버렸다.이경은 곧바로 몸을 틀어 침상 반대편으로 내려섰다. 남자는 혹시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벗기려 드는 건 아닌가 경계했지만 이경은 곧장 창문 쪽으로 달려가 한 번에 가볍게 창밖으로 뛰어내렸다.‘도망쳤다고? 이런 절호의 기회에 내 정체를 궁금해하지도 않고 그저 달아나다니.’“도련님!”밖에서 문을 열고 두 남자가 허겁지겁 들어왔고 검은 옷의 남자는 손을 내저으며 냉정하게 말했다.“가까이 오지 마라.”살아오면서 부모님과 스승님 말고는 무릎을 꿇어본 적 없었는데 이렇게 한 여자 앞에 주저앉게 될 줄이야. 이보다 더한 치욕이 또 있을까.“도련님, 구공주가 달아났습니다.”수하들도 도련님이 제압당한 걸 다 알면서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이제 당장 쫓아야 하지 않을까 망설이던 찰나 남자는 어둡게 눈을 빛내며 차갑게 말했다.“도망쳐 봤자 소용없다.”그때 또 다른 수하가 급히 달려와 보고했다.“도련님, 윤세현이 쫓아오고 있습니다!”남자는 드디어 혈이 풀리자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차가운 달빛 아래 그의 실루엣에는 싸늘한 기운만 감돌았다.“좋다, 윤세현을 흑풍절벽 쪽으로 유인해라.”...한편 이경은 울창한 숲속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도 뒤쫓아오지 않았다. 눈앞에는 우거진 나무들이 달빛마저 완전히 가려 방향을 알 수 없었고 이경은 오로지 감에 의지해 앞으로 걸었다.드디어 나뭇가지 사이로 희미한 새벽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 빛을 따라 숲을 벗어나자마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앞을 막고 있었다.‘여기서 더는 길이 없구나...’이경은 되돌아가려 고개를 돌렸으나 그 순간 앞에 어두운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검은 옷을 입은 그 남자였다. 이경은 입가에 여유로운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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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윤세현이 정말로 나타났다.고요한 달빛을 밟으며 홀로 다가오는 그의 모습은 길고 차가운 그림자가 땅 위로 드리워져 한눈에도 위압적이었다.어두운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더욱 깊어 보였고 그 모습이 이경의 눈에 들어온 순간 정말 신처럼 당당하고 넘볼 수 없는 존재감이 느껴졌다.‘이래서 사람들이 그를 신처럼 여기는 거구나. 참으로 전장의 신다운 위풍이네.’이경은 힘겹게 목을 가누며 이를 악물었다.“저는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경의 목이 더욱 세게 조여와 얼굴이 찌푸려지고 참을 수 없는 통증에 숨이 턱 막혔다.‘이 남자, 정말 지독하네!’그 순간에도 윤세현의 시선은 잠시 이경의 얼굴을 스치더니 곧장 검은 옷을 입은 남자에게로 고정됐다.“날 여기로 불러낸 목적이 뭐냐?”그는 태연하게 다가오며 이경이 사내에게 붙잡혀 있는 모습을 보고도 단 한 점의 연민도 보이지 않았고 그 어떤 감정도 섞여 있지 않은 얼굴이었다.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비웃으며 말했다.“세자 저하는 방금 혼례 올린 새 신부가 이토록 고초를 겪는데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신가요?”남자는 손가락을 조여 이경의 목덜미를 긁듯 훑었고 이경은 뾰족한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하얀 목덜미 위로 선명한 붉은 상처가 피어올랐고 진한 핏방울이 목선을 따라 흘러내려 옷깃 속으로 사라졌다.치명적이지는 않았지만 이 남자가 힘을 조금만 더 주면 자신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이나 다름없을 터였다.그런데도 윤세현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목적이 뭐냐?”그가 다시 한번 단호하게 묻자 검은 옷 남자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저는 그저 궁금했습니다. 과연 세자 저하께서 구공주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으실 수 있는 분이신지, 그 점을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윤세현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냉담하게 침묵할 뿐이었다.검은 옷 남자는 설마 진짜로 이 남자가 이경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믿을 수는 없다며 손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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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정녕 미쳤구나...’이경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윤세현이 두 번째 칼날을 또다시 자신의 어깨에서 무표정하게 뽑아내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멈추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몸도 목소리도 전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곧이어 세 번째 칼날이 깊게 박혔다. 이미 피와 살점이 뒤엉킨 어깨가 그야말로 참혹했지만 윤세현은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심지어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그는 마치 쇠로 빚은 사내처럼 대지 위에 꿋꿋이 우뚝 서 있었고 강인한 기백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그때, 이경의 목을 조이던 힘이 갑자기 풀어졌다. 검은 옷의 남자가 손을 거두었던 것이다.이경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녀는 바닥에 버려진 칼과 핏방울이 뚝뚝 떨어진 자리를 바라보며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저 사람, 정말 아프지도 않은 건가... 이런 강인한 사람은 21세기에서도 본 적이 없었는데.’힘이 겨우 돌아온 이경은 본능적으로 윤세현 쪽으로 다가가려 했으나 겨우 한 걸음 옮기는 순간 손목이 휙 잡혀 다시 뒤로 끌려 나왔다.“왜 약속을 어겨?”이경은 검은 옷의 남자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분명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 사내만큼은 마지막까지 신의를 지키는 이일 거라 믿고 싶었다.검은 옷의 남자는 더 이상 웃음기 없는 눈으로 피로 물든 윤세현을 바라보다가 이전보다 훨씬 냉담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나는 네 목숨을 놓아준다고 했지 어떻게 놓아줄지는 말한 적 없는데.”그러고는 차가운 시선으로 윤세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세자 저하, 그 용맹함은 진정 남다르십니다. 구공주는 풀어드리겠으나, 살려내실 수 있을지는 오로지 세자 저하의 뜻에 달려 있겠지요.”말을 끝내자 검은 옷의 남자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이경은 온몸이 엄청난 내공에 밀려 절벽 아래로 순식간에 내던져졌다.‘이런... 내가 이대로 또다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운명인가.’순간, 온몸이 허공을 갈랐고 차가운 바람과 죽음의 그림자가 이경을 감쌌다.‘설마, 또다시 다른 세상으로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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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이경은 눈앞이 어지럽게 흐려지다가 천천히 정신을 되찾았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억을 더듬자 절벽 아래로 내던져졌던 순간이 떠올랐다. 마지막 그때, 자신을 죽이려던 윤세현이 망설임도 없이 함께 뛰어내린 것도 똑똑히 보았다.바위틈을 휘몰아치던 바람이 머리를 세차게 때렸고 곧 온몸의 감각이 사라지며 정신을 잃었었다. 그런데 막상 깨어보니 아직도 약간의 어지러움만 있을 뿐, 기적처럼 큰 부상도 몸을 찢는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이상하다 생각하며 고개를 숙이니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다름 아닌 쓰러져 있는 윤세현의 가슴팍 위였다.그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깊이 의식을 잃고 있었다. 어깨 부위를 내려다보니 상처는 이미 심하게 찢겨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이런 상처라면 지금쯤 목숨이 위험할 텐데...’이경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서둘러 그의 옷깃을 찢어 상처를 살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그가 번뜩 눈을 뜨며 거칠게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 몸에 감히 손대지 마라.”목소리는 쇳소리처럼 갈라져 있었으나 여전히 싸늘하고 매서웠다.순간 어이가 없어 한 대 때리고 싶다가도 그 상처가 자신의 탓임을 생각하니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그런데 이경이 미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윤세현은 힘이 빠진 듯 다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큰 손이 힘없이 축 늘어지는 모습을 보자 이경은 잠깐이나마 마음 한구석이 짠해졌다.나라의 전쟁 영웅이라 불리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심하게 다치지 않았다면 결코 쉽게 쓰러질 리 없을 텐데 결국 이경은 망설이다 그의 옷을 열어 상처를 살펴봤다.그리고 그 순간, 그동안 수많은 중상을 봐온 천재 외과의라 해도 놀랄 만큼 깊은 칼자국이 드러났다. 저런 칼날이 저리 깊게 파고들었다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을까. 그런데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버텼던 것이다.‘이대로 두면 반드시 목숨이 위험할 텐데 봉합도 해야 하고 소독도 해야 하는데... 여긴 실도 바늘도 약도 아무것도 없어.’...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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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죽을 때까지 저 성격은 못 고치는 모양이네.’아무리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긔의 싸늘한 눈빛에 잠시 스쳤던 연민은 온데간데없었다. 며칠 전만 해도 이경이 자신에게 약을 먹이고 수작을 부리며 붙어 다니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윤세현은 몸을 일으켰다. 일어서는 순간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잠깐 숨을 골랐을 뿐, 곧 바깥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저 정도 상처에 저리 버텨낸다면 아무리 적대감이 앞섰던 이경이라 해도 속으로는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도대체 몸이 얼마나 강한 거야... 칼 세 자루가 어깨를 꿰뚫고 천 길 절벽 아래로 떨어졌는데 이렇게 버티는 사람은 처음 보네.’운이 좋았던 건, 빽빽한 나뭇가지에 떨어져 내려 충격이 분산됐기 때문이다.하지만 여긴 만 길 낭떠러지, 이런 곳에서 이렇게 멀쩡히 일어나 걸을 줄은 누가 알았으랴.그때, 동굴 입구 쪽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도 멍하니 있을 작정이냐? 내가 너를 업고 올라갈 생각은 없으니 스스로 걷지 않으면 이 자리에 남아 들짐승 밥이나 되거라.”아까 조금이나마 남았던 호감도 순식간에 싸늘히 사라졌다. 이경은 바위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가까스로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막상 동굴을 나오자 눈앞에 펼쳐진 윤세현의 곧은 뒷모습에 한순간 마음이 흔들렸지만 곧 이를 악물었다.‘아무리 잘생긴들, 다 무슨 소용이야. 내 인생을 망쳐놓은 원흉인데.’“여기가 절벽 아래라 하셨는데 저희가 다시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가까이 다가가자 윤세현이 평소와 달리 얼굴이 창백해 힘겹게 버티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아챘다.“열이 많이 오르신 것 같습니다.”의사로서의 습관이 나온 이경은 무심코 그의 이마에 손을 대려 했다. 그러자 곧 차가운 눈빛이 자신을 제지했다.“괜한 짓 하지 마라.”그가 냉랭하게 말하며 손을 뿌리쳤다.“세자 저하, 제가 함부로 손을 대려는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 열이 나는지 살피고자 했을 뿐입니다.”“그럴 필요 없다.”그는 한마디로 잘라 말하고 동굴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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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앞쪽 산골짜기 바위 뒤에서 갑자기 열댓 명의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손에는 긴 칼을 든, 한눈에 봐도 훈련이 잘된 자객들이었다.‘분명 검은 옷의 남자가 보낸 살수들이겠지.’윤세현은 손에 아무 무기도 들지 않았지만 그 많은 자객 앞에서도 산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바람이 불어 그의 이마에 헝클어진 머리칼이 흩날리고 차가운 눈빛에서는 마치 죽음을 품은 신마(神魔) 같은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그의 눈빛 하나에 자객들이 움찔하며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중 한 명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겁낼 것 없다, 저 자는 칼에 찔리고 절벽에서도 떨어졌다. 지금 저러는 건 다 허세다.”“맞아, 얼굴빛 좀 봐라. 그냥 버티는 거지!”마침내 모두가 용기를 내어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저 자만 죽이면 우리 모두가 공을 세우는 거다! 죽여라!”실상 윤세현은 이미 깊은 내상과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임을 이경은 알고 있었다.이경도 바닥에서 날카로운 돌을 집어 들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움직이기도 전에 윤세현이 팔을 뻗어 그녀를 뒤로 밀쳐냈다.준비도 하지 못한 채 뒤로 밀린 이경은 바닥에 쿵 하고 주저앉았다. 고개를 들자 윤세현은 이미 열몇 명의 자객과 뒤엉켜 한 치도 물러섬 없이 싸우고 있었다.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혼자 죽을힘을 다해 맞서다니. 이게 다 옛 남정네들의 고집인 건지, 아니면 저 사람이 유독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이경은 천천히 일어나 냉정한 눈으로 그 장면을 지켜봤다. 검은 옷의 살수들은 순식간에 몇 명이나 쓰러졌지만 윤세현은 끝까지 무너지지 않았다.늘씬한 몸은 산처럼 흔들림이 없었고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손길 같은데도 한 번 내리칠 때마다 자객이 그대로 쓰러졌다.“아...” 또 한 명의 자객은 그 손에 맞아 벽에 부딪혀 피를 토하고 나가떨어졌다.그러나 윤세현의 입가에도 힘을 너무 써서인지 피 한 줄기가 천천히 흘러내렸다.이경은 그 모습을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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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윤세현은 흐릿한 의식 속에서도 곁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희미하게 느꼈다.이경은 그의 몸을 등에 업고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나아갔다. 작고 여린 어깨로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몇 번이고 무릎을 꿇고 쓰러졌지만 그럴 때마다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나 묵묵히 그를 짊어졌다.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숨이 가쁘게 차오르고 고단함이 섞인 거친 숨결이 귓가에 들려왔다. 정말이지, 이경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윤세현은 자신도 직접 일어나 걸으려 했으나 몸에 힘이 빠져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만큼 오랜 뒤에야 그녀가 마침내 멈춰서서 조심스레 그의 몸을 땅에 내려놓았다.곧바로 뼛속까지 스며드는 싸늘한 한기가 엄습해 온몸이 덜덜 떨리고 이대로라면 차라리 지옥에 떨어진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절망적인 추위가 몰려왔다.이경은 무엇인가를 그에게 먹이고 연신 그의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을 재기도 했다. 그녀가 무슨 약을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손길만큼은 어딘가 다정하고 따스했다.그 손끝이 이따금 머물 때마다 윤세현은 문득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길을 떠올릴 만큼 평온한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그의 어머니도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준 적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 여인은 어머니가 아니라,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선녀가 아닐까.알 수 없는 그리움에 사로잡힌 채 윤세현은 무의식중에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쇠처럼 강한 팔로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놓치지 않으려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그렇게 그녀를 품에 안자 아까 그토록 차갑던 한기가 한결 누그러지는 듯했다.한편, 이경은 그를 떼어내고 싶어 속으로 분통을 삼켰다.‘평소에는 나더러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더니 지금은 무슨 짓이야! 왜 품 안에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거야?’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를 정도로 당황스러웠지만 힘을 다해 아무리 그를 밀쳐도 쇠처럼 단단한 그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밀치면 밀칠수록 그는 더욱 이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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