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 대신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세자 저하, 어찌 세자빈을 품에 안고 조회에 나오신 겁니까?” 세자 윤세현은 이를 악물고 답했다. “내 부인은 세상에 하나뿐이다. 혹여 잃게 되면 네가 책임질 거냐?” 세자빈 이경은 본래 전장에서 이름을 떨치던 젊고 빼어난 지휘관이었다. 하지만 전생에는 믿었던 사내에게 배신당해 절벽 아래에서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다시 태어난 그녀는 이번 생에는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세상을 쥐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다 어느새 이경은 윤세현이 누구보다 아끼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상선이 허둥지둥 달려와 황제 이중명께 아뢰었다. “폐하, 큰일 났사옵니다! 세자궁 사람들이 폐하의 후궁을 벌하였다 하옵니다!” 황제는 그 말을 듣자 용상 아래로 숨어버리며 중얼거렸다. “괜찮다. 저 세자빈은 짐이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니라...”
View More뜰 안에서는 끔찍한 비명이 퍼져 나왔다. 한 생명이, 짧은 시간에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초아는 이경 곁에 앉아 있으면서도 온몸에 식은땀이 맺혀 손끝까지 덜덜 떨렸다.하지만 이경은 여전히 태연하게 호두를 까먹고 있었다. 얼굴은 더욱 담담해 보였고 마음의 동요는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윤세현은 이경 가까이에 앉아 조용히 차를 마셨다. 뜰에서 들려오던 여자의 절규가 완전히 잦아든 뒤에서야 윤세현이 고요한 시선으로 이경을 바라봤다.마치 이경의 얼굴에서 어떤 감정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지만 정작 아무런 변화도 찾을 수 없었다.“할 말 없어?”윤세현이 낮고 단호하게 물었다.초아는 그 자리에 더욱 몸을 움츠린 채 벌벌 떨었다.예전에도 이경 곁에서 궁인들이 벌을 받는 걸 본 적은 있었지만 그때는 그냥 잔인하다고 생각했을 뿐 오늘처럼 이렇게까지 두려워 본 적은 없었다.지금 윤세현의 태도는 무심한 듯 보였지만 오히려 그런 평온함이 가슴 한가운데를 서늘하게 파고들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읽히지 않았고 지금 이 순간 평화로워 보여도 언제든 목숨을 빼앗길 수 있다는 생각에 초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이경은 고개를 들어 윤세현의 냉정한 눈빛을 똑바로 받아냈다.“세자 저하의 사람이 판을 짜고 또 제 술잔에 약까지 탔는데... 제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약을 탔다고?”윤세현의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았다.“저한테 술을 권한 그 잔을 제가 내려놓으면서 현주님의 술잔과 바꿔 두었습니다.”이경의 두 눈에는 한 겹 웃음기가 스쳤지만 그 안에 숨겨진 차가운 빛은 누구라도 쉽게 느낄 수 있을 만큼 서려 있었다.“게다가 저에게 준비해 주신 남자 무희들도 모두 현주님 방으로 돌려보냈으니 세자 저하께서 지금 바로 가서 챙기셔야 할 사람은 오히려 그쪽이 아닐까요?”이 말을 듣고 윤세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섰다.문이 닫히는 순간, 초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
“세자 저하, 진정하십시오!”문정수는 거의 날듯이 윤세현의 뒤를 쫓았다. 혹시라도 윤세현이 격분해서 그만 이경을 다치게라도 한다면 그 뒤는 정말 수습할 길이 없었다.‘뭐라고 변명할 수 있단 말인가!’그런데 문정수가 방 안으로 뛰어들었을 때 상상도 못 한 광경이 펼쳐졌다.이경과 초아가 방 한가운데서 호두를 까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것이다.이경은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문을 박차고 들어온 두 사람을 천진난만하게 바라봤고 전혀 아무 잘못도 없는 표정이었다.“왜 그러세요? 누가 보면 사람 잡으러 온 줄 알겠네. 혹시 배고픈가요?”이경은 손끝에 들고 있던 호두 알맹이를 슬며시 내밀었다.윤세현은 자신이 지금 무슨 감정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 같은데 그걸 애써 참고 있었다. 순간 모든 긴장이 한 번에 풀어지며 그저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방금 전만 해도 그렇게까지 초조하고 가슴이 미어질 만큼 다급하게 달려왔는데 이 상황을 보니 허탈하기도 하고 묘하게 기분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공주마마, 아프시다더니 왜 쉬지 않고 이렇게...”문정수가 머쓱하게 물었다.이경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호두를 입에 넣으며 대답했다.“내가 정말 아픈 줄 알았어? 그저 핑계 삼아 연회장을 빠져나오려 한 것일 뿐이다.저런 잔치, 재미도 없고 계속 나만 곤란하게 만드는데 내가 거기 더 있을 이유가 없잖아.”“곤란하게 만들다니요...?”이경은 호두를 오독오독 씹으며 피식 웃었다.“그 남자 무희들 말이다. 내가 정말 좋아해서 부른 줄 알아? 설령 내가 그런 걸 좋아한다 해도 내가 직접 나서서 그런 짓을 했겠어? 내가 그렇게 어리석어 보이더냐?”앞부분을 들은 윤세현은 한순간 불쾌한 기색이 스쳤지만 이경의 뒷말을 듣고는 묘하게 생각이 바뀌었다. 초아도 든든하게 거들었다.“우리 공주마마, 정말 누가 봐도 억울한 오해만 잔뜩 받으셨지 실제로는 그런 분 아닙니다. 요즘 들어서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하셨거든요. 폭
지금 윤세현은 자신의 방에 머물고 있었다.책상에 앉아 글씨를 쓰고 있었으나 마음이 너무도 복잡해서였을까 붓끝이 힘없이 내려앉자 종이는 그대로 찢겨 두 동강이 났다.곁에 있던 문정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잔뜩 긴장했다.“세자 저하, 그... 그럼 제가 나가서 공주마마... 공주마마의 상태를 한 번...”‘공주마마께서 뭘 하고 계신 지, 제가 가서 확인이라도...’문정수는 차마 끝맺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이경이 방금 남자 무희 몇 명을 골라 데려가더니 곧바로 몸이 불편하다며 방으로 돌아간 이 상황이다. 이 며칠을 지켜보며 문정수도 점점 느끼고 있었다. 이경은 분명 소문과는 달랐다고 믿고 있었는데 오늘 밤만큼은...‘대체 공주마마, 뭘 하시는 건지...’문정수 역시 답답함과 두려움에 초조해졌다.‘세자 저하께선 그래도 자존심이라도 세우실 수 있지만 나는 안 돼. 절대 공주마마가 세자 저하께 부끄러운 일을 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어!’“뭘 보려고?”윤세현의 손에서 붓이 쩍 부러지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문정수는 또 한 번 식은땀이 흘렀다.“저, 공주마마께서... 혹시 어디 아프신 건지 의원이라도 불러... 드릴까 해서...”윤세현이 이렇게 신경이 곤두서 있는 걸 뻔히 보이면서도 이경이 저렇게 행동한 뒤 윤세현이 곧장 찾아가는 것도 체면이 서지 않을 것 같았다.평소의 윤세현이라면 지금처럼 차갑게 등을 돌리고 있는 이경을 더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진짜 이대로 두고 있으면...’“제가 다녀오겠습니다.”문정수가 조심스레 물러서려 할 때, 윤세현이 벌떡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 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가지 마.”‘저 여자... 감히 남자 무희들을 골라서 데려가? 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 이건 세상 사람들 앞에서 내가 무능하다는 걸 선포하는 거잖아! 내가 내 사람 하나 못 지킨다는 걸! 어떻게 감히, 나한테 이런 수치를 안길 수 있지? 그런데 미친 듯이 신경이 쓰이네. 정말, 지금 저 여자와 남자 무희들이 진짜로 뭔가를 한다면?
“공주마마, 괜찮으십니까?”초아가 재빨리 이경을 부축했다. 이경은 미간을 문지르며 비틀거리더니 누가 봐도 술이 많이 오른 듯 보였다. 윤세현은 붉게 상기된 이경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연회장 안 모든 시선이 이경에게 쏠렸다. 방금 전 남자 무희들을 뒷마당으로 들이라고 해놓고 이제 곧장 방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니 누가 봐도 여러 가지 의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초아는 복잡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경이 힘들어 보이자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경을 부축해 회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세자 저하, 공주마마께서 몸이 안 좋으신데 잠깐 같이...”그 순간, 이서영이 눈치를 챘다는 듯 빠르게 끼어들었다.“세현 오라버니, 혹시 공주마마를 따라가시려는 건 아니죠? 방금 공주마마께서 남자 무희 몇 명이나 데려갔잖아요?”이서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세현의 차가운 칼날 같은 시선이 그녀를 덮쳤다.그 순간 이서영의 몸이 움찔 굳었고 더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또 그 표정이네. 왜 항상 저년 편만 드는 거지?’“초아야, 나 정말 몸이 안 좋아. 얼른 방으로 데려가 줘.”이경이 애써 목소리를 냈다.초아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이경을 부축해 회장을 빠져나갔다.윤세현 역시 그 모습을 따라 나가려다 뒤에서 들려오는 떨리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세현 오라버니, 공주마마께서 선택한 건 세현 오라버니가 아닙니다.”윤세현은 대꾸도 없이 소매를 털고 회장을 빠져나갔다.연회장에 남은 이들은 모두 윤세현이 무척 화가 나 있다는 걸 눈치챘다.‘공주마마도 너무 심하신 거 아냐? 세자 저하가 보는데도 저렇게 남자 무희들을 고르다니... 겉으로는 그냥 공연 보는 척하지만 누가 봐도 방으로 데려가서...’‘소문처럼 정말 남자를 끊임없이 데려다 곁에 두는 건가... 정말 안타깝네...’이서영 역시 윤세현을 붙잡고 싶었지만 한 걸음 내딛기도 전에 몸이 휘청거렸다.상아가 급히 달려와 그녀를 붙들었다.“
‘백조 춤’, 만약 제대로 춰낸다면 ‘무지개 춤’ 보다도 훨씬 더 화려하고 압도적인 무용이었다.그런데 아무나 춰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보통 사람은 아예 시도조차 할 자격이 없고 그만한 실력도 없는 춤이었다.사람들은 정말 특별한 무대를 기대하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하지만 정작 이경이 내린 ‘백조 춤’의 무대 위에는 놀랍게도, 윗옷을 거의 걸치지 않은 남자 무희들이 들어선 것이다.아니 아예 옷을 안 입은 건 아니었다. 적어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가려져 있었지만 그 외에는 얇은 천만 걸쳐 몸매가 거의 다 드러나 보였다.남자 무희들은 춤용 바지와 얇은 옷만 입었고 상반신과 팔, 심지어 복근까지 그대로 드러났다.“세상에...!”“이게, 이게 대체 뭐야?”“이런 건 너무 민망하잖아요!”여인들은 당황해서 고개를 돌렸고 얼굴은 금세 붉게 물들었다. 정작 관원들이 데려온 사내들도 얼굴이 붉어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집안 여인들에게 이런 낯 뜨거운 장면을 보게 하다니!’반면 아직 혼인하지 않은 젊은 장수들은 처음에는 당황하다가도, 곧 재미있다는 듯 눈을 빛냈다. 가족들이 함께 온 게 아니니 그들은 오히려 신이 났다.이서영 역시 얼굴이 붉어진 채, 얼른 고개를 돌려 무대를 바라보지 않으려 애썼지만 슬쩍 이경의 표정을 살폈다.‘아마 창피해서 어쩔 줄 모를 거야.’그런데 이경은 오히려 술잔을 들고 반쯤 미소를 지으며 반라의 남자 무희들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저게... 정상적인 여자의 반응이야? 구공주가 정말 소문처럼 남자 구경을 즐기는 그런 사람이야?’장수들 역시 곧 그 사실을 눈치챘다.‘역시 우리 공주마마, 전장에선 남자 못지않은 기개를 보였어도 정작 이런 취향은... 거침이 없으시네.’문정수는 본능적으로 윤세현을 바라봤다. 그 표정은 단순히 불쾌한 걸 넘어 폭풍우가 몰아칠 듯 잔뜩 흐려져 있었다.문정수는 마음이 쿵 내려앉으며 걱정이 앞섰다.‘이번에는 정말 큰일 나겠네.’“공주마마... 공주마마, 제발 그만 보세요.”초아는
이경의 뒤에 서 있던 초아가 몰래 이경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저 여자가 공주마마께 술을 올리다니 저 속에 무슨 속셈이 있는지 모르겠네.’초아 눈에는 이서영이 절대로 좋은 마음으로 다가온 게 아니었다. 술잔에 혹시라도 무슨 꿍꿍이가 담긴 건 아닐까 불안해졌다.이서영은 그런 초아를 흘겨보며 비웃듯 말했다.“궁녀 주제에 어디서 손을 대고 있어? 썩 꺼져라!”하지만 초아는 물러서지 않았고 공주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그런데 이경은 이미 이서영이 건넨 잔을 조용히 들어 올리고 있었다. 초아는 속이 타들어 가듯 안절부절못했다.‘공주마마, 만약 이 술에 독이라도 들어 있다면 어쩌려고...!’초아가 다시 한번 이경의 소매를 꼭 잡자 이경이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왜 그래?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 필요하면 나가서 다녀와도 돼.”이경이 손짓을 하며 말했다.초아는 순간 어이가 없어 두 눈을 깜빡였고 얼굴이 빨개질 만큼 민망했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이서영이 무슨 수를 쓸지 걱정될 뿐이었다.“공주마마...”“공주마마께서 나가라 하시잖아! 아직도 안 나가?”이서영 곁에 있던 상아가 초아를 노려봤다. 초아도 지지 않고 그녀를 똑바로 노려봤지만 그때 이경이 손을 들어 술잔을 들었다.“공주마마, 이 술은...”초아가 다시 조심스레 입을 열려 하자 이서영이 날카롭게 소리쳤다.“네가 뭔데 끼어드느냐! 우리 자매의 잔을 방해하다니 이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누구 없느냐, 이 아이를 끌어내라!”그러자 이경이 태연하게 말했다.“제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현주님께서 무슨 권리로 제 시녀를 쫓아내려는 거죠?”그렇게 말하며 이경은 잔을 가볍게 들어 술을 마셨다. 잔을 내려놓은 이경이 이서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이제 현주님 차례 아닙니까?”“공주마마께서 이렇게 호의적으로 응해주셨는데 저도 안 마실 수가 없죠.”이서영은 기분이 몹시 좋아진 얼굴로, 자신의 잔을 들어 한 번에 모두 마셨다. 그 표정에는 이긴 자의 뿌듯함이 가득했다.이때, 곁에 있던 상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