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구공주, 그녀의 당찬 인생

다시 태어난 구공주, 그녀의 당찬 인생

By:  꽃미소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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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 대신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세자 저하, 어찌 세자빈을 품에 안고 조회에 나오신 겁니까?” 세자 윤세현은 이를 악물고 답했다. “내 부인은 세상에 하나뿐이다. 혹여 잃게 되면 네가 책임질 거냐?” 세자빈 이경은 본래 전장에서 이름을 떨치던 젊고 빼어난 지휘관이었다. 하지만 전생에는 믿었던 사내에게 배신당해 절벽 아래에서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다시 태어난 그녀는 이번 생에는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세상을 쥐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다 어느새 이경은 윤세현이 누구보다 아끼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상선이 허둥지둥 달려와 황제 이중명께 아뢰었다. “폐하, 큰일 났사옵니다! 세자궁 사람들이 폐하의 후궁을 벌하였다 하옵니다!” 황제는 그 말을 듣자 용상 아래로 숨어버리며 중얼거렸다. “괜찮다. 저 세자빈은 짐이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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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네가 고작 교지 한 장으로 이 몸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더냐?”

머리 위로 깊고 묵직하게 깔린 남자 목소리가 서늘하게 내리꽂혔다. 이경은 순식간에 목덜미가 시큰해지더니 숨이 턱 막혀와 의식이 아득해졌다.

긴 속눈썹이 떨리며 겨우 눈을 뜬 순간, 그녀의 시야에 세상 어디에도 비길 데 없는 준수한 얼굴이 다가왔다. 하지만 그 남자는 지금,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네가 감히 우리 공가 세자빈 자리를 넘본 것이냐?”

남자는 매서운 눈빛과 입가에 한 줄기 냉소를 머금은 채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싸늘한 시신이라면 몰라도 살아 있는 그대는 결코 내 곁에 둘 생각이 없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목을 조이는 힘이 한층 더 세졌다. 이경은 온몸이 점차 저려오다 못해, 마침내 의식이 흐릿해질 무렵에야 남자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손을 거두었다.

긴 도포 자락을 단정히 추스른 그는 기품 있고 날렵한 체격에 식은땀 한 줄 흐르고 있을 뿐 얼굴에는 미동도 없었다.

얼음장 같은 표정, 천하의 모든 빛을 가릴 것 같은 그 얼굴에는 오직 차가운 적막만이 남아 있었다.

그가 조용히 몸을 돌려 손바닥으로 방문을 내리치자 문밖에는 하인들이 모두 얼굴을 바닥에 박고 엎드려 있었다.

“세... 세자 저하, 구공주께서... 구공주께서...!”

윤세현은 무심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죽었다. 땅에 묻어라.”

한 치의 미련도 없는 듯, 그는 조용히 등을 돌려 걸어 나갔고 감히 가까이할 수 없는 고독이 길게 드리웠다.

‘정말로, 땅에 묻으라는 것인가?’

하인들은 모두 숨을 삼키며 얼굴이 잿빛이 되어 무릎을 꿇고만 있었다.

‘구공주는 폐하의 막내딸이자 대왕대비마마의 온 사랑을 한 몸에 받던 귀한 손녀인데.’

그제서야, 이경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윤세현이 떠난 자리에 남은 냉혹한 기운과 귀에 남은 모진 말들을 뒤로한 채 그녀는 자신의 머릿속을 차분히 정리하려 애썼다.

진정한 구공주는 자신의 지아비 손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대왕대비의 교지로 인해 억지로 혼례를 치렀으나 윤세현은 자신의 신부를 두고 이토록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윤세현이 구공주를 얼마나 증오했으면 이런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드러낸 것일까. 하지만 지금 이 몸은 더 이상 예전의 구공주가 아니다. 이 몸에는 이제 다른 영혼인 이경이 들어있다.

방 밖에서는 여전히 하인들이 고개를 숙인 채 꼼짝도 못 하고 있었고 방 안에는 구공주의 시신이 조용히 누워 있었다. 누구 하나 감히 손을 대지 못한 채, 공포에 질려 서 있었다.

“이 일, 공가 대감께 아뢸까?”

“네가 가보거라.”

“아니 네가 가야지!”

“난... 차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차라리 그냥 묻는 편이 낫지 않겠나. 아무리 구공주라 해도 예전부터 소문이 좋지 않은 분이었으니 아까울 것도 없을 테지.”

“그래, 세자 저하의 명을 받들어, 이대로 시신을 묻자.”

하인들이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시신을 옮기려던 찰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핏빛 붉은 혼례복을 입고 흑단처럼 고운 머릿결이 어깨 너머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결하고 청아한 얼굴은 더욱 눈부시게 하얗게 빛났고 유리알 같은 검은 눈동자와 오뚝한 콧날이 기품을 더하고 있었다.

이경은 문가에 몸을 기대어 나른한 얼굴로 하인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누구를 땅에 묻겠다는 것이냐?”

“구... 구공주...?”

“귀신이로구나!”

“그림자가 있어... 사람이 분명해!”

이경은 매서운 눈길로 마당에 엎드린 하인들을 훑어보았다.

“윤세현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자신을 죽이고도 태연히 사라진 그 사내,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이 자를 내 손으로 단단히 혼내주지 않고는 내가 어찌 이경이라 할 수 있으랴.’

“구공주마마, 세자 저하께서는... 지금 청운각에 머무르고 계십니다.”

같은 시각, 청운각.

윤세현은 한 손에 찻잔을 들고 고요히 앉아 있었다. 창을 스치는 햇살 아래, 새까만 머리카락 끝에는 아직 식지 못한 땀방울이 아른거렸으나 그 얼굴에는 바람 한 점 스치지 않는 호수처럼 아무런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 곁에는 어린 여인이 두 눈에 맺힌 눈물을 애써 감추며 서 있었다.

“세현 오라버니, 모든 게 저의 천운이 박한 탓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오라버니 곁을 지킬 자격이 있겠습니까. 다 저의 허물이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윤세현의 동생 윤원호는 안타까운 듯 고개를 떨구었다.

“모든 건 구공주가 대왕대비마마께 매달려, 이 혼사가 이뤄진 것 아니겠소. 형님 탓이 아니라, 다 그 여인의 짓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 해도... 세현 오라버니께서 그런 행실 고약한 여인을 부인으로 맞으시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이서영은 조용히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치고는 몰래 윤세현이 앉아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바람 한 점 흔들지 못할 만큼 담담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속마음을 짐작할 수 없는 고요함만이 그 표정을 감췄다.

이서영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부디 노여워 마십시오. 서영은... 서영은 종으로라도 곁에 남아, 평생 시중을 들고자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윤원호는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영아, 너는 현주다! 신분이 얼마나 귀한데, 종이 되겠다니!”

옆에 있던 이도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맞아, 네가 현주인데 어떻게 세자 저하 종이 되겠어.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지.”

그때, 문밖에서 맑고도 냉소가 섞인 웃음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진정 네가 종이 되고 싶다면 내가 직접 대왕대비마마께 아뢰어 네가 내 시중을 들게 해볼 터이니 그리 원한다면 말해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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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네가 고작 교지 한 장으로 이 몸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더냐?”머리 위로 깊고 묵직하게 깔린 남자 목소리가 서늘하게 내리꽂혔다. 이경은 순식간에 목덜미가 시큰해지더니 숨이 턱 막혀와 의식이 아득해졌다.긴 속눈썹이 떨리며 겨우 눈을 뜬 순간, 그녀의 시야에 세상 어디에도 비길 데 없는 준수한 얼굴이 다가왔다. 하지만 그 남자는 지금,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네가 감히 우리 공가 세자빈 자리를 넘본 것이냐?”남자는 매서운 눈빛과 입가에 한 줄기 냉소를 머금은 채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싸늘한 시신이라면 몰라도 살아 있는 그대는 결코 내 곁에 둘 생각이 없다.”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목을 조이는 힘이 한층 더 세졌다. 이경은 온몸이 점차 저려오다 못해, 마침내 의식이 흐릿해질 무렵에야 남자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손을 거두었다.긴 도포 자락을 단정히 추스른 그는 기품 있고 날렵한 체격에 식은땀 한 줄 흐르고 있을 뿐 얼굴에는 미동도 없었다.얼음장 같은 표정, 천하의 모든 빛을 가릴 것 같은 그 얼굴에는 오직 차가운 적막만이 남아 있었다.그가 조용히 몸을 돌려 손바닥으로 방문을 내리치자 문밖에는 하인들이 모두 얼굴을 바닥에 박고 엎드려 있었다.“세... 세자 저하, 구공주께서... 구공주께서...!”윤세현은 무심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죽었다. 땅에 묻어라.”한 치의 미련도 없는 듯, 그는 조용히 등을 돌려 걸어 나갔고 감히 가까이할 수 없는 고독이 길게 드리웠다.‘정말로, 땅에 묻으라는 것인가?’하인들은 모두 숨을 삼키며 얼굴이 잿빛이 되어 무릎을 꿇고만 있었다.‘구공주는 폐하의 막내딸이자 대왕대비마마의 온 사랑을 한 몸에 받던 귀한 손녀인데.’그제서야, 이경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윤세현이 떠난 자리에 남은 냉혹한 기운과 귀에 남은 모진 말들을 뒤로한 채 그녀는 자신의 머릿속을 차분히 정리하려 애썼다.진정한 구공주는 자신의 지아비 손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대왕대비의 교지로 인해 억지로 혼례를 치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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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짝!갑작스러운 소리와 함께, 이경의 손바닥이 이서영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이서영은 전혀 예상치 못해, 옆 의자에 부딪히고는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너무도 뜻밖의 일에 한동안 넋이 나가 얼굴을 파고드는 아픔에도 제대로 반응할 수가 없었다.윤원호 역시 놀라움에 말문이 막혔다.‘이토록 난폭하고 독한 구공주라니...’“서영 현주!”정신을 차린 윤원호가 다급히 달려와 이서영을 부축해 일으켰다. 이서영의 얼굴에는 다섯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붉게 찍혀 있었고 볼 한쪽은 금세 퉁퉁 부어올랐다.“형님! 서영 현주께서 다치셨습니다!”윤원호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억누르지 못하고 이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 한들, 연약한 이서영에게 이토록 거칠게 손을 대다니...윤원호는 곧장 윤세현을 바라보며 외쳤다.“형님!”구공주가 아무리 황실의 공주라 한들, 이 땅에서 공가의 위세 앞에 주저할 이는 드물다. 하물며 윤세현은 선왕께서 친히 세우신 세자, 온 나라 신하들이 붙잡으려 애쓰는 전장의 영웅이었다.윤세현이 조정 군사의 삼분의 일을 쥐고 있으니 만에 하나 구공주를 벌한다 해도 황제마저 감히 나설 수 없을 터였다.그런데도 윤세현은 아직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침묵하고 있었다.이서영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살짝 흐느꼈다. 고통에 온몸이 떨렸지만 꾹 입술을 깨문 채 그 어떤 항변도 하지 않았다. 억울함과 인내심, 그 모든 것이 도도하게 날 선 이경과는 전혀 딴판이었다.윤원호는 그 모습이 더욱 안쓰러워 가슴이 저릿해졌다.다시 윤세현을 바라보니 여전히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으나 이경을 바라보는 눈빛 끝에 미묘한 불쾌함이 살짝 깃들어 있었다.그때, 밤바람이 살랑 불어와 이경의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뜻밖에도 붉은 옷 아래로 뽀얗고 고운 다리가 잠시 드러났고 윤원호는 그만 넋을 잃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 흰 다리는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 버렸고 곧 윤세현이 이경의 앞을 막아서더니 두 사람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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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이경은 침대 위로 내던져졌다. 고개를 돌려 윤세현을 바라보자 그의 눈에는 차가운 기색과 함께 조롱이 깃들어 있었다.“어쩌시렵니까? 제가 그 귀하신 서영 현주를 때렸다고 저한테 복수라도 하시려는 겁니까?”대답 없이 이경의 얼굴을 흘끗 보던 윤세현은 곧장 시선을 그녀의 다리로 내렸다.붉은 혼례복 아래 곧고 하얀 두 다리는 더욱 눈에 띄었고 방금 전만 해도 두려움에 떨던 이경이었으나 지금은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는 눈빛으로 윤세현을 바라보고 있었다.“이런 게 네 취향이냐?”이서영을 때린 걸 두고 하는 말이란 걸 짐작한 이경은 눈썹에 오만한 빛을 머금고 맞받아쳤다.“그래서 어쩌시겠습니까?”남의 지아비를 탐내는 여인에게 뺨 한 대쯤은 오히려 약한 벌이라고 생각했던 이경은 얼굴을 망가뜨려도 전혀 아깝지 않다는 심정이었다.막 구공주의 몸에 깃들어 아직 이 남자를 진짜 지아비라 느끼진 못했지만 그래도 오늘이 혼인 첫날밤이라는 사실만큼은 명확했다. 적어도 구공주라는 신분으로 이리저리 휘둘리며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윤세현의 눈빛이 한순간 어두워졌다. 사람들은 구공주를 두고 방탕하다 손가락질했지만 적어도 오늘 밤만큼은 그 모든 소문이 거짓임을 직접 확인했다. 그런데도 이경이 보여준 당돌함에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갑작스럽게 다가온 윤세현이 침상 곁에 서서 그림자처럼 이경을 가리자 방 안의 불빛은 그의 몸에 막혀 금세 어두워졌다.이경은 손바닥에 힘을 주며 도망칠 기회를 엿보았지만 그 순간 발목이 잡혀 그대로 끌려오고 말았다.그는 이경의 손을 머리 위로 눌러 고정시키고 온몸으로 그녀를 눌러 움직일 수 없게 했다.“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당장 놓으십시오!”원래는 이렇게까지 가까이 다가갈 생각은 없었지만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전법이었고 상대가 적이었다면 이쯤에서 목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여인은 자신의 새 신부였다.윤세현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가쁘게 오르내리는 이경의 숨결만을 지켜보고 있었다.“네가 겁을 먹을 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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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이경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를 바보처럼 여기기라도 하듯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침묵이 흐르자 방 안의 공기는 한껏 긴장감에 휩싸였고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때, 바깥에서 누군가 다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세자 저하, 변방에서 급보가 들어왔습니다!”이경이 고개를 들어 침대 옆에 선 윤세현의 표정을 살피려는 순간, 그가 갑자기 손을 휘저으며 두꺼운 이불을 그녀 얼굴에 덮어씌웠다. 한순간에 시야가 어둡게 가려지더니, 숨이 턱 막힐 만큼 온몸이 이불에 감겨버렸다.‘이게 무슨 짓이야!’간신히 이불에서 빠져나온 이경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방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한숨을 내쉰 이경은 조심스럽게 침상에서 내려와 벽 쪽으로 다가갔다.바닥에는 하얀 가루가 한 겹 쌓여 있었는데 그제야 산산조각 난 옥비녀가 완전히 가루가 되어버렸다는 걸 알았다.손에 힘을 살짝 주어 보니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아까 잠깐 긴장했던 마음을 애써 숨겼지만 그래도 윤세현이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곧 머릿속에는‘변방 급보’라는 말이 떠올랐다.비록 지금은 세자에 불과하지만 그는 실질적으로 대군을 거느린 전쟁의 영웅이다.이번 기회에 그가 변방에 몇 해라도 나가 있게 된다면 적어도 이경은 당분간은 자기 일상도 조용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낯선 신부방을 천천히 둘러보다 이런 기막힌 상황까지 겪게 된 현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평생 지켜온 몸을 이렇게 한순간에 잃게 될 줄이야...’긴 손가락으로 비녀 자리를 매만지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곰곰이 생각했다.여길 떠날 것인지 아니면 당분간 구공주로 살아갈 것인지. 피곤이 몰려오자 하품을 하며 옷매무새를 고쳐 입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상에 몸을 던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해가 뜨기 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공주마마.”문밖의 목소리는 자신을 따라온 시녀 연지였다.“무슨 일이냐?”이경은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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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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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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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여섯 날 동안 윤세현은 한 번도 빠짐없이 군대 맨 앞에 서서 대열을 이끌었고 구공주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 듯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하지만 오직 부장 문정수만큼은 매일 구공주와 관련된 소식을 윤세현에게 빠짐없이 보고해야 했다.“오늘도 눈물 한 번 안 보였다고?”윤세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믿기 어렵다는 듯 묻자 문정수가 조심스럽게 답했다.“예, 세자 저하. 첫날에는 구공주께서 연지를 데리고 대열을 잠깐 벗어나 뭔가를 챙겨오셨습니다. 무엇을 가져오셨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쉬는 시간마다 마차 안에서 그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 뒤로는 계속 마차 안에 머물렀고 가끔씩 내려와 말을 타기도 하셨지만... 대체로 별 탈 없이 지내셨습니다.”‘별 탈 없이?’그 여자가 이 군대에서 그렇게 태평하게 지낼 수 있다니 윤세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내심 기다리던 눈물과 후회, 스스로 잘못을 고백하는 장면은 어디에도 없었다.“세자 저하, 대군이 내일이면 모성에 당도합니다. 오늘 밤은 이곳에서 야영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문정수의 말에 윤세현은 짧게 시선을 주고 해가 점점 저물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다 손짓 한 번에 대열을 멈추게 했다.병사들은 곧바로 진을 치고 부엌에서는 저녁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윤세현은 막사로 들어가 한동안 지도를 들여다보았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 복잡하고 불안해졌다.‘그 여자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여섯 날을 쉴 새 없이 달려왔는데 정말 아무렇지 않게 지내고 있는 거야? 혹여 남몰래 막사 안에서 울고 있는 건 아닐까...’어쩐지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이경의 얼굴이 떠올라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특히 신혼 첫날밤, 자신의 자존심을 비웃던 그 표정이 생각날 때마다 분노가 다시금 치밀어 올랐다.더는 참지 못하고 윤세현은 지도를 접어놓고 길게 숨을 내쉰 뒤 막사 밖으로 걸어 나왔다.“세자 저하!”대열 맨 앞에서만 머물던 그가 이날따라 처음으로 군 진영 중간까지 걸어 나오자 구공주를 모시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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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윤세현이 개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연지가 다급히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공주마마께서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라 하셨습니다...”하지만 연지는 윤세현의 기세를 감히 막기 어려워 입을 다물었다.괜히 문정수처럼 얻어맞고 피를 토할까 봐 차라리 멀찌감치 물러서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연지는 고개를 숙인 채 더는 막지 못했고 오히려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그 자리를 피해 멀찍이 물러났다. 문정수 역시 또다시 봉변을 당할까 봐, 최대한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그 시각, 이경은 개울 한가운데까지 들어가 둥근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맑은 물은 어깨 아래까지 차올랐고 갓 솟은 달빛 아래 드러난 희고 매끄러운 어깨는 고운 옥을 닮은 듯 빛을 머금고 있었다.강가에 선 윤세현은 한순간 그 모습에 시선이 멈췄지만 곧 이내 표정이 어두워지고 눈빛에도 서늘함이 스며들었다.물이 일렁이자 이경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밖에서 지키라고 하지 않았느냐... 뭐야, 당신이었군요.”달빛 아래, 윤세현의 키 큰 그림자가 물가로 다가오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서늘하고 차가웠다.‘저렇게까지 냉정하게 굴어야 마음이 편한가.’이경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여기까지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윤세현의 낮고 굵은 목소리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이렇게 드러내놓고 물에 들어가는 것이, 그리도 좋으냐?”이경 역시 분이 치밀어 일부러 비꼬듯 받아쳤다.“네, 저야 예전부터 풍문이 자자하지 않습니까? 세자 저하께서는 저의 과거 소문을 한 번도 못 들으셨습니까?”사실 그녀는 옷을 벗은 것도 아니고 겨우 어깨와 팔이 드러난 정도였으나 이런 것도 방정맞다 여기는 이 시대의 분위기를 미처 잊고 있었다.생각해 보면 지금 이경이 있는 곳은 21세기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고 이런 차림은 이 시대에서는 허락되지 않았다.이경의 말에 윤세현의 눈빛에선 더 깊은 분노가 번졌다.“연지 앞에서도 이러는 것이냐?”분명 조금 전까지도 이경은 연지의 발소리를 듣고도 전혀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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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놓으십시오!”이경은 분노에 찬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러자 윤세현이 낮은 목소리로 비웃듯 말했다.“네가 같이 목욕하자고 한 거 아니냐. 그런데 지금 와서 왜 이리 허둥대느냐?”분명 다시는 이 여인과는 엮이지 않겠노라 다짐했건만 이경의 오만하고 대담한 태도는 오히려 더 한번 눌러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제가... 허둥댄다고 생각하십니까?”이경의 눈동자에 놀란 기색이 잠시 스쳤으나 곧이어 익숙한 도발과 방자함이 다시 번졌다.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오히려 그의 목에 팔을 걸고 바짝 다가섰다.“세자 저하께서 스스로 얼마나 매력적인지, 혹시 모르십니까? 저뿐 아니라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세자 저하 곁에 머무르길 바라는지 아십니까?”이경이 한껏 다가가 몸을 밀어붙이자, 곧바로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세자 저하와 함께 목욕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여인들의 소망인지... 아십니까?”“너도 그중 하나냐?”윤세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비꼬듯 물었다.이경은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분명 조금 전에는 놀란 기색이 스쳤으나 만약 그걸 그가 눈치채지 못했다면 이번에도 완전히 속았을 터였다.하지만 이번에는 속지 않았다.“똑같은 수를 내가 또 속을 줄 알았느냐.”윤세현은 긴 손가락으로 이경이 걸치고 있던 얇은 속옷을 순식간에 찢어냈다.“아...!”몸에 차가운 밤공기가 닿자 이경은 깜짝 놀라 두 손으로 가슴을 급히 가리며 물러섰다.“흥, 너도 결국 네 몸이 다 드러나는 건 싫은 모양이군.”그는 차갑게 쏘아보며 마치 무가치한 물건을 내던지듯 이경을 놓아버렸고 긴 다리로 물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와 조용히 젖은 옷을 추슬렀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을 돌려 남긴 한마디는 차가운 비웃음이었다.“아쉽게 됐네. 네 몸뚱이에 난 전혀 관심 없거든.”이경은 분노에 이를 악물었다.‘누가 들어오래? 와서 욕만 하고 이젠 이렇게까지 모욕을 줘?’속옷이 찢겨나가고 물 밖으로 나가기도 민망해 어쩔 줄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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