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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1화

주시우는 몇 걸음 다가가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신예린의 구두를 집어 들었다.눈앞에 놓인 그것이 바로 신예린의 것임을 알아차리는 순간, 주시우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주시우는 곧장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지만 들려온 건 전원이 꺼졌다는 안내음뿐이었다. 신예린의 배터리가 다 된 것을 알고 있던 주시우는 얼굴빛이 굳어졌다. 주시우는 발걸음을 재촉해 세 걸음을 두 걸음에 좁혀 달려 올라갔다.불이 켜져 있는 4층 실험실에 도착했지만 안은 텅 비어 있었고 허공에는 그의 거친 숨소리만 가득 울렸다.그 시각, 2층.신예린과 정가을은 벽 모서리에 몸을 웅크린 채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크게 느껴질 만큼 정적이 감돌았다.‘도준호가 뭔가에 부딪혀서 발길을 돌린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조금만 고개를 들었어도 우리 둘은 이미 들켰을 텐데...’신예린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정가을을 붙잡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은 몸을 낮춘 채 발소리조차 삼키며 걸었다. 자칫 감지등이 켜질지 두려워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러웠다.간신히 1층에 도착했을 때, 신예린은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곧장 정가을의 손을 잡고 가장 가까운 강의동으로 향하려는 순간, 위쪽에서 쿵쿵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쏟아져 내려왔다. 서두르는 기척에 심지어는 불안이 묻어나는 소리였다.신예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그대로 앞으로 내달렸다.“예린아!”귀에 익은 음성이 뒤에서 울려 퍼졌고 그 소리에 신예린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 눈물이 먼저 치밀어 오르자 뒤돌아보기도 전에 코끝이 시큰해졌다.곧장 다가온 팔이 신예린을 끌어안았다. 잃었던 보물을 되찾은 듯, 떨리는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대체 어디 있었어? 나 정말... 죽는 줄 알았어.”익숙한 체온과 숨결이 닿자 신예린은 긴장이 풀리며 힘이 빠져나갔고 눈가가 젖어 들면서 떨리는 팔로 주시우를 끌어안았다.주시우는 품에 안긴 신예린의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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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2화

병원 병동, 긴 복도를 따라 한 사람이 급히 달려왔다.“상태는 어때?”소지훈이 허리를 짚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밤늦게 주시우의 전화를 받자마자 병원 쪽 일을 정리하고 곧장 달려온 참이었다.주시우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희미한 불빛 속에서 그늘진 표정이 더 무겁게 드리워졌다.“아직 검사 중이야.”말이 끝나자 검사실 안에서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족분, 들어오세요.”주시우가 문을 밀고 들어가려는 순간, 소지훈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예상대로 주시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잠시만 기다려.”검사실 안, 신예린은 방금 검사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바지가 반쯤 벗겨진 채라서 의사가 가족을 불러들이자 당황해 서둘러 바지를 잡아 올렸다.“지금은 움직이지 마시고 가족이 도와드리게 하세요.”의사의 말에 주시우는 묵묵히 다가가 신예린의 바지를 올려 입히고 배 위로 걷혀 있던 옷자락도 곱게 내려주었다.신예린은 부끄러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초조하게 의사를 바라보았다.“선생님, 아기는... 괜찮나요?”주시우의 시선 역시 의사에게로 향했다.“검사상으로는 당장은 괜찮습니다. 다만 놀란 데다 격하게 움직여서 위험했을 뻔했으니 앞으로는 절대 무리하지 말고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의사의 말에 신예린과 주시우는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감사합니다.”주시우가 조심스레 인사했다.“오늘은 돌아가서 푹 쉬세요.”그 말을 남기고 의사는 검사실을 나갔다.문밖에서 대기하던 소지훈은 이미 의사의 말을 들은 참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며 목소리를 높였다.“정말 다행이네. 갑자기 배가 아프다길래 정말 놀라 죽는 줄 알았어. 아직 일곱 달밖에 안 됐는데 조산이라도 되면 어쩔 뻔했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그렇게 놀라고 또 심하게 움직인 거야?”신예린과 주시우는 잠시 눈빛을 주고받았다.두 사람이 아무 말이 없자 소지훈은 답답해하며 다그쳤다.“말 좀 해봐.”잠시 망설이던 주시우가 입을 열었다.“혹시 도준호라는 사람...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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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3화

주시우의 얼굴이 굳게 내려앉았다.“더 아는 게 있어? 혹시 그 여학생이 누군지는 알아?”소지훈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몰라. 그냥 들은 건 그 여학생이 도준호랑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거였어. 아마 고등학교 갓 졸업했을 때라고도 하더라. 그럴듯하게 말하니까 다들 믿었지. 게다가 그때 도준호의 아내가 미친 사람처럼 보였으니 전부 도준호 말이 맞다고 생각했어.”신예린의 심장이 요동쳤다. 실험실에서 도준호가 정가을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분명히 평안군을 언급했었다.숨이 거칠게 몰아쉬어지고 믿고 싶지 않은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가을이예요...”신예린의 목소리가 떨리며 잠겼고 눈가가 뜨겁게 젖어 들었다.“정가을하고 도 교수는 같은 고향 사람이에요. 그때 그 학생은 분명 가을일 거예요.”모든 게 설명됐다. 정가을이 왜 그렇게 두려워했는지, 왜 기어이 이곳을 떠나려 했는지 말이다.도준호의 손아귀는 이미 3년 전부터 정가을을 덮쳐왔다.그때 정가을이 반항하려 했을지 몰라도 소용없었고 마음속에 새겨진 상처는 몸의 흉터보다 훨씬 깊었을 터였다.‘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홀로 그 지옥을 견뎌왔을까.’주시우의 눈빛은 깊고 매서웠고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은 심연 같았다.“정가을이 누구야?”사정을 모르는 소지훈은 두 사람의 얼굴이 심각해지는 걸 보고는 도리어 놀라 되물었다.“무슨 뜻이야? 설마... 오늘 여학생이 바로 그때 그...”아무 대답도 없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소지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설마 진짜야? 확실한 거야?”잠시 침묵하던 주시우가 낮고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네가 방금 말한 걸 종합하면... 거의 틀림없어.”소지훈은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그렇다면 뭐 하러 이러고 있어? 당장 경찰에 신고해야지. 이런 인간이 아직 의사로 일하고 있다니... 의사라는 이름이 부끄럽잖아. 교수라는 이름도 마찬가지고.”소지훈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잠깐.”주시우가 손을 뻗어 그를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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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4화

“하지만 저는 여자예요.”신예린은 눈가가 붉어진 채로 말했다.“가을이가 털어놓을 수 있는 건 저뿐이겠죠.”주시우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한 채 침묵했다.“한 번만 시도해 보게 해주세요. 대낮에는 도준호가 감히 저한테 무슨 짓을 못 해요. 그러니 일부러 밤을 노려서 가을이를 덮친 거잖아요. 게다가 제가 직접 가을이를 구했으니 가을이가 저한테는 벽을 덜 세울 거예요.”신예린은 간절히 눈을 맞추며 애원했다.“한 번만 시도해 보게 해주세요.”그 말엔 분명 일리가 있었다. 지금 정가을은 남자에 대한 거부감이 극심했고 일이 더 커지기 전까지는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보호가 되는 셈이었다.주시우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하지만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 밤에는 내가 데리러 갈게.”신예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네. 알겠어요.”“그럼 나는?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없어?”소지훈이 나섰다.“너...”주시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사실 네 도움이 꼭 필요해. 도준호의 전 부인을 찾아봐 줄 수 있겠니?”소지훈은 눈빛이 단단히 굳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내가 맡을게.”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주시우는 이불을 잘 덮어주며 신예린을 바라보았다. 표정은 온통 근심으로 얼룩져 있었고 주시우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낮아졌다.“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이건 하루아침에 풀릴 일이 아니야.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고 증거도 부족해. 게다가 가을이 자신도 일을 더 키우고 싶어 하지 않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우리 몫만 다하는 거야.”임신한 탓에 원래도 예민하던 신예린은 결국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말을 잇지 못했다.“가을이에게 이런 일이 있었을 줄 몰랐어요. 오히려 제가 괜히 무섭다고 멀리했어요... 그게 다 내 편견이었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요.”그러자 주시우는 조용히 답했다.“누구든 친구를 선택할 권리는 있어. 네가 거리를 둔 건 그저 맞지 않았던 걸 뿐이야. 그게 가을이를 해친 건 아니야.”주시우의 다정한 말에 신예린은 코끝이 시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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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5화

정가을은 무표정한 얼굴로 피가 흘러내리는 팔을 내려다보았다.살을 찢는 고통이 오히려 가슴속 깊은 고통을 조금은 덮어주는 듯했다.그날, 짓밟힌 순간부터 정가을은 이 몸을 증오하며 살아왔다.다음 날 아침, 신예린은 휴대폰이 완전히 충전된 걸 보았다.화면에는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에 문자도 몇 개 와 있었다.신민호였다.[누나, 왜 전화를 안 받아? 할 얘기가 있어.][일부러 피하는 거야? 진짜 급한 일이 있다니까.][누나, 제발 전화 좀 받아.]신예린은 한참 동안 신씨 가문과 연락을 끊고 지냈고 그들도 먼저 다가온 적이 없었다.명절에도 단 한 번 안부 문자조차 오지 않았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누나라 부르다니 이상할 뿐이었다.커서부터는 바로 신예린의 이름을 부르거나 ‘야’하고 불렀던 신민호였다.‘괜히 친한 척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겠지.’신예린은 대꾸할 마음도 여유도 없었다.그 시각, 회의실 안.주시우와 도준호가 마주쳤다.의외로 주시우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도 교수님.”말을 마치자마자 의자를 빼고 도준호의 옆자리에 앉았다.도준호는 순간 속내를 짐작하지 못했다.만약 주시우가 신고할 생각을 접은 거라면 다행이지만 아니라면 여전히 위협이 될 수 있었다.회의 내내 도준호는 은근히 주시우를 살폈다.하지만 주시우의 시선은 온전히 발표와 기록에만 머물러 있었다.간간이 펜을 들어 꼼꼼히 메모하는 모습까지 평소와 다름없었다.회의가 끝난 뒤, 교수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주시우도 노트를 챙겨 일어서려 했을 때, 도준호가 끝내 못 참고 불렀다.“주 교수님.”주시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일이십니까? 도 교수님.”“어제 말씀하신 교우님의 부인 말입니다. 실험동에서 찾으셨는지요?”“물론이죠.”“그렇다면 다행입니다.”주시우의 눈빛이 순간 차갑게 스쳤다.“하지만 덕분에 병원에 가야 했습니다.”도준호의 얼굴이 잠시 굳더니 이내 태연하게 잡아뗐다.“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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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6화

주시우는 멱살을 잡힌 채로도 전혀 흔들림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주시우의 태연한 표정이야말로 도준호가 가장 참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주시우, 너는 맨날 도도한 척하지 마. 네가 나보다 뭐가 잘났다고 생각해. 너도 똑같이 제자한테 손댔잖아. 우리 둘이 그냥 비슷한 자식들이야. 그런데 감히 날 무시해?”도준호의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어때, 어린 여자애들이 더 좋지 않아? 네 마누라가 보아하니 안으면 폭신할 것 같고 침대 위에서도 목소리 예쁘게 잘 짖어대겠지.”그 말에 주시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늘어졌다.주시우는 주먹을 움켜쥐었으나 끝내 휘두르지 않았고 대신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날 너 같은 인간이랑 비교하지 마. 난 최소한 나이와 지위를 이용해 여자를 억지로 끌어내리진 않아. 최소한의 존중도 모르는 주제에 무슨 의사, 무슨 교수야. 아무리 책을 읽어도 네 수준은 변하지 않아.”주시우의 비웃음은 목소리에 서려 있었다.“심리학적으로 무능한 인간일수록 여자한테서 존재감을 확인하려 들지.”“닥쳐!”도준호는 끝내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허공을 가를 뿐, 주시우는 고개를 비켜 맞지 않았다. 그 대신 도준호의 손목을 거칠게 비틀어 억지로 놓게 했다.“몸이 그렇게 간절히 쓰고 싶으면 감옥 안에서 한번 힘껏 휘둘러봐. 거기가 너한테 딱 알맞겠지.”도준호는 분노에 휩싸여 또다시 주먹을 쥐었고 그 순간, 회의실 문가에서 소란이 났다.학생 몇 명이 문 앞에 서서 헐떡이며 주먹을 휘두르는 도준호와 침착하게 몸을 피하는 주시우를 보고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 모습은 마치 투우장 한복판 같았다.“주, 주 교수님... 도 교수님...”학생의 목소리에 도준호의 동작이 멈췄다.문 앞에 모여 선 학생들을 보자, 일그러진 표정이 순식간에 지워지고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가면을 오래 쓰다 보면 자신도 진짜라고 착각하게 되는 법이었다.주시우는 도준호의 얄팍한 연기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무슨 일이에요?”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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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7화

“아니, 두 사람이 어떻게 싸울 수가 있어? 둘 다 성격 좋기로 유명하잖아. 다른 교수들이라면 몰라도 그 두 분은 믿기 힘들다니까.”“나도 믿기 어렵지만 학생회 애들이 직접 봤다잖아. 열댓 명 눈으로 직접 다 확인했대.”“근데 왜 싸운 거래? 무슨 이유라던데?”“그건 몰라. 학생회 애들 말로는 들어가 보니까 주 교수님이 투우하듯 피하고 있었다던데.”“푸하하, 그 장면은 완전히 상상되는데?”소문은 금세 퍼져나가 정가을의 귀에도 들어왔다.정가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책을 안고 지나갔지만 손끝은 점점 더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정가을은 무슨 일 때문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오히려 가슴이 먹먹했다.자신조차 이미 포기했던 정의를 누군가가 아직도 대신 싸워주고 있다는 사실이 괴로웠다.눈물이 시야를 가리자 정가을은 고개를 더 숙이고 발걸음을 재촉했다.그러다 도서관 입구에서 신예린과 마주쳤다.신예린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정가을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피하려 했다.“가을아.”신예린이 다급히 불렀다.“네가 겪었던 일들은... 우리가 다 알게 됐어.”정가을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고 입술은 핏기 없이 하얗게 질렸다.신예린은 서둘러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여기는 사람이 많아. 네가 원치 않으면 다 들을 수 있잖아. 우리 따로 얘기하자.”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신예린은 옆길로 걸어갔다.잠시 뒤, 뒤에서 따라오는 정가을의 발소리가 들렸다.조용한 정심호 앞, 신예린이 나무 그늘에 멈춰 섰다.뒤돌아보니 정가을이 서 있었다.신예린은 오래 준비한 듯 천천히 말을 꺼냈다.“가을아, 우리는 다 알고 있어. 도준호가 예전에 네게 무슨 짓을 했는지. 네가 뭘 두려워하는지 말해 줘. 나랑 주 교수님이라면 널 도와줄 수 있어.”오는 길 내내 짐작은 했지만, 막상 직접 듣자 정가을의 몸은 저절로 떨려왔다.정가을은 부정하려 애썼다.“무슨 말인지 모르겠어.”“모른 척한다고 없었던 일이 되니? 네 마음이 매일 그렇게 괴로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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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8화

그러자 정가을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억눌린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신예린은 다가가 정가을의 안경을 벗겨내고 휴지 한 장을 뽑아 눈가에 흐른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그 순간 신예린은 정가을의 모습에서 예전의 자기 자신을 다시 보는 듯했다.바뀌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 다만 안개 속에 갇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을 뿐이었다.“가을아, 도망친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야. 지금 걷고 있는 길이 그렇게 아프다면... 우리 다른 길을 한번 걸어보자. 응?”임신으로 인해 한층 부드러워진 신예린의 모습은 더 따스하게 다가왔다.정가을은 문득 어젯밤에 배를 부여잡고도 자신을 끌어내던 신예린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리고 주시우가 자신을 구해준 일, 심지어 도준호와 맞서 싸웠던 순간까지 생각났다.그날 이후 정가을은 세상이 온통 적대적으로만 느껴졌다.마치 온몸에 가시가 돋은 것처럼 말이다.가시투성이인 사람을 좋아할 리 없었고 결국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이렇게 끝까지 자신에게 다가와 주는 사람이 있다니.정가을은 눈물이 끊어진 진주알처럼 쏟아져 내렸고 떨리는 어깨와 무력한 표정이 그녀의 깊은 슬픔을 드러냈다.“왜... 왜 이렇게까지 나를 도와주려 하는 거야?”정가을의 흐느낌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만약 태양을 본 적이 없었다면 어둠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그러자 신예린은 낮게 대답했다.“절망 속에 있으면... 누구나 손 내밀어 주길 바라잖아.”주시우가 손을 내밀어 줬듯 신예린도 정가을에게 손을 내밀고 싶었다.그 말에 정가을은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만약 열여덟의 자신에게도 이런 손길이 있었다면 지난 3년이 이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이제야 정가을은 누군가가 주저함 없이 자신을 위해 결정을 내려주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달았다.신예린은 천천히 몸을 낮추어 정가을을 안아 주었다.“가을이가 동의했어요.”신예린은 학교 길을 걸으며 전화를 붙잡았고 목소리는 감격에 젖어 떨리고 있었다.“가을이가...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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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9화

신예린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신민호의 얼굴이었고 그는 휴대를 손에 쥔 채 가까운 곳에 서 있었고 뺨에는 희미하게 멍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신민호는 신예린을 보자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성큼 다가왔다.“정말 누나 맞네. 처음에는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어. 배가 이렇게 불러왔구나.”신예린은 한 번도 신민호 얼굴에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아직 앳된 얼굴인데도 비위를 맞추려는 눈치가 너무도 분명했기에 낯설고 불편하기만 했다.“어떻게 들어왔어?”신예린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누나 동창분 따라 들어왔어.”신민호는 조심스레 대답했다.“누나, 나 며칠째 계속 전화했는데 왜 안 받았어.”“받기 싫어서.”단칼 같은 대답에 신민호 얼굴이 굳더니 억눌린 화가 스멀스멀 드러났다. 집에서는 언제나 자신이 윗자리에 있었고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부모에게 일러바쳐서 신예린이 욕을 먹게 만들고는 했다. 예전 같으면 감히 이런 대꾸는 상상도 못 했을 터였다.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돈이 급한 신민호로서는 온갖 불만을 삼켜야 했다.신예린은 신민호가 억지로 참고 있는 모습을 보자 더 이상 인내심이 나지 않았다.“신민호, 그냥 올 이유는 없을 거야. 무슨 일인지 빨리 말해. 나 바빠.”그제야 신민호는 본론을 꺼냈다. 그는 비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누나... 나를 1,000만 원만 빌려줄 수 있어?”“고등학생이 무슨 돈이 필요해서 천만 원을 달라는 거야?”신예린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잠시 망설이던 신민호는 결국 털어놨다.“게임에 충전하려고 어떤 형한테 돈을 빌렸는데 못 갚아서... 이자만 불어나고 있어.”신예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신예린은 예전에 먹을 것도 아껴가며 돈을 쪼개 썼는데 동생은 게임에 천만 원을 날려버렸다니... 신예린은 같은 성씨를 가졌어도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싶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신예린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나 돈 없어.”“누나...”신민호가 다급히 다가와 팔을 잡으려 하자 신예린은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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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0화

밤이 되자 정가을은 주시우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문이 열리자 주시우의 얼굴이 드러났고 그의 어깨 너머로 신예린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정가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들어와.”주시우는 몸을 옆으로 비켜 세우며 부드럽게 말했다.정가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가을아, 여기 앉아.”신예린이 정가을의 손을 잡아 의자에 앉혔다.혹여 마음이 변해 오지 않을까 걱정했던 신예린은 정가을이 약속대로 나타나자 속으로 몰래 한숨 돌렸다.주시우는 컵에 물을 따라 두 사람 앞에 내밀었다.“고마워요.”정가을이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다.잠시 고요가 흐른 연구실 안, 먼저 말을 꺼낸 건 주시우였다.“결심해 줘서 고마워. 우리 모두 네가 얼마나 힘든 길을 걸어왔는지 알고 있어.”정가을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못 했고 금세 눈가가 붉어졌다.“혹시 들려줄 수 있을까? 증거나 증인으로 삼을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알아야 하니까. 시간의 흐름만 알려줘도 돼. 세부적인 건 경찰서에 가서 얘기하면 되고.”주시우는 최대한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마치 정가을이 겁을 먹을지 두려워하는 듯했다.불빛이 어른거리는 방 안에서 정가을의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우리는 같은 고향이에요. 도준호는 우리 마을에서 처음으로 대학 간 사람이었어요. 의대를 졸업하고 대도시에서 의사가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다 자랑스러워했죠. 저도 공부를 잘했지만 대학 지원을 앞두고 부모님이 큰 고민을 했어요. 시골이라 정보가 없었고 부모님은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으니까 어떤 전공이 좋은지도 전혀 몰랐죠. 그때 마침 도준호가 휴가차 고향에 내려왔어요. 부모님이 저를 데리고 가서 도준호를 만났고 도준호는 저한테 무슨 전공을 배우고 싶냐 물었어요. 동생이 아파서 저는 의대를 가고 싶다고 했죠. 그러자 지금의 대학을 추천했고 제 성적으로 충분히 갈 수 있다고 했어요. 전공을 정리한 후, 도준호의 방에서 의학 서적이 많은 걸 보게 됐고 모르는 게 있으면 설명해 주겠다며 같이 보자고 했어요. 도준호는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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