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예린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와 원나잇을 한 남자는 다름 아닌 그녀가 다니는 대학교의 교수님이었다. 게다가 더욱 아찔한 점은 그날 밤 그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덜덜 떨며 임신이라는 글이 적힌 결과지를 그의 앞에 내놓았을 때 주시우는 그녀에게 두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하나는 아이를 지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신예린은 얼떨결에 교수님과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 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에서 잤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주시우가 베개를 들고 그녀의 방문 앞에 섰다. “난방에 문제가 생겼나 봐. 내 방이 따뜻하지가 않아. 그래서 오늘 밤은 여기서 자도 될까?” 신예린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그를 방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 주시우가 또다시 나타났다. “아직 수리가 덜 됐나 봐. 오늘도 신세 좀 질게.” 그렇게 주시우는 자연스럽게 그녀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난방비를 아껴서 아이를 키우는 데 돈을 한 푼이라도 더 쓰겠다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 주경의 화정대 의대는 명문대였고 주시우는 화정대에서도 굉장히 유명한, 화정대 의대의 최연소 교수였다. 그는 약지에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지만 그의 곁에 여자가 있는 걸 본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 한 학생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수업 도중에 물었다. “교수님, 이미 결혼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언제 저희한테 아내분을 소개시켜줄 거예요?” 그런데 주시우가 갑자기 출석 체크를 하기 시작했다. “신예린.” 한 여자가 본능적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학생들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주시우는 부드러운 눈빛을 해 보였다. “여러분께 소개할게요. 제 아내 신예린이에요. 아주 훌륭한 심장외과 의사죠.”
View More거실은 은은한 노란 불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신예린은 아직도 카펫 위에 힘없이 누운 채 방금 주시우와 나눈 키스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잠시 후, 부엌에서 주시우의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그는 손에 물 한 잔을 들고 신예린 앞으로 다가왔다.조명 아래 비친 신예린의 얼굴은 투명한 옥처럼 빛났고 작은 코와 촉촉하게 빛나는 입술 주변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건 분명 주시우의 흔적이었다.평소라면 언제나 차분하고 절제된 모습이었지만 방금은 도저히 제어할 수 없었다.주시우는 신예린을 여러 번 안아 버렸고 혹시 겁을 주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뒤늦게 밀려왔다.주시우는 신예린한테 잔을 건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물 좀 마셔.”그 한마디에 신예린은 비로소 정신이 돌아왔다.신예린은 입안이 바싹 말라 있었고 볼에 닿는 열기도 여전히 뜨겁게 남아 있었다.신예린은 잔을 받아 들어 조심스럽게 몇 모금 삼켰다.긴 속눈썹이 눈 밑에 그림자를 드리우자 주시우의 목젖이 미묘하게 흔들렸다.바로 그때 신예린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올려 주시우를 바라봤다.주시우의 붉어진 뺨과 까만 눈동자에는 묘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아까... 누가 자기 키스 못 한다고 했죠?”그 말에 주춤한 주시우는 어색하게 기침을 흘렸다.“음... 아마 본능이었던 것 같네.”‘본능이라니... 교수님이 말한 본능이 결국 날 이렇게 정신없이 흔들어 놓았잖아...’잔을 다 비우자 주시우는 신예린의 앞에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먼저 샤워할래?”신예린은 눈길을 피하며 작게 대답했다.“네... 알겠어요.”신예린은 갑작스러운 관계의 변화가 아직은 익숙하지 않았다.특히 조금 전까지 그토록 뜨겁게 입맞춤을 나눴다는 사실이 자꾸만 떠올라 얼굴이 달아올랐다.평소의 주시우는 마치 욕망과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절제된 수도승 같은 느낌이었는데 조금 전처럼 붉어진 눈가로 자신을 삼킬 듯 바라보던 모습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평소의 주시우랑 차이가 너무 커서 신예린의 심장은 아직도
그러자 주시우가 가볍게 웃었다.“내가 왜 널 속이겠어. 원한다면 증명해 줄까?”신예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어떻게... 증명해요?”“예린이가 조금 전에 나한테 한 것처럼 말이야.”그 순간 신예린의 뇌리에는 방금 장면이 스쳤고 얼굴이 곧장 붉게 달아올랐다.주시우의 눈빛은 점점 깊어졌다.“예린이가 날 좋아해서 키스했다면 내가 예린한테 하는 키스는 똑같은 마음 때문이겠지.”주시우의 굵직한 목소리가 귀에 파고드는 순간, 신예린은 마치 몸이 둥실 뜨는 듯 어지러웠다.“증명해 줄까?”‘세상에... 누가 키스를 이런 식으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신예린은 두 손을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붉혔다.“네.”하지만 신예린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 거의 들리지 않는 정도였다.“뭐라고?”주시우가 몸을 조금 더 가까이 기울이자 얼굴이 바로 신예린의 앞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반쯤 그림자에 잠긴 주시우의 옆모습은 몹시 점잖았고 길게 드리운 속눈썹과 날렵한 콧날, 단정한 입술 선은 숨이 막히도록 매혹적이었다.신예린은 알 수 없는 용기가 솟구쳤고 그 순간 살짝 고개를 들어 주시우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가벼운 입맞춤이 이어졌고 이건 곧장 말이 필요 없는 대답이었다.공간을 가득 메운 공기는 순식간에 달아올랐고 뜨겁고 조용한 기류가 두 사람 사이에 퍼졌다.주시우는 눈빛이 불길처럼 이글거렸고 신예린을 끌어안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은 순간, 전류가 튀듯 강렬한 불꽃이 스쳤다.“내 키스는 좀 서툴지도 몰라.”주시우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고 신예린은 볼이 활활 달아올랐다.“만약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말해. 우리 둘 다 배우는 거에는 자신 있잖아. 잘 안되면 몇 번이고 연습하면 되지.”그 한마디에 신예린은 온몸이 전율하며 숨조차 가빠왔고 수치스러움과 설렘이 뒤섞여 머릿속이 하얘졌다.“그럼... 시작할까?”키스하면서도 먼저 허락을 구하는 주시우의 태도에 신예린은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하지만 다가오는 주시우의 얼굴이 눈앞에 닿
주시우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통화를 끊어 버렸다.신예린의 등줄기가 순간적으로 서늘해졌다.주시우의 목소리를 한 번이라도 들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단박에 알아챌 것이다.이건 사실상 두 사람의 관계를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었다.아니나다를까 전화를 끊긴 채 멍하니 휴대폰만 바라보던 여도준은 머리가 하얘졌다.‘방금... 주시우 교수님의 목소리를 들은 게 맞아?’하지만 주시우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신예린을 개의치 않고 휴대폰을 무음으로 돌려놓았다.앞으로의 시간을 어떤 방해도 허락할 수 없다는 듯 무심히 옆에 내려놓고 시선을 다시 신예린에게로 맞췄다.신예린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여전히 조금 전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멘탈이 흔들리고 있었다.“아직 대답 안 했잖아.”주시우의 손끝이 신예린의 손목을 따라 미끄러지듯 움직였고 그의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귓가에 파문처럼 퍼져 나갔다.“왜 날 몰래 키스한 거야? 날 좋아해서 그래?”신예린의 얼굴은 금세 달아올라 불길처럼 붉게 타올랐고 도무지 주시우와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는 아주 작지만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주시우의 눈빛은 유리 조각처럼 반짝이며 빛을 품었고 그동안 마음속을 짓누르던 온갖 망설임과 걱정이 모두 사라졌다.나이가 많든 세대 차이가 있든 그 순간 이제는 아무 상관 없었다.주시우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눈앞에 있는 신예린이 자신을 똑같이 좋아한다는 사실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했다.신예린이 입술을 대던 그 찰나부터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예린이를 절대 놓쳐서는 안 돼.’목울대를 울리며 주시우는 쉬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신기하네. 나도 그래.”늘 그렇듯 담담한 어투였지만 주시우의 그 한마디는 신예린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신예린은 숨이 멎을 듯 가슴이 요동치며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방금 뭐라고 하셨어요?”그러자 조명 때문에 빛을 띤 주시우의 눈동자가 깊이 흔들렸다.“나도 널 좋아한다고.”신예린은 머
신예린의 입술에 닿았던 부드러움이 사라지자 주시우의 눈매가 스르르 좁혀졌다.신예린은 놀란 새처럼 허겁지겁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다.그러나 곧 따뜻하면서도 강한 주시우의 손길이 신예린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었고 주시우는 그대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방심한 신예린은 힘없이 중심을 잃고 넓은 가슴팍으로 고스란히 안겨 버렸다.한 손으로 주시우의 가슴을 짚자 얇은 옷 너머로도 뜨겁게 전해지는 체온이 고스란히 손끝에 스며들었다.그 순간 신예린은 심장이 제멋대로 빨리 뛰었고 숨이 가빠졌다.주시우는 여전히 손목을 놓지 않은 채 그윽한 눈빛으로 신예린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순간, 신예린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어떻게 변명해야 하지? 방금 몰래 키스하려던 걸 들킨 건가... 날 내쫓으면 어쩌지...’신예린은 입술이 바짝 말랐고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교수님...”그러나 말끝을 이어 가기도 전에 주시우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귀가에 와닿았고 묘하게 울리는 울림은 신예린의 귓불을 간질이며 온몸을 달아오르게 했다.“날... 좋아해?”신예린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주시우의 숨결이 바로 앞에서 스쳐 오고 알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휘몰아쳤다.‘좋아하냐고요? 당연하죠. 너무 좋아한다고요!’좋아하는 감정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신예린의 마음속에서 넘쳐흘렀다.주시우의 시선이 불길처럼 타오르는 가운데 신예린은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입술을 열어 고백을 내뱉으려는 찰나,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순식간에 달아오른 분위기는 바로 깨져 버렸고 은근하게 고여 있던 아늑한 느낌은 산산이 흩어졌다.신예린은 당황한 표정으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 전화를 받아야 할 것 같아요.”신예린이 살짝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집으려 했으나 주시우의 손아귀는 여전히 놓아주지 않았다.주시우의 눈빛은 신예린에게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신예린은 어쩔 수 없이 몸을 기울여 손을 뻗어서 핸드폰을 확인했고 화
신예린은 밥을 먹다 말고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주시우의 창백한 피부에 희미한 홍기가 번지더니 마치 유백색 옥에 빛이 스며든 듯 은은한 광택이 돌았다.신예린은 몇 번이고 주시우의 얼굴을 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물었다.“교수님, 괜찮으세요?”주시우는 겉으로는 침착했지만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도저히 믿기지 않았기에 신예린은 무심코 손을 뻗어 주시우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그러나 닿기도 전에 주시우의 뜨거운 손바닥이 곧장 신예린의 손목을 붙잡았다.신예린은 손끝이 덜컥 떨렸고 주시우 역시 버티기 힘들었다.신예린의 손목은 여름날 얼음 조각처럼 차가워 주시우의 뜨거운 손바닥을 식혀 주었고 그래서 더 놓기가 아쉬웠다. 그러나 혹시라도 지난번처럼 이성을 잃을지 두려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주시우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낮게 말했다.“아마 잠시 후에 설거지를 좀 부탁해야 할 것 같아. 머리가 좀 어지러워.”“머리가 어지러워요?”신예린의 눈빛이 잔뜩 긴장으로 흔들렸다.“그냥... 취한 것 같아.”‘단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신예린은 믿기지 않아 눈을 크게 떴고 주시우는 신예린의 표정을 읽고는 차분히 덧붙였다.“난 술에 굉장히 약해. 조금만 마셔도 바로 취해. 그때도... 겨우 한 모금이었어.”갑작스레 그날 밤 이야기가 언급되자 신예린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단 한 모금으로 그렇게 격렬할 수 있다니... 앞으로 교수님한테 술을 조금 더 권하면...’엉뚱한 생각이 머리에 스쳤으나 신예린은 금세 고개를 흔들며 진정을 되찾았다.‘안 돼. 그런 비겁한 방법을 어떻게 떠올릴 수가 있어.’식사를 마친 뒤, 신예린은 서둘러 설거지를 마쳤다.부엌을 정리하고 나와 보니 거실은 고요했고 소파 위에 주시우가 누워 있었다.따뜻한 불빛 아래 드리운 긴 그림자 속에서 주시우의 몸은 한 겹 붉은 기운에 싸여 있었고 붉게 물든 입술은 마치 활짝 핀 꽃처럼 눈부시게 빛났다.‘잠자는 미남이라는게... 딱 이 모습이구나.’신예린은 저도 모르
신예린은 마음이 살짝 흔들렸고 누군가 집에서 자신을 기다려 주는 이 기분이 참 좋았다.“밥은 다 됐어요?”신예린의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나긋하게 흘렀다.“거의 다 됐어. 배고파?”“아니... 괜찮아요.”주시우는 신예린 손에 들린 봉지를 보고 물었다.“뭐 샀어?”“이따 보여 줄게요.”신예린은 일부러 비밀스러운 듯 웃으며 대답했다.주시우는 가볍게 웃고는 아직 불 위에 있는 팬이 떠올라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얼마 뒤, 갓 볶아낸 요리를 들고나왔을 때 신예린은 이미 분홍빛 음료를 두 잔 따라 두었고 투명한 유리잔 속에 담긴 색감이 눈에 띄었다.“이건 뭐야?”“딸기 음료예요. 병이 너무 귀여워서 그냥 장식 삼아 사 봤어요.”신예린은 탁자 위에 놓인 작은 병을 가리켰고 은빛 병마개와 통통한 유리병은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웠다.주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말했다.“예쁘네.”신예린의 입가에는 곧장 웃음이 번졌다.식탁에 마주 앉자 신예린은 의자에 올려둔 작은 상자를 꺼내 조심스레 내밀었다.주시우는 약간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이건 뭐야?”“선물이요.”신예린은 조금 수줍은 표정으로 말했다.“지금 열어 봐도 돼?”“네.”상자를 묶은 리본을 가볍게 풀자 은빛 테두리가 둘린 검은 만년필이 고급스러운 빛을 발하며 드러났다.신예린은 혹시 마음에 들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주시우를 살폈다.“갑자기 웬 선물이야?”“교수님이 저한테 해준 게 너무 많잖아요. 만년필이 교수님이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주시우의 눈빛이 순간 부드럽게 흔들렸다.“마침 학교에서 쓰던 펜이 고장 나서 불편했는데... 고맙워. 정말 마음에 들어.”그 말을 듣는 순간 신예린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좋아해 주시니까 다행이에요.”잠시 망설이던 주시우는 물었다.“근데 너는 뭐 안 샀어?”신예린은 멋쩍게 웃었다.“저는 특별히 사고 싶은 게 없어서요.”신예린은 원래 욕심이 많지 않았다. 먹고 입을 것만 있으면 충분했고 비싼 물건을 굳이 탐내는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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