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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터닝포인트: Chapter 31 - Chapter 40

100 Chapters

제31화

주시우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입을 열었다.“공교롭게도 난 널 찾으러 온 거야.”신예린은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굳이 추측할 필요도 없었다.주시우는 억지로 웃는 듯한 신예린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열 시에 끝나?”신예린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문 앞에서 기다릴게.”그 말을 끝으로 주시우는 버블티 카페를 나섰다. 신예린은 그의 뒷모습을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이게 끝인가? 교수님 표정이 왜 이렇게 차분하지? 아니면 폭풍 전의 고요란 게 이런 건가?’신예린은 감히 긴장을 풀 수 없었다. 퇴근까지 남은 30분 동안 그녀는 한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초조하게 시간을 보냈다.열 시 정각 신예린은 버블티 카페 문을 열고 나왔다.주시우가 정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30분 동안 주시우는 변함없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특유의 뛰어난 외모 덕에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신예린이 주문을 받으며 듣기에도 손님들 사이에서는 그에 대한 소곤거림이 끊이지 않았다.수려한 이목구비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 누구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신예린은 주시우 앞에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레 불렀다.“교수님...”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돈이 그렇게 부족해?”주시우가 물었다.신예린은 그가 알바 사실을 숨긴 데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장 먼저 나온 질문은 돈에 관한 것이었다.“아니에요.”신예린은 고개를 저었다가 이내 다시 끄덕였다.“맞아요...”“내가 준 카드로 지금 대학생 생활비 기준으로만 따져도 거의 1년은 넉넉히 쓸 텐데.”주시우의 목소리엔 나무라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차분하게 상황을 짚는 듯했다.그의 차분한 톤 덕분인지 불안하던 신예린의 마음도 조금 가라앉았다.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그건 교수님 돈이잖아요.”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주시우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두 사람 사이엔 적막이 흘렀고 신예린은 그를 힐끗 올려다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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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주시우는 짧게 숨을 고른 뒤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전에 말했지? 너한테 지금 제일 중요한 건 공부랑 아이야. 아이가 없다고 해도 네 몸이 먼저야. 사람 체력은 한계가 있어. 계속 이렇게 하면 금방 무너질 수도 있어.”그는 매일 아침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얼굴로 일어나는 그녀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혼자서 버티려고 하는 거 나쁜 건 아니야. 근데 사람은 한순간에 강해질 수 없어. 네가 완전히 설 수 있을 때까지는 날 믿고 기대.”주시우의 한마디 한마디가 가을바람을 타고 신예린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그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웠고 은은한 불빛이 그를 비출 때마다 명암이 교차하며 온화한 그의 얼굴선을 더욱 뚜렷하게 살렸다.신예린의 눈시울이 금세 촉촉해졌고 그녀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 모습을 주시우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때 따뜻한 손이 그녀의 머리 위에 살포시 얹히더니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내 말 들어. 이제 일 그만둬. 대학교수나 돼서 아내 하나도 못 먹여 살린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사람들이 나 뭐라고 하겠냐?”금방이라도 울 것 같던 신예린은 주시우의 농담 같은 말에 결국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내일 사장님께 말씀드릴게요.”“그래, 착하지.”주시우의 목소리엔 사랑이 담겨 있었다.신예린의 볼이 절로 붉어졌다. 그녀는 주시우의 뒤를 살금살금 따라 걸으며 차로 향했다.“배고프지 않아?”주시우의 물음에 신예린은 고개를 저었다.“안 고파요.”오늘 저녁은 늦게 먹었고 자기 전에는 어김없이 우유 한 잔을 마실 예정이었다.“치킨 같은 거 안 먹고 싶어?”장난스러운 뉘앙스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신예린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가 일부러 놀리는 걸 알아채곤 투덜거리듯 말했다.“교수님!”앞서 걷던 주시우는 소리 내지 않고 작게 웃었다.집에 돌아온 뒤, 신예린은 늘 그렇듯 서재에서 공부를 이어갔다.주시우는 주방에서 작은 냄비에 우유를 데우고 있었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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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응.”“설마 네 애가 벌써 걸어 다닌다는 소리 하려는 건 아니지?”“아니, 아직 뱃속에 있어.”“너 지금 뭐 하고 있어? 우리 얼굴 좀 보자.”소지훈의 목소리엔 다급함이 묻어났다.“아내 우유 데워주고 있어.”“...”이게 무슨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란 말인가.“시우야, 너 대체 무슨 상황이야? 갑자기 결혼이라니. 혹시 부모님이 결혼하라고 등 떠민 거야?”소지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아니, 그냥... 좀 의외였거든. 근데 내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는 범위야.”‘지금 장난하나?’소지훈은 주시우가 처리하지 못할 일이 과연 있긴 한가 싶었다.“설마 네 와이프가 외국인이라서 애가 혼혈이라는 건 아니겠지?”“아니야.”전화로는 답답하다고 느낀 소지훈은 조급하게 말했다.“너 언제 시간 돼? 얼굴 좀 보자. 그리고 제수 씨도 같이.”주시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신예린을 친구에게 소개하는 건 문제없지만 본인의 의사부터 확인해야 했다.“일단 물어볼게.”“그래그래, 물어보고 바로 답 줘.”“우유 식겠다. 답은 나중에 줄게.”주시우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전화를 끊어버렸다.“여보세요?”소지훈은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아니, 우유가 식는다고 십년지기 친구의 통화를 이렇게 끊는다고?’소지훈의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 왜냐하면 그는 주시우를 누구보다 잘 아는 친구였다.고등학교 때부터 모든 걸 잘하던 그야말로 학교의 중심이었던 주시우. 겉으론 부드럽고 예의 바른 것 같지만 늘 확실한 선을 그으며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성격이었다.좋아하는 여학생들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주시우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그 후 주시우가 해외 유학 중에도 두 사람은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소지훈이 장난스럽게 외국 여자와 한번 만나보라고 해도 주시우는 연애 이야기는커녕 학술 이야기만 꺼냈다. 예컨대 그 나라 학회지에 새로 실린 논문에 신선한 관점이 있더라는 식이었다.그러다 나중엔 그 논문에 실린 사람이 바로 주시우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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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다음 날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송지유는 기다렸다는 듯 신예린을 찾아왔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내밀었다.“뭐야?”신예린은 고개를 갸웃했다.“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줘!”송지유는 두 손 검지를 맞대며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신예린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더니 곧 장난스럽게 말했다.“이렇게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들고 와서 용서받겠다고? 성의가 이것밖에 안 돼?”나뭇가지는 충전 케이블보다 얇았고 길이도 볼펜 정도밖에 안 됐다.“너무 큰 거 가져왔다가 네가 진짜로 때리면 어떡해.”신예린은 어깨를 으쓱였다.“네 잘못도 아닌데 뭘. 나였어도 교수님한테 한마디만 들으면 바로 다 불었을 거야.”신예린이 무심히 말하자 송지유는 턱을 만지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이제 보니 너희 집은 교수님 말이 곧 법이구나?”“그런 거 아니거든.”신예린의 귀가 빨개졌다.“에이, 아니긴 뭐가 아냐? 너 교수님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할 것 같은데.”“...”사죄까지 마친 송지유는 더 대담해져서 신예린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근데 교수님이 너 찾았을 때 뭐라고 하셨어? 혹시 화나서 네 엉덩이라도 때리신 거 아냐?”“진짜 뭐라는 거야! 안 그랬거든!”신예린이 황급히 그녀를 밀쳤다.“너야말로 애처럼 맨날 엉덩이 때릴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송지유는 키득거리며 말했다.“근데 진짜 궁금하긴 해. 교수님 화나면 너한테 어떻게 하실지. 선생님들은 원래 좀 이상하잖아. 혹시 벌로 가정 규칙 백 번 쓰게 한다거나 무릎 꿇고 벌서게 한다거나?”그녀는 점점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그 모습을 본 신예린은 진심으로 송지유의 머릿속이 궁금해졌다.“지유야, 너 제발 그런 이상한 막장 로맨스 좀 그만 봐. 너한테 진짜 해로워.”둘은 한참을 웃고 장난을 치다가 종소리가 울리자 곧바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수업이 끝난 뒤 신예린은 도서관으로, 송지유는 기숙사로 향했다.송지유는 최근 정소윤이 밤늦게 들어와 부스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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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여도준은 신예린의 냉담한 표정을 보며 며칠 전 송지유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그날 이후로 여도준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정말로 신예린에게 남자 친구가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그는 며칠을 몰래 관찰했지만 그녀는 예전과 다름없었다.송지유와 함께 있거나 혼자 도서관에 앉아 있을 뿐이었고 주변에는 얼씬거리는 남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분명 송지유가 신예린 체면 세워주려고 일부러 그런 소리를 한 거야. 걔는 입만 열면 헛소리니까.’여도준은 그렇게 결론지으며 다시 예전처럼 신예린에게 말을 걸었다.“며칠 전 수업에서 체순환이랑 폐순환 배웠잖아. 며칠 고민했는데 아직 완전히 이해가 안 돼. 넌 다 이해했어?”신예린은 책에서 눈을 떼고 그를 바라봤다.“응, 다 이해했어.”여도준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그럼 나한테도 좀 설명해 줘.”“싫어.”여도준의 표정이 굳어졌다.신예린은 그와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지금 여자 친구가 있지 않은가.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 텐데, 이런 식으로 들이대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모르는 건 네 여자 친구한테 물어봐.”하지만 그 말은 오히려 여도준에게 오해를 불러왔다.신예린이 질투하는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면 왜 아무 이유 없이 그의 여자 친구를 언급할까.여도준은 다시 웃음을 지었다.“예린아, 나랑 효은이가 사귀고 있긴 해도 공부에 관한 얘기는 너랑도 할 수 있잖아. 우리 여전히 친구 아니야?”이런 말이 태연히 나오는 걸 보니 한 여자를 기만하면서 다른 여자에게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게 당연한 인간인 듯했다.신예린은 송지유처럼 말재주가 좋은 것도 아니고 속으로만 이를 갈다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여도준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예린아, 너 요즘 도서관에서 예전에 우리가 같이 앉던 자리에 자주 앉더라? 혹시 날 기다린 거 아니야?”신예린은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그녀가 책을 덮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여도준은 반사적으로 물었다.“어디 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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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신예린은 강효은의 태도만 봐도 심상치 않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차분한 표정으로 비아냥거리는 말투엔 일절 반응하지 않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주문하시겠어요?”강효은은 턱을 살짝 치켜들고 오만한 얼굴로 말했다.“같은 학교 친구인데, 할인 좀 안 돼?”“죄송합니다. 저는 알바라서 할인 권한이 없어요.”“아, 그렇구나.”강효은은 바로 뒤에 서 있던 친구들을 돌아보며 비웃듯 말했다.“얘들아, 비싼 걸로 왕창 시켜. 우리 학교 우등생 도와준다고 생각하고 많이 팔아주자. 생활비로 좀 보태게.”곧 친구들의 입에서 자잘하고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퍼졌다. 일부러 큰 소리로 웃어대는 통에 주변까지 시끄러워졌다.가게 안을 지켜보던 여하은이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다가왔다.“예린아, 무슨 일이야?”신예린은 여하은을 향해 고개를 저은 뒤 강효은 일행을 향해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주문하실 건가요? 아니면 다음 손님께 피해 주지 말고 비켜주시겠어요?”“뭐야, 지금 손님한테 시비 거는 거야?”강효은은 혀를 차며 친구들에게 말했다.“얘들아, 빨리 골라. 우등생께서 바쁘시대.”결국 그들은 한 사람씩 음료를 주문했고 옆에 모여서 기다리며 꽤 큰 목소리로 수군대기 시작했다.“쟤가 네 남자 친구 좋아했다던 애 맞지? 여도준이 결국 널 선택한 거 보면 확실히 똑똑하긴 해.”“공부 잘하면 뭐 해. 생긴 것도 별로고 데리고 다니기 쪽팔릴 것 같은데.”“딱 봐도 집안이 별로니까 학교 다니면서 알바까지 하는 거잖아.”“효은이는 얼굴도 예쁘고 집안도 좋고 누가 봐도 답 뻔하지. 비교 자체가 안 되잖아.”강효은은 입가에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한마디 덧붙였다.“쉿, 조용해. 다 들리겠어.”‘내가 들으라고 일부러 큰 소리로 떠드는 거면서...’신예린은 그녀들을 무시하고 뒤에 있는 손님들의 주문을 계속 받았다.잠시 후 강효은 일행의 음료가 다 나왔고 신예린이 포장해 건네주려는 찰나 강효은이 갑자기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분명 당도 30으로 주문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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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신예린은 갑자기 강효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타로 밀크티. 당도 50. 얼음 적게. 펄 추가.”이번엔 다른 여자애를 가리켰다.“젤리 밀크티. 당도 30. 얼음 보통.”“망고 스무디. 당도 50. 얼음 적게.”“그리고 그쪽은 블랙 밀크티. 당도 표준. 얼음 없음. 코코넛 젤리 추가.”신예린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번에 말하고는 옆에 꽂혀 있던 주문 영수증을 뽑아 그녀들 앞에 내밀었다.“제가 방금 말한 거 확인해 보세요. 잘 못 들으셨으면 다시 불러드릴게요.”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으로 신예린을 바라봤다. 그녀의 기억력에 완전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하지만 정작 강효은과 친구들 중 누구도 나서서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왜냐하면 신예린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본인들이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원래는 신예린을 망신 주려 했는데 오히려 그녀의 실력을 보여주는 꼴이 되어버렸다.강효은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가 금세 붉어졌다.신예린은 강효은을 똑바로 바라보며 사람 미치게 하는 한마디를 던졌다.“내가 왜 공부 잘하는지 알아? 기억력이 좋거든.”강효은의 얼굴은 완전히 새까매졌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신예린, 이번은 그냥 넘어가는데 여도준한테 다시 들이대면 그땐 진짜 가만 안 둬.”그 말을 내뱉고는 버블티 카페를 쿵 소리가 날 정도로 문을 세게 밀고 나가버렸다. 그녀의 친구들도 황급히 따라 나갔다.한바탕 소동은 그렇게 끝났다. 구경하던 손님들도 흩어졌고 여하은은 신예린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신예린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평소라면 이런 식으로 나서서 싸우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강효은이 도를 넘게 몰아붙인 탓에 저도 모르게 버티고 맞서게 된 것이었다.카운터 위를 정리하던 신예린은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마침 안수빈과 눈이 마주쳤다.예상치 못한 시선 교차에 그는 화들짝 놀라듯 시선을 피하더니 금세 고개를 숙이고 자기 일을 계속했다.신예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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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안수빈은 신예린에게 밀려 몇 걸음 뒤로 비틀거렸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신예린은 입술을 달달 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안수빈을 쏘아봤다.하지만 안수빈은 억울하다는 얼굴로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왜요? 내가 뭘요?”그때 상황을 눈치챈 여하은이 다가왔다.“예린아, 무슨 일이야?”신예린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숨을 골랐다. 입을 떼기조차 힘든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 사람이 방금 내 엉덩이 만졌어요...”여하은의 표정이 단숨에 굳어지며 안수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안수빈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평소 순한 인상답게 당황해 말까지 더듬었다.“예, 예린 씨가 오해한 거예요. 난 그런 적 없어요.”“아니요.”신예린은 손이 떨릴 정도로 분노에 차 있었다.“그쪽 방금 내 바로 뒤에 있었잖아요.”“뒤에 있은 건 맞아요. 하지만 난 그저 물건 가지러 간 거고 예린 씨가 앞에 있어서 부딪혔을 뿐이에요. 절대 일부러 만진 거 아니에요.”안수빈은 급하게 변명했다.정말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여자의 촉은 정확하다. 길을 걷다 누군가 휘파람을 불어도 그게 호감인지 불쾌한 희롱인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신예린은 방금 그 손길이 분명 의도적이라고 확신했다.“무슨 일 있어?”그때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 이정문이었다. 그는 마침 매장 점검차 왔다가 신예린과 안수빈이 대치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안수빈은 그를 보자마자 살길을 찾은 듯 급히 말했다.“매형! 예린 씨가 내가 일부러 자기 엉덩이 만졌다고 오해하고 있어요. 근데 절대 아니에요. 난 정말 실수였어요!”신예린도 곧바로 이정문을 향해 소리쳤다.“사장님, 전 거짓말 안 했어요. 방금 이 사람이 저 만졌어요. 분명히 느꼈어요.”“이미 말했잖아요. 물건 가지러 갔을 뿐이고 그때 예린 씨가 앞에 있어서 부딪힌 거라고.”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쳤고 이정문은 둘을 번갈아보더니 신예린에게 차갑게 말했다.“예린 씨, 일하다 보면 스칠 수도 있는 거지, 그걸 가지고 이렇게 소란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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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경찰서에 앉은 순간 신예린은 자신이 신고한 걸 후회하기 시작했다.어릴 적부터 늘 경찰은 정의롭고 공평한 존재라 믿어왔지만 막상 경찰서에 도착하니 경찰들의 태도는 딱 봐도 어린 여학생인 자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시큰둥한 태도였고 오히려 안수빈을 두둔하는 눈치였다.“가게 CCTV는 오래전에 고장 났어요. 이건 예린 씨 본인도 아는 사실이에요. 제 처남이 만졌다는 증거도 없잖아요. 경찰관님도 알다시피 일하다 보면 접촉이 생길 수도 있는 거고요. 수빈이는 빨대랑 스푼 가지러 갔다가 신예린 씨가 거기 서 있어서 우연히 스친 거라고 하잖아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수빈이는 원래부터 착실한 애예요. 절대 그런 짓 할 애가 아니에요.”이정문은 신예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내 생각엔 예린 씨도 일부러 누명 씌운 건 아닐 거고... 이왕이면 좋게 끝내는 게 낫잖아요? 어차피 오늘까지만 일한다니까 내가 아르바이트비 4만 원 더 쳐줄게요. 좋게 마무리하자고요.”그러고는 경찰을 향해 말했다.“정말 죄송하네요. 이런 일로 괜히 번거롭게 해드려서요.”신예린의 손은 멈추지 않고 떨렸다. 화가 나서인지, 아니면 억울함을 제대로 풀 수 없는 상황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한 경찰이 다가와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성추행 사건은 원래 증거 없으면 입증하기 힘들어요. 방금 사장님 말 들으셨죠? 그냥 돈 받고 끝내는 게 나아요. 학생이면 더더욱 이런 일 소문나면 좋을 거 하나도 없어요. 솔직히 안수빈 씨도 딱 봐선 그런 사람 같아 보이지 않고요.”신예린의 눈이 흔들리며 경찰을 올려다봤다.“그러니까... 지금 제가 거짓말한다는 거예요?”경찰은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하게 대답했다.“전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하지만 학생이 만졌다고 주장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하잖아요. 아무리 경찰이라도 증거 없이 함부로 체포할 순 없어요.”“증거를 찾는 게 경찰의 일이잖아요?”신예린은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전 거짓말하지 않았어요.”“물증도 인증도 없고 서로 말이 다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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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주시우는 큰 보폭으로 경찰서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신예린을 발견했다.주변은 경찰과 민원인들이 얽혀 분주하고 소란스러웠지만 구석에 앉은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마치 길 잃은 새끼 짐승처럼 위축되어 있었다.주시우는 주저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신예린도 무언가를 느낀 듯 고개를 들었다.붉어진 눈시울, 꾹 다문 입술, 꼭 맞잡은 두 손. 애처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신예린을 마주하자 주시우의 목울대가 천천히 오르내렸다.“무슨 일이야?”신예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 있던 경찰이 나섰다.“당신 아내가 가게 동료가 자신을 만졌다고 오해해서 일이 커졌습니다. 사실 단순한 오해였고 가게 사장님도 학생인 걸 고려해 그냥 넘어가기로 하셨어요. 오히려 위로금으로 4만 원 더 준다니까, 이쯤에서 마무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집에 데리고 가서 잘 달래주세요.”경찰의 말투에는 상황을 적당히 무마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대학생이 벌써 결혼한 것도 모자라 남편이 대학교 교수라니 그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그런데 막 들어온 남자의 눈빛과 분위기는 확실히 달랐다. 그의 차분한 태도 속에서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다행히 합의서에 이미 사인을 받아둔 상황이라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이 남자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주시우는 신예린의 꾹 다문 입술과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난 눈빛을 바라보았다.순간 주시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 남자가 널 만졌어?”옆에 있던 경찰이 급히 끼어들었다.“그건 정말 오해입니다. 단순히 일하다가 발생한 우발적 접촉이었을 뿐이고...”“당신한테 물은 거 아닙니다.”주시우는 경찰을 보지 않은 채 눈꺼풀을 들어 신예린을 바라보았다.“대답해, 신예린. 그 남자가 널 만졌어?”닦달하려는 목소리는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말에 신예린의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이윽고 신예린의 입에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떨리듯 흘러나왔다.“만졌어요...”그녀는 정말 거짓말을 하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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