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Chapter 21 - Chapter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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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

오경애의 얼굴에 어색한 기색이 스쳤지만 사실대로 대답했다.“없어요. 도련님 며칠째 집에 안 들어오셨어요.”그러면서 주율천을 변호하듯 덧붙였다.“도련님 늘 바쁘잖아요. 그러니 괜히 이상한 생각 하지 마세요.”온채아가 덤덤하게 답했다.“네, 걱정하지 마세요.”그녀는 곧 이혼할 남편의 행방에 대해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터라 샤워를 마치고 익숙한 침대에 누웠다. 대낮까지 푹 잘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았다.이곳은 더 이상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지 못했다.같은 방, 같은 침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나 모든 것이 변한 것 같았다.온채아는 손을 뻗어 침대 옆 서랍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따분한 마음에 SNS를 훑기 시작했다.정다슬: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데려다주고 집에 와서 또 열일하는 중.]온채아는 씩 웃으면서 좋아요를 눌렀다. 계속 밑으로 내려오다 갑자기 손이 멈췄다.심서정: [넌 정말 약속을 지켰어. 영원히 날 지켜주고 내가 필요할 때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사진 속에서 심서정은 병상에 누워 있었고 누군가가 그녀에게 과일을 먹여주고 있었다.손만 나왔지만 길고 곧은 손가락, 선명한 관절, 그리고 손목뼈 근처에 있는 작은 붉은 점을 본 순간 온채아는 이 게시물의 남자가 주율천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봤다.그녀는 화면을 캡처해 주율천에게 보냈다.[아직 병원이죠?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데 내일 병원으로 갈까요?]주율천이 집에 오지 않는다면 먼저 찾아갈 의향도 있었다. 이혼하면 모두가 자유로워질 테니까.경성 공항.비행기에서 내린 주율천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좌석에 몸을 기댔다. 밀려오는 피로에 미간을 꾹꾹 문질렀다.늦은 밤이라 도로에 차가 많지 않았다. 검은색 마이바흐가 부드럽게 도로 위를 달렸고 흐릿한 가로등 불빛이 주율천의 날렵한 옆모습을 비췄다. 늘 점잖고 온화했던 그였는데 지금은 약간 싸늘한 기운을 풍겼다.비서가 조심스레 물었다.“대표님, 회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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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심서정이 계속 캐물었다.“그럼 온채아랑 언제 이혼할 건데?”요즘 들어 주율천이 가장 많이 들은 단어가 바로 이혼이었다.모두들 그가 당연히 이혼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 단어를 들을 때마다 주율천은 가슴속에 뭔가가 꽉 막힌 듯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주율천은 그 이유를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 이혼하면 그룹 주가가 흔들릴 수도 있고 심서정의 명예가 손상될 수도 있었다.아무튼 그는 알고 있었다. 이혼은 절대 안 된다는 것을.주율천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절대 안 해, 이혼.”다음 날 잠에서 깬 온채아는 비몽사몽 시간을 확인하다 주율천의 답장을 보았다.[무슨 일이야? 내일 집에 가서 얘기해.]온채아가 심서정 앞에서 소란을 피울까 봐 이러는 거라고 짐작했다.‘내가 심서정한테 또 병을 던질까 봐 걱정돼서 그러겠지.]하지만 온채아는 이 답장으로도 충분했다.그가 돌아온 후에 터놓고 얘기하면 온채아는 더 이상 안정감을 주지 않는 이 집을 영원히 떠날 수 있을 것이다.세수를 하고 기분 좋게 옷을 갈아입은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옷방을 나서기 전 잠시 뒤를 돌아보던 그녀는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주씨 가문의 둘째 며느리로서 주율천은 아내를 끔찍이 아끼는 남편은 아니었지만 공식 석상에 여성 파트너와 동반해야 할 때는 늘 아내를 데려갔다.가끔은 그녀가 함께 나서야 하는 자리도 있었다. 하여 명품 옷, 액세서리, 가방들이 옷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주씨 가문은 돈이 부족하지 않았다. 이혼하면 이 물건들은 전부 쓰레기장에 버려질 것이다.‘그럴 바엔...’온채아는 자선 단체에 연락해 모든 물건을 기부했다. 옷들은 단체에서 처리하도록 맡겼고 그 수익금은 가난한 지역 소녀들의 교육 자금으로 쓰게 했다.물건을 정리하고 오경애에게 택배로 보내 달라고 부탁한 후에야 온채아는 마음 편히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침을 먹었다.거실을 지나던 중 샤넬 정장을 입고 차갑게 앉아 있는 주율천의 어머니 민은하를 보았다. 관리를 잘 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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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결혼한 여자라면 합방이란 단어의 뜻을 모를 리 없었다.민은하의 두 눈이 흔들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지?”“제가 왜 이런 거로 농담하겠어요.”온채아가 고개를 들었다. 손바닥만 한 얼굴에 어두운 기색만 남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어머님, 이혼 말고는 정말 다른 방법이 없어요.”“...”민은하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온채아에게 향한 게 아니라 아들과 심서정에게 향한 분노였다.한 사람은 멍청하기 짝이 없었고 한 사람은 남의 것을 탐했다.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아무리 무서운 시어머니라 해도 온채아에게 이혼하지 말라고 설득할 수가 없었다.무슨 염치로 그러겠는가? 아들이 온채아의 인생을 3년이나 낭비하게 했는데.결혼한 지 3년이나 됐는데도 부부 생활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민은하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온채아의 손등을 토닥였다.“이혼 합의서를 보니까 진안로의 그 집만 원한다고 썼던데...”“네.”온채아가 입술을 깨물었다.“만약 안 된다면 집은 안 받아도...”오늘 그녀의 목적은 이혼이었다. 지난번에 받은 52억 원과 그동안 모은 적금까지 합하면 먹고 사는 데는 문제 없었다.남들 눈에는 온채아가 3년 동안 사랑도 받지 못하고 맨몸으로 쫓겨나는 꼴이 웃음거리일지는 몰라도 온채아는 밑진 게 없다고 생각했다.그동안 그녀는 너무나 자유로웠다. 성씨 가문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벌로 무릎을 꿇거나 매를 맞은 횟수만 따져도 전혀 후회되지 않았다.“그게 무슨 소리야?”민은하가 온채아를 보며 말했다.“소문이라도 나면 우리 주씨 가문이 며느리를 박대했다고 하겠어. 이렇게 하자. 진안로 그 집은 네가 살아. 그리고 내 명의로 된 집 한 채를 더 줄게. 그것도 진안로에 있어. 한 채는 네가 살고 다른 한 채는 세를 줘서 생활비로 쓰면 돼.”그 말에 온채아는 흠칫 놀랐다.진안로의 집들은 모두 한층에 1세대 구조로 세를 주면 월세가 최소 수백만 원이었고 매매가는 말할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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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민은하가 차분히 말을 이었지만 표정이 점점 차가워졌다.“네가 겉으로는 여전히 주씨 가문 사람이니까 성씨 가문도 우리한테 최소한의 체면은 줄 거야.”온채아가 주먹을 꽉 쥐었다. 민은하와 시선을 마주했을 때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사돈 어르신이 정말 널 아꼈다면 그때 네가 한방 병원에 다니는 걸 왜 못 다니게 했겠어?”민은하가 계속 말했다.“네가 성씨 본가에서 돌아올 때마다 걸음걸이가 이상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어.”그 말에 온채아는 온몸이 굳어버렸고 시선이 멀리 서 있는 오경애에게로 향했다.오경애는 죄책감에 그녀의 눈을 피했다.온채아는 모든 걸 깨달았다. 그동안 그녀가 허세를 부리며 감췄던 세월을 민은하가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만 똑똑한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면 보고도 모른 척하는 법이었다.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갑자기 반발심이 생겨 꽉 쥐었던 손을 풀고 말했다.“방금 말씀하신 당분간이라는 게 얼마나 되죠?”“최대한 빨리 처리할게.”“10억 더 주세요.”“뭐?”온채아는 민은하의 놀란 표정을 못 본 척 덤덤하게 말했다.“진안로의 집 두 채에 10억까지 주셔야 합니다.”그녀는 자신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말해버렸다. 사실 그녀는 상대가 강하게 나오면 괜히 반발심이 생기는 성격이었다. 만약 민은하가 최해경의 건강으로 설득했다면 망설임 없이 동의했을지도 모른다.그런데 상대에게 약점이 잡혀 끌려다니는 건 그녀지만 그녀가 모든 이익을 챙긴 것처럼 보이는 이런 상황이 너무나 싫었다.이건 소원희와 똑같은 수법이었다. 성씨 가문에서 온채아는 개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지만 남들은 온채아가 엄청난 은혜를 입었으니 늘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기나 해? 배은망덕한 것 같으니라고!”민은하가 노발대발하더니 찻잔을 집어 던졌다. 잔이 바닥에 떨어져 쨍그랑하고 깨졌고 차가 카펫을 적신 바람에 엉망이 되고 말았다.이 결혼의 결말처럼 보기 흉했다.그때 현관 쪽에서 갑자기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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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비자요.”온채아가 대충 둘러댔다.“다슬이가 유럽 여행 가자고 했는데 귀찮아서 안 가겠다고 했거든요. 어머님이 들으시고 사람 시켜서 처리해주신다고 하셨어요.”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블루 뱅크에 10억 원이 입금됐다는 문자였다.주율천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어젯밤 얘기를 꺼냈다.“나한테 할 얘기 있다며? 무슨 얘기야?”그 말에 온채아는 살짝 멈칫했다가 입술을 깨물었다.“그냥 비자 문제예요. 오빠한테 부탁하면 편할 것 같아서요.”“내가 한발 늦은 거야?”주율천이 피식 웃더니 티테이블 위의 텅 빈 선물 상자를 쳐다봤다.“저거 나한테 준 선물 아니야?”“어머님이 보시더니 마음에 든다고 가져가셨어요. 갖고 싶으면 다음에 어머님한테 사 달라고 해요.”주율천은 그게 뭔지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엄마가 좋아하면 그냥 엄마 드리자.”깊이 파고들 생각이 없었다.지난 3년 동안 이 결혼에서 그가 보여준 태도와 다를 바 없었다.예전에는 주율천이 온화하고 화를 잘 내지 않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 관심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그녀가 준 선물에도, 그녀라는 사람에게도 관심이 없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늘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이젠 온채아도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그래요. 나한테 하나 더 사달라고 하지만 않으면 돼요.”“이런 깍쟁이.”주율천이 온채아를 흘겨봤다.“내가 성유준만큼 너한테 인색하게 굴진 않았을 텐데.”온채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오빠는 늘 통쾌했어요.”어릴 때 온채아는 성유준의 친구들과 종종 생일을 보내곤 했다. 선물을 줄 때면 주율천은 항상 그녀의 취향을 정확히 저격했고 쩨쩨하게 군 적이 없었다.매너가 넘친 주율천은 친구의 여동생까지 기꺼이 기쁘게 해줬다. 하지만 그저 친구의 동생일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그 대답에 주율천이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화가 많이 났는데? 아직도 네 오빠랑 화해 안 했어?”“화해할 것도 없어요.”온채아의 목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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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오경애가 막 열려고 할 때 마침 주율천의 휴대폰이 울렸다.“이거 놔.”휴대폰 너머로 발버둥 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목이 터져라 우는 심서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율천아, 나 좀 구해줘.”순간 표정이 어두워진 주율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어나갔다.오경애는 어리둥절했다.“도련님, 확인 안 하실 거예요? 그럼 바로 보낼 건데...”“그냥 보내요.”주율천은 마음이 조급해져 아무것도 신경 쓸 수 없었다.길을 가로질러 쏜살같이 호텔까지 도착한 그는 프런트 직원의 제지를 뿌리치고 방문 앞까지 달려가더니 긴 다리를 들어 문을 세게 걷어찼다.방 안에는 여러 명의 남자가 있었다.다행히 심서정은 옷을 그나마 온전했고 그녀는 주율천을 보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운 주율천은 두 눈이 빨갛게 출혈된 채로 살벌한 살기를 뿜어냈다.그는 무심코 의자를 집어 들더니 세 남자를 향해 내던졌다.의자가 부서지는 동시에 주먹이 날아갔고 정확히 얼굴을 타격했다....그 시각 경찰의 전화를 받은 온채아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상황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아마도 주율천처럼 유명한 명문가 도련님이 사람을 때릴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심지어 일 대 삼으로 싸웠고 상대방 모두가 경상을 입었다고 한다.부랴부랴 파출소에 도착한 온채아는 부상을 입은 남자들을 바라보며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죠?”“채아 씨, 화내지 마요.”심서정이 눈시울을 붉히며 다가왔다.“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실수로 술을 너무 많이 마셨거든요. 율천이가 제때 오지 않았더라면...”심서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채아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이건 한 여자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발 벗고 나서는 남자의 사랑을 담은 난투극이다.다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남자 주인공은 그녀의 남편이다.주율천은 미안한 듯 온채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내가 번거롭게 했네.”“괜찮아요.”온채아는 경찰을 따라가 보호자 서명을 하고 절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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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온채아는 주율천의 뒤를 따르는 심서정을 쳐다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됐어요. 다슬이가 기다리고 있어요.”“온채아.”주율천은 마침내 그녀의 이상함을 알아채고는 손목을 덥석 잡았다.“잠깐만.”온채아가 떼내려 했지만 주율천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돌려 심서정에게 말했다.“넌 차에 먼저 타 있어.”“알겠어. 채아 씨가 얘기 잘하고 와.”겉으로는 너그러운 척했지만 심서정은 주먹을 불끈 쥔 채 차에 올라타는 순간까지도 불쾌하게 온채아를 노려봤다.주율천은 온채아의 손목을 문지르며 신중하게 말했다.“저번에 병원에서 서정이를 다치게 한 일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어. 그리고 이사 문제는 천천히 생각해 봐도 된다고 내가 먼저 얘기했어.”분명히 받은 대로 돌려줬을 뿐인데 지금 이 상황은 마치 심서정이 너그럽게 넘어가며 아량을 베푼 것처럼 흘러갔다. 심지어 주율천은 온채아 때문에 마지못해 심서정이 집에 사는 걸 허락해 준 듯했다.정말 모두가 온채아의 충동과 꼬장을 감수하는 것처럼 보였다.“만약 제가 경찰에 신고하겠다면요?”“뭐?”“누구 때문에 높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피를 흘린 건 나예요. 왜요? 전 경찰에 신고하면 안 돼요?”온채아는 담담한 눈빛으로 주율천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날 경찰에 신고했다면 당신은 어떤 자세를 취했을까요? 어떻게 심서정 씨의 편을 들어줄지만 생각했겠죠?”병원 발코니에서 들었던 그 말이 떠오른 온채아는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다친 건 본인인데 정작 남편이란 인간은 다른 여자를 위한 뒷수습에만 신경 쓰고 있었다.주율천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온채아는 그 찰나의 표정을 봤지만 예상했던 반응인 듯 담담하고 솔직하게 말했다.“심서정 씨가 경찰에 신고했어도 당신은 수천 가지의 방법으로 수습했을 거예요. 신고해도 소용없게 만드는 방법이 많잖아요. 계속 심서정 씨를 집에 살게 한 건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거잖아요. 제발 좀 솔직해져요.”따지고 보면 모든 건 주율천이 심서정과 함께 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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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주율천에게 이혼 얘기를 꺼내지 않기로 민은하와 약속했을 뿐 같은 집에서 계속 살기로 약속한 건 아니었다.청연원으로 돌아가는 길.주율천은 뒷좌석에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초점이 풀린 두 눈은 어딘가 흐리멍텅해 보였다.심서정이 그의 팔을 흔들며 물었다.“율천아, 무슨 생각해? 아까부터 계속 멍때리네?”차에 탄 순간부터 주율천의 마음은 이미 딴 곳에 있었다.‘온채아가 또 무슨 말을 한 거야.’“별일 아니야.”주율천이 정신을 차리고 손을 들어 미간을 문지르던 중, 차가 마침 온채아가 진료 보는 한의원을 지나갔다.그리고 그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착잡함이 드러났다.‘사춘기가 이제야 온 건가? 요즘 따라 까칠하게 구네.’심서정은 주율천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고 그의 시선을 따라 경계하며 한의원 쪽을 바라봤다.‘한의원?’‘온채아가 진료를 보는 한의원인가? 맞는 것 같은데...’...민은하는 온채아가 일을 더 벌일까 봐 두려웠는지 곧바로 송금했고 전문 인력까지 배치해 그녀와 함께 부동산 소유권 이전 절차를 밟았다.그렇게 분주하게 움직인 결과 온채아의 손에는 따끈따끈한 부동산 등기권리증 두 장이 쥐어졌다.경성의 진안로는 땅값이 금값인 곳이다.온채아가 사기를 당할까 봐 걱정되었던 정다슬은 연차까지 써가며 동행했으나 함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어느 하나 문제 되는 게 없이 깔끔하게 처리되었다.부동산에서 나온 정다슬을 차에 탄 즉시 온채아의 팔을 껴안았다.“앞으로 부자라고 불러도 되지? 나 일하기 싫어. 그냥 네가 나 먹여 살려주면 안 될까?”“알았어. 알았어.”온채아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정다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너도 이사 올래?”“응?”정다슬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헤벌쭉 웃었다.“이사는 사양할게. 내가 밤늦게까지 일하거든. 그거 들으면 네가 퍽이나 잠이 오겠다. 그래도 며칠만은 부자들의 생활을 경험해 보고 싶네.”두 사람은 점심도 먹지 않은 채 바쁘게 움직였고 곧바로 캐리어를 끌고 진안로로 향했다.온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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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여승운은 바로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온채아는 부담감을 느끼며 확인차 처방전을 여승운에게 건네줬고 친구 소개로 한의원을 찾아온 환자는 농담처럼 말했다.“선생님, 이러면 제가 큰 병에 걸린 것 같아서 너무 불안해요.”한의원 환자들은 모두 여승운이 온채아와 강태무의 스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그러자 여승운이 웃으며 말했다.“안심하세요. 난치병 전문인 온채아 선생한테 이 정도는 아주 쉬운 케이스예요. 그냥 제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구는 거예요.”여승운은 처방전을 힐끗 보고는 다시 온채아에게 건넸다.사실 온채아는 그가 수년 동안 만난 모든 중 한의학 분야에서 가장 재능 있는 인재였다.만약 소원희가 억압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백배 천배 더 성장했을지도 모르고 약물을 개발하고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좋은 발상이야. 조제량을 잘 맞추면 한 번만 복용해도 바로 효과를 볼 거야.”대장내시경 검사 결과 환자는 심각한 장염이었고 모든 약을 한동안 복용했지만 증상이 계속 악화해서 온채아를 찾아온 것이다.온채아는 맥을 짚더니 단순한 염증이 아니라 과도한 불안에서 비롯된 증상이라고 판단해 염증을 억제하는 대신 반대로 접근했다.처음엔 그저 시도해 보는 마음으로 찾아왔던 환자도 여승운의 말을 듣고는 마음이 놓이는 듯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선생님, 다 나으면 감사 인사 전하러 꼭 다시 올게요.”온채아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한의원 입장에서는 환자분이 다시 안 오시는 게 더 좋아요. 건강해졌다는 뜻이잖아요. 늘 좋은 기분을 유지하세요. 환자분의 몸보다 더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약효를 고려했을 때 완치할 거란 확신이 있었지만 의사로서 이런 말은 쉽게 하면 안 된다.온채아가 마지막 진료를 끝내자 여승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가자. 집사람이 음식 차렸어.”“오늘도 저랑 태무 오빠는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겠네요.”여승운의 아내는 엄청난 요리 실력을 소유했고 온채아가 간다고 할 때마다 항상 입맛에 맞는 음식을 준비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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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뒤따르던 온채아는 긴장한 듯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이미 그 반응을 예상했던 여승운은 걱정스럽게 뒤를 돌아보았으나 온채아는 어느새 마음을 다잡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이를 본 여승운은 다른 사람들을 먼저 들여보내고 온채아만 불러세웠다.“불편하면 얘기해. 밥 안 먹이고 돌려보낼게.”“선생님, 저 괜찮아요.”벨린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때부터 온채아는 마음의 준비를 해왔다.먼 타국에서도 만났으니 이렇게 다시 만나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게다가 그가 지금 높은 자리에 위치한 사람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굳이 본인 때문에 여승운이 눈치 보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여승운의 온채아의 평온한 표정을 보고 어깨를 토닥였다.“그래, 이렇게 훌훌 털어내는 것도 좋아. 결국 형제자매 사이잖아. 말 못 할 어려움이 있었을지도...”“선생님.”온채아는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얼른 들어가요.”이런 얘기를 해주는 게 여승운이 처음이었을까?온채아는 그 말 못 할 어려움이라는 게 도대체 뭔지 이해되지 않았다. 얘기를 할 수 없었던 상황도 아닌데 한순간에 온채아를 쓰레기처럼 멀리 내던졌다.따지고 보면 소원희의 말이 맞았다.부를 타고난 재벌가 도련님은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을 키우는 데에 책임감이 뒤따르지 않는다. 관심이 생겨 키우다가도 질리거나 귀찮아지는 순간 버리면 그만이니까.여승운은 온채아의 마음을 읽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그래. 가자꾸나.”온채아가 들어가기 전 거실의 분위기는 비교적 화기애애했다.강태무는 연구원에서 성유준과 일면식이 있었고 두 사람은 손정원의 소개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채아야.”그녀가 들어오는 걸 본 강태무는 곧바로 손을 저었다.“한빛 그룹 대표님이셔. 얼마 전에 벨린에서 만난 적 있지?”남자는 허리를 곧게 펴고 있었고 어두운 눈동자는 평소처럼 차갑고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주황색 노을이 유리창을 타고 들어와 그의 몸을 비추며 살벌한 아우라는 누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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