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애걸복걸! 도련님의 고백: Chapter 111 - Chapter 120

162 Chapters

제111화 돌아올 게 있었을 거야

조경순이 처음부터 어머니의 유골에 손댈 마음이 없었다면 그녀는 진작 하강시를 떠났을 것이다.이 엿 같은 도시에 미련이라곤 털끝만큼도 없었으니 말이다.서지혁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그동안 이렇게 살고 있었구나.”잠시 후,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네 아버지 회사 요즘 꽤 잘나가던데. 실적이 엄청난 건 아니어도 안정적이야. 굳이 너한테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을 텐데. 제대로 키워만 놨어도 충분히 너한테서 돌아올 게 있었을 거야.”“그 회사가 이렇게 버틴 게 다 누구 덕인데.”하시윤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때 지혁 씨가 퍼주듯이 도와줬잖아. 요구한 대로 돈을 다 퍼 줘서 결국 그 사람 회사를 살렸지. 지혁 씨는 하병우의 은인일 거야.”서지혁은 입술을 씰룩거리며 말했다.“그 말은 나한테도 책임이 있다는 거야?”하시윤은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정우의 밥그릇을 내려놓았다.그즈음 아래층에서도 저녁이 준비됐다.가정부가 서정우를 챙겼고 서지혁과 하시윤은 1층으로 내려갔다.식탁 위 공기는 늘 그렇듯 무겁고 차가웠다.하시윤이 있는 한, 이 집의 분위기는 언제나 싸늘했다.모두가 침묵하며 말없이 식사를 이어갔다.한효진은 밥을 몇 숟가락 뜨다 말고 기침을 했다.숨이 막히는 듯 얼굴이 불편해 보였다.그녀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손을 저었다.“너희들 먼저 먹어라. 나는 입맛이 없구나.”그녀는 방으로 가지 않고 거실 소파에 몸을 기대앉았다.유민숙이 곁에 따라붙었다.부엌에서는 곧 대추차를 내왔다.한효진은 몇 모금 마시더니 고개를 저었다.나이 탓인지 몸이 불편하면 마음도 금세 무거워졌다.그녀는 기력이 없는 채로 소파에 기대앉았다.식사가 끝난 뒤, 서경민이 다가와 물었다.“어머니, 위층으로 올라가실래요? 많이 불편하시면 병원에 모시고 갈까요?”한효진은 말하기도 귀찮은 듯 손만 내저었다.“됐어. 나 신경 쓰지 마.”그녀가 그렇게 손사래를 치자 서경민과 성문영은 위층으로 올라갔다.오늘 밤에는 화상 회의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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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건데?

하시윤은 하루 종일 몸이 찌뿌둥했다.온몸 구석구석 욱신거리는 느낌이었다.퇴근 시간이 되어 가방을 챙기자 최수빈이 불렀다.“시윤 씨, 어디 가요?”“집에 가야죠.”하시윤은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왜요?”“오늘 저녁 회식 있잖아요. 깜빡했어요?”하시윤은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회식이요?”최수빈이 말했다.“아침에 얘기했잖아요. 사무실에도 있었으면서 못 들은 거예요?”하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어제 무리한 탓인지 오늘은 허리도 쑤시고 다리도 뻐근했다.하루 종일 정신이 딴 데로 가 있었으니 사무실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제대로 들을 리가 없었다.최수빈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오늘 밤 딱히 급한 일 없으면 같이 가요. 새로 부임한 과장님 첫 회식인데 얼굴은 비춰야죠.”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덧붙였다.“과장님 승진 후 첫 식사 자리니까 다들 분위기 맞춰주려는 거예요.”하시윤은 몸이 영 따라주지 않아 한숨을 쉬며 말했다.“나 술 못 마시는데요.”“안 마셔도 돼요.”최수빈이 말했다.“아침에 과장님이 그랬잖아요. 오늘은 내부 회식이라 편하게 하라고요. 마시기 싫은 사람은 안 마셔도 된다고 했어요.”그는 다시 고개를 숙여 목소리를 낮췄다.“강수호 일, 나 다른 사람한테는 말 안 했는데 과장님은 아는 것 같더라고요. 오늘 위에서 과장님을 따로 불렀거든요. 무슨 얘길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돌아와서는 시윤 씨 얘기를 꺼냈어요. 정규직 전환시키고 월급 올려야 한다고요.”하시윤은 짧게 대답했다.“좋네요, 그거.”최수빈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돈 때문에 회사 다니는 게 아니라는 거 알고 있어요. 그래도 정규직 되면 좋잖아요. 과장님이 시윤 씨 챙기려고 하는 거니까 이번에는 얼굴만이라도 비춰요. 다들 간다는데 시윤 씨만 빠지면 좀 그렇지 않을까요?”하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잠시 후, 연정훈이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자 모두 함께 출발했다.평소처럼 차 있는 사람이 태워주는 식으로 몇 팀으로 나뉘어 이동했다.하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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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그래요, 그럼

장지수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아까 두 사람 얘기를 들었는데 동거하는 것 같더라고.”“뭐라는 거야.”동료는 걸음을 멈추더니 그녀를 돌아보고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게 말이 돼?”그녀는 서지혁에 대한 소문을 여러 번 들은 모양이었다.“서지혁 여자친구는 심연정이잖아. 그런데 동거를 하시윤이랑 한다고? 왜?”“그 일 기억 안 나?”장지수가 말했다.“하시윤 애 낳은 적 있잖아. 예전에 서지혁 애 있다고 난리 났었고 사진도 돌았는데. 병원에서 아기 안고 있는 사진 말이야.”상대는 잠깐 눈을 가늘게 떴다.“그런 얘기 있었던 것 같긴 하네.”그러나 곧 날을 세우며 말했다.“그래도 말이 돼? 하시윤이랑 심연정을 비교해? 서지혁이 눈이 멀어도 그건 아니지. 아니면 심연정을 옆에 두고도 애를 낳았다는 거야? 심연정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었나?”“하지만...”장지수가 말을 잇자 상대는 짜증 섞인 한숨을 뱉었다.“세상에 우연도 많잖아. 혼자 별생각 다 하지 말고 연결시키지도 마. 걱정 말라니까. 아무 일 없어. 내 말 믿어.”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며 말을 툭 내뱉었다.“몇 년이나 일했는데 이 정도 일에 벌벌 떨어? 신입도 아니고.”장지수는 결국 입을 닫았다.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뒤늦게 룸으로 돌아갔다.자리에 앉은 사람들 앞, 고기 굽는 철판 위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익힌 고기를 접시에 담아 올리는 중이었다.장지수는 옆을 힐끔 바라봤다.방금 화장실에서 그녀와 함께 하시윤을 험담하던 그 사람은 지금 하시윤 옆에 딱 붙어 앉아 있었다.활짝 웃으며 친한 척하며 말도 걸었다.그녀의 이름은 성라희였다.일 잘하고 눈치도 빨라 회사 내에서 처세 하나는 기가 막힌 인물로 유명했다.강수호와 지윤정이 사귀던 시절에는 지윤정과 가까이 지냈다.그 덕분에 강수호는 그녀에게 수차례 편의를 봐주었고 몇몇 영업 실적을 그녀의 몫으로 돌려주기까지 했다.하지만 둘이 헤어지자마자 지윤정과 손절하고는 얼른 다른 사람 라인으로 갈아탔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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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온몸이 쑤셔

하시윤은 원래 잠깐 얼굴만 비추고 먼저 돌아갈 생각이었다.그런데 성라희가 일을 내는 바람에 계획이 꼬였다.그녀는 단호박즙을 거의 다 비워냈고 고기도 조금 먹었다.아무리 기다려도 성라희가 돌아오지 않자 하시윤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단호박즙이 마지막 한 잔 남았다.그녀는 연정훈에게 잔을 들어 보이며 짧게 말했다.“죄송해요. 집에 일이 생겨서 먼저 들어가 볼게요.”연정훈은 말없이 잔을 들었다.이번에는 군말 없이 단숨에 비웠다.“그래요. 급한 일 있으면 먼저 가요.”다른 동료들과도 인사한 뒤 하시윤은 가방을 들고 룸을 나섰다.하지만 그때, 장지수가 성라희를 부축해 화장실 쪽에서 나오고 있었다.성라희는 상태가 아까보다 더 안 좋아 보였다.방금은 혼자 걸을 수라도 있었는데 이제는 장지수의 부축이 필요했다.장지수는 하시윤을 발견하고 잠시 멈칫했지만 먼저 말을 걸었다.“왜 나왔어요?”곧이어 그녀의 손에 든 가방을 보고는 다시 물었다.“가는 거예요?”“네.”하시윤은 짧게 하고는 눈길도 제대로 주지 않은 채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하시윤이 멀어지자 성라희는 복도 벽에 기대 헐떡이며 투덜거렸다.“뭐가 잘났다고 저래? 잘난 체할 건 또 뭐 있다고?”장지수가 낮게 말했다.“지윤정이 처음 왔을 때도 그랬어.”“다르지.”성라희가 말했다.“지윤정은 그냥 어리고 사회생활을 못 해봐서 그러는 거고. 하지만 하시윤은 달라. 그냥 잘난 척이잖아. 일부러 저러는 거라고.”장지수가 말렸다.“조용히 해. 과장님 하시윤 편 드는 거 눈치 못 챘어? 괜히 찍히지 말고 조심해.”성라희는 코웃음을 쳤다.“난 안 무서워. 일만 제대로 하면 누가 나한테 뭐라 그래? 걱정 붙들어 매라고.”다시 걸음을 떼며 성라희는 또 중얼거렸다.“두고 보자고. 언제까지 잘난 체하나 보지. 빽이 있다고? 서지혁? 웃기지 마.”...하시윤은 서씨 가문의 본가로 돌아오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방 안에는 서지혁이 있었다. 그는 서정우를 품에 안고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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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이 나이에 충치라도 생기면 큰일이잖아요

하시윤이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서지혁은 아직 침대 위에 있었다.그는 몸을 옆으로 돌린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고른 숨결이 방 안에 잔잔히 퍼졌다.이런 아침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하시윤은 여전히 어색했다.그녀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이불을 살짝 들었다.그런데 발끝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서지혁이 몸을 뒤집더니 눈을 떴다.서지혁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둘 다 잠깐 멈칫했다.서로에게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낯선, 묘한 공기가 흘렀다.하지만 서지혁은 곧 아무렇지 않게 몸을 일으켰다.“일어났어?”하시윤도 짧게 대답했다.“좋은 아침이야.”서지혁이 먼저 침대에서 내려섰고 하시윤도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 뒤를 따라 내려왔다.서지혁은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다 문 앞에서 멈춰 서며 말했다.“너 조금 있다가 들어와.”하시윤은 원래 들어갈 생각도 없었는데 그 말 때문에 오히려 더 어색해졌다.며칠 전 화장실에서 일을 보던 그와 마주친 기억이 스치자 얼굴이 달아올랐다.그녀는 괜히 이불을 펴고 개며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됐어.”굳이 그렇게 말해 줄 필요도 없었다.하시윤은 서지혁이 정리를 마치고 나온 뒤에야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마쳤다.서지혁은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화장실을 지나칠 때 그는 하시윤을 바라보며 말했다.“나 정우 좀 보고 올게.”굳이 자신에게 알릴 필요 없는 일이었다.하시윤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그녀도 서둘러 정리를 마친 뒤 2층으로 올라갔다.문틈 사이로 본 정우의 방 안에는 서지혁뿐 아니라 성문영도 와 있었다.“할머니!”정우가 그녀의 품에 안겨 애교를 부리자 성문영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성문영은 화장을 하지 않고, 또 편안한 옷차림이어서 그런지 평소 하시윤을 향하던 날카로움은 사라지고 얼굴에는 비로소 그 나이대에 보여야 할 자애로움이 깃들어 있었다.하시윤은 바로 들어가지 않았다.성문영과 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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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기억력 진짜 형편없다

하시윤은 고운 피부에 앳된 얼굴을 한 하민지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녀가 처음 조경순을 따라 하씨 집안에 들어왔던 때를 떠올렸다.그때의 하민지는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에 깡마른 몸, 남자애처럼 짧게 자른 머리였다.옷이 찢어진 건 아니었지만 한눈에 봐도 오래 입은 티가 났다.그녀는 겁에 질린 눈으로 사람을 올려다봤었다.하병우가 하시윤을 ‘언니’라고 부르라고 시키자 하민지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면서 다가와 손을 잡았다.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겨우 이틀, 하병우는 내연녀와 그 딸을 집으로 끌어들였다.어린 나이에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그날, 하시윤은 본능적으로 하민지의 손을 뿌리쳤다.하시윤도 어린아이였던지라 힘이 그렇게 세지는 않았다.하지만 하민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아팠을 텐데 울음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다.입술을 꾹 다문 채 눈물만 주르륵 떨어뜨렸다.조경순이 다가와 아이를 꼭 안았다.그녀의 눈가도 금세 붉어졌다.“우리 모녀를 받아주지 못하겠다면 그냥 나갈게요.”그녀의 목소리에 서린 억울함에 하병우는 오히려 미안함을 느꼈다.그는 조경순과 하민지를 품에 꼭 안았다.하시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내가 갓 돌아간 터라 뭐라고 더 말할 수는 없었다.그저 차가운 목소리로 하시윤에게 심술부리지 말라고 했고, 또 두 사람은 그녀의 새어머니와 여동생이니 살갑게 대하라고 했다.“두 사람이 밖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그는 그렇게 덧붙였다.하지만 하시윤은 믿지 않았다.두 사람이 고생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하병우는 수시로 그들에게 돈을 보내줬고 조경순은 일조차 하지 않았다.그렇게 도와주는데도 딸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고?그토록 뻔한 동정심 유발인데 말이다.평소에는 장사 하나로 남들보다 열 배는 눈치 빠른 그가 그 순간에는 왜 그렇게 멍청했는지 하시윤은 알 수 없었다.하시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하민지는 억지로 지은 미소를 거두고는 말했다.“아빠가 오라 하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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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나예요

오후쯤, 하시윤은 지윤정에게서 전화를 받았다.그녀는 자리에 있던 일을 멈추고 복도로 나가 조용히 받았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강수호가 구속됐다고요?”지윤정은 그렇다고 답하며 목소리에는 들뜬 기색이 묻어났다.윤근영도 함께 체포됐고 남편 주우빈이 그녀에게 찾아와 탄원서를 써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지윤정은 그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다만 상대가 얼마나 ‘성의’를 보이는지 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즉, 돈 문제였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주우빈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생각해 보겠다는 말만 남기고 돌아갔다.결국 돈을 낼 생각이 없는 눈치였다.지윤정이 말했다.“그 사람 월급도 많지 않아요. 집 대출도 있고. 난 처음부터 알았어요.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그러면서도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강수호는 인맥이 좀 있잖아요. 저번에 내가 신고했다가 취하했을 때, 강수호가 그러더라고요. 그 사건, 아예 위로 보고도 안 됐대요. 윗선에서 눌러버린 거죠. 그러니까 내가 취하하지 않았어도 결국 흐지부지됐을 거예요.”하시윤이 단호히 말했다.“걱정 마요. 내가 끝까지 확인할게요. 이번에는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의 말 한마디는 지윤정에게 위로가 되었다.더 이상 말은 오가지 않았고 통화는 곧 끝났다.전화를 끊은 하시윤은 휴대폰을 뒤적이다가 십여 분 전에 서지혁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내용은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였다.그는 이미 사람들을 움직여 놨다고 했다.강수호 쪽에도 인맥이 있긴 했으나 이번에는 손을 쓰지 못했다.대신 그의 부모가 꽤나 발을 넓혔지만 그마저도 서지혁이 막아두었다고 했다.그는 하시윤에게 걱정 말라고 덧붙였다.공소가 제기된 이상, 검찰이 사건을 접수하면 더는 손쓸 여지가 없을 것이다.하시윤은 메시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고 답장을 보냈다.[고마워.]단 한 마디만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그 후로 서지혁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다.퇴근 시간이 다가올 즈음, 이미 할 일은 끝난 하시윤은 자리에 멍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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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하고 싶어서 온 줄 알았지

하시윤이 회사를 나설 때 성라희는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얼굴빛은 ‘창백하다’라는 말로는 모자랄 정도로 완전히 사색이었다.차를 몰고 회사 정문을 지나칠 때 하시윤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아직 그녀가 보였다.다만 자리를 근처 소파로 옮겼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온몸이 무너져 내린 듯 축 처져 있었다.하시윤은 시선을 거두고 액셀을 밟았다.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은 뒤 그녀는 2층으로 올라갔다.서지혁이 야근이라면 서인준도 같이 야근할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방문 앞에서 들려온 건 서인준의 웃음소리였다. 서인준은 정우 방에서 아이와 놀고 있었다.하시윤은 들어가 정우에게 인형을 내밀며 말했다.“아빠가 사준 거야.”그러고는 옆에 있던 서인준을 돌아보며 물었다.“야근 아니었어요?”서인준이 혀를 찼다.“형 야근해서 가슴 아픈 거예요? 형은 일하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놀고 있으니까 마음이 불편한 거예요?”하시윤은 흠칫하더니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인형으로 그를 한 대 치려다 말았다.그녀는 인형을 다시 정우에게 건네며 될수록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애 앞이잖아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요.”서정우는 인형을 품에 꼭 안더니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아빠 약속 지켰네.”서인준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내가 점심시간에 나가 사고 퇴근 후에 정우 가져다주겠다고 했더니 형이 굳이 자기가 가겠대요. 그럼 점심에 사서 나한테 주면 내가 퇴근할 때 가져가겠다고 했더니, 또 그럴 필요 없다고 하더라니까요.”그는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알고 보니 오후에 사서 형수님을 만나러 갈 핑계를 만들려는 거군요.”하시윤이 그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그 입 좀 다물어요.”서인준이 턱을 치켜들었다.“내가 틀린 말 했어요?”그의 성격을 잘 아는 하시윤은 굳이 맞받아칠 생각도 없었다. 괜히 달려들면 불만을 부채질하는 꼴이니까. 그냥 침대에 가서 조용히 앉았다.서인준은 그녀의 표정이 평소보다 무겁다는 걸 눈치챘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오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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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언짢은 마음

심연정은 말을 잇다가 두 걸음 앞으로 다가오며 서정우를 안으려 했다.서인준이 몸을 살짝 빼며 말했다.“당신 몸에 세균이 있다고요.”말투는 여전히 거칠었다.심연정은 익숙하다 못해 체념한 듯했지만 하필 하시윤이 옆에 있어 그 말이 더 수치스럽게 느껴졌다.표정이 잠깐 일그러졌으나 그녀는 이내 억지로 미소를 되찾았다.“아이고, 엄마가 깜빡했네. 그럼 조금 있다가...”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인준은 서정우를 안은 채 그녀 옆을 지나 한효진에게 다가갔다.“정우가 아까 왕할머니 보고 싶다고 했잖아. 빨리 인사드려야지.”한효진은 아이를 안아줄 수 없으니 몸을 굽혀 가까이 다가갔다.서정우가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더니 한참 생각하고는 볼에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췄다.한효진의 눈이 단숨에 가늘어졌다.입가에는 웃음이 번졌다.“아이고, 착한 우리 정우.”하시윤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 장면을 지켜봤다.심연정의 얼굴에는 불쾌함이 스쳐 지나갔지만 금세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 미소를 띠었다.서인준은 그녀의 몸에 세균이 있다며 기를 죽여놓았다.한효진도 한참이나 바깥에 서 있었지만 정우를 그녀의 품에는 안겼다.누가 봐도 심연정을 일부러 곤란하게 만들려는 작정이었다.하시윤은 그 억지 미소를 짓는 심연정을 바라보다가 생각했다.‘이 사람, 정말 대단하네. 저런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다시 웃을 수 있다니.’밖에서는 냉정하고 일 잘하는 여자, 집에서는 얌전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그 모순된 얼굴을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무례한 서인준에게도 끝내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하시윤은 고개를 돌려 서지혁을 바라봤다.심연정이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그 정도가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할 수는 없을 테니까.잠시 후, 하시윤은 몸을 반쯤 돌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하병우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지금 통화 가능해?]자기 일에는 누구보다 신경 쓰는 하병우였다.오늘은 주말이라 그녀가 서씨 가문 본가에 있을 걸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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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일부러

하시윤은 서정우가 잠든 틈을 타 잠깐 외출했다.시내에 들러 몇 가지 물건을 사고 꽃다발 하나를 주문했다.볼일 자체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산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길이 꽤 멀어 왕복 한 시간 넘게 걸렸다.저택으로 돌아와 정원을 지나 현관 쪽 긴 복도를 걷던 중, 그녀의 걸음이 문득 멈췄다.서지혁이 거실 앞마당에 서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한 손에는 휴대폰을 귀에 댔고, 다른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모습이었다.멀리서라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하시윤은 그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단번에 느꼈다.오늘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던 서인준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그리고 그 이유가 자신 때문일 거라는 말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도대체 뭐가 문제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하시윤은 이상하게도 그 말이 맞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일부러 걸음을 늦췄다.그가 통화를 마치고 자리를 떠나면 그때 안으로 들어가려는 속셈이었다.그런데 서지혁은 이미 그녀가 정원을 벗어나던 순간부터 그녀를 발견했다.그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묘한 눈빛으로 하시윤을 바라봤다.하얀 셔츠에 여유 있는 슬랙스, 느슨하게 묶은 머리.그 차림의 하시윤은 차분하고 부드러워 보였다.그녀가 걸음을 일부러 늦춘 것도 서지혁은 벌써 눈치챘다.그래서 전화는 이미 끊었지만 그도 일부러 휴대폰을 계속 귀에 댄 채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하시윤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쯤, 서지혁은 그녀가 슬그머니 멈춰 선 걸 발견했다.하시윤은 갑자기 시선을 옆으로 돌리더니 마치 무언가 흥미로운 걸 발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서지혁은 그제야 휴대폰을 내려놓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하시윤이 돌아서며 이제야 그를 발견한 척했다.“아, 여기 있었네.”서지혁은 코로 짧게 숨을 내뱉더니 물었다.“뭘 샀어?”하시윤의 손에는 부풀어 오른 종이 가방 하나가 들려 있었다.그 안에는 까만 비닐봉지가 하나 더 들어 있었지만 내용물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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