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하강시 사람이라면 서씨 가문의 서지혁이 냉혹하고 단호하며 여지라곤 남겨두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 4년 전에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다. 이름도 모르는 여자와의 뜨거웠던 하룻밤. 그리고 10개월 후, 갓 태어난 아기를 빌미로 거액을 뜯어간 그녀.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토록 대담한 일을 벌인 걸까? 모두의 궁금증이 하늘을 찔렀다. 나중에 아이가 아프다는 소식에 그녀는 서씨 가문 본가로 들어갔다. 모두들 복수심에 불탄 서지혁이 절대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했다. 아무리 아들이 있다 해도 키우지 않았는데 모자간에 정이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 서씨 가문 본가의 정원. 한 새침한 여자가 나무 의자에 앉아 옆에서 서류를 보던 남자의 발목을 장난스럽게 톡톡 건드리며 웃고 있었다. 그녀의 발목을 덥석 잡은 서지혁. “또 힘이 생겼어?” 여자가 콧방귀를 뀌었다. “창피하게 왜 그래?”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건강을 회복한 아이가 달려왔다. “우리 엄마 괴롭히지 말아요.”
View More서지혁은 정말로 하시윤과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은 지금 서씨 가문 본가에 와 있었다.하시윤은 오늘 일부러 쇼핑몰을 몇 바퀴나 돌았다. 사람들 틈에 섞여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에는 지하 주차장으로 빠져나왔고 뒤따르는 차가 없는 걸 몇 번이나 확인한 뒤에야 본가 쪽으로 차를 돌렸다.서지혁은 이미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하시윤이 도착했을 때, 서지혁은 뒷마당 연못가에 서서 물고기 밥을 뿌려주고 있었다.하시윤은 뒤에서 가만히 그를 끌어안았다.“왜 여기 와 있었어?”서지혁이 손에 든 사료를 털어내며 말했다.“전에 사람 불러서 정리 좀 시켰는데 덜 끝났더라고. 오늘 다시 불러서 마저 치우게 했어.”하시윤은 조금 전 본채 앞을 지나오며 안쪽을 힐끗 봤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는데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가구도 전부 빠져나가 휑했다.“여기 팔려고?”“안 팔아.”서지혁은 담담하게 말했다.“애초에 살 사람도 없을 거고.”저택 규모가 워낙 컸기에 대가족이 아닌 이상 굳이 이런 집에서 살 이유도 없었다.게다가 하강의 오래된 명문가들은 이미 다들 자기들 터전을 따로 잡아둔 상태였다.하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그냥 비워두게?”“당분간은.”서지혁은 연못 안을 바라보며 말했다.“급하게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 그냥 자산 하나 남겨둔다 생각하려고.”하시윤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럼 나 여기 좀 둘러보고 올게. 예전에는 제대로 구경해본 적이 없어서.”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그렇게 느릿하게 걷다 보니 예전에 불타버린 2층 건물 앞까지 오게 됐다.잔해는 이미 대부분 치워진 상태였다. 다만 바닥을 파헤쳤던 커다란 구덩이만 아직 메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하시윤은 발끝으로 작은 돌멩이 하나를 툭 차 넣었다.예전에 이곳에 뭘 해뒀는지는 직접 본 적 없었다. 귀신 막는다고 쇠로 된 검을 꽂아두고 빨간 실을 둘러놓고 요상한 동상까지 세워놨다고 들었다.아마 그 한효진이 시킨 일이었을 거다.나쁜 짓은 있는 대로 다 하면서 정작
서경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그리고 조금 전 하던 말을 이어갔다.“원래는 심태진도 여기 끌고 와서 당신 옆에 던져놓을 생각이었어.”그는 피식 웃었다.“둘이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였잖아. 갈 거면 둘이 같이 가는 게 맞지.”그러다 문득 말투가 바뀌었다.“그런데 난 사람을 안 믿어. 혹시라도 당신이 그 인간 붙들고 살아남으면 곤란하잖아.”서경민은 혀를 한 번 찼다.“난 그런 변수는 용납 못 해.”성문영은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서경민은 정말 끝까지 그녀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두렵긴 했지만 이제 와서 빌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서경민의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성문영이 물었다.“왜...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당신은 애초에 날 좋아하지도 않았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날 증오해?”서경민은 몸을 반쯤 돌린 채 그녀를 내려다봤다.“난 당신을 증오한 적 없어.”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증오한 적이 없다고. 그냥 좀 짜증 났을 뿐이야. 당신은 너무 쓸모가 없었거든.”그리고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게다가 두 사람이 날 배신했잖아.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게 맞지만 감히 나를 배신하려는 그 일 자체 때문에 기분이 더러웠어.”서경민은 원래 그런 인간이었다. 눈 밖에 난 사람은 절대 그냥 두지 않고 한 번 거슬리면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지금처럼 코너 끝까지 몰린 상황에서도 자기 기분 상하게 만든 인간들은 반드시 손보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렸다.말을 끝낸 그는 입꼬리를 비틀었다.“그래도 당신은 운 좋은 줄 알아야 해. 당신이 아들을 잘 키웠거든. 지혁이가 날 여기까지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지금처럼 몸 사릴 이유도 없었겠지. 그랬으면 당신 꼴은 지금보다 훨씬 처참했을 거야.”성문영은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욕설처럼 내뱉었다.“당신은 사람이 아니야. 짐승만도 못한 인간, 제정신이 아니라고.”“제정신이 아니라고...”
상대는 카메라 화면을 캡처한 뒤, 확대와 복원 작업까지 거쳐 서인준에게 전달했다.차창에 비친 사람은 얼굴 반쪽도 채 드러나지 않았지만 서인준은 단번에 알아봤다. 성문영이었다.그는 곧바로 말했다.“빨리 찾아주세요. 돈은 더 얹어드릴게요.”그리고 곧 덧붙였다.“돈은 상관없습니다. 결과만 만족스러우면 두 배로 드리죠.”애초에 단가가 높은 일이었는데 거기다 두 배까지 얹어준다고 하니 상대 쪽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얼른 장담부터 했다.“걱정 마십시오. 저희도 최대한 서두르라고 압박 넣겠습니다.”전화를 끊은 뒤에도 서인준은 도무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가 차를 몰고 교외 쪽으로 향했다.렌터카였지만 성능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속도도 잘 붙었는데 서인준은 그마저 답답했는지 내내 경적을 울려댔다.교외를 지나 더 외진 외곽으로 들어서자 주변 풍경이 점점 황량해졌다. 사람 사는 집도 드물었다.서경민이 이런 곳에 숨어든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서인준은 한참을 빙 둘러 돌아다녔지만 끝내 위치를 특정하지 못했다. 원래 이런 쪽에는 영 소질이 없는 사람이었다.결국 포기한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끈 뒤 등받이를 뒤로 젖힌 채 몸을 기대고 누워 눈을 감았다.그는 요 며칠 계속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머릿속은 늘 흐릿했고 겨우 잠이 들어도 꿈이 끊이질 않았다.꿈속에는 오래전 일들이 끝도 없이 떠올랐다.너무 어릴 적 기억이라 원래라면 이미 다 지워졌어야 할 시간들이었다. 세월에 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성문영도 자신을 예뻐했다는 걸 말이다.서지혁은 원래 성격이 차가웠다. 누구에게도 살갑지 않았고 성문영에게도 매달리거나 애교를 부리는 아이가 아니었다.반면 서인준은 어릴 때부터 애교를 잘 부렸고 좋아하는 마음도 숨기지 못하는 성격이었다.성문영이 퇴근해 돌아오면 그는 늘 달려가 다리를 끌어안았고 두 팔을 벌린 채 안아달라고 조르기도 했다.그 시절의 성문영은
하시윤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결국 생각나는 대로 답장을 보냈다.[그냥 별 의미 없는 일상적인 대화만 나눴어요.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한참이 지난 후에야 최승우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다행이네요.]그 한마디를 끝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하시윤은 시간을 확인했다. 너무 이르지도, 그렇다고 아주 늦지도 않은 애매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서지혁에게 지금 무엇을 하고 있냐는 메시지를 보냈다.하지만 답장은 없었다. 아마 한창 바쁜 모양이었다.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그녀는 결국 불을 끈 채 잠을 청했다. 어제 워낙 온몸의 진을 뺀 탓에 침대에 눕자마자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물론 그만큼 깨어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이불 속으로 낯선 온기가 쑥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그녀는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상대가 서지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핀잔을 주었다.“무슨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처럼 밤중에 몰래 기어들어 와?”서지혁은 차가운 기운을 풀풀 풍기며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는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피곤해. 그냥 자자.”하시윤은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투덜거렸다.“하루 종일 얼굴도 안 보이고 뭐 한 거야? 문자를 보내도 씹기나 하고.”서지혁이 나직하게 읊조렸다.“낮에는 경찰서에 들어가서 조율하느라 진을 다 뺐어. 밤에는 본가에 잠깐 다녀왔는데 이제 거긴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서 이것저것 정리할 물건이 산더미더라고.”그 말에 하시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더 깊게 캐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몸을 다독이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얼른 자.”그녀 역시 편안한 자세를 찾아 그에게 기대어 다시 잠을 청했다.다음 날 아침 하시윤이 눈을 떴을 때, 서지혁은 이미 깨어나 있었다.그는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댄 채 휴대폰 화면을 심각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하시윤은 우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커튼이 완전히 쳐져 있지 않아 밖의 풍경이 훤히 보였다.이제 막 동이
차가 서씨 가문 저택을 향해 달렸다.국도를 벗어나 산 중턱쯤 올랐을 때, 멀리 길가에 세워진 차 한 대가 보였다. 차 주변에는 서너 명의 남자가 내려서 있었는데 어떤 이는 차에 기대어 있었고 어떤 이는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일행의 차가 다가오자 그들은 몸을 일으켜 길 쪽으로 두어 걸음 다가왔다.서지혁은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으나 조수석에 앉아 있던 서인준이 갑자기 몸을 바짝 세우며 목소리를 높였다.“형, 저 사람 집사 아저씨 아들 같은데?”그 말에 서지혁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조금 더 나아가 멈추자 길가에 있던
서지혁 역시 곧바로 소식을 접했다. 유골이 발굴되자 대나무숲에 상주하던 경찰들은 대부분 철수했지만 폴리스라인은 여전히 쳐져 있었고 현장은 엄격히 통제된 상태였다.그는 저녁 무렵까지 업무를 마친 뒤에야 구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은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자마자 말을 꺼냈다.“안 그래도 전화를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그가 덧붙였다.“혹시 바쁘지 않으시면 시간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여쭤보고 싶은 게 좀 있어서요.”서지혁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정말로 뭐가 나오긴 했나 보군요?”상
집 구경을 마친 일행은 다시 본채로 돌아왔다.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막 귀가한 듯한 서경민과 마주쳤다. 기척을 느낀 그는 고개를 돌려 일행을 보았다.“형사님, 안녕하세요.”구 형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회장님, 실례가 많았습니다.”“다 둘러보셨습니까?”구 형사가 그렇다고 답하자 서경민은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권했다.“앉아서 이야기하시죠.”모두 자리에 앉은 뒤, 서경민이 먼저 입을 뗐다.“한숨 돌릴 틈도 없이 움직이시는 걸 보니 위에서 압박이라도 내려온 모양이죠?”구 형사가 씁쓸하게 웃었다.“사건이 너무 오랫
서지혁은 먼저 서인준의 팔을 툭툭 두드리며 위로했다.“자책하지 마. 네 잘못 아니야.”그러고는 이어서 말을 덧붙였다.“대나무숲에 묻혀 있던 사람은 나도 모르는 분이야. 아주 오래전에 벌어진 일이라는데 그때 우리는 너무 어렸잖아.”잠시 침묵하던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수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보자.”서인준은 짧게 대답하더니 처치실 앞에 서 있는 성문영을 슬쩍 살피고는 망설이며 입을 뗐다.“그리고 형, 하나 더...”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성문영이 몸을 돌려 다가왔다. 그녀는 옆에 있던 의자에 앉으며 한효진이 들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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