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출산의 밤, 하 대표님이 첫사랑을 따라 죽었다: Chapter 61 - Chapter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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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화

이겸의 검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시정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유 변호사님, 저... 알아요. 변호사님이 별아 언니 좋아하시는 거...”시정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기묘하고 섬뜩했다.“유 변호사님하고 별아 언니, 어디까지 가셨어요? 혹시... 벌써 같이 잤나요? 제 짐작엔, 바람난 아내 때문에 강준 오빠가 곤란하겠는데요?”이겸이 눈썹을 더욱 깊게 찌푸렸다. 믿기 힘들다는 듯 시선을 떨구며.“소시정 씨,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유 변호사님, 지금 강준 오빠도, 별아 언니도 없잖아요. 우리 솔직하게 얘기해요.”시정의 시선이 이겸의 미간을 향했다.“별아 언니는 오래전에 이미 강준 오빠에 대한 마음이 식었어요. 유 변호사님이 나타난 건, 그야말로 절묘한 타이밍이죠.”‘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겸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었다.시정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변했다. 아까까지와의 표정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소시정 씨, 제 생각엔 소시정 씨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요.”“오해요? 변호사님, 이 하얀 장미... 이거, 강준 오빠가 저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시정이 시선을 내려, 장미 꽃잎을 손끝으로 굴리며 가볍게 웃었다.“이건 별아 언니 주려고 준비한 거예요. 강준 오빠는 두 사람의 관계를 되돌리고 싶어 해요. 변호사님, 위기감 안 느끼세요?”이겸은 조용히 찻잔을 들어 올리고 한 모금을 머금었다.“두 사람은 원래 부부입니다. 다시 화해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은 일이겠죠.”그리고 차분히 잔을 내려놓는 남자의 눈빛은 더욱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오히려 소시정 씨 쪽이겠죠. 소시정 씨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강준과 별아 씨의 결혼이 이렇게 위태롭진 않았을 겁니다.”순간, 시정이 나이에 맞지 않는 섬뜩한 웃음을 터뜨렸다. 활처럼 휘어진 눈매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그게 바로 인과응보예요. 인과응보.”“무슨 뜻입니까?”이겸의 물음에 시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웃음은 점점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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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화

강준은 입꼬리를 비틀면서 씁쓸하게 웃었다.“나랑 이혼하고... 유이겸이랑 결혼하려는 거야?”별아는 눈길을 피하며 담담히 대답했다.“이혼한 뒤에, 내가 누구랑 결혼하든 너하고는 상관없잖아.”‘이번 생만은... 지난 생의 그 죽음만은 피하고 싶어.’‘그 이후는... 나중에 생각하자.’두 사람은 끝내 불편한 기운 속에서 갈라섰다.강준은 별아 앞에서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갔다.한참이 지나서야 별아는 화장실을 나왔다.자리로 돌아왔을 때, 이겸만이 남아 있었다.“강준이랑 소시정 씨는 갔어요.”이겸의 시선이 별아에게 닿았다. 여자의 목덜미에 희미하게 남은 흔적을 놓치지 않았다.“혹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강준이가 화가 난 것 같던데요.”별아는 순간 움찔했으나, 이내 무심한 척 고개를 저었다.“그래요? 잘 모르겠네요. 죄송해요, 제가 좀 배가 아파서... 유 변호사님을 오래 기다리게 했죠.”“괜찮습니다.”이겸은 굳이 더 묻지 않았다.별아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식사 내내 억지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마음속 깊숙히 온통 허무와 피로뿐이었다.식사가 끝나고 두 사람은 함께 식당을 나섰다.“별아 씨. 힘들다면 꼭 이혼을 선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혼을 하든 안 하든... 그건 누구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에요.”이겸의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별아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마음이 떠난 남자랑 계속 사는 여자는 없어요. 변호사님이 괜히 오해하신 것 같네요.”“그럼 조금이라도 힘내세요. 많이 웃으려고 노력하시고요.”이겸은 부드럽게 격려했다.별아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네, 그렇게 해 볼게요.”...별아가 본가에 들어섰을 때, 강준은 이미 거실에 앉아 있었다.그녀가 아직 신발도 벗기 전, 남자의 비아냥 섞인 목소리가 날아왔다.“오늘 유이겸이랑 데이트하니까 좋았어?”잠시 눈길을 준 별아가 무심하게 받아넘겼다.“너도 있었잖아.”“내가 눈치껏 비켜줬잖아. 그 정도면 고맙다고 해야지.”강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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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화

[나 N국 좀 다녀올 거야. 대략 일주일 정도.]강준은 별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장은 없었다.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일 때문에 가는 거야.]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었다.강준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옆자리의 시정이 슬쩍 눈길을 보냈다.강준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걸 금세 알아챘다.‘역시 송별아 때문이겠지.’조심스레 시정이 입을 열었다.“오빠, 이번에 저희 N국엔 뭐 하러 가는 거예요?”강준은 핸드폰을 닫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사람 좀 만나러.”“누군... 데요?”“가면 알게 될 거야.”“네.”...별아는 연달아 온 강준의 메시지를 전혀 열어보지 않았다.출근길, 그녀는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어머니가 아침에 피를 토했다는 소식이었다.순간, 별아의 손끝이 떨렸다. ‘피를 토했다고? 상황이 심각해.’별아는 곧장 차를 돌려 은빛병원으로 향했다.어머니는 오랫동안 위장병을 앓아왔다.아버지가 곁에서 정성껏 돌보며 버텨왔는데, 왜 갑자기 악화된 걸까?‘전생에선 엄마 건강에 큰 문제가 없었는데... 이번 생은 왜 이렇게 꼬이는 거야?’차는 병원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병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링거를 맞고 있던 어머니는 창백한 얼굴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엄마...”별아는 침대 곁으로 다가가 손을 꼭 잡았다.“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되셨어요?”옆에 있던 아버지 송지국의 표정은 이미 굳어 있었다. 그리고 목소리엔 분노가 가득 실려 있었다.“한 달째야. 매일 아침마다 그 소시정이 나타나선 네 엄마한테 험한 소리만 쏟아냈어.”별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송지국은 이를 악물고 말을 이어갔다.“하강준이 자기 배를 부르게 했다느니, 네가 이혼도 안 해주고 남의 여자와 애를 명분 없게 만든다는 둥... 별별 소리를 다 했어.”“그런데 네 엄마가 그걸 가만히 듣고 있겠어? 말싸움으로 번지고, 매번 그렇게 부딪치니 기운이 남아날 리가 있겠니.”송지국은 분노에 손까지 떨렸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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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화

별아는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엄마는 멀쩡했는데... 어떻게 갑자기 위암, 그것도 중기와 말기 사이라는 거야?’장정섭 교수는 단호했다.“가족분들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물론 전 세계를 뒤져서 더 나은 치료법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장정섭 교수의 고개 젓는 모습은 곧 판결문 같았다. 남선애의 삶에 선고장을 내린 듯했다.별아는 더 버티지 못하고 복도 구석으로 달려가 오열했다.‘소시정... 다 너 때문이야.’‘매일 찾아와 엄마를 괴롭히더니, 결국 엄마 병까지 키워버렸어.’‘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강준은... 그런 여자를 데리고 지금 N국에서 오로라를 보고 있겠지.’‘우리 엄마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사람하고.’그녀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어떻게... 내가 그 둘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겠어.’별아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고,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수지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목소리는 흐느낌에 젖어 또렷하지 않았다.“수지야... 나 좀 도와줘. 최고의 의사든, 의료팀이든 뭐든 찾아. 나... 우리 엄마 꼭 살려야 돼.”수지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야, 진정 좀 해. 어머니한테 무슨 일이야? 울지 말고 천천히 얘기해봐.]“위암이래. 중기를 지나 이제 말기에 가까워져 있대.”잠시 침묵. 그 뒤 수지의 놀란 목소리가 터졌다.[뭐라고? 그게 말이 돼? 어머니 매년 건강검진 받으셨잖아. 아무 문제도 없었잖아.]“그러니까... 나도 믿을 수가 없어. 근데 지금은... 시간이 없어. 빨리 좀 알아봐 줘. 돈이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어. 우리 엄마... 기다릴 시간이 없어.”별아의 얼굴은 눈물로 젖고, 기운은 이미 다 빠져 있었다.수지는 단호하게 말했다.[알았어. 너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바로 알아볼게. 우리 오빠한테도 연락해서 해외 연구소나 의료진하고 연결해 달라고 해볼게. 너는 어머니 곁 지켜. 알았지?]급한 사태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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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화

강준은 원래부터 별아네 가족의 안위를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았다.별아 자신이 그 살아 있는 증거였다. ‘날 이렇게 만든 남자한테 애초에 기대할 게 뭐가 있겠어.’수지는 핏대를 세우며 혀를 찼다. 말은 거칠고, 독이 담긴 말투는 주저함이 없었다.“하강준 그 개X식, 여자만 보면 다리 풀리는 놈이잖아. 저딴 놈이 지금 N국 가서 오로라 구경? 오로라가 제발 걔를 찍어 떨어뜨려 버렸으면 좋겠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진짜.”수지의 말은 점점 거칠어지면서 분노를 사정없이 쏟아냈다.“법으로 안 될까? 그런 배신한 놈들 전부 물리적으로 처벌하는 조항 하나 만들면 좋겠다. 그게 안 되면... 내가 가위 하나 사서 하강준 그거 확 잘라버릴까 봐.”수지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과격했지만, 그 속엔 분명한 연민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별아는 수지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가슴이 뜨거워졌다. ‘욕해도 때려도, 지금은 그런 감정조차 필요해. 하지만 현실은 다르지.’수지는 한참 욕을 퍼붓다가도 이내 숨을 고르고 이성을 찾았다. 상황은 냉혹했고, 감정으로는 별아 어머니의 병을 고칠 수 없었다.“야, 나도 미치도록 역겹다, 알지? 근데 지금은 감정만으로 해결 안 돼. 우선 어머니를 살려야 해.”“더러워도 지금은 좀 참아야 해. 어머니가 나으면 똑같이 돌려주자. 하강준을 가능한 한 멀리 쫓아내는 거야.”별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 구역질나는 인간한테 무슨 말을 하겠어?’‘그런데 만약 하강준이 안 도와주면,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남선애의 병은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매 순간이 소중했고, 별아는 가능한 모든 길을 찾아야 했다.“다른 방법은 없을까?” 별아가 물었다.“지금으로선 방법이 그거 하나뿐이야.” 수지는 솔직하게 말했다.별아의 머릿속을 스쳐간 건 며칠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연구팀이었다. 여자 교수 유이나가 이끄는 그 연구팀이 위암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는 소식...여자 교수의 이름은 별아에게 낯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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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화

설명을 이어가기 어려워진 이겸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누나, 내가 다시 별아 씨에게 물어보고 다시 연락할게.”[이겸아, 그런데 너... 강준이 아내라는 여자하고...]이나가 묻기 시작하자, 이겸은 곧바로 말을 끊었다.“됐어, 누나. 나중에 얘기하자. 먼저 끊을게.”통화를 끝낸 뒤, 이겸은 잠시 깊은 숨을 내쉬었다.‘별아 씨가 나를 찾아왔다는 건, 정말 막다른 길에 몰렸다는 뜻인데...’‘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이렇게 미안할 줄은 몰랐네.’별아의 시선이 이겸에게 향했다. 기대가 담긴 여자의 눈빛에 이겸의 가슴이 알 수 없는 힘으로 조여왔다.“유이나 교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나요?”이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누나 말로는, 연구 중인 약물이 아직 인체 실험 데이터가 나오지 않았답니다. 지금 무리해서 사용하면 부작용이 클 수 있다고...”“별아 씨 어머님 상태가 워낙 위중하시니, 더는 몸을 힘들게 하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며칠만 더 기다려 보시죠. 데이터가 정리되면 소식 드리겠습니다.”사과하는 듯한 이겸의 얼굴. 별아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네... 약이라는 게 신중해야 하는 거니까요. 기다려 보겠습니다.”‘희망 같기도, 절망 같기도 한 말... 결국 또 막다른 골목이구나.’‘수지가 말했듯, 최악의 경우엔... 하강준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겠지.’‘아무리 더럽고 구역질나도, 엄마를 위해서라면 못할 게 뭐가 있나.’이겸은 별아를 로펌 입구까지 직접 배웅했다. 그는 무언가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망설임 끝에 짧게 말했다.“별아 씨,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며칠 안에 데이터가 나올 거예요. 결과가 긍정적이라면 제가 직접 우리 누나를 만날 수 있게 해 줄게요.”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감사합니다, 변호사님.”그렇게 발걸음을 돌려 병원으로 향하려던 순간, 별아의 시선이 멈췄다.강준이 별아의 차 옆에 서 있었다.그리고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손끝은 느긋했지만, 흩날리는 긴 코트 자락과 함께 풍기는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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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별아는 운전대에 엎드린 채 울고 있었다. 눈물이 시야를 흐렸다.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강준이었다.운전석 문을 연 강준은, 얼굴 가득 눈물이 번진 별아를 뒷좌석으로 안아 옮겼다.“모르는 사람 같으면, 내가 네 가족을 다 죽인 줄 알겠다. 나 해외 간 거, 너한테 말했잖아. 일 때문이었다고. 넌 왜 자꾸 이상한 쪽으로만 생각해?”그는 차문을 닫고 몸을 숙여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직접 핸들을 잡은 강준은 곧장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별아는 더는 따질 기운조차 없었다. 강준과 시정이 N국에 간 게 진짜 업무였는지, 아니면 엉뚱한 짓이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지금 별아의 머릿속엔 단 하나, 어머니를 살려야 한다는 것뿐이었다.“하강준, 너랑 소시정이 어떤 사이인지는 너도 알고 하늘도 알아. 난 알고 싶지도 않아. 앞으로 보고 같은 거 보내지 마. 안 볼 테니까.”별아의 목소리는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강준은 백미러로 그녀를 흘끗 바라봤다.결혼할 때 그는 다짐했었다. 송별아라는 여자 눈에 눈물 한 방울도 안 나게 하겠다는 맹세. 그런데 요즘 별아는 왜 이렇게 자주 울고 있는 걸까?‘정말... 내가 잘못한 걸까? 근데 대체 뭐가 잘못이었지?’최근 일들이 너무 많아, 별아의 마음을 세심히 돌볼 여유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강준은 한껏 낮춘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건넸다.“좀 전에 장모님 뵙고 왔는데 상태가 생각보다 안 좋아. 근데 우리 팀에서 새로 개발한 약이 있는데, 지금까진 효과가 괜찮아.”“내가 강 비서를 Y국에 보냈으니까 곧 가져올 거야. 너무 조급해하지 마. 장모님은 분명 좋아지실 거야.”간신히 사람다운 말을 했지만, 별아는 고개를 돌린 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겸 쪽의 연락을 더 기다리고 싶었다.“하강준, 그게 뭐야? 바람피운 다음에 미안하다고 던져주는 거야?”별아는 이미 강준에게 철저히 실망해 있었다. 이런 거짓된 호의는, 차라리 역겨웠다.“정말 보상하고 싶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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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화

별아가 병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남선애는 피를 토하면서 몸을 가누지 못했다.송지국은 어쩔 줄 몰라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엄마...”별아는 다리가 풀려 거의 무너지듯 병상 앞으로 달려갔다. 휘청거리는 어머니를 부축하며 속삭였다.“엄마, 괜찮으실 거예요. 곧 새 약이 들어올 거예요. 금방 좋아지실 거예요.”“별아...”남선애는 힘없이 딸의 어깨에 기대었다. 최근 들어 살이 급격히 빠진 탓에, 뼈만 남은 몸은 병마를 버틸 힘조차 없어 보였다.간호사가 꽂아둔 주사 바늘은 자꾸만 헐거워져 약물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엄마, 조금만 쉬세요. 이제 말씀하지 마세요.”남선애는 고개를 젓더니, 더 이상 고통을 버틸 힘조차 없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죽는 게 무섭진 않아. 근데 너랑 별현이, 그리고 네 아빠... 그게 걱정이지.”별아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콧날이 시큰해지고 눈물이 차올랐지만, 울 수는 없었다.강한 척하면서 어머니를 달랬다.“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엄마. 괜찮아지실 거예요. 꼭 이겨내실 거예요.”남선애는 결국 딸 품에서 고개를 떨구며 깊은 잠에 빠졌다.송지국은 옆에서 몰래 눈물을 훔쳤다.창밖에는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또다시 슬픔의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다.잠시 후, 부녀는 병실 밖에 서서 말없이 한참을 서 있었다.“아빠, 절 원망하세요?”송지국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곧게 뻗어 있던 허리가 이제는 굽어 있었다.“네 엄마 병은 네 탓이 아니다.”별아는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바라봤다. 짙은 흑발 사이로 희끗희끗한 새치가 더 늘어나 있었다.아버지는 며칠 새, 수십 년이 흘러버린 듯한 모습이었다.별아의 눈가가 다시 뜨겁게 젖어 들면서 마음은 복잡하게 뒤엉켰다.‘한때 아빠 말고도 세상에서 나를 무조건 사랑해 줄 사람은 하강준이라고 믿었어.’‘하강준은 내 방패였어. 나를 다치지 않게 막아줄 거라고...’‘근데 그 방패가 칼이 돼서, 날 찌를 줄은 몰랐어. 나는 아무 힘도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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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화

시정이 가면을 벗은 듯 표정을 바꾸고는 별아를 노려봤다. 날카로운 눈빛에는 교활함만 남아 있었다. “난 그냥 네 엄마를 화나 죽게 만들러 왔어. 그리고 네게 말해줄게, 하강준이 나 보냈어.”시정의 목소리는 낮고도 냉랭했다. “하강준이 그러더라. 너희 송씨 집안 사람들은 하나같이 걸레라고. 하나라도 줄어들면 좋겠다고 말이야.”“별아야, 그 말 듣지 마.”남선애는 기침을 하며 또 피를 토했다. 숨소리는 가늘었다.남선애 침대 앞으로 다가간 시정이 가식적인 웃음을 흘렸다.“하강준이 네 집안을 진짜 봐줬으면, 왜 내가 임신을 했겠어? 네 집안이 다 죽어야 우리가 편하게 잘 살 수 있는 거지. 네 엄마부터 시작이야. 네 엄마부터 먼저 죽어줘!”별아의 손끝이 떨렸다.‘이 여자, 도대체...’시정의 말은 사람 목을 조르는 독침 같았다.“소시정, 죽어!!” 별아는 숨이 막혔다.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별아는 병상 옆 협탁에서 과도 하나를 집어 들었다. 칼끝이 손에 차갑게 닿았다. 그대로 시정을 향해 내질렀다.“오빠, 살려줘요!!”시정이 허리를 굽혀 소리쳤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입가에는 어쩐지 비겁한 희열이 맺혀 있었다.그 순간, 강준이 달려들었다. 눈앞을 가르는 눈보라 속을 뚫고 온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재빨리 시정 쪽으로 몸을 던져서 자신의 품으로 감쌌다. 하지만 과도는 강준의 굳센 팔뚝을 깊게 찔렀다.피가 솟구쳤다.강준의 하얀 셔츠 위로 붉은 빛이 번졌다. 순간, 모두의 시야가 붉게 물든 듯했다.별아의 눈은 피를 삼킨 듯 번득였다. 광기 어린 손으로 다시 칼을 휘둘렀다. 미친 듯이 찢어버리겠다는 듯이.강준은 재빨리 별아가 쥔 손목을 잡아채며 소리쳤다.“미쳤어? 칼 내려놔!”“하강준, 너 꺼져!”별아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갈라졌다. 분노로 살기를 띠고 있었다.“오늘은 꼭 소시정을 죽일 거야. 날 막을 거면 나도 죽여.”‘살고 싶지 않아. 이렇게 사느니 모두 죽여버릴 거야.’별아의 심장은 거칠게 울렸고, 손은 떨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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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화

별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자신이 당하는 억울함은 참을 수 있었지만, 소시정이 엄마를 괴롭히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병실은 숨조차 막히는 정적에 잠겨 있었다.그때, 강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송지국과 남선애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 향했다.강준의 팔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 핏자국이 아직도 스며드는 것 같았다.송지국은 혹여 강준이 화를 내 별아를 경찰서에 넘길까 두려워, 먼저 입을 열었다.“하 서방,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딸을 제대로 못 가르쳤어.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건 잘못이지. 내 체면을 봐서, 한 번만 별아를 눈감아 주게.”송지국은 허리를 깊게 숙였다. 고개는 땅에 닿을 듯했다.그 모습은 한없이 작고, 비참했다.별아의 가슴이 날카롭게 찌르는 듯했다. 눈물이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지만, 기어이 꾹 참았다.강준은 다급히 송지국을 붙잡았다.“장인어른,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가 별아한테 무슨 원망을 하겠습니까.”그는 고개를 흔들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걱정 마십시오. 저... 별아랑 잠깐 얘기 좀 나누겠습니다.”숨 막히는 기운이 병실을 감쌌다.별아는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강준을 따라 병실 밖으로 나왔다.도망칠 수 없는 순간이었다.하지만 별아는 후회하지 않았다. 방금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조차.‘난... 오래전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어.’“언제 가면 돼?”별아의 눈빛은 허공을 바라보듯 멍했고, 목소리는 차갑게 흘렀다.강준은 눈살을 찌푸렸다.“어디를 말하는 거야?”“경찰서.”“정말 그렇게 스스로 갇히고 싶어?”강준의 목소리엔 이해할 수 없다는 혼란이 묻어 있었다.“별아, 넌 진짜 많이 달라졌어. 우리...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별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눈발 흩날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치 허공에 스쳐가는 낙엽처럼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하강준, 축하해. 이제 곧 아빠가 되잖아.”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태어나는 아이.그 아이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것이다.‘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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