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Chapter 281 - Chapter 290

435 Chapters

제281화

주종현은 수없이 많은 밤, 꿈속에서 그녀와 다시 마주할 순간을 그려왔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이렇게 서로를 모르는 남남처럼 서 있게 될 거라곤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손끝은 멈추지 않고 떨렸고 목은 바짝 말라 숨쉬는 것조차 버거웠다.“시아.”아람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돌아서는 순간, 그녀의 머리끈이 공중에서 가늘게 휘어졌다. 겨울바람이 뺨가의 잔머리까지 들어 올리니 마치 지나온 모든 시간과 작별을 고하는 듯했다.“시아. 난 송하윤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승진도 했고 소만도 이젠 제 일은 스스로 해낼 수 있어. 시아, 난…”주종현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쉰 목소리로 지금껏 꾹 눌러 삼켰던 모든 말을 한꺼번에 토해내려는 듯 목소리를 쥐어짜냈다.“강시아. 정말로 나를 버린 것이냐?”그녀의 걸음은 아주 잠깐동안 멈칫하더니 이내 골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가녀린 뒷모습에는 어떤 미련도 보이지 않았다. 주종현은 손바닥에 꽉 쥐고 있던 반쪽짜리 팔찌를 날카로운 모서리가 살을 깊숙하게 파고들 때까지 부여잡았다. 달큰한 피맛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며 시야가 흐릿하게 번져갔다.시아. 제발 나를 또 버리지 마.하지만 그 한마디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 한줄기 뒷모습이 골목 어귀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이 미어지도록 바라보았다. 마음 속 한 귀퉁이가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길목의 마차 안에서, 소휘는 문발을 살짝 걷고 차갑게 코웃음을 흘렸다. “달랑 한 여자 때문에 주 세자께서 이게 무슨 꼴이냐?”“아 장군에게 전하거라. 계획대로 움직이라고. 폐하께도 상주도 올려. 지휘사 대인이 여기 계시니 토벌을 돕고 가는 게 순리이지 않겠느냐?”경 총관이 물었다.“토벌은 어느 정도로 길게 끌면 되겠습니까?”소휘가 무릎 위를 톡톡 두드렸다.“일단은 석 달. 질질 끌지 않으면 본왕이 처한 곤궁함을 보여줄 수 없지. 아 장군에겐 인원을 천천히 늘리게 해서 주 대인으로 하여금 이 토벌이 쉽사리 끝나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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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2화

“몇 번을 말했니! 저 아이랑 놀지 말라고 했잖아! 어떤 집 애인지도 모르는데!”그 아이는 어머니를 향해 슬쩍 인상을 찌푸리더니 혀를 쏙 내밀었다.“그럼 어머니가 탕후루를 사주시면 되잖아요!”부인은 곧바로 아들의 귀를 잡아 이끌며 데리고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람네 옆집 장 아주머니가 피식 웃더니 손짓으로 아이들을 불러 들였다.“얘들아, 그렇게 뛰어다니다가 감기 걸린다. 어서 들어와서 몸 좀 녹이거라.”장 아주머니의 생각은 맞은편과 달랐다. 어디서 왔든, 돈도 있고 연줄도 있어 보이는 이웃이라면 좋게 지내두는 게 나쁘지 않았다. 남편도 집에 없는 판에 괜히 원한 살 일은 만들지 않는 게 현명했다.“고맙습니다, 아주머니.”연아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손대지 말아야 할 것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저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필 뿐 실례를 범하는 일도 없었다. 장 아주머니는 흡족한 듯 웃었다. “말도 이쁘게 하는구나. 여기 앉아 있거라. 아주머니가 금방 찹쌀경단을 구워오마.”어른이 사라지자 아이들은 곧바로 시끌벅적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그중 까무잡잡한 남자아이 하나는 자기 탕후루를 다 먹고도 연아가 한 개 겨우 먹은 탕후루를 탐내기 시작했다.“야, 계집애가 뭘 그리 많이 먹어! 나 줘!”연아는 작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탕후루를 재빨리 등 뒤로 숨겼다.“싫어!”그 아이는 성질도 사납고 욕심도 많았다. 거기에 그의 어머니도 무척 심술궂었기에 연아는 그 가족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자아이가 손을 뻗어 빼앗으려 하는 순간, 장 아주머니의 큰딸이 발견하고는 재빨리 그 앞을 가로막았다.“주근! 또 남을 괴롭히는 거야?”주근은 집안의 유일한 아들로 목숨줄이나 다름없었다. 딸만 다섯 낳고 얻은 외아들인지라 집에서도 버릇없이 자라 열다섯이나 된 누나도 성질나면 손찌검을 해댈 정도였다. 그러니 열두 살밖에 안 되는 수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주근은 그대로 뛰어올라 수련의 손을 사정없이 깨물었다.“아악! 어머니!”안에서 과자를 나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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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3화

아람은 자기 딸이 인색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강세오가 사다 준 군것질거리도 언제나 골목 아이들과 나누어 먹는 아이였다. 비록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장 아주머니에게서 몇 번이나 들은 적이 있었다. 골목 끝 집 사람들은 무례하고 포악한데 그 집 아들은 못된 기질이 끝이 없다고 말이다.아람은 차갑게 말했다.“당신 집 아이나 잘 단속해요.”주근의 할머니는 골목에서 모를 사람이 없을 만큼 악명이 높았다. 이 골목의 처녀며 새댁이며 늙은 아주머니들 전부 그녀에게 기가 눌려 지고 살았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척 걸더니 아람을 향해 삿대질했다.“어디서 굴러온 창녀 같은 년이! 네 딸년이 우리 손자를 괴롭혔잖아! 꼴을 보니 여우 피가 흘러서는... 어린 것이 남정네 꼬시려고 눈에 불이 났구먼!”아람은 말도 없이 처마 밑에 걸어둔 마른 옥수수대를 확 낚아채 그녀의 시끄러운 입에 쑤셔 넣었다. 손을 들어 힘껏 내리친 따귀는 주근의 할머니를 연거퍼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연아, 어서 가자!”주근의 할머니는 우악스러운 시골 여자였지만 아람은 막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몸인데다가 연아까지 데리고 있다 보니 정면으로 싸운다면 불리함이 뻔했다. 모녀가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자 옆집 마당에서 주근의 할머니가 바닥을 쿵쿵 구르며 입에 담기도 힘든 욕을 퍼부었다.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모두 입에 담기 힘든 오물 같은 욕설뿐이었다. 곁에 서있는 주근 역시 할머니를 따라서 혀를 차며 삐딱하게 욕을 뱉어댔다.아람이 연아의 귀를 꼭 막고 집 안으로 들어간 뒤에야 연아는 아람의 손을 꼭 잡고는 말했다.“어머니, 주근이 제 탕후루를 빼앗으려고 했고 수련 언니는 저를 지켜주다 물린 거예요. 저는 그 탕후루를 절대 주고 싶지 않아서 불에 던져버렸어요.”아람이 놀라서 물었다.“수련이 다쳤다고?”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아주머니께서 언니를 데리고 의원으로 가셨어요.”아람은 딸의 작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연아, 어머니가 옆에 없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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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4화

두 집안은 원래 그저 인사만 주고받는 사이였지만 합심해서 한 판을 붙고 나니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 수련은 열두 살이 되어 부엌일과 허드렛일을 도우며 집안을 챙기는 나이였다. 남동생 수주는 연아처럼 학당에 다니며 글을 배웠다. 민간에서 딸아이를 오랫동안 학당에 보낼 수 있는 집안이라면 대개 벼슬집이거나 넉넉한 상가였다. 수련처럼 일손을 돕는 것이야말로 가장 흔한 삶이었다. 아람은 수련이 제법 영특하다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그녀는 동생의 책을 들여다보며 자연스레 글자를 익혔고 아람이 주판을 튕겨보이면 곧바로 익혀내기도 했다.“수련아, 학도가 되어볼 생각이 있느냐?”대대로 학도는 남자아이만 받는 것이 관례였다. 학도 생활을 마치면 달마다 적어도 은 한 냥은 벌 수 있었다. 수주는 예전에 집이 너무 고생하니 글공부를 그만두고 어머니 일을 돕겠다고 했다가 어머니에게 크게 혼나고 다시 학당에 나가고 있었다.수련은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아람이 지금 자신을 학도로 거둘 마음이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아람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였다.“우주에 곡식 창고를 하나 맡고 있는데 아직 학도가 없단다. 네가 괜찮다면…”“할래요!”수련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저… 어머니께 이 기쁜 소식을 알리고 올게요!”잠시 뒤, 장 아주머니가 수련의 손을 꼭 잡고 뛰어왔다.“아, 아람 마님! 우리 수련이를 받아주신다고요? 그… 나중에 시집가면…?”시집을 가면 일은 그만두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기에 그동안 갈고닦은 기술이 허사가 될 수도 있는 셈이었다. “제가 위주성에 있는 한, 시집을 가건 아이를 낳건 수련이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데리고 있을 거예요.”장 아주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수련을 데리고 엎드려 절을 시키려 했다.“어서 스승님께 큰 절을 올리거라!”아람이 얼른 말렸다.“진짜 스승님은 따로 있습니다. 제 반쪽짜리 솜씨로 수련이를 망쳐선 안 되니까요.”다음 날, 오 관사가 아람의 부름에 달려왔다. 학도가 여자아이라는 말을 듣자 그는 당장에서 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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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5화

강세오한테서도 두 번이나 편지가 왔었다. 아설은 그저 말수가 줄었을 뿐 별문제는 없어 보였고 곡식 창고 주변 순찰도 강화했다. 그래서 아람은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아설의 얼굴은 살이 다 빠져서는 뼈만 남은 듯 앙상했다.“설아!”그제야 자제하던 눈물이 터지며 아설은 아람의 품으로 파고들어 서럽게 울었다.“언니… 그 사람이 가버렸어요.”아람의 손길이 순간 멈칫했으나 곧 등을 토닥이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갔으면 간 거지. 호위 하나일 뿐이다. 언니가 더 좋은 사내를 찾아줄게. 우리 오라버니는 어떠느냐? 장차 영의정 자리에 오를 사람이니 그때가 되면 영의정 부인이 되는 것이다. 위심도 너를 만나면 무릎을 꿇어 인사를 해야 된다니까?”아설의 입가에 억지 웃음이 비쳤다. “싫어요. 전 아버지한테 시집 가는게 아니잖아요. 강 대인은 잔소리가 너무 많아요…”생각해보면 맞는 말이긴 했다. 강세오는 어릴 때부터 잔소리가 많았고 그 버릇은 평생 고쳐질 것 같지 않았다. 그 때문에 놓친 혼처도 한둘이 아니었다.아설은 눈물을 훔치며 품 속에서 소중히 간직한 나무 비녀를 꺼냈다.“섣달 그믐도 넘기지 않고 갑자기 떠났어요. 이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단 한 줄의 소식도 없구요. 그저 이 비녀만 남겼어요.”그녀의 눈이 금세 다시 시어졌다.“기억이 돌아왔다 해도 한 마디라도 남겨줬으면 전 절대 매달리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조용히 떠날 거면 왜 굳이 이 비녀를 남기고 갔을까요?”아람은 답해줄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분노가 치밀어 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이나 종이나 정말이지 똑같은 작자들이구나. 울어 줄 가치도 없다.”아설도 이를 바득 물었다.“맞아요! 둘 다 똑같아요!”아설은 이제서야 아람이 왜서 죽음을 위장하면서까지 경성에서 도망쳤는지를 알았다. 저런 남자들과 얽히면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그리고 다음날.성왕부에서 며칠째 요양하던 주종현이 또 찾아왔다. 문을 열고 나온 아설은 그의 얼굴을 보자 마자 기억을 되찾은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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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6화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주근 할머니는 문짝에 부딪혀 붙어 있다가 그대로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겨우 비명을 한 번을 내지르더니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철이 어머니는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 얼어붙었다. 문 앞의 사내는 병색이 완연했으나 온몸에 서린 살기는 마치 지옥에서 기어나온 귀신 같았다.“입에서 그딴 소리가 또 나오면 뼈도 못 추릴 줄 알아.”철이 어머니가 바들바들 떨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사, 살… 살인이야.”주근 할머니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크게 다쳐 한동안 침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침대머리를 부들부들 치며 아문에 고발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실제로 사람을 불러왔다. 하지만 아문에서 내려온 사람은 다름 아닌 철이 아버지였다. 주근 아버지는 일단 눈물부터 쏙 빼며 아랫사람답게 고함을 치려 했으나 오히려 철이 아버지가 손사래를 치며 멀찍이 물러섰다. “감히 조정의 관리를 모욕하다니, 제정신입니까?”주근 아버지는 말문이 막혀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아, 아니… 저기 골목 어귀 그 집…”“그 집은 관가 식구입니다!”철이 아버지가 코웃음을 쳤다.“그러게 왜 가만있는 사람을 건드립니까? 이 골목에 이리 많은 사람들이 사는데 당신네처럼 기어코 일을 치는 집안은 처음 봅니다! 다섯 날을 줄 테니 당장 짐을 싸서 나가십시오!”주근 아버지는 평생을 어머니 말만 따르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침상에 누워버리자 이젠 이정표조차 잃은 셈이었다.“나, 나가라니요…?”옆에서 설탕과자를 씹던 주근이 그 말을 듣자마자 소리쳤다.“우리 집이 왜 나가! 저 더러운 기집년이랑 그 기집애나 꺼져버리지!”주근 아버지는 식겁하여 아들의 입을 틀어막았다.“닥쳐라! 더 말해서 무슨 일을 만들려고!”하지만 주근은 성질이 뱀딱지라 자기 아버지의 손이고 할 것 없이 확 물어뜯었다. 주근의 아버지가 그 아픔에 손을 놓자 주근은 골목 어귀 쪽으로 뛰어가며 할머니에게 배운 삼류 욕설을 퍼부었다. 주근 아버지는 혹여나 일이 생길가 헐레벌떡 달려가서는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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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7화

“아버지도 경성이 싫으세요?”연아는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며 올려다보았다. 주종현은 두 손을 떨며 딸을 끌어안았다. 그의 눈가가 금세 붉게 젖어들었다.“그래. 아버지도 경성이 싫다.”그의 목소리는 먹먹하게 갈라져 있었지만 연아는 곧장 환하게 웃어 보였다.“어머니도 싫다 하셨어요! 저도 싫구요! 한데 여기는 너무 좋아요! 수련 언니도 있고, 수주 오빠도 있고, 철이 오빠도 있고, 취영 언니도 있고, 복동이도 있어요!”연아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가며 자랑하듯 말했다. 경성에서는 같이 놀 친구는커녕 말 벗이라곤 콩뼈 강아지 하나뿐이었다.“아연아, 네 아버지야?”옆 골목에 사는 같은 학당의 아이가 지나가며 희한하다는 듯이 주종현을 쳐다보았다. 연아는 주종현의 목을 꼭 끌어안고 보란듯이 말했다.“맞아! 우리 아버지야!”아이가 멀어지자 주종현은 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너의 이름은 주연아다.”하지만 연아는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반항했다.“싫어요! 주연아라고 불리우면 또 경성으로 올라가야 하잖아요! 전 주연아라 불리우고 싶지 않아요!”그러고는 집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아버지, 함께 복동이 보러 가요!”주종현은 그제야 복동이라고 말한 아이가 자신의 아들일 수 있음을 깨닫고는 조심스레 물었다.“복동이는 너희 어머니가 낳은 아이냐?”“그럼요! 어머니 말로는요 저랑 어렸을 때 모습이…”“연아야.”아람이 연아의 말을 가차없이 끊었다. 마차에서 내린 그녀 뒤편에는 경계심 가득한 세 소녀도 함께였다. 아람은 수차례 나타난 남자를 거들떠보지도 않고는 연아를 안아들었다.“시아…”그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문은 쾅 닫히며 모든 시선과 질문을 단칼에 끊어냈다. 주종현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는 골목 끝에 텅 빈 집을 바라보았다.그리고 다음 날.골목 끝에 갑자기 인부들이 들락날락하기 시작했다. 그저 앞뒤로 간단하게 수선만 했을 뿐이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사흘 뒤, 새로운 세대가 그 집으로 들어왔다. 누가 주인인지 본 사람은 없었으나 들어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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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8화

소휘는 경성을 떠나더니 아예 날개를 펼친 셈이었다. 예전 경성에서 온화한 공자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는데다가 여기서 더 말했다가는 말도 안되는 소리까지 튀어나올 것이 뻔했다. 아람은 차라리 연아의 손을 잡고는 그들을 에둘러 지나 뒤뜰 쪽으로 성큼 걸어가 버렸다. 강세오는 누이의 어딘가 흐트러진 뒷모습에 눈길을 두었다가 소휘를 향해 굳은 시선으로 말을 건넸다.“전하, 예전엔 누이를 지킬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전하께서 만약 …”소휘는 흥미로운 듯 입가를 치켜올리며 말했다.“예전에는 없었지. 지금은 있지 않느냐?”그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가볍게 현청 밖으로 걸어 나갔다. 강세오는 얼굴이 굳어서는 곧장 뒤를 쫓아가며 외쳤다.“전하! 제 누이는 제가 지킵니다!”정현에서 물길을 트려면 돈이 필요했지만 현에는 돈이 없었기에 경성으로 상주를 올려야 했다. 물길을 어떻게 틀 것인지, 이익은 무엇이고 부족한 부분은 무엇인지, 얼마나 걸리는지, 돈은 얼마나 들지, 이 모든 것은 현령이 구체적으로 써 바쳐야 했다. 게다가 이 징계는 현에서 주로, 주에서 부로, 부에서 다시 경성으로 겹겹이 절차를 거쳐야 했다.정현은 산들이 모인 아래 작은 물웅덩이 같은 곳에 위치했다. 주위에 작은 물담들이 모여야 큰 호수가 될 것이 분명했다. 하나 이런 곳에 돈을 쓸 가치가 있을지 없을지를 결정하는 것은 현지의 자원뿐만이 아니었다. 과연 물길을 트는 것이 천추만대로 이어질 좋은 일일지는 전적으로 현령의 능력과 안목에 달린 일이었다.정현의 봄갈이가 머지않았다. 들에 나가면 논밭마다 사람 손발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소휘는 강기슭에 서서 끝이 보이지 않는 물길을 바라보았다.“강 대인은 신과에서 갓 뽑힌 장원인데 이렇게 작은 고을에 임명을 받았다. 폐하의 뜻이 무어라 생각하느냐?”강세오는 그 굳건한 뒷모습을 바라보다 옅게 웃으며 답했다.“폐하에게 녹을 받는 한, 그 근심 또한 제 몫이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 제가 어디를 다스리길 바란다면 그저 따르는 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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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9화

거리에 놓인 긴 걸상 위에, 산적 기운이 잔뜩 밴 사내 셋이 팔을 벌리고 제멋대로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술동이를 한 움큼 쥔 채 드글거리는 술을 흘렸고, 걸상 아래에는 가게 하인이 묶여 신음하고 있었다. 또 다른 한 명은 앳된 기생을 팔로 휘감아 억지로 끌어안고 있었다. 소녀는 질색한 얼굴로 노파를 향해 계속 도움을 애원했다.“춘 마담, 살려주세요.”춘 마담은 억지웃음을 띠고 몸을 꾸벅꾸벅 숙이며 말했다.“세 분 나리, 이 계집애는 아직 제대로 익히지 못했는지라 흥을 깨실까 염려 됩니다. 부디 저희 취화루로 몸을 옮기시지요. 마음껏 모실 아가씨들로 편히 모시겠습니다.”산적은 술동이를 바닥에 내던지고 소녀의 턱을 거칠게 틀어쥐더니 손놀림으로 희롱했다.“우리가 모를 줄 아느냐? 네가 데려다 앉히는 것들은 이미 얼마나 뒹굴다 닳았을지 모르지. 노릇 덜한 게 더 좋은 법이다. 안 부서지는 거, 더러운 손 안 탄 거, 그게 더 맛있잖아!”강세오가 현장에 이르렀을 때는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었지만 감히 나서려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는 인파를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누구냐! 감히 성안에서 패악을 부리는 자가!”선두에 선 산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삿대질했다.“너 같은 게 뭔데? 아무리 잘난 척 해대던 진 씨도 내 앞에선 머리를 조아렸어! 너 같은 건 콧구멍 하나만도 못해!”강세오는 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이 산적 놈은 갓난아이를 잡아두고는 진 대인에게 무릎을 꿇으라 요구했고 그는 실제로 무릎을 꿇었다.하지만 강세오는 이제 막 벼슬길에 오른 새내기 관리였기에 가슴은 뜨거운 정의감으로 펄펄 끓고 있었다. 그는 곁의 아전 허리에 찬 칼을 빼들고는 번개처럼 칼날을 내리쳐 산적의 팔뚝을 내리 찔렀다.“내가 누구냐고? 네 더러운 목을 베러 온, 염라대왕이다!”주점 맞은편, 2층의 어스름 속.누군가 그 광경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강세오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강세오가 칼을 뽑아내는 순간, 그의 눈빛에 걱정이 스쳐 지나갔다.“아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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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0화

“대인! 큰일 났습니다!”아침 일찍 현청 문이 열리자마자 아전 하나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뛰어들어왔다. 입구에는 세 남자가 등 뒤로 꽁꽁 결박당한 채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바로 어제 그 난동을 부리던 무리였다. “이봐!”아전이 조심스레 손을 뻗자 남자는 그대로 툭 하고 쓰러졌다. 옆에 있던 놈도 따라 쓰러지고, 마지막 놈까지 줄줄이 힘없이 고꾸라졌다. 셋 모두 차디찬 주검이었다.아전은 비틀거리며 뒷마당으로 달려갔다. 강세오에게도 인명이 걸린 사건은 처음이었다.심지어 주검을 관아 문 앞에 놓고 사라지다니, 수상할 따름이었다.“대인, 여기 서명까지 된 자백서입니다.”종이를 펼치자 그동안 저질러온 악행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읽기도 역겨울 정도였고 하나하나가 모두 극형에 처해도 모자랄 죄목들이었다. “대인, 이런 악한 놈들은 부검하기도 아깝습니다! 오랏줄에 묶어 다섯 갈래로 찢어도 모자라지요!”포졸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 문서 속 사건들만 놓고 보면 죽어 마땅했으나 강세오는 고개를 저었다.“악행이 깊다 하나, 백성에겐 형을 집행할 권리가 없다. 관아에서 사건을 기록도 하지 않고 눈감기 시작하면 정현은 곧 난장판이 될 것이다. 작은 다툼이 복수로 번지고 각자 보복에 나선다면 세상 어디에 법이 설 수 있겠느냐?”포졸은 한참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예, 명심하겠습니다.”안쪽에서 둘의 말을 듣고 있던 소휘가 입꼬리를 치켜들어 웃었다.“아 장군께서 괜한 일을 하는군.”그는 손을 털고 걸음을 돌렸다.“아람은 어디 갔지?”경 총관이 답했다.“강변에 있는 작은 절에 갔다고 합니다.”“절이라?”소휘는 코웃음을 쳤다.“여자들이란… 부처에게 비느니 본왕에게 비는 게 더 빠를 텐데.”말을 마치자 마자 그는 가차없이 마차에 올랐다.“가자. 그 뭐, 절이라는 데로.”강변의 작은 절은 의외로 불전이 꽤 성했다. 경성의 백마사처럼 산을 오를 필요도 없었던 터라 더 좋았다. 절 안에서는 고기를 삼가지만 절 밖 강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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