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주종현의 대혼 날, 그의 첩과 어린 딸은 기이한 화재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가 마주한 것은 오직 잿더미로 변한 폐허뿐. 그곳에서 그는 난생처음으로 울부짖으며 오열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천 리 떨어진 우주에서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경성 출신의 아름다운 객상이 나타났다. 그 후, 주종현이 황명을 받아 우주에 주둔하게 되었을 때, 그는 밤마다 꿈속에 맴돌던 그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 곁에서 고운 미소를 흩뿌리고 있었고, 그녀의 딸은 다른 이의 품에 안겨 환한 얼굴로 그 자를 아버지라 부르고 있었다. 그는 핏빛으로 물든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으르렁댔다. “넌 어째서 나를 피해 숨었던 것이냐?” 그녀는 그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공자께서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View More큰 마님 처소의 시녀라 한들, 설령 총애를 조금 더 받는다 해도 앞길은 결국 두 갈래뿐이었다. 하나는 관리를 붙여 혼인해 그대로 늙은 시모 노릇을 하는 길. 또 다른 하나는 그녀처럼 세자의 첩이 되어 날마다 문 앞에 서서 세자의 부름을 기다리며 끝이 보이는 삶을 사는 것.설령 송 가의 아가씨가 아니더라도 다른 집 아가씨는 얼마든지 있었다. 주모가 선하든 그렇지 않든, 운명은 늘 남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아설, 너 아직 기억나? 네가 왜 나랑 함께 경성을 떠나기로 했는지.”뜬금없는 한마디에 아설은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감탄하듯 말했다.“이상합니다. 경성에서의 일들이 전부 전생 이야기처럼 느껴져요. 장우 오라버니한테 속은 게 계기가 되었고 그 뒤엔 위심에 대해서도…”말을 하다 말고 그녀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굴이 단숨에 붉어졌다.“언니! 저한테서 무슨 말을 끌어내려고 그런 것이죠!”아마도 위심이 나서서 도와줬을 때, 그 순간부터 마음이 움직였을 것이다.아람은 웃었다.“끌어내긴 무슨. 네 눈이 벌써 위심한테 붙어 있었는데 내가 뭘 더 캐겠어. 그만 놀릴게. 다만 한 가지는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어. 네가 위심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도 알고 위심 역시 너를 연모한다는 것도 알아. 그건 다 보이니까. 위심이 말만 꺼냈으면 주종현은 분명 너희 둘을 이어줬을 거야.”아람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낮은 숨을 내쉬었다.“한데 내 계획이 새어나갈까 봐 일부러 그렇게 말했어. 주종현이 위심을 승진시키고 관가 아가씨를 소개해 줄 거라고. 그래서 네가 마음을 접고 나랑 떠나도록 만든 거야. 내가 이기적이지 않았다면 너는 지금쯤 위심과 혼례를 올렸을지도 몰라.”아설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말했다.“한데 지금이랑도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아요. 굳이 차이를 따지자면, 만약 제가 경성에 있었다면 이런 큰 장사는 못 했겠죠.”그녀는 턱을 살짝 치켜들며 웃었다.“지금은 위심이 버는 그 푼돈으론 아예 눈에 차지도 않습니다.”지금 그녀가 1년에 받는 배당만
“언니!”아설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 들어왔다.“무슨 일이야?”아람은 고개를 들었다. 아설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고 눈빛은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무슨 좋은 일이길래 그렇게 신이 났어?”“큰 장사가 들어왔어요!”아설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십만 석이에요. 곡식 십만 석!”창고 하나가 통째로 비다시피 할 물량이었다.“이 거래가 제대로 자리 잡으면 내년에는 이런 대형 창고를 두 채는 더 지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언니가 배를 샀잖아요. 수매든, 출하든 훨씬 수월해질 겁니다.”하지만 아람은 오히려 미간을 좁혔다. 장사가 커지는 건 분명 좋은 일이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소휘의 밑천이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이 사람은 누가 소개한 거야?”아설은 고개를 저었다.“소개는 없어요. 스스로 찾아온 겁니다.”아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이 일은 아직 오 관사에게 알리지 말고 뒤에서 우리가 직접 접촉해야 해. 만약 성사되더라도 이 건은 상행 장부로 돌리지 마.”아설은 곧바로 뜻을 알아차렸다.“이 건은 따로 굴려서 큰 고객을 숨기겠다는 것이네요?”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언니, 성왕 전하를 떼어내려는 겁니까?”아람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지금은 돈을 벌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야. 살아남을 수 있느냐의 문제지.”“살아남는다고요?”아설은 바깥일을 자주 뛰는 만큼 작은 기류 변화에도 민감해져 있었다.“언니, 무슨 소문이라도 들은 겁니까?”아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다만 성왕 전하의 욕심이 너무 커. 괜히 말해서 네가 불안해질까 봐 그동안 말하지 않았을 뿐이야. 왕야는 아 씨 상행을 발판 삼아 세력을 키우려 하고 있어. 곡식, 배, 약재, 소금까지… 다 손에 넣으려 해.”“소금이요?”아설은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염매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으니까.성왕은 정말 돈이 된다면 가릴 게 없는 사람이었다.더구나 계약 문서에는 이름도 올리지 않고 뒤에서 자금만 대고 이익만 챙기니 고되고 위험한
“석 포두께서는 지금 당직 중이신 걸로 압니다만, 현아에 계시지 않고 개인 일을 보시는 건 썩 바람직하지 않아 보이네요.”석 포두의 몸이 굳었다.“그건... 맞습니다.”농민이 뭔가 더 말하려 하자 석 포두는 그를 밀어 밖으로 내보냈다.“구촌 어르신, 저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습니다. 더 기다릴수록 값은 계속 떨어질 겁니다. 다들 상의해서 서둘러 파시지요.”나중에 곡식으로 물건을 바꿔야 할 지경이 되면 그땐 정말 헐값이 될 테니 말이다.구촌 어른은 굳게 닫힌 대문을 한 번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밖에서 기다리던 농민들이 우르르 몰려왔다.“구촌 어르신, 어찌 됐습니까!”“방법이 없답니까?”구촌 어른은 고개를 저었다.“될 수 있는 건 다 해봤네. 우리 집 곡식은 어제 갔던 장 씨 상회에 넘길 생각이네. 곡가가 워낙 불안정하니 그대들은 각자 형편에 맞게 결정하시게.”그 틈에서 구경만 하던 복이 삼촌이 코웃음을 쳤다.“역시 돈 있는 것들이 더 야박하다니까. 다 똑같네. 우리 굶어 죽으라고 버티는 거지. 우리가 솥에 밥도 못 올릴 때쯤 헐값으로 땅까지 사들이려는 거라고.”귀가 얇은 몇몇 사람들의 분노가 단번에 불붙었다.“맞아! 저 여자들이랑 조 씨 집이랑 뭐가 다르다고!”“주부에 고발합시다!”정신이 좀 든 사람이 복이 삼촌을 돌아보며 말했다.“복이 삼촌 말도 웃기네요. 안 사면 다른 데 가서 팔면 되지 않습니까? 조 씨 집은 예전에 곡식을 가져가 놓고 돈을 안 주거나 덜 줬습니다. 지금은 곡식이 다 자기들 손에 있는데 뭘 고발한다는 겁니까? 강제로 못 팔게 됐다고 화풀이하는 겁니까?”복이 삼촌은 이미 벌금도 물었고 올해 농사도 망쳤다. 그 모든 게 다 자기 선택의 결과였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을 부추겨 함께 난리를 치려 했다.사정을 꿰뚫어본 이들은 집으로 돌아가 곡식을 점검했다. 지금 팔면 큰돈은 못 벌어도 헛수고는 면할 수 있을 터.끝내 깨닫지 못한 소수만이 복이 삼촌 곁에 남았다.“복이 삼촌, 그럼 이제 어찌 합니
“그건 네가 그들보다 잘 살고 있기 때문이야.”단낭은 그 말의 뜻을 단번에 알아들었다.“그럼 더 잘 살아야겠습니다. 아주 잘 살아서 숨넘어가게 만들어야겠어요.”“그래야지.”아람은 복동이를 받아안았다.“그런 인간들 때문에 식욕까지 망칠 필요는 없다. 난 아직도 생선살 죽을 기다리고 있거든.”단낭은 아람이 자신을 달래려 일부러 저렇게 말해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단 씨 집안일로 더는 아람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단비영이 해결하지 못하면 그땐 자신이 단비영을 해결하면 될 일이다. 자기 집안 일로도 모자라 이제는 상단 마님 집안까지 끌어들이고 있으니 말이다.단낭이 남편과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단비영은 주종현과 함께 건주로 떠났다.무슨 일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녹봉이 두 냥이나 올랐다.기뻐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단 씨 집안이 더더욱 단비영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단 노파는 단비영을 만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집 근처에 올 담은 없었기에 길에서 몇 차례 단낭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단낭은 그때마다 매몰차게 뿌리쳤다.아무리 험한 말을 퍼붓고 화이시키겠다고 협박해도 단낭은 더 단단해질 뿐이었다.그녀의 태도에 단 노파는 분통이 터져 허벅지를 쿵쿵 내리쳤다.깊은 가을이 지나자 날이 부쩍 쌀쌀해졌고 아이들은 눈에 띄게 훌쩍 자라 있었다.아람 상단의 곡물 창고는 가득 찼다. 버티며 팔지 않던 농가들은 곡가가 내려가고 나서야 팔지 못한 것을 깨닫고 뒤늦게 허둥대기 시작했다.아설이 이 소식을 전하자 몇 달 동안 참아왔던 아람은 마침내 속이 후련해졌다.“여인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더니.”아람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그냥 네가 알아서 하거라. 지금까지 전부 네가 결정했잖아.”정현에 머문 지 반 년이 넘은 아설은 어느새 제법 큰 상단 주인다운 기세를 갖추고 있었다. 석 포두가 농민들을 데리고 찾아왔을 때, 아설은 단호하게 문전박대를 했다. 예전에 차라리 풀어버리겠다고 했던 쌀을 이제 와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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