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주종현의 대혼 날, 그의 첩과 어린 딸은 기이한 화재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가 마주한 것은 오직 잿더미로 변한 폐허뿐. 그곳에서 그는 난생처음으로 울부짖으며 오열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천 리 떨어진 우주에서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경성 출신의 아름다운 객상이 나타났다. 그 후, 주종현이 황명을 받아 우주에 주둔하게 되었을 때, 그는 밤마다 꿈속에 맴돌던 그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 곁에서 고운 미소를 흩뿌리고 있었고, 그녀의 딸은 다른 이의 품에 안겨 환한 얼굴로 그 자를 아버지라 부르고 있었다. 그는 핏빛으로 물든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으르렁댔다. “넌 어째서 나를 피해 숨었던 것이냐?” 그녀는 그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공자께서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View More주종현은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네가 정현을 떠난 뒤로, 아비는 이미 위 숙부를 보내 너를 맞이하게 했었다. 헌데 중간에 네가 방향을 바꿔 다시 정현으로 돌아갈 줄은 미처 몰랐다.”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오랜 세월 고단함이 새겨진 눈가의 주름이 한층 더 깊어진 듯 보였다.창가로 걸어간 그는 새하얗게 덮인 세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그 목소리에는 지워지지 않는 피로가 배어 있었다.“대성조는 오랫동안 가난하고 쇠약했다. 조정에는 문치만 성하고, 무장은 시들어, 태조 시절의 강철 같은 기개는 이미 사라졌지. 우륵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칼날처럼 늘 우리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다. 아비는 어쩔 수 없이 큰 흐름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다시 딸을 바라보았다. 늘 매서운 매의 눈빛 같던 그의 시선에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연아야, 아비가 사과하마. 너는 아비의 딸이다. 네가 태어나던 날, 처음 너를 안아 올린 사람도 아비였다. 어찌 제 손바닥 위에서 키운 아이를 스스로 다치게 할 수 있겠느냐.”그의 목소리는 무겁고도 진실했다.만약 예전, 규방에서 책과 그림만 보며 자라던 주연아였다면 이 말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이미 바깥세상을 한 번 겪고 돌아온 사람이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얼어붙었던 마음 한구석이 그 말에 금이 가듯 열렸다. 그 틈으로 서서히 온기가 스며들었다. 그녀의 입가에 아주 옅고 맑은 미소가 번졌다.“아버지. 저는 다 알고 있습니다.”서재를 나서자, 눈보라는 한결 잦아든 듯했다.주연아는 눈을 밟으며 자신의 뜰로 돌아갔다.오던 길에 남겼던 어지러운 발자국은 이미 새로 쌓인 눈에 덮여 사라지고 있었다.문을 열자 따뜻한 향기가 그녀를 감싸며 밀려왔다.익숙한 향이 아니었다.용연향. 차갑고도 강압적인, 거부할 수 없는 기운이 담긴 향기.방 안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주종현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그가 두터운 망토를 걸치고 문을 열고 나섰을 때, 뜰에는 이미 눈보라의 울부짖음만이 남아 있었다.맹서강의 모습은 벌써 문 밖으로 사라지고 없었다.어스름한 등롱 불빛 아래, 눈 위의 발자국이 또렷이 드러났다.한 줄은 크고 반듯하여, 흔들림 없이 서재 문에서 시작해 멀리 이어져 있었다.또 다른 한 줄은 작고 흐트러져, 먼 곳에서부터 이어져 오다 서재 창 아래에서 한참을 어지럽게 맴돌고 있었다.그리고 그 작은 발자국은, 결국 옆의 큰 계수나무 그림자 속으로 꺾여 들어가 있었다.주종현의 시선이 그 짙은 어둠 속에 머물렀다.목울대가 가볍게 움직였다.눈보라에 실린 그의 목소리가 바깥으로 흘러나왔다.그 안에는 미묘하게 감도는 다정함과 어쩔 수 없는 체념이 섞여 있었다.“나오너라. 밤바람이 거세다. 괜히 얼어붙는다. 네가 감기라도 걸리면, 네 어머니가 또 아비를 나무랄 게다.”나무 그늘 아래는 여전히 고요했고 눈이 사락사락 내려앉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주종현은 더 재촉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차가운 눈이 어깨 위로 쌓이도록 내버려 두었다.한참 뒤에야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온몸에 냉기를 두른 채, 천천히 계수나무 뒤에서 걸어 나왔다.주연아였다.얼어붙은 코끝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맑고 고운 눈동자도 눈보라에 씻긴 듯 생기를 잃어 있었다.손난로도 들고 있지 않아 원래 희던 두 손은 붉게 부어 마치 잘 익은 당근처럼 변해 있었다.주종현은 그 모습을 한 번 보는 순간, 가슴이 저려왔다.그는 성큼 다가가 딸의 얼음처럼 차가운 손을 덥석 잡았다.미간이 깊게 구겨졌다.“철이 없구나!”타이르는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녹일 수 없는 애틋함이 더 짙게 담겨 있었다.“이렇게 추운 날에 손난로도 안 들고 나오다니, 아비를 걱정시켜 죽일 셈이냐?”그는 더 말릴 틈도 주지 않고, 그녀를 이끌어 서재 안으로 데려갔다.이 딸은 그와 시은이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애지중지 키운 아이였다.평생 겪은 고생이라곤,
십여 년 넘게 집안에서 일해 온 몇몇 노복들을 제외하고는, 낯선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녀를 빈틈없이 지키고 있었다.하지만 그 보호는 화려하게 장식된 감옥처럼 그녀를 숨 막히게 했다.주연아는 창가에 앉아, 눈의 무게에 눌려 가지가 휘어진 매화나무를 바라보았다.생각하면 할수록, 어딘가 어긋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심장을 움켜쥐듯 조여왔다.번뜩이는 순간,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벌떡 일어나, 여우털 외투를 걸치고 눈보라 속으로 뛰쳐나갔다.밤은 깊고 고요했다. 눈 위에는 그녀의 발자국만이 깊었다 얕았다 이어지고 있었다.서재에 다가가기도 전에 멀리서부터 외삼촌의 차분한 목소리가 창틈 사이로 새어 나왔다.“우륵은 오만하고 거칠다. 헌데 이번에는 아예 빌미를 우리 손에 쥐여주었어. 명분이 서는 전쟁이다. 하늘이 내린 기회지. 계획만 치밀하게 세운다면, 단숨에 제압해 우리 대성조 북방의 백 년 묵은 근심을 뿌리째 뽑아낼 수 있을 거다.”주연아의 발걸음이 멎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죽였다.서재 안은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아버지가 더는 말을 잇지 않을 것만 같은, 긴 정적이었다.그제야, 주종현의 익숙하면서도 약간 쉰 듯한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폐하는 아직 젊고 기세가 지나칩니다. 여러 차례 사적으로 제게 말했지요. 태조를 본받아, 친히 군을 이끌고 나가 영토를 넓히고 불세출의 공을 세우고 싶다고요. 이번에는…”그의 말이 잠시 끊겼다.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함과 무게가 실려 있었다.“이번에는 연아를 ‘투명장(投名状: 어떤 집단이나 편에 들어가기 위해 충성과 결의를 증명하려고 바치는 증표나 행동을)’으로 삼게 되었으니, 아마 조정의 노신들 입을 막을 더 확실한 이유가 생긴 셈입니다.”투명장…주연아의 머릿속이 ‘웅’ 하고 울리며 새하얗게 비어버렸다.그 뒤의 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그래서… 이런 거였나. 그녀는 그저 내세우기 좋은 명분이었을 뿐이었다.그가
문무백관은 숨을 죽인 채, 감히 크게 숨 쉬는 것조차 두려워했다.칼끝이 맞닿을 듯 팽팽하게 긴장된 그 순간, 죽음 같은 적막을 깨뜨린 것은 한 노신의 늙고 떨리는 목소리였다.“폐하, 부디 삼가 숙고하소서!”백발이 성성한 노신이 비틀거리며 대열에서 나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폐하! 우륵의 병력은 강합니다. 삼십만 대군이 압박해 온다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닙니다. 지금은 다시 전쟁을 일으킬 때가 아니옵니다!”그의 말은 고요한 호수 위에 던져진 돌처럼 파문을 일으켰다.곧바로 몇몇 화친을 주장하던 신하들이 줄줄이 무릎을 꿇었다.“폐하, 삼가 생각하소서!”“그러하옵니다, 폐하! 주… 주 대인께서 이미 평민이 된 지금, 군을 맡아 이끌 자가 없사옵니다. 전쟁을 택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하씨 가문과 주씨 가문은 변방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었다.한쪽은 적융을 막고, 한쪽은 우륵을 막았다.주종현이라는 버팀목이 사라지자 그동안 눈치를 보던 자들마저 하나둘 화친 쪽으로 기울었다.순식간에 조정에는 화친을 청하는 목소리가 물결처럼 번졌다.그 노신은 머리를 땅에 박다시피 하며 눈물과 함께 호소했다.“폐하, 우륵의 한왕이 이토록 성심으로 혼인을 청하며 경연군주를 지목하였으니… 그 뜻을 받아들이시옵소서!”“고작 군주 한 사람으로, 우리 대성조의 수십 년 평안과 수많은 장병들의 목숨을 바꿀 수 있다면, 그보다 값진 일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폐하!”“그 입 다물라.”소림의 목소리는 한 점의 온기도 없이 차가웠다.서릿발 같은 시선이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는 노신을 곧장 꿰뚫었다.“우리 대성조가 언제부터 이토록 나약해졌느냐.”크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한 글자 한 글자가 천근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고작 우륵 따위가 짐의 미래 황후를 탐낸다고 해서, 짐이 스스로 내어주어야 한단 말이냐?”‘황후’라는 두 글자를 그는 유난히 깊게 눌러 말했다.끝없는 소유욕과 모욕당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노신은 온몸을 떨며 얼굴이 창백해졌고 무언가 더 말하려 했다.그러
맹시은이 마침내 지팡이 없이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이미 여름이 깊어 있었다.그해 초, 맹여산은 연아를 위해 얼음 열몇 수레를 사들였다. 고작 한 시진 남짓 썰매를 타기 위해서였다.거의 녹지도 않은 얼음은 다시 지하 창고로 옮겨져 보관되었다. 먹을 수는 없게 되었지만 더위를 식히기에는 더없이 알맞았다. 그 덕에 진국공부는 여름 내내 얼음이 모자라지 않았다. 밖으로 나돌기 좋아하던 연아조차 더는 외출을 고집하지 않았다. 대신 집 안에 틀어박혀 작은 목공 작업에 몰두했다. 자기 몸만 다치지 않으면 맹시은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
심야 무렵이었다. 온 경성은 고요한 밤 속에 잠겨 있었고 거리에서는 간간이 ‘땅, 땅’ 하는 순라의 타종 소리만 울렸다.시은은 책상 앞에 홀로 앉아 있었다. 기름 등불 하나가 외롭게 흔들리며 미약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탁자 위에는 색이 바랜 오래된 검 술 장식이 놓여 있었다. 장공주는 본래 조양공주라 불렸다. 그 시절 맹여산은 공주부의 호위대장이었고 그의 장남 맹여운은 조양공주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다. 두 젊은이는 서로를 사랑했지만 신분의 격차는 너무도 컸다. 조양공주는 맹여산을 위해 은전을 얻어냈고 전쟁은 당시 가장 빠른 출세길
그녀는 말을 마치고 나서 그 소년들을 한 번 더 훑어보았다.“가자. 괜히 기분만 상하지 말고.”소년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히히덕거리며 떠나갔다. 버릇없이 자라난 철없는 귀공자들일 뿐이었다. 황수영은 말 위에서 점점 분이 치밀어 올랐다.“요즘 공훈 집안 자식들 보면 하나같이 하늘만 쳐다보고 살아서 자기들이 무슨 인중용봉이라도 되는 줄 안다니까! 예전에 시부모님이랑도 이 얘기로 많이 다퉜어. 아이를 데리고 떠날지, 아니면 경성에 남겨 두고 맡길지 말이야.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데리고 가는 게 맞는 것 같아
시은은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통닭을 쥐고 있던 손도 힘이 풀리듯 느슨해졌고 그녀는 이내 손을 내려 두어 입 베어 문 통닭을 곁에 내려놓았다.“헌데 저는 그저 앞만 보고 싶어요.”그녀가 일어서자 주종현이 재빨리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그럼 내가 네 앞에 서면, 그땐 나를 볼 수 있겠느냐?”시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고 가슴속도 함께 흔들렸다. 그녀는 그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다만 손을 빼내어 급히 자리를 떠났다.누대의 등롱이 바람에 흔들리며 외롭게 하나의 그림자만을 남겼다. 공기 속에는 여전히 통닭의 향이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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