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파혼 후 시작된 그의 집착: Chapter 1 - Chapter 10

30 Chapters

제1화

서은주가 진백현을 좋아한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하지만 결혼을 약속하고 5년이 지났지만, 그는 그녀에게 그 어떠한 신체적 접촉을 하지 않았다. “백현씨, 오늘은 우리가 약혼한 지 5주년이 되는 날이야. 언제 와?”호텔 최고급 스위트룸. 풍선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벽에서 장미 모양의 조명이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시계는 약속한 일곱 시를 훌쩍 지나 어느새 아홉 시를 넘기고 있었지만, 서은주는 여태 홀로 앉아 있었다.“나 바빠.”“대체 무슨 일이야?” 그때, 전화기 너머로 여자의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백현 씨… 나 너무 아파요.”서은주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지금… 가희 씨랑 같이 있어?”“일이 좀 생겼어.”“그 여자 일에 왜 하필 백현 씨가 나서야 하는 거야?” 서은주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 여자가 나보다 더 중요해?”“이 타이밍에도 나랑 싸우자는 거지?!”순간, 서은주는 머릿속에서 무언가 폭발한 듯했고 급기야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심장마저 서서히 내려앉았다. 어느새 한기가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그녀는 한참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우리 여기서 끝내는 게 좋겠어.”조금이라도 그녀를 달랠 줄 알았지만 돌아온 건,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기는 소리였다.서은주는 실소를 터드렸다.도대체 뭘 기대했던 건지 서은주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그녀는 와인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방을 나설 때는 이미 밤 11시가 넘었다.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서은주는 엘리베이터 밖에 한 남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검은 정장을 입은 그는 키가 훤칠했으며, 또렷한 이목구비에 차갑게 가라앉은 눈매까지 더해져 차가운 그의 분위기가 더욱 위압적으로 보였다.남자도 그녀를 훑어보았다.연녹색 원피스 차림에 취기로 달아오른 얼굴은 마치 활짝 핀 복숭아꽃 같았고, 별을 삼킨 듯 반짝이는 눈망울과 가는 눈썹, 잘록한 허리 아래 길고 가는 다리라인, 청초하면서도 은근히 매혹적인
Read more

제2화

호텔방에 들어선 남자는 그녀를 벽에 몰아붙였다.허리의 벨트 버클이 그녀의 아랫배에 닿아, 서늘한 촉감이 심장을 파고들었다.남자의 거친 숨결이 그녀의 귓가에 뜨겁게 흩어젔다.“도와줘.”방 안의 불은 켜지지 않은 상태였다.서은주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그의 벨트 버클을 더듬었다.하지만 그녀는 경험도 없었고, 취기마저 올라 머리가 어지럽기도 했기에 움직임마저도 둔했다.아무리 해도 풀리지 않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며 도움을 청했다.“안 돼요.”투정 섞인 그녀의 목소리는 심장을 간질이는 것 같았다.남자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내가 가르쳐주지.”그 한마디에, 저도 모르게 열기가 번졌다.하지만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포갠 순간, 남자는 그대로 멈췄다.“응…? 왜 그래요?”서은주는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고 남자는 그녀의 손을 천천히 쓸어내렸다.오른손 중지에 끼워진 반지에 남자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애인이 있었네?”“…네.”“잠깐 재미라도 보려는 건가?”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녀를 응시했다.“문제 있나요?”서은주는 낮게 웃음을 뱉으며 태연하게 되물었다.진백현이 그녀 몰래 육가희와 얽혀 있는 마당에 그녀라고 그를 위해 순결을 지킬 필요는 없었다.그의 시선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남자는 그녀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좀전의 뜨거움은 사라지고 차갑고 날 선 공기만이 남았다.“약혼자가 있으면서 날 건드리려 했다? 감당할 수 없을 테니 이쯤에서 그만두지.”“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감당할 수 없다고 단정 짓죠?”그녀는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도발하고 있었다.마치 오히려 그에게 겁먹은 것은 아닌지 되묻는 것 같았다.단지 하룻밤 스쳐 가는 인연이라면 서로 즐기고 끝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하지만...그는 임자가 있는 여자는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귀찮은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골치만 아팠기 때문이다.그런데 바로 그때 “철컥-” 벨트가 풀렸다.그녀는 벨트를 끌어 내리며 그를 올려다봤다.촉
Read more

제3화

간단히 샤워를 마친 서은주는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피임약을 삼켰다.그때 수표가 다시 시야에 잡혔지만, 그녀는 그저 무심하게 주머니에 넣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은주는 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병가를 냈다.오늘은 병원에 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집에 도착해 문을 연 순간, 무언가 시야를 가로질렀고 반응할 틈도 없이 “짝-!”소리와 함께 왼쪽 뺨에 통증이 퍼졌다.“진우 씨, 애한테 왜 손을 대고 그래요!”이순옥은 급히 다가와 서진우를 말렸다.그러자 서진우는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백현과의 약혼은 네가 원해서 한 거잖아. 20년 넘게 키워줬더니 이제 내 허락도 없이 파혼하겠다? 제법 날개가 단단해졌구나!”“삼촌, 저…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서은주는 고개를 들고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았다.“ 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우리가 거둬주지 않았다면, 네가 지금처럼 살 수 있었겠어?그 애가 용서하지 않으면 이 집에 다시는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마라!”말을 끝낸 서진우는 홱 돌아서서 나가버렸다.서은주는 원래 피부가 희고 예민한 편이라 볼이 금세 벌겋게 부어올랐다.이순옥은 얼음팩을 수건에 감싸 그녀의 얼굴에 대며 말했다.“은주야, 삼촌도 괜히 그런 게 아니야. 회사 사정이 안 좋아서… 오늘 아침에 백현이 쪽에서 전화가 왔거든. 파혼하면 투자금 회수하겠다더라. 요즘 회사가 버티는 것도 그 덕이고…외숙모를 봐서라도 백현이와 잘 얘기해 보면 안 되겠니?”서진우는 차갑고 무뚝뚝했지만, 이순옥은 늘 그녀를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다.서은주는 그녀의 애원 섞인 눈빛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서은주가 진백현을 찾아간 건 다시 잘해보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서로 깔끔하게 정리하고 끝내고 싶었을 뿐이다.하지만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는 끝내 받지 않았다.그러다 우연히 SNS에서 사진을 보게 됐다.【진백현 도련님과 육씨 가문 공주님의 우연한 투 샷.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요.】위치는 호서 리조트였고 서은주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서은주가 그
Read more

제4화

서은주는 그의 손끝이 목선을 스치듯 지나가는 감촉을 또렷이 느꼈다.너무 민감한 곳이라 순간 몸이 저절로 움찔했다.남자의 뜨거운 숨결에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고, 너무 조용한 탓에 그 쿵쿵거림이 귀에까지 들리는 듯했다.목걸이가 풀리자, 서은주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감사합니다.”육강민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그의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머리 위로 스쳤다.“어젯밤에 만났는데 모른 척하는 건가?”“……”육강민은 큰 인물이다.그가 둘이 아는 사이임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그녀가 아는 척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다시는 마주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음 날 바로 이렇게 부딪히게 될 줄이야.게다가 하필이면, 연적의 작은 아빠라니. 대체 이게 무슨 악연인가!“옷이 잘 어울리네.”그 말에, 서은주는 단숨에 어젯밤으로 끌려갔다.그녀의 볼이 뜨거워졌다.세간에서 말하길, 성세 그룹의 대표 육강민은 청렴하고, 욕심 없고, 차갑고, 금욕적이라고 했다.하지만…어젯밤의 남자는, 그 어떤 면에서도 ‘금욕’과는 거리가 멀었다.생각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목걸이를 풀어주던 육강민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옥 장식을 자세히 살폈다.“말 타 본 적 있어?”“아뇨.”“내가 가르쳐주지.”서은주는 의아했다.—마장에 도착했을 때, 도우미가 이미 갈색 말을 끌고 나와 있었다.덩치가 너무나 큰 말은 서은주를 한층 더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말에 오르는 순간, 말이 앞뒤로 움직이며 흙먼지가 일었다.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아, 말고삐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발만 버둥거렸다.그때, 육강민이 고삐를 잡고 말에 올랐고 주변 사람들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진백현은 분노로 이마에 핏줄까지 보였다.서은주의 행동은 공개적으로 그를 배신한 것과 다름없었다.진백현의 시퍼런 얼굴을 본 서은주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녀의 신경이 온통 진백현에게 가 있었기에, 육강민이 말에 올라탄 것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그러다 갑자기 남자의 뜨거운 체온이
Read more

제5화

서은주는 입술을 깨물었다.“먹었어요… 실례가 많았습니다.”말을 마친 서은주는 절뚝거리며 돌아갔다.다리 통증에 식은땀이 쉴 새 없이 흘렀다.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만 보는 육강민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육강민이 왜 서은주의 말을 탔는지 이해하지 못했다.혹시… 그녀에게 반하기라도 한 건가?하지만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 다리를 절며 돌아오는 서은주의 초라한 모습에 미운털이 박힌 것이라고 단정한 듯 너도나도 비웃기 바빴다.고작 서씨 가문에서 거둬준 양녀 주제에, 진씨 가문도 부족해 언감생심 육씨 가문 넘보려 한다고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내가 데려다줄게.”진백현의 안색은 어두웠다.“나도 차 있거든.”그러자 진백현이 코웃음을 쳤다.“이 상태로 운전하겠다는 거야?”서은주는 다리가 심하게 아팠다. 옷을 갈아입을 때 허벅지 안쪽이 시퍼렇게 멍 들어 있던 것을 보았던 서은주는 투덜댈 기력도 없어 조용히 그의 차에 올랐다.차가 리조트를 벗어나자마자, 진백현은 곧바로 물었다.“두 사람 무슨 얘기한 거야?”“아무 말도 안 했어.”“그 분이 어떤 분이신데, 너의 몇 마디로 나랑 가희 씨 사이를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정말 사랑한다면 나랑 먼저 깨끗하게 정리했어야지. 이렇게 뒤에서 몰래 만나는 건 너무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은주!”진백현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중심을 잃은 서은주는 앞좌석에 머리를 부딪칠 뻔했다.“자극해 봐야 소용없어. 너네 집안이 무너져 가는 꼴 안 보여? 넌 절대 나한테서 못 벗어나.”“너무… 치사하네.”“우리 집이 망했을 때, 내 자존심 짓밟고 억지로 약혼시킨 건 너희 서씨 가문 아니었어?”사업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서은주는 자신과 약혼 한 것이 진백현의 자발적 선택인 줄 알았다. 이제야 모든 걸 이해했다.“서은주, 육씨 가문과는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거야.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스케일이 아니란 말이야.”“진백현, 나도 한마디만 할게. 우리 집 건드리지 마. 안
Read more

제6화

“뭐라고들 하던가?”육강민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고등학교 때 한 남학생이 그녀 때문에 싸움이 붙었다가 퇴학당했다는 얘기가 있었죠. 진씨 가문이 어려워졌을 때는 바로 진백현 대표를 몰아붙여 약혼을 받아냈고요. 겉보기만 순진한 척하는 거지, 실상은 다릅니다.”“그냥 어린애잖아.”“이미 직장인이니, 어린애는 아니죠.”육강민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그의 시선이 서은주에 향했을 때 그녀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멎는 듯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돌렸다.“난 먼저 올라갈게.”육강민은 그렇게 말하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그와 함께 검은 색 정장을 입은 남자 두 명이 뒤따랐다.서은주는 그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 아니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굳게 다짐한 서은주는 친구들에게 잠시 볼일이 있다고 말한 뒤 무리를 빠져나온 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육강민은 각진 외모만큼이나 무척 차가운 사람이었다.“저기…”“당신은 나를 다시 찾아오지 말아야 했어.”며칠 전 그가 했던 경고가 떠오르자, 서은주는 손발이 얼어붙는 듯했다.엘리베이터가 천천히 8층에 멈췄다.이곳은 리조트 최고급 럭셔리 스위트룸. 육강민은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 고민하던 서은주는 입술을 깨물고 결국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방 안으로 들어서려는 그때, 두 남자가 길을 가로막았다.“자중하세요.”“들어오게 해.”그렇게 서은주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문이 닫혔고 육강민은 자켓을 벗어 툭 내려놓았다.“수표 때문에 왔어요.”“수표?”“그날 밤… 그…”육강민이 그녀에게 다가왔다.그에게서 은은한 향이 풍겼다. 차갑고도 위험한, 어딘가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런 향이었다. “부족하다고 느낀 건가?”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중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에는 은근한 유혹이 섞여 있어, 사람의 마음을 간질이는 기묘한 울림이 단숨에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리고도
Read more

제7화

생각해 보면, 육강민이라면 원하는 모든 것을 손쉽게 얻을 수 있을 테니 그녀 때문에 번거로움을 자초할 리가 없었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제가 경솔했어요. 더 이상 폐 끼칠 일은 없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육강민의 손은 아직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힘을 주지 못한 다리는 힘이 풀려 다시 소파로 떨어졌고, 허벅지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가 통증이 번졌다.“다리가 아직도 아픈 건가?”서은주가 답도 하기 전에,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이미 서로 모든 걸 봤던 사이라 부끄러울 건 없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서은주는 여전히 얼굴이 화끈거려 본능적으로 가리려 했다.그러나 허벅지 안쪽에 생긴 붉고 푸른 멍자국은 이미 그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육강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날 밤, 자신이 그녀를 너무나 혹독히 다뤘던 것 같다.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채 그녀가 처음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으니 절제 같은 건 있었을 리 없었다.그리고 다음날엔 일부러 말을 태웠고 승마 역시 처음인 그녀였기에 다리가 성할 리가 없었다. 여린 그녀의 새하얀 피부는 작은 충격에도 멍들이 생겨 이렇게나 선명하게 드러날 줄은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보고 있자니, 그를 짐승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 같아 가슴 언저리가 저릿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를 천천히 어르고 달래기 시작했다.힘을 준 것도 아니었지만, 서은주는 통증에 신음을 토했다.촉촉해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모습에 정신이 아찔했다.“이렇게 아픈데도 여기까지 온 건가?” 그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많이 나아졌어요.”서은주는 급히 치마를 내려 고쳐 입었다.“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그때 육강민은 다시 입을 열었다.“온천은 다리 통증에 그리도 좋다지.”서은주는 순간 멈칫하며 그를 돌아보았다.육강민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라이터를 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무슨 뜻이지?여지를 주고 있는 거?육강민의 행동에
Read more

제8화

그의 시선 변화를 감지한 서은주가 입을 열려는 그때, 그의 뒤쪽에서 누군가 말했다.“의사를 불러 드릴까요?”“필요 없다.”“근데… 이 아가씨는 왜 아직 여기에 계신 겁니까?”서은주를 발견한 육지성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육강민은 진즉에 그녀를 내쳐야 했지만, 온천까지 내어주었다. 쓰게 했으면 충분히 예우한 거다.이 정도 대우는 이례적이었고 그럼에도 이 여자는 아직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의사를 찾으시는 거면, 제가 봐드리죠.”서은주는 급히 입을 열었다.육강민이 육지성 쪽으로 눈을 흘기자, 그제야 육지성은 얌전히 입을 닫고 조용히 물러났다.“나이가 어려 보이는데, 어떻게 벌써 의사가 된 건가?”육강민이 겉옷을 벗고 그녀에게 다가왔다.그에게서 술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고 살짝 짜증 섞인 듯 넥타이를 잡아당기는 움직임이 다소 거칠었다. 서은주는 다가서서 손을 내밀어 그를 도왔다.남자는 그대로 그녀가 넥타이를 풀도록 내버려두었다.가늘고 긴 그녀의 손은 유난히 고왔다.“학창 시절 몇 학년 건너뛰었고, 학사와 석사를 연속으로 마쳐 1년째 직장 생활을 하고 있어요.”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는 그의 마음을 녹였다.“그러면 성적이 꽤 좋았겠군.”육강민은 그녀에 대해 안 좋은 소문만 들었을 뿐, 따로 알아보지 않았다.서은주는 살짝 미소 지었다.“어디가 불편하시죠?”“예전에 등을 다쳤어.”군시절 생긴 오래된 상처였고, 비가 오는 날이면 늘 불편했다.“그럼… 옷 좀 벗어 주실래요?”서은주는 용기를 내 그의 셔츠 윗단추 하나를 풀었다.그러자 목덜미와 쇄골이 선명히 드러났다.그녀의 손이 계속해서 내려가려는 순간,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단단히 눌렀다.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기다렸다는 듯이 손대는 건가?”“그런 뜻 아니에요…”서은주는 그럴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단지 진료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약혼한 지 5년이나 됬는데 진백현이 그쪽을 건드리지 않았다?”너무나 직설적인 그의 질문에 서은주는
Read more

제9화

서은주는 방을 나서며 다시 한번 그를 바라봤다.육강민은 창가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흩어지는 연기 속에서 그의 눈매는 더욱 깊고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살짝 풀린 셔츠 깃은 방탕하면서도 차분했다.“부상이 도져서 불편하신 거라면... 담배나 술로는 통증이 가라앉지 않아요. 되도록이면 끊으시는 게 좋고, 따뜻하게 찜질하셔야 해요.”그녀의 목소리는 한여름의 서늘한 바람처럼 부드럽고 차분했다. 육강민은 고개만 살짝 돌려 그녀를 보았다.나이는 어려 보이는데, 제법 가르치려는 폼은 났다.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서은주는 조용히 물러섰다.회관을 나서니 어느새 비가 부슬부슬 떨어지고 있었다.차도 없고 택시는 안쪽까지 들어올 수도 없어, 서은주는 손으로 머리를 가린 채 빗속을 작은 걸음으로 달렸다.8층 창가에서 육강민의 시선은 비가 쏟아지는 거리 속을 달려가는 그녀를 향해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그는 담배를 비벼 껐다.그러다, 그의 시선이 소파 위의 작은 물건에 향했다.서은주가 남기고 간 목걸이였다.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간 그의 입꼬리에 얄팍한 조소가 번졌다.‘일부러 놓고 간 건가? 나이는 어려도 제법이군’서은주는 혹여 그날이 마지막이 될까 걱정했다. 그래서 일부러 흔적을 남겼던 것이다.자신의 마음이 그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못했다.언젠가 그가 먼저 자신을 찾아 주기를 바랐다.하지만 육강민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진백현의 압박은 날로 심해졌고, 그 여파로 회사는 자금난에 빠졌다.집 안에서는 접시와 그릇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다.“너 백현이 만나러 간 거 아니었어! 대체 뭐라고 했어?”서진우의 목에는 핏대가 섰다.“파혼은 안 한다고 했어요.”“그럼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내 목을 조일 작정인 것이야?”“파혼 안 하는 이유는 우리 가문에 굴욕을 안겨 주고 싶어서라고 했어요.”“이 미친놈이! 어림도 없는 소리!”화가 난 서진우는 재떨이를 집어던졌다.“
Read more

제10화

육강민이 도착한 순간, 모든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서은주의 휴대폰이 진동했다.서진우의 메시지였다.[고 사장은 내 큰 고객이다. 아내한테 잡혀 사는 사람이라 감히 널 어쩌진 못 할 거다. 그냥 기분만 맞춰 드려.]그녀는 냉소를 지었다.’이게 친삼촌이라는 사람이 할 말인가?’“자. 내가 한 잔 따라줄게요.”고철주가 술잔을 건넸다.“죄송하지만 내일 수술 일정이 잡혀서 못 마셔요.”“체면도 안 세워주겠다?”서은주가 답도 하기 전에, 고철주의 손이 살짝 흔들리며 술잔이 기울었고, 술이 그녀의 원피스 위로 쏟아졌다.여름옷이라 본래 얇았기에 몸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났다.고철주는 걱정하는 척하면서 냅킨을 집어 들더니 닦아주겠다며 손을 뻗었지만, 서은주는 손을 들어 그의 손을 강하게 쳐냈다.“뭐 하시는 겁니까!”“한 성깔하시는군?”방 안의 남자들은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육강민은 술잔을 든 채, 온몸이 엉망이 된 그녀를 그저 조용히 보고만 있었다.화가 난 서은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너무 급히 움직이는 바람에 테이블 끝에 놓여 있던 오픈된 술병을 건드리고 말았다..고철주가 욕을 내뱉었다.“젠장—”술은 그의 바지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서은주!”고철주가 그녀를 노려봤다.“오늘 널 부른 건 네 씨 집안을 봐서다. 기회를 줬으면 고마워해야지!”“화 푸시지요. 고 사장님, 그저 어린 아가씨잖아요.”누군가가 옆에서 말리며 육강민이 바라보고 있으니, 이미지 깍아 먹지 말라고 눈빛을 보냈다.“어서 고 사장님께 사과드리세요.”다른 이들도 부추겼다.오늘 이 방엔 여자들도 꽤 있었고 요란하게 꾸민 그녀들의 요염한 시선이 모두 그녀를 향해 있었다.손에 든 가방을 꽉 움켜쥔 서은주는 여전히 이곳을 벗어나려 했다.하지만 고철주가 다시 불러 세웠다.“서씨 집안 사람들, 성질 한번 대단하군. 이렇게 가버리면 삼촌한테는 뭐라고 말할 건데?”그녀가 고개를 돌렸다.“뭘 원하는 거죠?”고철주는 일부러 육강민 쪽을 흘끔 바라봤다.일전
Read more
PREV
123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