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의 모든 챕터: 챕터 381 - 챕터 390

508 챕터

제381화

금영이 곁에서 나직하고 친절한 어조로 한마디 거들었다.“조금 전에는 그리도 급히 성은을 칭송하더니, 지금은 왜 이리 멍하니 서 있는 것이냐?”배명월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분해서 피라도 토할 지경이었으나, 손복안도 있는 상황에서 결국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폐하의 성은에... 감사드리옵니다.”사실 황제가 일부러 배명월을 곤란하게 만들려 한 것은 아니었다. 일국의 제왕이 여인들의 사사로운 다툼에까지 마음을 쓸 리 만무했다. 그는 그저 진심으로 배명월이 태자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다만 금영과의 일 때문에 태자의 간청을 차마 뿌리치지 못했으니, 이렇게라도 사람을 붙여 쓸 만하게 가르치려 한 것이다.황제의 의중이 무엇이든, 금영은 그 덕분에 가슴 한구석이 제법 후련해짐을 느꼈다.손복안은 곧바로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다시 금영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금영 아가씨, 잠시 따로 말씀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금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복안을 따라 한쪽으로 물러났다. 손복안은 품 안에서 정갈한 나무 상자 하나를 꺼내 두 손으로 정중히 받들어 올렸다.“폐하의 밀지입니다. 이 물건은 반드시 아가씨께 직접 전하라 명하셨습니다.”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금영은 우선 예를 갖추어 그것을 받았다.“손 태감께 수고를 끼쳤습니다.”*손복안이 떠난 뒤였다. 영안후가 금영을 쏘아보며 물었다.“손 태감이 너에게 무어라 하더냐?”“아직 멀리 가지 않으셨으니, 직접 가서 여쭈어보시지요.”금영의 서늘한 대답에 영안후의 안색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너!”“언니는 참으로 예의가 없으시네요. 어찌 아버지께 그런 식으로 불손하게 말씀하실 수 있어요?”배명월이 기다렸다는 듯 비꼬며 나섰다.그때, 공난심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언행은 삼가라. 어찌 동생이 되어서 가문의 장녀를 이토록 무례하게 꾸짖는 것이냐?”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난심의 손에 들려 있던 회초리가 배명월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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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2화

상자 안에는 정교하게 세공된 검은 옥패 하나가 놓여 있었다. 표면에는 용의 문양이 살아 움직일 듯 새겨져 있었다.굳이 설명이 없어도 그 용도를 알 수 있었다. 궁의 금문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출입패였다. 황제가 이 귀한 물건을 직접 보낸 의중은 명확했다. 친히 기다리고 있으니, 언제든 궁으로 찾아오라는 무언의 부름이었다.금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패를 비단함에 깊이 갈무리해 두었다.황제가 직접 사람을 보내 찾지 않는다면, 자신도 먼저 발걸음을 옮길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황제라는 거대한 산이 한 번쯤은 스스로 움직이게 만들어야 했다.입궁을 둘러싼 눈치싸움도 드디어 막바지에 이른 만큼, 마음을 더 차분히 다스려야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현청전.손복안이 황제 앞에 엎드려 보고했다.“폐하, 물건은 차질 없이 전해 드렸사옵니다.”황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 영민한 아가씨가 자신의 뜻을 헤아려 주기를 바랐다. 그는 제왕의 권위로 억지로 불러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부디 그녀가 제 발로 궁의 문턱을 넘어 들어오기를 바랐다.*눈 깜짝할 사이에 사흘이 지났다. 황제의 하사품이 영안후부에 당도한 뒤로, 영안후는 다시금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성심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더 이상 금영을 건드리지 못했다.배명월은 공 상궁을 비롯한 교습상궁들에게 붙들려 황실의 법도를 골수에 새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차니, 자연히 금영을 괴롭힐 여유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평온한 이른 아침, 해수가 밖에서 돌아와 분을 참지 못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아가씨, 장평군주부에서 연회 초청장이 왔다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미 말도 없이 다 떠났답니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명절이 지나면 가문 간의 왕래가 잦아지기 마련이었다. 선대 영안후의 명망 덕에 영안후부는 도성의 내로라하는 가문에서 늘 초청을 받는 집안이었다. 물론 최근에 금영이 어명을 거스르며 파혼하는 일이 있긴 했지만, 결국 배명월이 다시 태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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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3화

장평군주의 집안은 남자 열여덟 명이 모두 전장에서 전사하고, 어린 여자아이 하나만 남은 상태였다. 선황은 그 아이를 직접 궁으로 데려와 길렀다. 비록 군주에 불과했으나, 황실 안에서는 공주와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금영이 문 앞에 도착하니, 배명월이 보였다. 태자를 기다리느라 일부러 들어가지 않는 듯했다. 그런데 그녀가 나타나자,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언니가 여긴 왜 왔어요?”금영은 배명월을 힐끗 보았다. 교습상궁들이 며칠 동안 가르친 것은 전부 헛수고였던 듯했다. 배명월은 입만 열면 그 각박하고 날 선 본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차라리 예전처럼 일부러 가련한 척하던 모습이 더 보기 좋을 지경이었다.배명월이 다시 말했다.“언니 지금 신분이 뭔지 잊지 마세요. 장평군주부 같은 곳에 언니가 올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그런데 금영이 입을 열기도 전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유진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격이 있고 없고를 네가 따질 건 아닌 것 같은데?”배명월은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불꽃처럼 빨간 옷을 입은 유진설이 다가오고 있었다. 배명월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유진설과 금영이 얼마나 앙숙인지는 도성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제 유진설이 알아서 금영을 몰아붙일 테니, 자신은 구경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유진설은 가까이 다가와 금영을 바라보았다.“네가 정말 올 줄은 몰랐어.”“누가 초대했는데, 당연히 와야죠.”금영이 웃으며 대답하자 유진설은 흠칫 놀라며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흥! 웬 친한척이야?”그러자 배명월이 곁에서 고소하다는 듯 거들었다.“그러게요. 괜히 친한 척하지 마세요. 불편해하시잖아요.”유진설이 직접 부른 것이라 해도, 분명 좋은 의도는 아닐 것이라 이미 확신한 모양이었다.그때, 유진설이 배명월을 바라보았다.“배명월.”배명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러나 유진설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네가 그걸 왜 신경 써? 쓸데없이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마.”그렇게 말한 유진설은 금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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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4화

연회장에 모인 귀녀들 중에는 배명월처럼 유진설이 분명 무언가 흉계를 꾸미고 있으리라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금영은 태연히 유진설 곁에 앉았다. 생을 마감했던 그 순간, 유진설은 유일하게 금영의 정절을 믿어주고 편을 들어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치졸한 수를 쓸 것이라곤 도무지 생각되지 않았다.사실 금영과 유진설은 마주치기만 하면 맞부딪치는 사이였다. 설전을 벌이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사사건건 서로 앞자리를 다투기도 했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비겁한 수로 상대방을 해친 적은 없었다. 금영은 회귀한 뒤부터 줄곧 유진설과 가까워지고 싶었으나, 유진설이 번번이 거리를 두는 바람에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며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자리에 앉은 금영이 유진설을 바라보며 물었다.“오늘은 왜 저를 도와주셨습니까? 굳이 초청장을 보내지 않으셔도 되었을 텐데.”만약 유진설이 오늘 금영을 부르지 않았다면, 앞으로 다른 가문에서도 더 이상 금영을 초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금영의 처지는 더욱 난처해졌을 터였다. 유진설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그러는 너는, 부른다고 덥석 오니? 내가 널 곤경에 빠뜨릴 거란 생각은 안 해봤어?”“진설 아가씨께서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걸 잘 아니까요. 고마워요.”금영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모두가 금영을 잊은 듯 투명인간 취급할 때, 유진설만이 사람들 앞에서 그녀의 존재감을 일깨워 주었다.유진설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정신을 차린 듯 다시 입을 열었다.“고마워할 것 없어! 내가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좀 전에 사람들 앞에서 친한 척한 것도 다 연기야!”그러더니 짐짓 쏘아붙이듯 한마디 덧붙였다.“네가 거북이처럼 영안후부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길래, 망신이라도 주려고 부른 것뿐이라고!”그렇게 말하는 유진설의 표정은 일부러 더 못되게 일그러져 있었다.금영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유진설은 정말이지 솔직하지 못한 성미였다. 하지만 말투만 이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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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5화

금영은 최대한 태자와 거리를 두고 싶어 다시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몸을 돌리자마자 누군가와 부딪칠 뻔해 급히 몸을 틀었다.그때, 상대가 먼저 가시 돋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누군가 했더니, 금영 아가씨였군요.”금영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 요영지가 보였다. 예전 같으면 이런 연회에 초대조차 받지 못했을 신분이었으나, 이제는 이황자와의 혼인이 결정되었으니 처지가 달라진 모양이었다. 요영지가 기고만장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저라면 부끄러워서라도 사람들 앞에 나오지 못했을 텐데, 참으로 대단하시네요.”그녀는 비꼬는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덧붙였다.“예전엔 그리도 기세등등하더니, 이렇게 쉽게 태자비 자리를 포기할 줄은 몰랐답니다. 정말 스스로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진짜 적녀가 나타나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요.”금영에게 요영지는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하찮은 존재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알아서 망신을 자초하려 제 발로 눈앞에 나타나 주니,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금영이 담담하게 대꾸했다.“내 일이니 그쪽이 상관할 바는 아니지요. 나를 걱정할 시간에 본인의 앞날이나 잘 챙기세요. 듣자 하니 현비마마께서 벌써 이황자의 측비로 들일 여인을 둘이나 골라두셨다던데.”그 말은 정확히 요영지의 정곡을 찔렀다. 하지만 그녀는 물러나지 않고 날카롭게 반박했다.“그래도 저는 황실에 시집가잖아요. 당신보다 낫죠. 그쪽은 이번 생에 황실의 문턱도 밟지 못할 겁니다. 아니, 어명을 거스르고 혼사를 물린 재앙 덩어리를 어느 가문에서 받아주겠어요? 이제 천한 상인이나 일반 백성이 아니고서야 시집갈 데 없을걸요?”금영이 입을 열기도 전이었다. 유진설이 성큼 다가와 요영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금영의 팔을 낚아챘다.“배금영, 들어가려던 거 아니었어? 같이 가자. 저런 못된 것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상책이야. 안 그러면 재수 옴 붙거든.”요영지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달아올랐다.“지금 뭐라고 했어요?”“왜? 억울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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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6화

뒤에 서 있던 손복안은 황제가 금영을 본 순간부터 살얼음 같던 기분이 눈 녹듯 누그러졌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황제의 전언을 금영에게 전한 지 벌써 이틀이 지났건만, 그녀는 단 한 번도 황제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그 탓에 손복안은 이틀 내내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황제의 눈치만 살펴야 했다.한편, 장평군주 또한 금영과 유진설이 있는 방향에 머물던 황제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그제야 며칠 전 금영이 파혼을 요청했던 일이 떠올라 가슴이 철렁했다. 아무리 황제가 너그러운 성정이라 한들, 제왕의 위엄을 깎아내린 존재가 기꺼울 리 없었다.하지만 동시에 금영이 가엾게 여겨지기도 했다. 평생을 규율에 얽매여 태자비가 되기 위한 삶을 살았는데,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아무리 금영이 스스로 청한 파혼이라 하나,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그것이 금영의 진심이라 믿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송정희의 마음이 친자식인 배명월에게 기울어 뒤에서 무언가 수를 쓴 것이라 짐작할 뿐이었다.결국 장평군주는 참지 못하고 금영을 위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듣기로 금영이 그날 이후 줄곧 문밖출입을 하지 않았다 하옵니다. 진설 또한 저 아이가 울화로 병이라도 얻을까 걱정되어 오늘 억지로 초대한 것뿐입니다.”장평군주는 혹여 황제가 금영의 태연한 모습에 노여움을 살까 봐 노심초사했다.황제는 그 말에 맑은 안색을 한 금영을 힐끗 바라보며 대꾸했다.“병이라도 얻을까 걱정되었다라… 짐의 눈엔 그리 보이지 않는데?”장평군주는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가 아는 황제는 이런 일로 금영을 난처하게 만들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속으로는 불쾌할지언정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이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그의 눈빛에 원망과 서운함 같은 기색이 서려 있는 듯했다. 장평군주는 여기서 더 편을 들다간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까 싶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그런데 정무로 바쁘실 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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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7화

금영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하실 말씀이 있다면 어서 하십시오. 서둘러 돌아가야 합니다.”태자가 금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모후께서 나의 측비로 두 사람을 더 간택하시겠다고 하셨다. 이번 혼례식에 함께 태자부로 들일 것이다.”금영은 미동도 없이 그 말을 들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권력 있는 가문의 여식을 측비로 들여 세력을 확장하는 것은 황실의 흔한 수법이었다. 하지만 이 말을 왜 굳이 자신에게 전하는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금영아, 너는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내가 모후께 간청하여 너를 측비로 들이게 하마.”금영은 기가 막힌 듯 태자를 훑어보았다. 어이가 없다 못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태자 전하, 대체 무슨 망발을 하시는 겁니까? 저는 이미 전하와 파혼했습니다.”“그건 나도 안다!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너를 측비로 들일 용의가 있다. 모후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부황께 직접 청해 승낙을 받아오마. 부황께서도 원래 너를 아끼셨으니, 네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실 것이다.”금영의 시선이 밑바닥까지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래서, 하려던 말씀이 고작 이것입니까? 그렇다면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전하의 측비가 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전하와 엮이는 일조차 없을 것입니다.”태자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나와 엮이지 않겠다니, 그럼 맹운산과 인연을 맺겠다는 것이냐? 배금영! 너 설마 진작에 맹운산과 사통하고 있었던 것이냐!”금영은 태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대꾸했다.“맹운산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제가 파혼을 청한 것은 더 이상 전하를 마음에 두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하처럼 갈대같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분은 제 취향이 아니거든요.”금영은 진심으로 질렸다는 듯 태자를 바라본 뒤, 다시 마차를 향해 발을 뗐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관 신귀안은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금영이 비릿한 냉소를 지으며 쏘아붙였다.“전하께서도 하실 말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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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8화

마차를 몰던 위명이 자리에서 내려와 안내하듯 살짝 손을 들어 보였다.“금영 아가씨, 오르시지요.”황제가 직접 만나러 온 이상, 그 누구라도 피할 길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금영이 내심 바라던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니 더 피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린 뒤 망설임 없이 마차에 올랐다.휘장이 걷히는 순간, 안에서 위엄을 내뿜으며 앉아 있는 황제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한결같이 냉엄한 얼굴이었다.안으로 들어선 금영은 곧바로 예를 올리려 했다.“신녀….”“예는 됐다.”말을 끝내기도 전에 황제가 무심히 가로막았다. 금영은 얌전히 마차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곧이어 손복안이 위명 옆자리에 몸을 싣자,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좁은 공간 안에 황제의 서늘한 체취가 감돌았다.금영은 슬쩍 눈을 들어 황제를 훔쳐보았다. 감정을 가늠하기 어려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금영의 시선이 점점 대담해질 무렵, 고요를 깨고 그가 입을 열었다.“무엇을 보느냐?”금영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송구하옵니다, 폐하를 보고 있었습니다.”황제의 차가운 목소리 끝에 옅은 웃음기가 섞였다.“계속 보아도 된다. 내 허락하마.”그제야 금영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황제가 물었다.“그래,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금영의 목소리가 맑게 울렸다.“폐하께서는 참으로 준미하십니다. 어떤 명문가의 공자보다도 빼어나세요. 만일 폐하께서 몇 살만 더 젊으셨다면... 도성의 모든 여인이 폐하를 마음에 품었을 것입니다.”앞부분을 들을 때만 해도 황제는 제법 흡족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그의 안색이 다시 차갑게 가라앉았다. 금영은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 칭찬을 한 것인데 왜 또 기분이 상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금영은 잠시 머리를 굴리다 화제를 돌렸다.“폐하, 어찌 장평군주부까지 걸음하셨습니까? 그리고 무슨 연유로 신녀를 기다리고 계셨는지요?”황제가 금영을 힐끗 보았다.“왜, 짐이 온 것이 달갑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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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9화

금영이 대답을 듣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 어느새 황제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그는 요 며칠 줄곧 편히 눈을 붙이지 못했다. 실로 오랜만에 겪는 예민함이었다. 이런 기분은 선황의 기력이 쇠하며 자신을 태자로 세웠던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사방에서 이리 떼가 노려보는 듯한 긴장감에 감각은 날카롭게 곤두섰고, 잠시라도 눈을 감는 것조차 사치였던 시절이었다.당시 그는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했고, 홀로 천하를 짊어져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려 있었다. 그런데 오늘 금영을 마주하자 기이할 정도로 마음이 가라앉았다. 마치 오랫동안 비어 있던 영혼의 균열이 마침내 메워지는 듯한 기분이었다.금영은 조용히 잠든 황제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작게 미소를 지었다.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얼굴에 떠올랐다.마차는 멈출 기미 없이 한 시진을 꼬박 달렸다.그가 어디로 향하든 금영은 그저 몸을 맡길 뿐이었다. 만약 자신을 해칠 요량이었다면 굳이 이런 수고를 들일 이유가 없음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개미 한 마리 죽이는 것보다 쉬운 일이 그녀를 없애는 일일 터였다. 그랬기에 오히려 기묘할 만큼 마음이 더 평온해졌다.전날 잠을 푹 잔 탓에 눈은 말똥말똥했다. 무료함에 시선이 이리저리 흐르던 차, 황제의 허리춤에 달린 옥패가 살짝 비뚤어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금영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흐트러진 장식을 가지런히 정리했다.그때였다. 황제가 갑자기 눈을 떴다. 막 잠에서 깨어난 제왕의 눈매에는 평소와 다른 나른함이 배어 있었다.“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금영은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폐하, 깨어나셨습니까?”황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짐이 더 늦게 깼더라면, 옥대까지 풀었겠구나.”순식간에 금영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난처한 듯 서둘러 변명을 늘어놓았다.“신녀는 그저... 폐하의 옥패가 좋아 보여서...”황제는 자신의 허리춤을 한 번 내려다보더니 무심하게 대꾸했다.“그저 흔한 물건이다. 마음에 들면 네게 주마.”말을 마친 황제는 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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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0화

두 사람이 거의 맞닿을 듯 마주 서자, 당황한 금영이 급히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뒤편엔 마차 바퀴의 축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자칫 허리를 크게 부딪칠 뻔한 찰나, 황제가 그녀의 팔을 잡아 앞으로 끌어당겼다.“왜 이리 자꾸 덤벙대느냐?”그 바람에 금영의 몸이 황제의 품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갑작스럽게 좁혀진 거리감에 금영의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때는 미약의 기운에 휩쓸려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기억나는 것이라곤 파편처럼 흩어진 조각뿐이었다.뼛속 깊이 새겨진 절제와 단정함은 금영의 본능이었다. 스스로 황제를 유혹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막상 그가 먼저 다가오면 어찌할 줄 몰라 얼어붙고 말기 일쑤였다. 황제는 그런 금영을 보며 기분이 좋은지 입매를 부드럽게 끌어올렸다. 그녀가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자신을 그저 까마득한 웃어른으로만 여기지는 않는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산속의 공기는 도성보다 훨씬 서늘했다. 망토를 챙기지 못한 금영의 붉은 옷자락이 유독 얇아 보였다. 그때, 눈치 빠른 손복안이 다가와 황제를 위해 준비했던 흑색 담비 털 외투를 받쳐 들었다. 황제가 손복안을 힐끗 보았다. 그 영민함이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황제는 그 외투를 금영의 어깨에 두툼하게 둘러주었다. 그리고는 목 아래의 끈까지 직접 매어준 뒤에야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되었다.”금영은 그의 뒤를 바짝 따라 걸었다. 혹여 그녀가 뒤처질까 염려되었는지, 황제는 일부러 걸음을 늦추어 주었다. 그런데 길이 가파른 곳에 이르자 금영의 안색에 망설임이 스쳤다. 황제가 손을 내밀려던 찰나였다.“금영 아가씨,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위명이 한걸음 나서며 듬직하게 팔을 내밀었다. 금영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얼굴이었다.“위 총령, 감사합니다. 참으로 세심한 분이시군요.”금영은 위명의 팔을 빌려 가볍게 고개를 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손복안이 슬쩍 위명을 흘겨보았다. 자신도 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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