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By:  서린화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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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금영은 영안후부(永安侯府:가문 또는 귀족의 칭호로, 주로 황실과 연결된 권력 있는 가문)의 적녀였다. 흠천감(钦天监: 봉명과 길흉을 점치는 관청)의 예언에 따르면, 그녀는 태자비의 운명을 타고난 여아라 칭송받았었다. 그래서 모두가 훗날 그녀가 태자비가 되고, 마침내 황후의 자리까지 오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원래 그녀에게는 끝없는 영화가 펼쳐진 인생이 주어졌어야 했다. 그런데, 혼인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영안후부의 진짜 적녀가 돌아온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부모는 그녀를 외면했고, 오라비는 그녀를 증오했으며 태자는 그녀의 출신을 부끄러워했다. 그들은 진짜 적녀를 떠받들며 금영의 길을 하나하나 끊어냈고, 마침내 죽음으로 순결을 증명하라며 몰아세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다시 한번 삶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미약이 탄 술을 마신 상황,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으나 그녀는 과거를 떠올렸다. 순결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끊었던 그 삶을 다시 반복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순결 대신 살아남는 쪽을 택했다. 결국 도망치던 그녀는 누군가의 품에 뛰어들었고, 본능적으로 상대의 목을 끌어안으며 몸을 밀착했다. 그러자 낮고도 냉정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것이냐.” 흐릿한 시야 속에서 마주한 깊고도 차가운 눈동자. 금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폐하….” "그렇다면, 썩 물러가거라!" “부탁드립니다… 폐하, 저를… 안아주십시오.” “....” 그렇게 하룻밤으로 끝날 인연이라 여겼지만, 황제는 이미 책봉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금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떠났다. 그렇게 몇달 뒤, 그녀는 자신의 몸에 새로운 생명이 깃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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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한겨울이었다.

굵은 함박눈이 쏟아지며 작산행궁(鹊山行宫: 황제가 사냥에 나갔을 때 머무는 별궁) 전체를 집어삼키듯 덮고 있었다.

금영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앞에 서 있었다.

벼랑을 휘몰아치는 찬 바람과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열기가 마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듯 단번에 그녀를 덮쳐왔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열기는 점점 더 거세져, 이내 정신마저 삼켜버릴 정도였다.

그녀의 손에는 금비녀 하나가 꽉 쥐어져 있었는데, 이미 날카로운 날이 손바닥을 찔러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행인지 아닌지 그 통증 덕분에 그녀는 간신히 마지막 이성을 붙들고 있을 수 있었다.

바로 그때, 뒤쪽 눈 덮인 숲속에서 남자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독한 약을 먹었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야.”

“사람을 이렇게 번거롭게 만들다니. 찾아내면 아주 본때를 보여줘야겠군.”

자신이 다시 살아나다니, 그것도 순결을 지키기 위해 절벽에 몸을 던지기 직전으로 돌아오다니, 금영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원래 그녀는 영안후부(永安侯府)의 유일한 적녀(嫡女: 정실 부인에게서 태어난 딸)였다.

흠천감(钦天监: 봉명과 길흉을 점치는 관청)은 오래전 예언한 바 있었다. 영안후부에서 태자비의 운명을 지닌 여아가 태어날 것이라고 말이다.

예언과 똑같이 마침 태자가 태어나던 해에 그녀도 태어났고, 자연스레 모두가 그녀를 미래의 태자비로 여겼다.

금영의 조부 역시 확신을 가지고 황제에게 혼인 교지를 받아두기까지 했다.

그러나 삼년 전, 조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금영은 아버지를 대신해 직접 조부의 유해를 모시고 고향인 회양(淮阳)으로 내려가 삼년상을 치렀다.

상을 마치고 본가로 돌아오던 길, 그녀는 작산행궁을 지나게 되었다.

그리고 때 마침 황제도 신하들을 이끌고 이곳에서 사냥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부모와 오라비, 게다가 정혼자까지 모두 이곳에 있다는 말에 금영은 곧바로 도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작산행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녀가 정혼자이자 태자인 그의 초대를 받아, 함께 근처 설림에서 눈을 감상하기로 한 날이었다.

금영은 어릴 적부터 몸가짐을 조심해 사사로이 외간 남자를 만나는 일을 삼가왔다. 그러나 정혼자인 태자와의 약속이었고, 혼례도 머지않은 상황이었기에 기꺼이 응했다.

하지만 태자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약속 장소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웬 산적 두 명 뿐이었다.

게다가 이곳에 오기 전, 황후가 하사한 강주(姜酒: 생강 술) 한 잔을 마셨는데, 뒤늦게 그 안에 미약이 섞여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금영은 순결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즉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양다리에 큰 부상을 입은 채, 얼어 죽기 직전의 상태로 사람들에게 발견되었다.

목숨을 걸고 지킨 순결이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녀가 가장 믿었던 가족들조차 죽음으로 책임을 다하라고 등 떠밀었다.

“산적에게 붙잡힌지 하룻밤이나 지났는데, 누가 그 결백을 믿겠느냐.”

“금영아, 너만 생각하면 안 된다. 가문의 명예를 지켜야지.”

“널 아끼는 건 사실이나… 이 일은 황실의 체면이 걸린 일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그녀의 귓가를 맴돌았다.

결국 그녀는 황후가 내린, 태자비의 상징이었던 봉황이 새겨진 비녀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렇게 비녀에 영혼이 묶인 채 삼년을 떠돌았다.

금영이 죽은 지 한 달 만에, 태자는 그녀의 여동생 배명월을 배필로 맞아들였다.

붉은 비단이 영안후부와 태자부(太子府)에 깔렸고, 배명월은 금영이 자결할 때 사용했던, 바로 그 봉황 비녀를 꽂고 태자비가 되었다.

부모는 물론 오라비까지 모두 배명월을 아끼며 살뜰히 챙겼다. 마치 금영이라는 사람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가끔 그녀를 떠올리는 사람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그녀가 천벌을 받은 것이라며, 지난 열여덟 해 동안 배명월의 운명을 대신 살아온 죄값을 치른 것이라고 헛소리를 늘어놓을 뿐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렇게 금영은 모든 비극의 시발점이었던 바로 이 날로 돌아왔다.

다만 이미 그녀의 운명을 뒤틀어버린 독주를 마신 뒤였다.

금영은 다시금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열기를 느꼈고, 강제로 회상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만 도망쳐!”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얌전히 우리한테 몸을 바쳐!”

“여긴 아무도 없는 설림이다! 널 구하러 올 사람은 없어!”

차가운 바람을 타고 산적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아무도 없는 설림…?’

그 말이 번개처럼 금영의 머리를 때렸다.

‘아니야, 있어.’

회귀 전,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져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 옴짝달싹 못하던 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근처를 순찰하던 호위들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급히 산꼭대기에 있는 폐궁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황실의 군사가 움직일 정도라면, 그 존재는 분명 몹시 귀한 인물일 터였다.

지금이라면 아직 기회가 있었다. 그에게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지금 상태로 찾아간다면 순결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었다. 과거, 목숨까지 바쳐 순결을 지킨들 가족들의 손에 떠밀려 죽음을 맞이하는 길뿐이었다.

차라리 이 몸을 담보로 더 큰 권력에 기대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다시는 그런 터무니없는 명분으로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결심이 서자 금영은 비녀를 머리에 꽂고 방향을 틀었다. 그녀는 산 정상을 향해, 비틀거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작산행궁 직설전(织雪殿)은 눈 절경을 위해 지어진 전각이었으나,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폐궁이 된 곳이었다.

그녀가 직설전에 도착해 문을 여는 순간, 이미 그녀의 몸은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금영은 거의 뛰어들다시피 누군가의 품에 부딪혔고, 곧 맑고도 서늘한 소나무 향이 그녀를 감쌌다.

안에 있던 사람은 당황한 듯 반사적으로 그녀를 밀쳐내려 했다. 그러나 이미 약에 취해 이성을 잃은 금영은,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상대에게 매달렸다.

“놔라.”

아무리 밀쳐내도 다시 들러붙는 금영의 끈기에, 상대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러나 금영은 끝내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그를 끌어안으며 흐트러진 몸을 밀착시킬 뿐이었다.

아름다운 얼굴, 그러나 이성을 잃은 눈빛, 위태로운 요염함이 흘러나왔다.

“부탁이에요… 제발… 살려주세요…”

속삭이듯 흘러나온 목소리와 따뜻한 숨결에, 남자의 몸이 굳었다.

잠깐 스친 욕망에, 그는 분노를 눌러 담았다.

“방자하구나.”

낮고 냉엄한 음성이 귀 옆에서 울렸다. 그러나 금영은 물러설 수 없었다.

몸속을 갉아먹는 열기가 그녀를 미치게 하고 있었고, 남자에게서 전해져 오는 차가운 기운만이 숨통을 틔워주고 있었다.

그녀는 더욱 세게 매달렸고, 급기야 그의 옷깃을 움켜잡아 끌어당겼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것이냐?”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물었다. 억눌린 분노가 서린 목소리였다.

금영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순간, 깊은 심연 같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산하를 담은 듯 고요하고, 위엄이 서린 눈.

서른을 갓 넘긴 듯한 나이, 검은 옷차림, 범상치 않은 기운…

그제야 금영은 깨달았다.

“폐하…?!”

그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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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한겨울이었다.굵은 함박눈이 쏟아지며 작산행궁(鹊山行宫: 황제가 사냥에 나갔을 때 머무는 별궁) 전체를 집어삼키듯 덮고 있었다.금영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앞에 서 있었다.벼랑을 휘몰아치는 찬 바람과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열기가 마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듯 단번에 그녀를 덮쳐왔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열기는 점점 더 거세져, 이내 정신마저 삼켜버릴 정도였다. 그녀의 손에는 금비녀 하나가 꽉 쥐어져 있었는데, 이미 날카로운 날이 손바닥을 찔러 피가 흐르고 있었다.다행인지 아닌지 그 통증 덕분에 그녀는 간신히 마지막 이성을 붙들고 있을 수 있었다. 바로 그때, 뒤쪽 눈 덮인 숲속에서 남자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독한 약을 먹었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야.”“사람을 이렇게 번거롭게 만들다니. 찾아내면 아주 본때를 보여줘야겠군.”자신이 다시 살아나다니, 그것도 순결을 지키기 위해 절벽에 몸을 던지기 직전으로 돌아오다니, 금영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원래 그녀는 영안후부(永安侯府)의 유일한 적녀(嫡女: 정실 부인에게서 태어난 딸)였다.흠천감(钦天监: 봉명과 길흉을 점치는 관청)은 오래전 예언한 바 있었다. 영안후부에서 태자비의 운명을 지닌 여아가 태어날 것이라고 말이다.예언과 똑같이 마침 태자가 태어나던 해에 그녀도 태어났고, 자연스레 모두가 그녀를 미래의 태자비로 여겼다. 금영의 조부 역시 확신을 가지고 황제에게 혼인 교지를 받아두기까지 했다.그러나 삼년 전, 조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금영은 아버지를 대신해 직접 조부의 유해를 모시고 고향인 회양(淮阳)으로 내려가 삼년상을 치렀다.상을 마치고 본가로 돌아오던 길, 그녀는 작산행궁을 지나게 되었다.그리고 때 마침 황제도 신하들을 이끌고 이곳에서 사냥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부모와 오라비, 게다가 정혼자까지 모두 이곳에 있다는 말에 금영은 곧바로 도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작산행궁으로 향했다.그리고 오늘은 그녀가 정혼자이자 태자인 그의 초대를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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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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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배경천은 금영의 태도가 몹시 못마땅했다. 그러나 영안후부는 본래 규율이 엄격한 집안이기에, 아무리 불만이 커도 지금은 더 말할 수 없는 배경천은 그저 냉소만 흘리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그가 나가자마자, 해수는 곧바로 문을 닫고 금영의 옷시중을 들려 했다. 하지만 금영은 그녀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너는 먼저 나가 있거라. 옷은 내가 알아서 갈아입을 테니.”담담한 말투였지만, 해수는 잠시 머뭇거렸다. 어제 설림에서 돌아온 뒤로 금영이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의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는 법, 결국 준비해 온 옷가지들을 침상 곁에 내려놓고 조용히 물러났다.방 안에 혼자 남자, 금영은 천천히 겉옷을 벗어냈다. 눈처럼 흰 살결 위로 퍼진 것은 온통 푸르스름한 흔적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얼굴이 미묘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회귀 전에도 그러했듯, 그녀는 여전히 어린 축에 속한 규수였고 이런 일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약에 취해 이성을 잃은 그녀가 부추긴 탓도 있겠지만, 그 냉정해 보이던 황제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금영은 애써 어제 상황을 머리에서 지우며 재빨리 옷으로 몸에 남은 흔적을 모두 가렸다.그리고는 혹시라도 놓친 부분이 없는지 거울 속에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검은 비단처럼 윤기 나는 머릿결이 푸른 빛을 띠는 옷자락 위로 떨어뜨린 모습, 그녀는 어느 때보다 단정하고 청아했다. 어제 황제를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예법 준수에 아주 철저한 명문가 규수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저 겉모습일 뿐, 과거 규율과 순결을 목숨보다 중히 여겼던 그녀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녀는 이제 살아남기 위해 못할 것이 없었다. 순결, 명성, 규범이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깨부술 생각이었다. 다시는 가문의 체면 따위를 들먹이며 압박하려는 이들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었다.금영은 거울 앞에 앉은 채 결의를 다졌다. 그렇게 잠시, 밖에서 해수가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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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금영은 그 모습을 보고, 자연스레 봉황이 새겨진 비녀를 살짝 고쳐 쥐었다. 그 비녀는 선대 영안후가 금영을 위해 사혼 교지를 받아낼 때, 황후가 내려준 것으로 태자비의 신분을 상징하는 신물(信物: 상징적 물건)이었다. 또한 회귀 전, 그녀가 스스로를 해치는 데 사용했던 물건이기도 했다.태자는 금영을 본 순간, 잠시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모두가 금영을 태자비라 여겼고,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런 금영의 앞에서 다른 여인과 가까이 있는 모습을 보이게 되니,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이 스쳤다.그러나 그는 태자였다. 그는 짧은 동요를 누른 뒤, 곧 평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여긴 어쩐 일이냐? 설마 나 때문에 온 것이냐?”이 말과 함께 태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설명하는 말투에는 엷은 짜증이 섞여 있었다.“명월이가 손을 다쳤다고 들어 잠시 들렀을 뿐이다. 괜한 생각하지 말거라.”금영이 입을 열었다.“괜한 염려이십니다. 전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제 의지로 온 것이 아닙니다. 둘째 오라버니께서 강제로 끌고 오신 겁니다.”금영은 분명하게 말했다. 괜히 태자 때문에 이곳에 온 것처럼 오해받는 피곤한 상황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금영의 말에 배경천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금영을 데리고 이곳에 온 원래 목적이 떠오르자, 그는 곧바로 재촉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명월에게 사과하지 않을 셈이냐!”금영은 배경천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잘못한 게 없으니, 사과할 일도 없습니다.”“아직도 인정 못하는 것이냐? 네가 아니었으면 명월이가 이렇게까지 다칠 일이 없었을 것 아니냐!”배경천이 성급하게 따져 물었다.“자신이 저지른 일로 벌을 받다가 촛대를 엎질렀는데, 왜 그 책임을 저에게 돌리는 것입니까?”금영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네 탓이 아니면, 누구 탓이란 말이냐! 네가 일러바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께서 이 일을 알았겠느냐!”“둘째 오라버니, 저 때문에 언니와 다투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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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서 황후는 얼굴을 굳힌 채 입을 열었다.“아무리 국사가 바쁘다 하나, 한창 혈기 왕성할 나이에 후궁에 드나드는 일이 드물어 걱정하고 있었는데... 웬 정체도 모를 천한 계집이 그 빈틈을 파고들 줄은 몰랐군.”곁에서 시중 들던 궁녀 조씨가 서 황후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마마,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 내무부 쪽 말로는, 폐하께서도 그 여인을 특별히 중히 여기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폐하께서 그 여인을 중히 여기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서 황후의 목소리는 어느새 낮고 차가워져 있었다.“중요한 건, 그 여인이 내 손아귀에 있지 않다는 거지. 이러다 몇 달 뒤에 출신도 모를 핏줄이 불쑥 튀어나오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 당장 샅샅이 찾아보거라.”서 황후가 얼음처럼 서늘한 기운을 풍기며 말하던 그때, 밖에서 외침이 들려왔다.“황제 폐하께서 납시오!”곧 황제가 들어서자, 서 황후는 그제야 표정을 풀며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폐하, 오셨습니까.”서 황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의 어깨에 걸쳐 있던 망토를 풀어 한쪽에 걸었다. 황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고, 서 황후는 곧바로 궁녀를 불러 차를 올리게 했다.황제가 차를 마시는 동안, 서 황후는 은근히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다 황제의 입술에 난 작은 상처를 발견하고는, 순간 놀라 잠시 시선을 떼지 못했다.“황후.”황제가 미간을 좁히며 불렀다.그제야 서 황후는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말했다.“예, 폐하. 부르셨습니까?”황제는 황후에게 비교적 인내심을 보이는 편이라, 다시 입을 열었다.“태자도 이제 나이가 찼고, 영안후부의 여식도 돌아왔다고 하더군. 혼사도 이미 한참 전에 정해진 마당에, 치를 때가 되지 않았는가?”서 황후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머뭇거렸다.그러자 황제의 눈썹을 찌푸렸다.“무슨 문제가 있는가? 아니면 그 여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가?”서 황후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폐하께서 정해주신 혼사인데, 제가 어찌 불만을 가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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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그렇게 금영은 전각 밖에서 몰아치는 눈보라를 맞이며, 꼬박 반 시진(时辰: 시간 단위, 한 시진은 2시간)이나 기다렸다.몸이 거의 얼어붙을 즈음, 마침내 전각 안에서 기척이 들려왔다.“마마께서 들라 하십니다.”금영은 굳어 버린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안으로 들어갔다.서봉거 안, 서황후는 상석에 앉아 금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서황후는 이제 막 서른을 넘긴 나이였으나, 몸가짐을 잘 가꾼 덕에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태자 소헌은 그녀가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낳은 유일한 핏줄이었다.“금영아, 왔느냐. 이리 가까이 오너라.”서황후의 눈빛은 꽤나 온화했다.금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가 서황후 곁에 앉았다.“회양에서 삼 년을 지냈다 들었는데, 어땠느냐?”“마마의 염려 덕에 잘 지냈습니다.”서황후는 이런저런 말을 던졌고, 금영은 규범에 맞춰 대답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서황후가 감탄하듯 입을 열었다.“참으로 기특한 아이다. 본궁은 네가 어서 소헌과 혼례를 치르고, 내 며느리가 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단다.”그 말에 금영의 얼굴이 붉어졌다.서황후는 다시 말을 이었다.“허나 이제 막 집으로 돌아왔으니, 바로 시집보내는 건 너희 부모가 많이 아쉬울 것이다. 그러니 당분간은 집에 머물며 어른들을 잘 모시거라. 태자와의 혼사는 급할 것 없다.”그 말을 듣는 순간, 금영의 눈썹이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돌려 말했을 뿐, 당장 혼약을 드러내지 말라는 뜻이기 때문이었다.금영은 고분고분한 얼굴로 대답했다.“모든 것은 마마의 뜻을 따르겠습니다.”서황후는 금영의 손을 잡았다.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참으로 말 잘 듣는 아이로구나.”서황후의 손은 따뜻했으나, 금영은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마치 서늘한 기운이 그 손을 타고 전해지는 듯했다.“손이 왜 이렇게 찬 것이냐? 어제 본궁이 보낸 강주를 마시지 않았던 것이냐?”그 말에 금영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강주, 미약이 섞였던 그 술이었다. 금영은 서황후를 바라보았다. 서황후의 표정은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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