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과거, 금영은 영안후부(永安侯府:가문 또는 귀족의 칭호로, 주로 황실과 연결된 권력 있는 가문)의 적녀였다. 흠천감(钦天监: 봉명과 길흉을 점치는 관청)의 예언에 따르면, 그녀는 태자비의 운명을 타고난 여아라 칭송받았었다. 그래서 모두가 훗날 그녀가 태자비가 되고, 마침내 황후의 자리까지 오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원래 그녀에게는 끝없는 영화가 펼쳐진 인생이 주어졌어야 했다. 그런데, 혼인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영안후부의 진짜 적녀가 돌아온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부모는 그녀를 외면했고, 오라비는 그녀를 증오했으며 태자는 그녀의 출신을 부끄러워했다. 그들은 진짜 적녀를 떠받들며 금영의 길을 하나하나 끊어냈고, 마침내 죽음으로 순결을 증명하라며 몰아세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다시 한번 삶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미약이 탄 술을 마신 상황,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으나 그녀는 과거를 떠올렸다. 순결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끊었던 그 삶을 다시 반복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순결 대신 살아남는 쪽을 택했다. 결국 도망치던 그녀는 누군가의 품에 뛰어들었고, 본능적으로 상대의 목을 끌어안으며 몸을 밀착했다. 그러자 낮고도 냉정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것이냐.” 흐릿한 시야 속에서 마주한 깊고도 차가운 눈동자. 금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폐하….” "그렇다면, 썩 물러가거라!" “부탁드립니다… 폐하, 저를… 안아주십시오.” “....” 그렇게 하룻밤으로 끝날 인연이라 여겼지만, 황제는 이미 책봉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금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떠났다. 그렇게 몇달 뒤, 그녀는 자신의 몸에 새로운 생명이 깃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View More금영이 얌전히 내전으로 들어가자, 황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이제 더는 그녀가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씩 기분이 풀리며 슬며시 안도감이 든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지난날 금영이 자신을 볼 때마다 어째서 그토록 두려워했는지도 알게 되었다.그는 업무 보는 자리로 돌아와 차분히 상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느덧 밤이 깊어졌다.손복안이 들어와 촛불 심지를 다듬고 몸을 덥히는 차까지 올린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 이제 쉬셔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옥체를 돌보셔야지요.”손복안은 넌지시 황제에게 권했다.황제는 고개를 끄덕인 뒤, 손에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본 손복안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내전에는 자고 있는 금영 때문에 작은 등불 하나만 남아 있었다. 황제가 침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금영이 이불을 덮은 채, 늘 그가 잠들던 침상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그 순간, 묘한 감정이 속에서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사실 제왕인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금영의 뜻 따위 상관없이 얼마든지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는 금영이 권세로 억지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선택하길 바랐다.*금영은 머리맡에서 황제의 인기척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흐트러진 침구를 다시 다듬어주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시 침실을 나갔다.그녀는 마음 한구석에 스치는 아쉬움을 느끼며 살짝 눈을 떴다. 직설전에서 직접 겪은 일이 아니었다면, 진작 황제의 몸에 문제가 생겼다는 세간의 소문을 믿었을지도 몰랐다.오늘 밤에는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금영은 그제야 서서히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다음날 아침.현청전에 당직을 서러 온 위명이 손복안을 불렀다."손 태감."그러자 손복안이 황급히 쉿하는 손짓을 했다."목소리 낮추세요.
황제는 평소 거창한 식사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수라상에도 특별히 진귀한 음식은 없었고, 고기와 채소가 골고루 갖춰진 평범한 요리들이 주를 이루었다.손복안은 황제 곁에 서서 시중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금영이 다가오는 기척이 들리자 고개를 들었다.그제야 손복안도 금영의 맨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멈칫하며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노련한 내관답게 순식간에 표정을 가다듬고는 금영에게 예를 올렸다."오셨습니까, 금영 아가씨."그의 담담한 인사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요 며칠 황제가 그녀를 찾느라 위명과 손복안을 적잖이 부렸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무렇지 않게 마주하자니, 쉽지 않았다."뭘 멍하니 서 있느냐? 어서 수저를 들지 않고."황제가 말하자, 금영은 얌전히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우연인지 아닌지, 이번에도 상 위엔 익숙한 연근으로 만들어진 여러 요리들이 올려져 있었다.황제가 젓가락을 들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자신의 그릇에 요리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금영부터 챙기기 시작했다.그가 가장 먼저 그릇에 올려놓은 것은 금영이 전에도 즐겨 먹던 연근떡과 연꽃전이었다.금영은 문득 가슴 한켠이 갑갑해졌다. 황제는 금영의 아버지인 영안후보다 더 자세히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았다.황제는 반찬을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는 금영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설마... 내 배려가 싫은 건가?'그런 생각이 스치자, 황제는 입을 열었다."네 마음이 어지러운 것도 이해한다만...."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짐은 분명 너에게 선택지를 주지 않았느냐? 억지로 몰아붙이지 않을 테니, 걱정 말거라."곁에 있던 손복안은 그 말을 듣고 최대한 자신의 존재감을 지우듯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황제가 이토록 온화한 태도를 보이다니,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왕은 본디 누군가를 배려할 필요가 없는 자리였다.그런데 황제는 금영을 생각
금영은 일부러 아무것도 못 알아챈 듯 황제를 바라보며 담담히 답했다."네. 폐하께서 신녀의 목숨을 거두신다고 해도, 조금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옵니다."그러자 황제가 낮게 웃었다."짐은 네 목숨을 원하지 않는다."그가 바라는 건 목숨 같은 것이 아니었다."짐이 원하는 것은...."황제가 말끝을 잠시 흐리며 뜸을 들였다.금영은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를 듯했다.곧이어 그가 말을 이었다."이 일을 어떻게 할지는 네가 직접 정하거라."직접 정하라니, 금영은 황제의 의도가 쉽사리 짐작되지 않았다.이때, 그가 금영에게 손을 내밀었다."일어나거라."황제는 금영을 이 차가운 바닥에 계속 무릎 꿇은 채로 두고 싶지 않았다. 한기가 몸에 스며들면 이 원사가 지어온 약도 효과를 볼 수 없을 터였다.금영은 황제의 길고도 단단한 손가락을 잠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손을 맞잡지는 않고,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황제가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 건 맞지만, 아직 선을 완전히 넘은 것은 아니었다. 이때 지나치게 다가갈 경우 도리어 경박해 보일 수도 있었다.비록 그가 자신에게 마음을 품은 것은 확실해졌으나, 금영은 아직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싫증 나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그녀가 원하는 것은 일시적인 흥미가 아니라,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그런 마음이었다.황제는 금영의 행동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낮게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금영은 본래 단정하고 예를 아는 성정이었다. 그러니 이런 때일수록 그를 멀리하려 드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그런데 문득 황제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러자 금영이 맨발인 상태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침상에서 다급하게 나오느라 미처 신발까진 챙기지 못한 모양이었다.'그렇게 궁금했나...? 아니면 설마 태자 때문에?'여기까지 생각하자, 황제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금영은 황제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역시 제왕의 비위를 맞
황제는 금영의 얼굴을 덮고 있는 면사를 풀어내려 했지만, 얼마나 단단히 매어 것인지 쉽지 않았다.그는 이 상황이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났다. 금영이 얼굴을 가리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황제는 포기하지 않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계속 매듭을 풀어나갔다. 금영 역시 꼼짝하지 않은 채, 그가 움직이는 대로 가만히 몸을 맡겼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마침내 그의 손길이 멈췄다. 스르르 풀려내린 면사와 함께 금영의 얼굴도 드러났다.금영은 오랜만에 맨얼굴이 된 탓인지 살짝 허전함을 느꼈다. 작산행궁을 떠난 뒤로는 좀처럼 벗은 적 없던 면사가, 결국 황제의 손으로 풀려난 것이다.드러난 금영의 얼굴은 묘한 색기와 함께 화사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마치 봄날 이슬을 머금은 작약꽃 같았다.작약은 모란처럼 화려하고 귀한 꽃은 아니었지만, 대신 더 맑고 선명한 아름다움을 지닌 꽃이었다.황제는 그제야 금영이 자신이 기억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몇 해 전 처음 입궁해 자신을 알현했을 때만 해도 앳되고 귀여운 인상이었는데, 어느새 이토록 눈부시게 자라나 있었다.면사를 쓴 금영은 늘 단정하고 귀녀다운 모습만 보여 주었기에, 그 아래에 이런 얼굴을 감추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토록 제멋대로 굴던 영지와 같은 사람이라니, 더욱 뜻밖의 일이었다.황제는 가만히 금영을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금영은 무릎 꿇고 있던 자세가 살짝 흐트러져 거의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자신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황제의 시선을 느끼며, 금영도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황제의 표정은 여전히 읽기 어려웠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적어도 그 눈빛 어디에도 노여움이나 살기는 어려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그녀가 공들여 온 수고가 아주 헛되지는 않은 듯했다.금영이 고개를 들자 가느다란 목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그 모습을 본 황제는 속으로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수많은 미인을 보아 온 그에게도 금영의 외모는 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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