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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주문춘귀: Chapter 291 - Chapter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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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1화

“나가 있거라.”심서준의 싸늘한 음성과 함께 문하는 거의 뛰다시피 해서 밖으로 나왔다.따뜻한 등불이 아른거리며 방안을 비추고 창가에서는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와서 식탁 모퉁이를 스쳤다.심서준은 고개를 숙여 손에 든 귀걸이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눈에는 어느새 핏발이 서고 손끝이 떨렸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여 식탁에 이마를 기댔다.평소 단정하고 정갈함을 신경 쓰던 사람인데 지금은 그저 초라하고 피폐해 보이기까지 했다.밖에 있던 문하는 안에서 뭔가가 깨지는 소리를 듣고 놀라 어깨를 움찔 떨었다.‘오늘 밤을 무사히 지나가야 할 텐데.’그는 계연수가 왜 그랬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한번 화리까지 한 여인이 어찌하여 이리도 매정하게 심서준처럼 귀한 분을 거절한단 말인가.정녕 그 귀걸이의 의미를 몰랐던 것일까?귀한 집에서 자란 명창군주도 심서준에게 한번 잘 보이기 위해 하루가 멀다하고 황후궁에 드나들고 있었다.‘참 이해할 수 없는 분이야.’문하 역시 계연수가 심서준이 무서워 도망치려 한다고 생각했다.한편, 용춘은 은자를 들고 기분 좋게 저택으로 돌아왔다. 계연수는 용춘이 갖고 돌아온 은자를 보며 알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용춘은 신이 나서 길에서 문하를 만난 일을 이야기했다.순간 계연수는 가슴이 철렁해서 다급한 어투로 그녀에게 물었다.“혹시 그에게 뭐 하러 가는지 얘기했니?”용춘이 웃으며 말했다.“제가 그렇게 눈치가 없는 사람이겠어요? 귀걸이는 그림에서 떨어진 건데 당연히 말을 안 했지요.”계연수는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하게 세수를 마친 후,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혜란원으로 향했다.원래는 고씨 노부인이 저녁에 간단한 가족 연회를 열자고 하셨는데 계연수는 내일 아침 빨리 출발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너무 급하게 떠난다는 감이 있기는 했지만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고씨는 평소와 다르게 깔끔하게 옷을 차려 입고 머리를 정갈하게 빗은 모습이었다.계연수는 며칠 전보다 많이 좋아진 어머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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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2화

고씨는 시녀가 건넨 그릇을 받아 계연수의 앞으로 내밀었다.“먹어 보렴.”계연수는 고개를 저었다.“보신탕인데 몸도 안 좋으신 어머니가 드세요. 어머니 몸상태가 좋아야지 가는 길이 순조롭죠.”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고씨도 딸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기에 수심 가득한 눈을 하고서 조용히 탕을 마셨다.계연수는 작은 소리로 내일의 여정에 관해 어머니께 이야기했다.“이곳에 도착하면 수로로 가야 할 거예요. 여긴 풍경이 좋으니 며칠 머무르며 감상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이는 떠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꼼꼼히 알아보고 세운 계획이었다.어머니는 걱정이 많고 약간의 어려움에 부딪쳐도 도망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얘기를 어머니께 하는 것도 모두 준비가 되어 있으니 안심하라는 의미에서였다. 약간의 변수는 있겠지만 준비가 철저한 이상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고씨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계연수의 이야기를 들었다.질 안 좋은 촛대가 타며 독한 냄새가 풍겼다. 장씨가 혜란원에 보낸 촛대는 불빛이 어둡고 연기가 많은 저렴한 촛대였다.저렴하더라도 향료를 섞어 비린내를 중화시키면 되는데 방 안에서 타는 촛대는 향료도 추가하지 않은 가장 품질이 안 좋은 초였다. 그러나 고씨는 삼년 동안 늘 사용하던 것이었기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녀는 어두운 빛 아래에서 차를 마시며 신이 나서 이야기하는 딸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소박한 차림을 하고 있어도 빼어난 용모를 가리지는 못했다. 초승달을 닮은 눈썹과 빨간 입술을 보고 있자니, 돌아가신 계연수의 아버지가 떠올랐다.계연수는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의 외모를 더 닮은 아이였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보고 있자니 돌아가신 부군을 다시 보는 기분이었다. 아무런 걱정 말고 따라오기만 하라던 사람, 그 사람과 함께 걸으면 무엇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지금의 계연수는 그 사람을 많이 닮아 있었다.그녀 역시 이제는 홀로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갖게 된 것 같았다.고씨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눈물이 나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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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3화

계연수는 어머니와 함께 밤길을 걷고 있었다. 고씨의 얼굴이 약간 창백했다. 그녀는 힘이 풀린 듯, 계연수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휘청거리며 걷고 있었다.어머니는 내일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슬픔에 잠긴 듯했다. 원래도 감성적인 성격인데 외할머니와의 이별이 유난히 마음 아플 것이다. 그녀는 시녀를 시켜 잘 부축하라고 일렀다.혜란원으로 돌아온 계연수는 어머니를 부축하여 침상에 눕혔다. 그녀는 피곤한 듯 잠에 든 어머니를 한참 바라보다가 조용히 방을 나왔다.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그녀는 목욕을 마치고 침상에 누웠다.이날 밤, 계연수는 꿈에서 심서준을 보았다.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늘 속을 알 수 없고 싸늘하던 눈동자가 이글거리는 눈빛을 하고서 그녀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다가왔다.귓가에 닿은 뜨거운 숨결에 몸이 화끈 달아오르고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낯선 느낌에 계연수는 화들짝 놀라 꿈에서 깼다. 방 안에는 희미한 촛불만 하늘거리고 있었다.그녀는 멍하니 이불 한쪽 끝을 잡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랬다.꿈속에서 그의 입술과 맞닿던 순간, 그 촉촉한 촉감은 어딘가 모르게 익숙했다.계연수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왜 그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심서준처럼 고귀한 사람이 그녀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서 낮게 깔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꿈이라니.그녀가 아는 심서준은 늘 엄숙하고 근엄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꿈속에서 본 것과 같은 행동을 할 리가 없었다.계연수는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뛰는 가슴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왜 이런 꿈을 꾸었는지 수치심에 견딜 수 없었다.‘내가 어쩌다가….’그녀는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한번도 그를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내일 출발해야 하는데.’다시 잠들려고 눈을 감은 순간,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가림막을 열어보니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춘화가 뛰어들어와 흐느끼며 소리쳤다.“아가씨, 큰일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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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4화

“덜컥 겁이 나서 아가씨 처소로 바로 달려갔죠. 부인은 늘 몸상태가 안 좋으셨지만 오늘처럼 피를 토한 적은 없으셨어요.”계연수는 고개를 돌려 창백하게 질린 어머니의 안색을 바라보았다.오늘 저녁까지 상태가 괜찮아 보였는데 왜 떠나기 직전에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긴 걸까.용춘은 문지기를 시켜 말을 타고 가서 의원을 모셔오도록 했다.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멍하니 있는 계연수를 보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 마세요, 아가씨. 의원이 곧 도착하실 거예요.”계연수는 이마를 짚고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목안이 썼다.춘화가 흐느끼듯 물었다.“큰 부인께 알려야 할까요?”계연수는 멈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잠시 후, 의원이 안으로 들었다. 계연수는 시녀를 시켜 초를 추가하게 하고 불을 밝혔다. 늙은 의원은 얼른 소매를 걷고 다가가서 고씨의 진맥을 보았다.방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하고 모두의 시선이 의원에게 쏠려 있었다.의원은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하더니 고개를 들고 최근 고씨의 상태를 물었다.춘화로부터 자세한 사정을 들은 의원은 긴 한숨을 쉬더니 계연수에게 말했다.“맥상으로 보아 기가 허하고 간에 울혈이 있는 듯합니다. 감정기복이 심하여 기혈이 막히면서 피를 토하신 것 같군요.”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부인은 워낙 몸이 허약하신데 근래 들어 고민이 많으셨나 봅니다. 우울감이 쌓여서 생긴 마음의 병이니, 약도 약이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을 편안히 하셔야 합니다.”의원이 물었다.“근래 부인 신변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까?”마음의 병, 계연수는 잠깐 멈칫했다.그녀가 뭐라 하기도 전에 밖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싸늘한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장씨가 시녀들을 거느리고 찾아온 것이다.아마 말을 사용해야 해서 허락을 받으러 간 문지기로부터 소식을 들은 듯했다.장씨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침상을 바라보더니 의원에게 말했다.“생각이야 늘 많은 사람이지.”“스스로 고민에 빠져서 주변사람들까지 걱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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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5화

장씨의 각박한 말이 귓가에 울리자, 계연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그녀는 자신이 계속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일수록 사람들의 비난이 거세질 것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그녀의 선택을 자업자득이라며 손가락질할 것이다.그녀는 자신이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믿었다. 화리도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렇게 쉽게 무너져 사람들에게 얕보이고 싶지도 않았다.의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직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손끝이 떨리고 눈물이 당장 흐를 것 같았지만 계연수는 꾹 참고 억지로 울음을 삼켰다. 고개를 돌린 그녀는 춘화에게 가서 처방대로 약을 받아오라고 이른 후, 따뜻한 물을 가져와 어머니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방 안에 화로도 두 개 더 들여놓았다.장씨는 계연수가 말이 없자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정성껏 보살피거라. 예전에 사씨 가문에서 찾아와 좋게 이야기하자고 할 때는 고집을 피우더니. 네 어머니도 너 때문에 울화가 쌓여 이렇게 된 것 아니냐. 어머니 성격을 뻔히 아는 애가 대체 왜 그렇게 고집을 피웠는지 이해할 수 없구나.”“네 아버지가 변을 당했을 때, 상심에 빠져 아버지를 따라간다고 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네 화리 얘기를 듣고 마음이 편했을 리가 있겠어?”옆에서 듣고 있던 용춘은 가슴이 쓰라렸다. 장씨는 계연수의 외숙모로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가장 각박한 말로 계연수의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계연수는 이 집에 온 이후로 무슨 일이든 큰댁에 도움을 청한 적이 없고 집안의 은자를 쓴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장씨는 올 때마다 각박한 말만 늘어놓았다.이 처소는 예전에 고씨가 살던 곳이었다. 노부인도 딸이 이곳에서 오래 머물기를 바라는데 장씨가 무슨 자격으로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계연수는 용춘의 굳은 표정을 보고 가볍게 그녀의 손을 다독였다. 그러고는 장씨를 바라보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화리는 사씨 가문에서 먼저 신뢰를 저버렸기에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서 제가 고집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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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6화

“네 어머니를 돌보는 일에 대해서는 너도 그리 부담 가질 것 없다. 가족인데 우리가 가만히 지켜만 보겠느냐?”말을 마친 장씨는 계연수의 표정을 살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목탄을 좀 더 가져오라고 이르마. 지금 네 어머니의 몸 상태로 풍한이 들면 큰일이니.”용춘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계연수는 가족끼리 정을 생각해서 내색을 안 했겠지만, 그녀는 참을 수 없었다.그녀는 앞으로 나서서 장씨에게 예를 행하고는 말했다.“큰 부인, 목탄에 대해서는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아가씨가 일전에 사둔 목탄이 아직 많이 남았거든요. 며칠 더 써도 충분합니다.”용춘은 대놓고 장씨가 질 나쁜 목탄을 보내주어서 계연수가 스스로 마련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냄새가 지독한 초는 그렇다 쳐도 질 나쁜 목탄을 쓰면 방 안에 연기가 가득 찰 텐데 환자가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계연수는 가족끼리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고 또한 어쨌든 고씨 집안의 돈으로 마련한 것이니 불만을 표하지 않았지만, 고씨의 상태로 하급 목탄을 계속 사용할 수는 없었다.고씨가 혜란원에서 지내는 동안 매년 계연수는 제 돈을 들여 혜란원에서 쓸 목탄을 마련했다. 그러나 장씨는 그런 건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장씨는 용춘의 말을 듣고 표정이 굳었다. 어린 시녀가 갑자기 모시는 분들 이야기하는데 끼어들어 이런 말을 하는데 못 알아듣는 것이 이상했다.‘목탄이 적다고, 질이 안 좋다고 불만인 거야?’장씨는 공짜로 신세를 지는 주제에 대체 무슨 불만이 왜 이리 많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계연수가 먼저 필요 없다고 했으니 남은 은자로 고윤희가 입을 봄옷을 몇 벌 지어입히면 될 것이다.어차피 딸이 곧 귀한 집에 시집을 갈 터인데 일개 시녀와 입씨름을 벌일 필요는 없었다.장씨는 그런 생각을 하며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네가 스스로 목탄을 사서 쓰는 줄은 나도 몰랐구나. 뭐, 차라리 잘된 거겠지.”“참으로 세심하고 준비성이 철저하구나. 내가 소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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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7화

계연수는 춘화에게서 처방을 받아 살펴보았다. 몸보신에 좋은 귀한 약재를 쓰다 보니 비싼 게 당연했다.어머니가 기력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뭐든 상관없었다.시녀가 들어와서 이불자리를 갈고 고씨에게 깨끗한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탕약이 다 끓자 벌써 날이 밝고 있었다.계연수는 침상에 앉아 어머니에게 탕약을 떠먹여주었다.용춘이 화로에 목탄을 더하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당분간은 출발할 수 없게 되었네요.”계연수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오늘 떠나기로 한 것은 이미 물 건너갔다. 하지만 장기간 이곳에 머물 수도 없었다. 어머니 상태가 안 좋기는 하지만, 이곳에 계속 머물고 싶지 않았다.한편, 심씨 저택.심서준은 밤새 잠도 안 자고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그의 책상 위에는 귀걸이가 든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는 냉랭한 눈으로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귀걸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밖에서 날이 어슴푸레 밝아오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 그는 문하를 불러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떠났느냐.”문하가 다급히 다가오며 고했다.“아직 소식이 없는 것을 보아 떠난 것 같지 않습니다.”심서준은 입술을 깨물고 지도 위에 표시한 휘안현의 위치를 바라보았다.경성에서 천리는 떨어져 있는 곳이니 말을 타고 가더라도 최소 일주일이 걸릴 거리였다.경성에서 공무를 보는 그가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내어 그녀를 보러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심서준은 조용히 지도를 쓰다듬었다. 이 상황에서도 그녀를 보러 갈 생각을 하다니.하지만 보러 간들 뭐가 달라질까.그녀가 이렇게 결연히 떠나려 하는 것은 그를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그녀는 혼인을 거부하고 자유를 원했다. 이는 그녀의 선택이었다.심서준이 말이 없자, 문하는 조용히 물러갔다.그는 어젯밤 돌아온 이후로 서재에 틀어박혀 있더니 날이 밝자마자 계연수가 떠났는지부터 물었다.문하는 그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그는 계연수가 떠난다는 사실이 괴로우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만류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하지만 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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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8화

심서준은 평소처럼 인사를 들이러 어머니의 처소로 향했다. 인덕원에는 큰댁 식솔들이 이미 모여 있었다.큰 부인 백씨와 그녀의 며느리들이 심씨 노부인 곁에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심서준이 안으로 들자 방 안은 즉시 고요해졌다. 노부인은 다가오는 아들을 보더니 말했다.“며칠 후면 날이 따뜻해질 테니 뒤뜰에 꽃들이 만개하겠구나. 네 형수가 시회(詩會: 사람들이 모여 꽃을 감상하고 시를 짓는 모임)를 열고 싶다고 하는데, 사람이 많을수록 북적거릴 테니 혹시 초대하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 연수가 시를 잘 짓는다고 하던데, 연수도 부르는 게 어떻겠니?”심서준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바로 밖으로 나갔다.심씨 노부인은 싸늘한 표정의 아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당연히 좋다고 할 줄 알았더니.’지난번 일이 있고서 노부인도 짐작가는 것이 있었다. 그가 평소답지 않게 고씨 집안 사람들의 방문에 응했던 것은 다름이 아닌 계연수 때문이었을 것이다.노부인은 아들이 계연수에게 어떤 마음인지 한번 떠보려는 의도로 물어본 것이었다.사실 심씨 노부인은 계연수가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다. 외모도 어여쁘고 성격도 온순하고 품행이 단정하니, 나무랄 데가 없었다. 흠이라면 한번 화리했다는 점이었다. 사씨 가문도 경성에서는 알아주는 가문이니 만약 아들이 계연수와 혼인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터였다.노부인은 만약 아들이 계연수에게 진심으로 마음이 있다면 따로 불러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곤란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녀를 양녀로 들이고 땅과 점포를 주어서 풍족한 삶을 살게 할 생각이었다.그런데 아들의 냉랭한 태도를 보니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어서 어리둥절했다.옆에 앉은 백씨가 심서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도련님은 원래 이런 성격이지 않습니까.”심씨 노부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의 혼사 때문에 노부인은 골머리가 아팠다.잠시 후, 노부인은 백씨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이 일은 앞으로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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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9화

한편 계연수는 어머니에게 약을 먹여드린 후, 침상 옆에 앉아 그녀를 보살피고 있었다.시녀가 들어와서 둘째 부인과 고씨 노부인이 왔다고 알렸다.계연수는 피곤한 듯 이마를 짚었다. 어젯밤 일을 집안 모두가 알게 된 듯했다.침상 위 어머니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선 계연수는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 비틀거렸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왔다.침소 밖 거실에 둘째 부인 유씨와 큰댁 식솔들, 고씨 노부인이 앉아 있었다. 아마 들어갔다가 방해만 될까 봐,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유씨는 구겨진 옷에 머리도 흐트러진 채로 나온 계연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생기 하나 없이 울어서 부은 눈을 보자 유씨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어젯밤에 피를 토했다고 들었다. 의원은 뭐라고 하더냐?”방 안 사람들은 계연수를 바라보며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계연수는 피곤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용춘이 건넨 차를 한모금 마시고는 의원이 했던 말을 노부인과 유씨에게 들려주었다.방 안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고씨 노부인은 계연수의 손을 잡아주며 다정하게 말했다.“괜찮아질 게다.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네 몸도 챙겨야지.”계연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고씨 노부인은 다른 사람들을 다 돌려보냈다. 이들이 이곳에 남는다고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어차피 그 사람들도 얘기를 듣고 모른 척할 수가 없어서 찾아온 거였기에 노부인이 돌아가라고 하니 다들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나마 둘째 부인 유씨는 진심으로 계연수 모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는 당장 쓰러질 것 같은 계연수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넌 일단 가서 쉬고 있거라. 네 어머니도 중요하지만 네 몸도 소홀히 해서는 안 돼. 집안에 사람들도 많으니 아무 걱정 말거라.”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감사해요, 외숙모.”유씨는 핏기 없이 창백하게 질린 계연수를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한때는 정말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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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0화

계연수는 눈물을 흘리며 외할머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이때 시녀가 들어와 고준안이 왔다고 고했다.고씨 노부인은 그 얘기를 듣고 계연수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준안이가 널 걱정해서 찾아온 듯하구나. 네 큰 외숙모의 성격은 너도 잘 알 것이다. 사실 그동안 큰 외숙모가 네 어미를 잘 돌봐주려 하지 않은 것은 너도 알 테지.”“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단다. 허나 집안 살림은 큰 외숙모가 관리하고 있고 집안에 돈 들어올 곳이 별로 없는데 그나마 큰 외숙모가 잘 관리해 주어서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단다. 그러니 나도 뭐라고 할 수 없었지. 그래서 준안이에게 부탁하여 평소에 네 어미를 좀 돌봐달라고 한 것이다.”“준안이는 큰 외숙모가 가장 아끼는 아들이니 그 아이가 중간역할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어. 그리하여 혜란원으로 지급되는 것들이 다소 부족하긴 해도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단다. 물론 네 어미가 아플 때는 해줄 만큼 해줬어.”노부인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계연수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했다.“연수야, 준안이의 마음은 너도 알겠지. 그 아이는 진심으로 널 아끼기 때문에 네 어미에게도 늘 예의 바르게 대하고 최선을 다해 보살펴 주었지. 다른 오라비들은 절대 그렇게 못해.”“아마 네 어미에게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 네가 상심할까 봐 공무까지 제치고 달려온 것 같구나. 아마 큰 외숙모가 또 아무것도 안 해줄까 봐 널 도와주려고 남은 거겠지. 여긴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가서 만나보거라.”계연수는 노부인의 말을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그녀는 때때로 어머니에게 보신품을 보내주는 것은 알고 있었어도 그동안 그가 자신을 위해 그렇게 많은 일을 한 것은 모르고 있었다.그에게는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계연수는 손수건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밖으로 나가니 대문 앞에 서 있는 고준안이 보였다. 고모이긴 해도 고씨 혼자 사는 처소라 사내인 그가 드나들면 말이 나올까 봐 배려한 것이었다.그는 눈이 퉁퉁 부어서 창백한 얼굴로 밖으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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