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계연수가 열네 살 되던 해에 가문의 가세가 기울었고, 열여섯 살에 혼인서를 들고 청귀세가인 사 씨 가문으로 시집을 갔다. 혼인을 한 지 3년 동안, 비록 남편의 태도가 냉담했지만 그녀는 아내의 직책을 다하며 현모양처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남편은 외모가 준수한 데다 앞날이 창창해서 사람들은 늘 그녀에게 만족해야 한다며, 사 씨 가문에 들어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느 눈이 내리던 날, 부군이 다시 한번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갔을 때 그녀는 비로소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열아홉 살이 되던 해, 부군이 후회할 것이라고 조롱하는 소리 속에서도 그녀는 고집스럽게 화리서를 들고 떠났다. 계연수는 원래 화리 후에 어머니를 모시고 강남으로 가서 가게를 운영하면서 안정적이고 편안한 삶을 살려고 했지만 경성 세가에서 가장 권세가 높고 차가운 남자가 그녀와 혼인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심서준은 추운 밤에 높이 걸려 닿을 수 없는 현달처럼 신분과 지위가 고귀했고, 차갑고 무자비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나와 혼인을 할지 이틀 동안 고민해 보거라.”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는 다음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싫다면 내가 몇 년 더 기다리지.’ 계연수는 알지 못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심서준은 어린 시절부터 그녀에게 마음이 끌렸고, 그녀에 대한 소외 뒤에는 온통 자제와 숨겨진 다정함이 있었음을.
View More떠날 즈음엔 이미 한낮이 훌쩍 지나 있었다.고씨 노부인은 계연수와 고씨가 절에 들러 기도를 올린다 하자 더 붙잡지 않았다.오후가 되자 잠시 하늘이 개었다. 모녀는 먼저 집에 들렀다가 그 뒤 법화시로 향했다.마차 안에서 계연수가 용춘에게 물었다.“그림은 전해 두었느냐?”용춘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세요. 옆집 문간에 맡겨 두었습니다. 심 대인께서 돌아오시면 바로 전해 드리겠다고 했습니다.”계연수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고 더는 묻지 않았다.오늘 법화시는 한산한 편이었다.이들이 기도를 드리러 온 까닭은 단 하나, 앞길이 순탄하길, 이후의 삶이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계연수의 아버지는 평소 신불을 믿지 않았고 그녀 또한 크게 의지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다.불상 앞에 무릎을 꿇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내일 길이 막힘없이 이어지기를, 지난번처럼 뜻밖의 변고가 없기를, 도적이나 유랑 무리 없이 무사히 휘안현에 닿기를, 그곳에 가서도 지나치게 험난하지 않기를.기도를 마친 뒤에는 어머니와 함께 법사를 찾아가 관음부와 오뢰부를 하나씩 받아 몸에 지녔다. 고씨는 더 정성을 들이고 싶다며 절에서 저녁 공양까지 하고 가자고 했다.계연수는 어머니가 이런 것에 마음을 두는 걸 알았기에 순순히 따랐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식사를 할 때까지만 해도 가느다란 비였는데 공양을 마치고 나오자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이런 날씨로는 더는 길을 나설 수 없었다.결국 절에 하룻밤 묵고 이튿날 새벽 날이 밝으면 떠나기로 했다.*그 무렵, 심서준은 형부에서 막 나오는 길이었다.형부 대청 앞에 서자, 형부상서와 대리시경이 나란히 따라섰다.군호(軍戶)들의 횡령 사건이었다. 주부 동지와 결탁해 뇌물을 주고받았고 위진무사까지 얽혔다. 심지어 위지휘사도 연루되어 서로 책임을 미루며 물고 늘어졌다.금의군이 관련된 자들을 모두 압송해 경성으로 들여왔고 심문은 거의 끝나 있었다. 마지막 형량을
상 위에는 향로와 불수 한 개가 놓여 있었고, 고준안이 가져왔으나 거의 손대지 않은 감말이 과자 한 접시도 그대로였다.향로에서 흰 연기가 가늘게 피어올랐다. 단정한 방 안에서 계연수는 옆에 놓인 난초 무늬 비단 장침에 손끝을 얹은 채 어머니와 내일 떠날 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외할머니께는 굳이 미리 알리지 않고 휘안현에 도착한 뒤에야 전하자고 마음을 정했다.사금희를 마주친 일을 떠올리면 더 머물 이유도 없었다. 이곳의 인연과 얽힘을 하루라도 빨리 끊어내는 편이 나았다.말을 마친 뒤, 계연수는 어머니의 얼굴을 조심스레 올려다보았다. 아무 말 없이 떠나려는 까닭은 또 하나 있었다. 고준안에게 자신이 함께 휘안현으로 가길 바라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전하고 싶어서였다.고씨는 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화리서를 건네며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그날과 같았다. 이미 스스로의 길을 정해 놓았다는 듯, 고요하고도 단단한 기색.고씨는 알고 있었다. 계연수가 진심으로 고준안을 끌어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는 것을.이제 딸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만큼 자라있었다. 어머니로서 자신이 할 일은 더는 딸의 발목을 붙잡지 않는 것이었다.다만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아직 나이도 많지 않은 아이라 원래라면 평탄한 귀부인의 삶을 살았어야 마땅하거늘, 병약한 어머니를 데리고 낯선 땅으로 떠나야 한다니.고씨는 더이상 고준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미 딸은 선택을 끝냈으니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모녀는 이튿날 떠나기로 의논했다. 사씨 집안 사람들이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모르는 이상 서둘러야 했다.계연수는 이제 사씨와 어떤 식으로도 얽히고 싶지 않았다. 고씨 역시 동의했다. 화리한 이상 더는 왕래도, 인연도 필요 없었다.다만 고씨는 떠나기 전, 고씨 노부인을 한 번 더 뵙고 싶어 했다. 떠난다는 말은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계연수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출발을 하루 미루기로 했다.*밤이
바깥채는 어둑했고 대문 아래 걸린 등롱 불빛은 안쪽까지 닿지 못했다.심서준은 온몸이 어둠 속에 잠긴 채 서 있었다. 계연수는 그의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없었지만 묘하게도 그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기색은 느낄 수 있었다.그의 시선은 지금 자신을 향하고 있으리라.계연수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우산을 펴고 유리 등롱을 들고 그 앞으로 다가갔다.비는 실처럼 가늘게 흩어졌고 등롱의 불빛은 빗줄기에 잘게 부서졌다. 젖은 청석 바닥 위로 차가운 빛이 잔물결처럼 번졌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선명히 보이지 않았다.두 걸음쯤 거리를 둔 채 그녀가 물었다.“심 대인, 이제 돌아가시려는 겁니까?”심서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잠시 뒤,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으며 물었다.“그 자는 당신 사촌입니까?”“네. 둘째 오라버니예요.”심서준이 한 걸음 더 다가서자 등롱의 부드러운 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주변에는 젖은 공기와 빗소리가 감돌았다.비에 젖은 은은한 향이 스쳤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속에서 그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왔다. 눈빛은 어둡고도 알 수 없는 기색을 띠고 있었다.“너무 가까이 서 있던데.”그 한마디에 계연수가 미묘하게 굳자 심서준이 덧붙였다.“앞으로 밤에는 남자를 집에 들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그제야 그녀는 그의 뜻을 짐작했다. 밤에 고준안과 함께 식사를 한 것이 경솔해 보였던 걸까, 아니면 소문이 돌까 염려한 것일까.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화리한 사실은 이미 알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고씨 집을 떠나 따로 살고 있는 지금, 밤에 사촌이라 해도 남자가 드나든다면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릴 수도 있었다.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그녀의 눈빛은 진지했다.조금 전까지 고준안과 단둘이 서 있던 모습을 보고 긴장했던 심서준의 마음이 그녀의 한마디에 서서히 풀어졌다. 늘 차갑던 그의 눈매도 조금씩 부드러워졌다.가느다란 비바람에 그녀의 단정한 머리칼이 살짝 젖어 붉게
심서준이 돌아서려는 순간, 계연수는 문득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밤늦게까지 와서 어머니의 약을 걱정해 주었는데 정작 자신은 그가 머물기 불편하다고 느끼게 만든 것만 같았다. 그 생각이 스치자 죄스러움이 밀려왔다.그녀는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심 대인…”심서준의 걸음이 멈췄다.그의 시선이 조용히, 그녀가 붙든 소매 끝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계연수의 목소리는 밤빛 속에서 더욱 가늘게 흩어졌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얼른 손을 놓았다.“심 대인께서 괜찮으시다면요.”심서준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가슴을 조여왔다. 방금 전, 그녀가 소매를 잡아당기던 그 짧은 순간, 심장이 또 한 번 급하게 뛰어오른 것을 그는 분명히 느꼈다.*식탁의 공기는 유난히 어색했다.작은 네모난 상에 네 사람이 한 자리씩 마주 앉았다. 올려진 반찬은 고작 세 가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듯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오직 심서준의 얼굴만이 태연했다. 곁에 서 있던 문하조차 발끝이 오그라드는 듯한 표정이었다.계연수는 젓가락을 쥔 채, 흘끗 심서준을 바라보았다. 그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 자리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어려서부터 귀한 집안에서 자라난 탓일까. 그의 몸에는 자연스레 배어 있는 품위가 있었다. 소박한 반찬 몇 가지와는 확연히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보였다.고씨 또한 심서준을 자주 본 적은 없었다. 두세 번 마주친 것이 전부였고 그것도 이미 오래전 일이었다. 세월이 흐르니 이제 사람도, 세상도 달라져 있었다.그녀는 어딘가 긴장한 얼굴로, 음식이 입에 맞는지 몇 번이나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부족할까 싶어 부엌에 다시 음식을 내오라 할 기세였다.손님이긴 하나 심서준은 마치 이 집의 주인처럼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맛이 좋습니다.”그 한마디에 상에 둘러앉은 이들은 모두 저도 모르게 숨을 돌렸다.고준안은 간간이 심서준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런
어둡게 가라앉은 생각 속에서 그는 입술을 단단히 다물고 있었다.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사옥현을 무너뜨릴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가 계연수를 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그녀가 순조롭게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는 일쯤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다. 심지어 계연수가 그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에게 반항하더라도, 그녀를 억누르게 할 수 있는 수단 역시 넘쳐났다.계연수에게는 그가 쥐고 흔들 수 있는 약점이 너무도 많았다. 그녀는 쉽게 상처 입는 연약한 사람이기에, 손을 뻗기만 하면 그의 손안에 가둘 수도 있었다.그러나 그는 그런 짓
사옥현은 문 앞에 서 있었다.그러자 문을 지키던 어멈이 그가 한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으리, 서재로 가시려는 겁니까? 제가 사람을 시켜 난로부터 피워 두겠습니다.”사옥현은 잠시 침묵한 뒤에야 물었다.“부인은 어디 있느냐?”그가 먼저 부인을 찾는 일이 드물었기에 어멈은 얼른 답했다.“부인께서는 뒤쪽 행랑채에 계십니다. 무슨 일이 있으시다면서 그쪽으로 가셨어요.”사옥현은 잠시 눈길을 떨군 채 다시 물었다.“풍한은 좀 나아졌느냐? 내가 보낸 보약은 잘 전해줬고?”그 말에 어멈이 잠깐 멈칫했
심서준은 심씨 부인이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얻은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심씨 부인의 애정은 남달랐지만 정작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다 자신의 아들이 이렇게 냉담한 성정을 타고난 것일까? 혹시 자신이 날마다 불전에 아이를 달라 기도한 탓에 부처가 속세의 온기와는 담을 쌓은, 맑고 차가운 불자를 내려 준 것은 아닐까?심씨 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이 아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오래전부터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살아 있는 동안에 손주 한 번 안아 보는 것이 그녀의 마지막 바람일 뿐이었다.문간을 지키는 이에게서
심서준은 황후의 말을 듣고 아무 말이 없이 탁자 건너편에 앉았다.고화한 얼굴은 잘 다듬어진 조각처럼 고요했고 속세의 먼지가 닿지 않는 사람처럼 눈길에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다.심 황후는 이미 이 동생의 과묵한 성정을 익히 알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 원래 대화가 많이 있는 편도 아니었다. 심서준이 태어났을 때, 그녀는 이미 스무 살이었기에, 현 황제에게 시집온 지도 삼 년이나 지난 상태였다. 혼인한 뒤에는 친정에 자주 드나들 수도 없었으니 자연스레 남매가 나누는 말도 적을 수밖에 없었다.그럼에도 피는 피였다. 그는 그녀의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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