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us les chapitres de : Chapitre 1 - Chapitre 10

10

1화. 속임수로 완성된 이혼 합의서

심지한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안지연은 대표실 앞에 서 있었고, 온몸은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웠다.발밑의 대리석 바닥은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고, 지연의 검정 하이힐은 검은색 바닥 무늬와 뒤섞여 거의 구분이 가지 않았다.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지연은 손을 들어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들어와.”낮게 가라앉은 지한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지연은 서류를 쥔 손에 힘을 주고 문을 열었다.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지한의 옆으로 다가갔다.“바빠요? 급하게 결재 받아야 할 서류가 있어서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류는 이미 지한의 앞에 놓여 있었고 사인이 필요한 부분은 모두 표시돼 있었다.지한은 스위스 출장을 마치고 이날 아침에야 귀국했다.공항에서 곧바로 회사로 온 터라 책상 위에는 결재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뚜렷한 이목구비에 귀티가 나는 지한의 얼굴에는 피로의 흔적이 역력했다.지한은 서류를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펜을 들어 서류에 연달아 서명했다.“수고했어.”지연은 서류를 정리하며 형식적으로 물었다.“오늘 저녁은 집에서 먹어요?”“저녁 약속 있어. 기다리지 마.”지한은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알겠어요, 그럼 이만 갈게요.”지연은 서류를 안고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문을 나서는 순간,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대표실 옆 휴게 공간을 지나던 찰나, 안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마치 새끼 고양이나 강아지가 침대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닿는 듯한 소리였다.지연은 무심하게 안을 바라봤다.테이블 위에는 뜯어놓은 과자 봉지 몇 개와 반쯤 마신 밀크티가 어질러져 있었고, 바닥에는 핑크색 하이힐 한 짝이 쓰러져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모든 게 단번에 이해됐다.지연은 가슴이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몇 걸음밖에 되지 않았지만 온몸의 힘이 빠진 듯, 자리에 앉자마자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지연은 쌓인 서류들 사이에서 한 부를 골라 들었다.이혼 합의서였다.마지막 장을 펼쳐 지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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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럼 나도 8년이나 공짜로 쓴 거네

지한의 눈빛은 어둡고 속을 알 수 없었다.지연의 눈은 이미 생기를 잃은 채 차갑게 식어 있었다.지하 주차장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하고 가라앉아 있었다.단발머리 여자는 지연을 보면서도 지한에게서 조금도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오히려 더 대담하게 그의 목을 끌어안고, 바짝 붙어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지연은 눈이 바늘에 찔린 듯한 따끔거리는 통증을 느끼며, 곧바로 차에 올라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떠났다.집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층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지연은 드레스 룸 유리장 앞에 서서 목걸이를 풀고 있었다.그때 등 뒤로 키가 크고 단단한 벽 같은 존재가 바짝 다가왔다.남자의 짙은 체취가 순식간에 코끝을 파고들었다.심지한이었다.지한은 양손으로 유리장을 짚은 채, 뒤에서 몸을 숙여 거울 속에 비친 지연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물었다.“화났어?”지연은 지한을 보지도 않았다.천천히 목걸이를 제자리에 넣고 나서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사람 하나 죽이고 싶을 만큼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지한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안성 그룹 쪽에서 폴라리스 프로젝트 협업을 제안했어. 그래서 요즘 그 집 장남 구영모를 계속 만나고 있고, 오늘 본 여자애는 구영모 여동생이야.”“그래서요? 여동생 안 챙겨주면 협업 못 한대요?”“안지연… 지금 설명하고 있잖아, 비꼬지 마.”“굳이 설명할 필요 없어요.”지연은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지한을 바라봤고, 지연의 맑고 차가운 눈빛은 마치 지한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심지한 씨, 나랑 사는 게 지겹고 이 집에 다른 여자를 들이고 싶다면, 내가 비켜줄게요.”지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지금 뭐라고 했어?”지연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이혼하자고요.”지연은 지한을 밀치고 나가려 했지만 지한은 지연의 손목을 거칠게 잡고 끌어당겼다.한 손으로 지연의 얼굴을 움켜쥐며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생각은 꿈도 꾸지 마.”지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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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네 소중한 애인이랑 계속 즐겨

지한은 지연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살기 어린 냉기가 얼굴에 짙게 서려 있었고, 차가운 기운이 공기까지 얼리는 듯했다.지연은 주변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다는 걸 눈치채고,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아, 여기 있었네.’지연은 곧 다시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봤다.소파 구석에 앉아 있는 단발머리 여자, 구여정이 눈에 들어왔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리를 꼬고 앉아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빙글빙글 감으며,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당장이라도 지연을 물어뜯을 듯한 눈빛이었다.주변 사람들의 말투를 들어보니, 이들이 함께 이런 자리에 온 게 한두 번은 아닌 듯했다.둘은 숨길 생각조차 없이, 연인처럼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때, 지한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마치 누군가 신호라도 준 것처럼, 주변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형수님, 죄송해요. 저희 그냥 헛소리한 거예요!”“형수님, 지한이랑 여정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형수님, 진짜로 오해하지 마세요.”지한은 지연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고 밖으로 끌고 나가려 했다.지연은 들고 있던 음료를 그대로 지한의 얼굴에 끼얹었다.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고, 주변 사람들의 머리가 쭈뼛 서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어떻게, 저 여자가 감히…?’지연은 바로 환하게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중한 사람이랑 계속 즐기세요, 좋은 시간 망치고 싶지 않으니까.”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지한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내려 했다.지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지한은 아무 말없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어깨에 메고 그대로 밖으로 걸어나갔다.방 안의 사람들 모두 침묵에 휩싸였다.복도에서, 지연은 지한의 어깨 위에서 격렬하게 몸부림쳤다.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지한이 안으로 들어가 몸을 틀자, 지연의 시야에 검은 가죽 구두 한 켤레가 들어왔다.말끔한 검은 정장 바지 아래로 곧게 뻗은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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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달래지 못한 게 아니라, 하지 않았을 뿐

지연은 오전 11시 40분쯤 심씨 집안의 저택에 도착했다.그녀를 본 집사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오늘 손님이 한 명 더 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사람이 ‘작은 안주인’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게다가 지금 거실에는 큰 도련님과 구 씨가 함께 있었다.그 사실이 떠오르자, 집사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심지한과 안지연이 법적 부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양가 부모를 제외하면 허준기와 집사를 포함한 몇몇 극소수의 최측근뿐이었다.“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집사는 어쩔 수 없이 큰 안주인의 지시에 따라 지연을 안내했다.거실 문에 다다르기도 전에, 은방울처럼 맑고 애교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내가 또 이겼잖아. 지한 오빠, 일부러 봐준 거지?”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순간 머릿속이 하얘졌지만, 이내 모든 게 단번에 이해됐다.“…후.”지연은 낮게 비웃으며 그대로 발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오늘은 책을 옮기느라 맨얼굴에 차림도 단출했다.헐렁한 흰 셔츠에 청바지, 허리까지 흐르는 긴 머리는 머리끈으로 느슨하게 묶었을 뿐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부는 눈처럼 희고, 붉은 입술과 또렷한 눈매는 몇 가닥 흘러내린 머리칼 덕에 오히려 더 청순하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거실에 앉아 있던 지한은 지연을 보자 놀라서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네가 어떻게 여기에…?”“어머님이 부르셨어요.”지연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눈동자 깊숙이 비아냥이 묻어났다.“홍콩에 있는 줄 알았는데, 언제 순간 이동을 배웠어요?”“……”지한의 눈에 아주 잠깐, 죄책감이 스쳤다.소파에서 일어난 단발머리의 구여정이 지연에게 다가가, 도발하듯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구여정이에요.”지연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마치 공기라도 되는 것처럼 무시했다.그때, 문밖에서 강문혜가 들어왔다.그녀는 지연을 힐끗 보더니, 다정한 얼굴로 여정의 손을 잡았다.“여정아, 오늘 재밌었어? 네 집처럼 편하게 있어.”그러고는 지연을 가리키며 덧붙였다.“이쪽은 우리 회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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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낯설지 않은 이 남자

지연은 남아 있던 돌 두 개마저 거둬들였다.오목은 한 판으로 승부가 끝나는 게임이지만, 여정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대놓고 억지를 부렸다.“그쪽이 먼저 이긴 건 맞지만, 나도 다섯 개니까 나도 이긴 거죠.”이미 네 개만 놓여 있던 자리에 멋대로 돌 하나를 더 얹었다.“……”지연은 몇 초간, 정말 모자란 사람을 보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그럼 저도 계속 둬도 되겠네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연은 돌 하나를 더 놓았고, 또다시 다섯 개를 완성했다.그 뒤로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지연은 판을 사실상 쓸어버렸다.여정이 어디에도 돌을 놓을 수 없을 만큼, 완전히 길을 막아버린 것이다.여정의 얼굴은 창백해졌다가 붉어졌고, 다시 하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두 번째 판, 세 번째 판, 네 번째 판…지연은 어떤 판에서는 일부러 가지고 놀 듯 서서히 몰아붙였고, 어떤 판에서는 단숨에 끝냈다.말 그대로 상대를 가지고 노는 수준이었다.여정은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그만해!”지한이 손을 뻗어 지연의 손에서 바둑 통을 낚아챘다.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이었다.그 얼굴을 본 여정은 곧장 지한의 품에 파고들어 울기 시작했다.마치 지연에게 크게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엉엉 울어댔다.지한은 그녀를 달랬고, 문혜 역시 나서서 위로했다.그러면서 문혜는 지연을 손가락질하며 몰아붙였다.“애들 장난 같은 게임 가지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니? 출신 때문인지 속도 좁고, 질투심만 가득해서 싸울 줄만 알지!”목소리들이 지연의 귀에 점점 흐릿하게 겹쳐졌다.눈앞의 지한의 얼굴은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바래 보였다.한때 그렇게 눈부시고 선명하던 사람이, 이제는 일그러지고 잿빛으로 흐려져 더는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이제 됐어, 20일밖에 안 남았어.’‘그냥… 뭐든 마음대로 해.’지연은 무심한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돌을 바둑판 위에 툭 던져놓고, 나른하게 몸을 일으켰다.돌들이 떨어지며, 핏방울 몇 개도 함께 판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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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복수에 목숨 걸지 마

지연은 병원 처치실에서 간호사가 자신의 상처를 소독하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키가 크고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싸늘한 기운을 풍기며 들이닥쳤다.의사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지연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괜찮아요. 이 사람은 제… 직장 상사예요.”‘남편’이라는 말이 무심코 튀어나올 뻔했지만, 급히 삼켰다.지한은 목에 무언가 걸린 듯 잠긴 목소리로 의사에게 물었다.“많이 다쳤습니까?”“겉에 조금 찢어진 정도라 큰 문제는 없습니다.”의사는 둘의 관계에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처치를 마무리하고 약을 처방했다.지연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지한은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지연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지연이 수납 창구로 가자 먼저 계산을 하고, 약을 받을 때도 대신 받아왔다.누가 보면 헌신적인 남편 그 자체였다.지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병원 밖으로 나온 지연은 고개를 숙여 택시 앱을 켜려 했다.그 순간 지한이 휴대폰을 낚아채고, 어깨를 감싸 주차장으로 끌고 갔다.조수석 문을 열어 그녀를 밀어 넣고는, 반대편으로 돌아 운전석에 올라탔다.차 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바깥 소음이 단숨에 차단됐다.숨 막히는 정적과 함께 차 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내 번호까지 차단하고, 나 괴롭히려고 죽기라도 하겠다는 거야?”지한이 고개를 돌려 지연을 노려보고 말했다.얼굴에는 피로와 분노가 동시에 뒤엉켜 있었다.지연은 멍하니 지한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답답하던 가슴이, 그의 황당한 말에 어이없어 풀려버린 것이다.자기가 바람피워 놓고, 자길 벌 주려고 죽으려 한다니.어떻게 이렇게 자기중심적일 수 있을까?“걱정 마요. 그럴 일 없을 테니까, 폰 돌려줘요.”지연이 손을 내밀었지만, 지한은 슬쩍 피했다.“오늘 내가 거짓말한 건 인정해. 하지만 네가 그 애를 몰아붙여서 일을 키웠잖아. 어릴 때부터 귀하게 자라서 철없고 말이 좀 거칠 뿐이지, 네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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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변심한 남자는 비참해진다

지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겉으로 보기엔 여전히 침착한 얼굴이었지만, 지한의 눈빛에는 미묘한 불안이 스쳐 지나갔다.휴대폰은 쉬지 않고 계속 울렸다.전화, 영상 통화, 그리고 메시지까지 쉼 없이 밀려드는 알림은 무례할 정도로 집요했다.방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조여 왔다.“안 받아요?”지연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그제야 지한은 휴대폰을 집어 들더니, 화면도 보지 않은 채 전원을 꺼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그러고는 지연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아직 열이 있네. 괜찮아, 자. 내가 계속 살펴볼게.”지연은 아무 말없이 눈을 감았다.한 시간쯤 지나자 숨결이 잔잔해져, 언뜻 보면 깊이 잠든 것처럼 보였다.지한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휴대폰을 들고 발코니로 향했다.전원을 켜자마자 쏟아지는 메시지를 훑어본 지한은 곧 전화를 걸었다.“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지금 바로 갈게.”목소리를 최대한 낮췄지만, 다급함이 느껴졌다.지한이 재킷을 집어 들고 조용히 문을 나섰고, 지연은 천천히 눈을 떴다지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숨도 자지 못하고 있었다.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변심한 남자는 마치 상한 과일 같아서, 결국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썩어 들어갈 뿐이었다.……새벽 4시 30분.심지한이 돌아왔다.지연이 아직 자는 줄 알고 안도의 숨을 내쉰 지한은 지연의 이마에 손을 얹어 보았다.열은 이미 완전히 내려 있었다.지한은 샤워 후 목욕 가운 차림으로 지연의 뒤에 누워 허리를 끌어안았다.지연은 지한이 잠든 것을 확인한 뒤 그의 팔을 천천히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그리고 침대에 앉아 잠든 지한의 얼굴을 내려다봤다.여전히 잘생긴 얼굴에 얇은 입술, 선명한 목선, 그리고…그 위에 가지런히 남은 이빨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그 순간 지연은 심장에 구멍이라도 난 듯 아려오는 동시에, 베개로 질식시켜 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아침이 되었을 때, 지연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앞치마를 두르고 두 사람 몫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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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결국 사람은 감정의 노예야

지한은 검은 연기를 내뿜는 트럼통을 힐끗 보며,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쓰레기면 그냥 버리면 되지, 왜 태워?”“태워버리는 게 더 깔끔해요.”지연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지한은 미간을 지푸렸다.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마당에 서서, 마지막 노을이 어둠에 완전히 삼켜질 때까지 서 있었다.……금요일 아침, 차량 서비스센터에서 차 수리가 끝났다는 연락이 왔다.차를 찾으러 가던 지연은, 정국에게 전화를 걸려다 문득 그때의 재킷이 떠올랐다.‘세탁해서 돌려주겠다고 했었지…’잠시 고민하다가 정국에게 전화를 걸어, 먼저 차 수리가 끝났다고 알렸다.수리 내역과 비용을 보내고는, 메시지 말미에 한 줄을 덧붙였다.— 실례지만, 도련님 키랑 몸무게, 치수 좀 알 수 있을까요?정장은 한 벌로 맞춰 입는 옷이라, 비슷한 걸로 사서 돌려주면 바지가 맞지 않을 것 같았다.괜히 어설프게 재킷만 사서 돌려주기보다는, 차라리 한 벌을 새로 맞추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정국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아저씨도 모르시나 보다.’지연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집으로 향하던 중 재무팀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급히 확인할 데이터가 있다며 회사로 잠깐 들러 달라는 부탁이었다.이마의 상처도 거의 아문 터라, 지연은 차를 돌려 회사로 향했다.며칠을 쉬다 나타난 지연을 보자, 팀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안부를 물었다.퇴사 얘기는 아직 꺼내지 않았다.곧 떠날 생각을 하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재무팀과 일을 마친 뒤, 밀린 업무를 처리하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사직서를 작성했다.퇴근 전에 지한에게 직접 전할 생각이었다.그런데 퇴근도 하기 전에 탕비실에서 역겨운 이야기를 듣게 됐다.“비서팀에서 들었는데, 안성 그룹 넷째 딸 구여정이 오늘부로 우리 회사에 입사했대. 대표가 자기 바로 옆방으로 배치했다던데.”“설마 심씨 집안이랑 구씨 집안 결혼 얘기 오가는 거야?”“그럼 안 매니저님은 어떻게 되는 거야?”사람들은 잠시 말을 멈추고 서로 눈치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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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위선적인 네 모습, 소름 끼쳐

지한은 재빨리 재킷을 벗어 여정의 드러난 몸을 가렸다.여정은 마치 세상이 무너진 사람처럼 울고 불며 소리를 질렀다.“안지연, 당장 나가!”지한은 분노에 차 외쳤다.준기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달려와 지연을 부축했다.“괜찮으세요?”지연은 이를 악문 채 눈가가 붉어지는 걸 애써 눌러 참았다.“심지한, 당신 정말 역겨운 인간이야.”지연은 준기의 손을 뿌리쳤다.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상태였지만, 비틀거리며 혼자 힘으로 걸어 나갔다.지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방금 지연의 눈빛은, 이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지한은 불안해졌다.“부… 아니 안 매니저님이 허리를 세게 부딪힌 것 같아요. 꽤 심각해 보여요.”준기의 말에 지한의 시선이 멈췄다.조금 전, 자신이 그녀를 거칠게 끌어당겼던 장면,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이 떠올랐다.지한은 여정의 울부짖음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지연을 쫓아갔다.……지연은 회사로 돌아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고통을 참으며 새집으로 향했다.엘리베이터 구석에 몸을 기댄 채, 숨이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세희야, 나… 그냥 다 끝내고 싶어. 이제 그 사람 얼굴 보는 것조차 힘들어.”세희는 지연의 무너진 목소리를 듣자마자 가방과 차 키를 챙겨 뛰쳐나왔다.“어디야?”주소를 말하자,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지금 갈게.”세희는 지연의 이혼 변호사이자,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유일한 친구였다.세희는 지연이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여도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며, 남편의 외도를 알고도 울지 않은 채 차분히 준비해 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런 지연이 이렇게까지 무너졌다는 건, 정말 한계라는 뜻이었다.‘심지한, 이 쓰레기 같은 놈…’지연은 전화를 끊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긴 머리가 얼굴을 가린 채, 생각은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가라앉았다.얼마나 지났을까.“이제 됐어요?”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한 엘리베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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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잔인하고 이기적인 남자

전화기 너머로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한참 뒤, 지한이 낮게 입을 열었다.“오늘은…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그랬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그만해요.”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지연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고의든 아니든, 나한테 손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그래, 그래. 다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지금 어디야? 당장 말해.”“말했잖아요. 집에 돌아간다고.”“오늘 밤 안에 와. 안 그러면 운성시를 다 뒤져서라도 찾아낼 거야!”지한의 목소리에는 더는 숨길 수 없는 분노가 실려 있었다.결국 지연은 한 시간쯤 뒤에 집에 갈 거라고 말했다.지한이 이성을 잃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지연은 새로 구한 집이 들통나는 일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집에 가는 길에 세희가 운전대를 잡은 채 말했다.“그 인간, 용서받지 못할 짓은 다 해놓고도 태도는 아주 상전이야. 그 더러운 성질에 끔찍한 통제욕까지… 네가 이혼 서류에 그런 식으로 서명 받은 거 알면, 진짜로 널 죽일지도 몰라.”지연은 창밖에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그럼 내가 먼저 독약이라도 준비해 둘까 봐.”집에 도착하자, 지한이 바람처럼 달려 나왔다.얼굴에는 걱정과 짜증이 뒤섞여 있었다.지연은 그를 힐끗 보고는 말없이 신발을 갈아 신고 안으로 들어갔다.허리를 굽히는 순간 다시 통증이 올라와 미간이 찌푸려졌다.지한이 손을 뻗어 지연을 부축하려 했다.“만지지 마요!”지연은 허리가 더 아파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한의 손길을 피하려 몸을 뒤로 뺐다.마치 더러운 것에 스치기라도 한 듯한 반응이었다.지한은 마음이 씁쓸해졌지만, 손을 거두고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사무실에 CCTV 설치했어. 언제든 확인해도 돼. 오늘 같은 일 다시는 없을 거야.”지연은 잠시 화면을 보다가, 비웃듯 말했다.“왜, 내가 또 들이닥쳐서 당신 ‘캔디’가 망신당할까 봐?”“걔랑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솔직히 말하면, 귀엽고 재밌다고 느낀 건 맞아. 그래도 동생으로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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