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지연은 지한의 진심을 믿었고, 그의 다정함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끝내 남은 것은 잔인한 배신뿐. 모든 것을 묵묵히 견디던 지연은, 결국 이혼 합의서에 서명하게 만들었다. 30일간의 이혼 숙려 기간이 끝나던 날, 지연은 그에게 통보했다. “내 인생에서 나가줘.”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지한은 얼어붙었다. “누가 이혼한대? 절대 안 돼!” 재벌가 후계자로 막강한 권력과 부를 지닌 현우는, 지연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먼 존재다. 지연은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지만 운명은 번번이 두 사람을 마주치게 한다. 파티에서 살짝 취한 지연이 실수로 현우의 넥타이를 잡아당기자, 현우는 몸을 숙여 지연의 귓가에 차갑고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 전 남편이 보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대담해도 괜찮겠어요?”
View More심지한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안지연은 대표실 앞에 서 있었고, 온몸은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웠다.
발밑의 대리석 바닥은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고, 지연의 검정 하이힐은 검은색 바닥 무늬와 뒤섞여 거의 구분이 가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지연은 손을 들어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낮게 가라앉은 지한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지연은 서류를 쥔 손에 힘을 주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지한의 옆으로 다가갔다.
“바빠요? 급하게 결재 받아야 할 서류가 있어서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류는 이미 지한의 앞에 놓여 있었고 사인이 필요한 부분은 모두 표시돼 있었다.
지한은 스위스 출장을 마치고 이날 아침에야 귀국했다.
공항에서 곧바로 회사로 온 터라 책상 위에는 결재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귀티가 나는 지한의 얼굴에는 피로의 흔적이 역력했다.
지한은 서류를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펜을 들어 서류에 연달아 서명했다.
“수고했어.”
지연은 서류를 정리하며 형식적으로 물었다.
“오늘 저녁은 집에서 먹어요?”
“저녁 약속 있어. 기다리지 마.”
지한은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알겠어요, 그럼 이만 갈게요.”
지연은 서류를 안고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문을 나서는 순간,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표실 옆 휴게 공간을 지나던 찰나, 안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새끼 고양이나 강아지가 침대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닿는 듯한 소리였다.
지연은 무심하게 안을 바라봤다.
테이블 위에는 뜯어놓은 과자 봉지 몇 개와 반쯤 마신 밀크티가 어질러져 있었고, 바닥에는 핑크색 하이힐 한 짝이 쓰러져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모든 게 단번에 이해됐다.
지연은 가슴이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몇 걸음밖에 되지 않았지만 온몸의 힘이 빠진 듯, 자리에 앉자마자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연은 쌓인 서류들 사이에서 한 부를 골라 들었다.
이혼 합의서였다.
마지막 장을 펼쳐 지한의 서명을 바라보다가, 손끝으로 천천히 따라 그었다.
순간 머릿속에는 과거의 여러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결혼하자고 말하던 확신에 찬 지한의 얼굴, 냉정한 미소로 남자는 평생 한 여자만 사랑하지 않으니 너무 믿지 말라던 시어머니의 말, 그래도 그는 다를 거라 믿었던 자신까지.
지금 생각하면 전부 우스운 일이었다.
어린 여자와 바람을 피우면서도 완벽히 숨겼다고 믿었을 테고, 출장에도 그 여자를 데려갔다.
오늘은 회사까지 데려온 것이다.
지연은 합의서의 서명 부분을 사진으로 찍어 시어머니에게 보냈다.
—서명했어요.
일주일 전, 그녀는 시어머니와 이미 거래를 끝냈다.
조건은 간단했다.
지연이 먼저 이혼을 요구할 것, 두 사람의 비밀 결혼 사실을 끝까지 외부에 알리지 않을 것.
그 대가는 2백억 원이었다.
한 달 후면, 지한은 그녀의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똑똑.
노크 소리에 지연은 이혼 합의서를 서류함에 넣으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고 들어온 사람은 심지한의 비서 허준기였다.
“안 매니저님, 대표님께서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준기는 짙은 초록색의 벨벳 보석함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지연이 아무 생각 없이 뚜껑을 여는 순간, 값비싼 다이아몬드 세트가 드러났다.
그 순간 지연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목욕 가운을 걸친 채 흐릿한 눈빛으로 다이아 목걸이를 들고 있는 단발머리 여자, 은은한 조명 아래 흐트러진 침대와 선명한 키스 자국.
속이 뒤틀리는 듯했다.
“전달 감사합니다, 허 비서님.”
지연은 고개를 들어 올렸고, 그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괜히 등골이 서늘해진 준기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대표님께서 직접 고르신 겁니다. 세상에서 딱 하나뿐인 제품입니다.”
하나뿐인 건 물건뿐, 그의 마음이 아니었다.
이제 와서 이런 건 필요 없었다.
지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그래요? 참 감동적이네요. 그렇게 바쁜데도 선물 살 시간은 있었나 봐요.”
미묘하게 서늘한 말투에 준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서둘러 지연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지연은 더러운 물건을 보듯 보석을 보다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중고 명품샵 사장에게 보냈다.
— 이 다이아 세트 처분해 주시고, 수익금은 지적장애 아동 재단에 기부 부탁드립니다.
잠시 후 돌아온 답장은 짧았다.
— “…….”
오후 5시, 지하 주차장.
차 문을 열던 지연은 무심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대각선 맞은편에서 시동이 걸린 차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창 너머 뒷좌석에는 지한이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단발머리 여자애가 바짝 붙어 있었다.
통통하고 앳된 얼굴에, 생기 어린 젊은이 가득 배어 있었다.
“대표님!”
준기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차가 급히 멈춰 섰다.
유리창 너머로 지연과 지한의 시선이 마주쳤다.
전화기 너머로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한참 뒤, 지한이 낮게 입을 열었다.“오늘은…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그랬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그만해요.”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지연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고의든 아니든, 나한테 손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그래, 그래. 다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지금 어디야? 당장 말해.”“말했잖아요. 집에 돌아간다고.”“오늘 밤 안에 와. 안 그러면 운성시를 다 뒤져서라도 찾아낼 거야!”지한의 목소리에는 더는 숨길 수 없는 분노가 실려 있었다.결국 지연은 한 시간쯤 뒤에 집에 갈 거라고 말했다.지한이 이성을 잃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지연은 새로 구한 집이 들통나는 일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집에 가는 길에 세희가 운전대를 잡은 채 말했다.“그 인간, 용서받지 못할 짓은 다 해놓고도 태도는 아주 상전이야. 그 더러운 성질에 끔찍한 통제욕까지… 네가 이혼 서류에 그런 식으로 서명 받은 거 알면, 진짜로 널 죽일지도 몰라.”지연은 창밖에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그럼 내가 먼저 독약이라도 준비해 둘까 봐.”집에 도착하자, 지한이 바람처럼 달려 나왔다.얼굴에는 걱정과 짜증이 뒤섞여 있었다.지연은 그를 힐끗 보고는 말없이 신발을 갈아 신고 안으로 들어갔다.허리를 굽히는 순간 다시 통증이 올라와 미간이 찌푸려졌다.지한이 손을 뻗어 지연을 부축하려 했다.“만지지 마요!”지연은 허리가 더 아파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한의 손길을 피하려 몸을 뒤로 뺐다.마치 더러운 것에 스치기라도 한 듯한 반응이었다.지한은 마음이 씁쓸해졌지만, 손을 거두고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사무실에 CCTV 설치했어. 언제든 확인해도 돼. 오늘 같은 일 다시는 없을 거야.”지연은 잠시 화면을 보다가, 비웃듯 말했다.“왜, 내가 또 들이닥쳐서 당신 ‘캔디’가 망신당할까 봐?”“걔랑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솔직히 말하면, 귀엽고 재밌다고 느낀 건 맞아. 그래도 동생으로밖에
지한은 재빨리 재킷을 벗어 여정의 드러난 몸을 가렸다.여정은 마치 세상이 무너진 사람처럼 울고 불며 소리를 질렀다.“안지연, 당장 나가!”지한은 분노에 차 외쳤다.준기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달려와 지연을 부축했다.“괜찮으세요?”지연은 이를 악문 채 눈가가 붉어지는 걸 애써 눌러 참았다.“심지한, 당신 정말 역겨운 인간이야.”지연은 준기의 손을 뿌리쳤다.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상태였지만, 비틀거리며 혼자 힘으로 걸어 나갔다.지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방금 지연의 눈빛은, 이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지한은 불안해졌다.“부… 아니 안 매니저님이 허리를 세게 부딪힌 것 같아요. 꽤 심각해 보여요.”준기의 말에 지한의 시선이 멈췄다.조금 전, 자신이 그녀를 거칠게 끌어당겼던 장면,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이 떠올랐다.지한은 여정의 울부짖음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지연을 쫓아갔다.……지연은 회사로 돌아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고통을 참으며 새집으로 향했다.엘리베이터 구석에 몸을 기댄 채, 숨이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세희야, 나… 그냥 다 끝내고 싶어. 이제 그 사람 얼굴 보는 것조차 힘들어.”세희는 지연의 무너진 목소리를 듣자마자 가방과 차 키를 챙겨 뛰쳐나왔다.“어디야?”주소를 말하자,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지금 갈게.”세희는 지연의 이혼 변호사이자,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유일한 친구였다.세희는 지연이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여도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며, 남편의 외도를 알고도 울지 않은 채 차분히 준비해 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런 지연이 이렇게까지 무너졌다는 건, 정말 한계라는 뜻이었다.‘심지한, 이 쓰레기 같은 놈…’지연은 전화를 끊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긴 머리가 얼굴을 가린 채, 생각은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가라앉았다.얼마나 지났을까.“이제 됐어요?”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한 엘리베이터
지한은 검은 연기를 내뿜는 트럼통을 힐끗 보며,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쓰레기면 그냥 버리면 되지, 왜 태워?”“태워버리는 게 더 깔끔해요.”지연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지한은 미간을 지푸렸다.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마당에 서서, 마지막 노을이 어둠에 완전히 삼켜질 때까지 서 있었다.……금요일 아침, 차량 서비스센터에서 차 수리가 끝났다는 연락이 왔다.차를 찾으러 가던 지연은, 정국에게 전화를 걸려다 문득 그때의 재킷이 떠올랐다.‘세탁해서 돌려주겠다고 했었지…’잠시 고민하다가 정국에게 전화를 걸어, 먼저 차 수리가 끝났다고 알렸다.수리 내역과 비용을 보내고는, 메시지 말미에 한 줄을 덧붙였다.— 실례지만, 도련님 키랑 몸무게, 치수 좀 알 수 있을까요?정장은 한 벌로 맞춰 입는 옷이라, 비슷한 걸로 사서 돌려주면 바지가 맞지 않을 것 같았다.괜히 어설프게 재킷만 사서 돌려주기보다는, 차라리 한 벌을 새로 맞추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정국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아저씨도 모르시나 보다.’지연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집으로 향하던 중 재무팀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급히 확인할 데이터가 있다며 회사로 잠깐 들러 달라는 부탁이었다.이마의 상처도 거의 아문 터라, 지연은 차를 돌려 회사로 향했다.며칠을 쉬다 나타난 지연을 보자, 팀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안부를 물었다.퇴사 얘기는 아직 꺼내지 않았다.곧 떠날 생각을 하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재무팀과 일을 마친 뒤, 밀린 업무를 처리하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사직서를 작성했다.퇴근 전에 지한에게 직접 전할 생각이었다.그런데 퇴근도 하기 전에 탕비실에서 역겨운 이야기를 듣게 됐다.“비서팀에서 들었는데, 안성 그룹 넷째 딸 구여정이 오늘부로 우리 회사에 입사했대. 대표가 자기 바로 옆방으로 배치했다던데.”“설마 심씨 집안이랑 구씨 집안 결혼 얘기 오가는 거야?”“그럼 안 매니저님은 어떻게 되는 거야?”사람들은 잠시 말을 멈추고 서로 눈치를 보다
지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겉으로 보기엔 여전히 침착한 얼굴이었지만, 지한의 눈빛에는 미묘한 불안이 스쳐 지나갔다.휴대폰은 쉬지 않고 계속 울렸다.전화, 영상 통화, 그리고 메시지까지 쉼 없이 밀려드는 알림은 무례할 정도로 집요했다.방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조여 왔다.“안 받아요?”지연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그제야 지한은 휴대폰을 집어 들더니, 화면도 보지 않은 채 전원을 꺼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그러고는 지연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아직 열이 있네. 괜찮아, 자. 내가 계속 살펴볼게.”지연은 아무 말없이 눈을 감았다.한 시간쯤 지나자 숨결이 잔잔해져, 언뜻 보면 깊이 잠든 것처럼 보였다.지한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휴대폰을 들고 발코니로 향했다.전원을 켜자마자 쏟아지는 메시지를 훑어본 지한은 곧 전화를 걸었다.“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지금 바로 갈게.”목소리를 최대한 낮췄지만, 다급함이 느껴졌다.지한이 재킷을 집어 들고 조용히 문을 나섰고, 지연은 천천히 눈을 떴다지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숨도 자지 못하고 있었다.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변심한 남자는 마치 상한 과일 같아서, 결국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썩어 들어갈 뿐이었다.……새벽 4시 30분.심지한이 돌아왔다.지연이 아직 자는 줄 알고 안도의 숨을 내쉰 지한은 지연의 이마에 손을 얹어 보았다.열은 이미 완전히 내려 있었다.지한은 샤워 후 목욕 가운 차림으로 지연의 뒤에 누워 허리를 끌어안았다.지연은 지한이 잠든 것을 확인한 뒤 그의 팔을 천천히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그리고 침대에 앉아 잠든 지한의 얼굴을 내려다봤다.여전히 잘생긴 얼굴에 얇은 입술, 선명한 목선, 그리고…그 위에 가지런히 남은 이빨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그 순간 지연은 심장에 구멍이라도 난 듯 아려오는 동시에, 베개로 질식시켜 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아침이 되었을 때, 지연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앞치마를 두르고 두 사람 몫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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