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os os capítulos de 달빛이 낮게 내린 밤에: Capítulo 11 - Capítulo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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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부인을 찾거든 나리께서도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강희는 조심스레 두어 마디를 더 보탰다. 더는 나서서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 곧 서둘러 사람을 찾으러 나갔다.주방현은 황급히 멀어지는 강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손을 들어 미간을 문질렀다. 그러고는 탁자 위에 놓인 호랑이 머리 모양의 아기 신발을 무심코 집어 들고 정시연의 침상 가장자리에 천천히 앉았다.촘촘히 이어진 바느질 자국을 손끝으로 쓸어보자, 굳어 있던 마음도 끝내 조금씩 누그러졌다.정시연은 또 성질을 부렸지만 자신이 두렵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자신이 죄를 물으러 올 것을 알고, 보물이를 안은 채 어딘가로 숨어 버린 것이리라.사람을 찾으면 차근차근 이해득실을 설명한 뒤 군주 앞에 데려가 사죄하게 하면 될 일이었다. 정시연이 앞으로 얌전히 군주를 모신다면, 너그러운 군주도 이번 일쯤은 눈감아 줄 테니까.‘정실로 맞은 내 부인인데, 어찌 진심으로 화를 낼 수 있겠느냐.’주방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얼마나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을까. 마침내 강희가 다급한 걸음으로 돌아왔다.주방현은 고개를 들었다가 강희의 뒤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멈칫했다.“나리, 부저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도 찾지 못했습니다.”강희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아무래도 부인께서…… 보물이를 데리고 집을 나가신 듯합니다.”주방현은 아무 말 없이 침상에 앉아 있었다.숨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릴 만큼 깊은 정적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강희는 목구멍이 바짝 조여 오는 것을 느끼며 감히 다음 말을 꺼내지 못했다.그런데 바로 그때, 주방현의 입에서 돌연 웃음이 새어 나왔다.“……집을 나갔다고?”글자 하나 읽을 줄 모르는 시골 아낙이 낯선 경성에서 대체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인가.의지할 친척 하나 없고 수중에는 돈 한 푼도 없었다. 그런 처지에 태어난 지 겨우 석 달 된 보물이까지 안고서, 대체 어디까지 갈 수 있겠는가.강희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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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정시연이 침소로 돌아온 것은 밤이 깊은 뒤였다.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침상에 누워 창밖에 높이 걸린 둥근 달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조금 전 민취에게 물었던 이야기가 다시금 떠올랐다.배지혁이 늦은 밤 금수당을 찾은 것은 배한설의 편식 때문이었다.예왕부의 노부인은 불심이 깊어 초하루와 보름이면 온 왕부 사람에게 소찬을 먹게 했다. 하지만 본래부터 채소를 입에도 대지 않는 배한설이 순순히 따를 리 없었다.공교롭게도 그날은 배지혁마저 자리를 비운 때였다. 식탁에 둘러앉은 여러 방의 부인들이 돌아가며 배한설을 타이르자, 아이도 지지 않고 말대꾸를 했다. 그렇게 한마디씩 주고받다 끝내 성질이 치민 배한설은 식탁을 뒤엎고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민취는 그날의 일을 들려주면서도 얼굴에 어린 근심을 감추지 못했다.배한설은 워낙 말썽이 심해 배지혁에게 벌을 받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평소의 배지혁이었다면 아이가 잠들었다는 말만 듣고 이처럼 가볍게 넘기지는 않았을 터였다.얼굴조차 확인하지 않고 돌아간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평소에는 의원을 불러야 할 만큼 호되게 벌을 받고도, 배한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곤 했다. 더구나 날마다 고기만 먹고 채소는 입에도 대지 않으니, 어린 몸이 견뎌 낼 리 없었다.일이 이 지경에 이른 데에는 곁에서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아랫사람들의 잘못도 있었다.민취의 난처한 얼굴을 떠올리자 정시연의 마음에도 불안이 스며들었다.그녀는 절대로 왕부에서 쫓겨나서는 안 되었다.이미 주씨 부저를 나와 한 걸음을 내디딘 이상, 앞에 펼쳐진 길이 칼산과 불바다라 해도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정시연은 답답한 마음으로 몸을 뒤척였다. 가슴에는 어느새 젖이 가득 차 팽팽하게 부어오른 상태였다.배한설은 저녁 무렵에 한 번 짜 놓은 젖만 먹었다. 밤에도 몇 번씩 젖을 찾던 보물이와는 달랐다.그러자 보물이의 조그만 얼굴이 또다시 눈앞에 아른거렸다.보물이가 밤에 어미와 떨어져 지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오 어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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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민취가 옥젓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자, 문지방 너머에 서 있는 정시연이 보였다.그녀의 손에는 찬합이 들려 있었다. 등 뒤에서 비쳐 든 햇살이 그녀의 그림자를 푸른 벽돌 바닥 위로 길게 늘어뜨렸다.“정 어멈?”민취가 의아한 목소리로 불렀다.“도련님께서 입맛이 없으시다고 들어서, 작은 부엌에서 몇 가지 만들어 왔습니다.”정시연은 대답과 함께 문지방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섰다.배한설은 그녀의 손에 들린 찬합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조그마한 두 눈썹이 맞붙을 듯 잔뜩 찌푸려졌다.“너도 나한테 소찬을 억지로 먹이려는 건 아니겠지?”민취는 입술을 지그시 다물었다.어젯밤 자신의 말을 들은 정시연이 아침 일찍부터 작은 부엌에 가서 소찬을 만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라 해 봐야 무나 배추처럼 흔한 채소뿐일 터였다.하필 배한설이 가장 싫어하는 것도 흰무와 표고버섯이었다. 한입만 먹어도 곧장 모조리 게워 낼 만큼 질색했다.정시연이 공연히 이 도련님의 성질을 또 건드릴까 염려된 민취는 서둘러 그녀를 말렸다.“정 어멈, 됐습니다. 도련님께서는 소찬을 못 드시니 오늘은 그만하고, 다음에 다시 생각해 봅시다.”그러고는 배한설을 달래듯 덧붙였다.“지금 바로 숙수에게 일러 도련님께서 좋아하시는 고기 요리를 만들어 오라 하겠습니다.”그 말을 들은 배한설은 그제야 기분이 풀렸는지 조그마한 턱을 치켜들었다.“빨리 가져오라고 하거라!”그러나 정시연은 입술을 꾹 깨물더니 배한설 앞에 찬합을 내려놓았다.“민취 낭자, 이미 다 만들어 왔으니 열어 보기라도 하세요.”배한설은 휙 고개를 돌렸다.“네가 만든 소찬은 안 먹는다. 난 고기완자 조림을 먹을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시연이 찬합의 뚜껑을 열었다.“안 먹는다니까! 안 먹어…….”나무 뚜껑이 살며시 들리자 뜨거운 김과 진한 향기가 한꺼번에 밀려 나왔다.잘 익은 생강과 마늘의 달큰한 향이 먼저 피어오르고, 그 뒤를 따라 짭조름한 감칠맛과 매콤하고 새콤달콤한 내음이 겹겹이 코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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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배한설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그는 제 그릇에 담긴 음식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소찬이라고? 이게 어떻게 소찬이란 말이냐? 아무리 봐도 고기이지 않느냐!”정시연은 손수건을 들어 배한설의 지저분해진 입가를 살며시 닦아 주었다.“들어간 재료도 별것 없습니다. 흰무와 표고버섯, 감자 같은 것들이 전부예요.”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흰무와 표고버섯이라고?정말 먹으면 배가 썩어 버릴 거라 호언장담했던 바로 그 흰무와 표고버섯이란 말인가?배한설의 두 손이 부르르 떨렸다. 통통한 손에 들려 있던 옥젓가락이 힘없이 빠져나가 푸른 석재 바닥에 떨어졌다.쨍그랑!민취는 놀란 눈으로 정시연을 바라보다가 이내 식탁 위에 차려진 요리로 시선을 내렸다.빛깔도 향기도 흠잡을 데 없는 요리들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감자와 흰무, 표고버섯으로 고기 모양을 내어 만든 것이라니.아무리 보아도 진짜 고기 요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민취는 넋을 잃은 배한설을 바라보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제멋대로인 도련님이 정시연의 솜씨 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다니.민취는 배한설의 그릇에 담긴 고기 모양을 낸 음식을 일부러 느릿하게 집어 멀리 옮겼다. 그러고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도련님, 계속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표고버섯과 흰무로 만든 음식은 모두 물릴까요?”민취의 손길을 따라 코끝을 자극하던 새콤하고 향긋한 내음도 서서히 멀어졌다.배한설은 애타는 눈으로 음식 접시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입술을 꾹 깨물더니, 접시를 제 앞으로 홱 끌어당겼다.*배지혁은 회랑 아래에 선 채 차 반 잔이 식을 만큼의 시간 동안 방 안의 동정을 듣고 있었다.배한설의 침소에서는 그릇과 젓가락이 부딪히는 소리가 간간이 흘러나왔다. 그 사이로 음식을 입 안 가득 문 채 ‘맛있다’고 웅얼거리는 소리도 이따금 섞여 들었다.어제와는 딴판이었다. 마치 하루아침에 다른 아이가 된 것처럼 얌전했다.그때, 청서가 방문을 밀어 열었다.끼이익 소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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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그때 배지혁이 돌연 두부국 곁에 놓인 자기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국물과 두부를 조금 떠서 맛보니, 흔한 두부를 썼음에도 무슨 방법으로 콩 비린내를 없앴는지 잡내가 전혀 나지 않았다. 채소즙을 섞어 빚은 두부는 옅은 연둣빛을 띠었고, 입 안에 넣자 더없이 보드랍고 매끄럽게 녹아내렸다.배지혁은 숟가락을 내려놓은 뒤 방 한쪽에 서 있는 정시연을 바라보았다.“어떻게 한설이가 순순히 먹게 한 것이냐?”뜻밖의 물음에 정시연은 잠시 놀랐으나, 이내 고개를 숙이고 공손히 대답했다.“전하, 도련님께서 소찬을 싫어하시는 것은 채소에서 흙내가 나는 데다 아무런 맛도 없다고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전에 어른들이 억지로 먹이려 한 뒤로는 아예 입조차 대지 않으셨고요.”정시연은 나직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 갔다. 부드러운 음성에는 남방 특유의 나긋한 억양이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그래서 으깬 감자를 두부피로 감싸 생선처럼 만들고, 흰무에는 발효시킨 밀가루 반죽을 붙여 회과육처럼 만들었습니다. 불린 표고버섯은 길쭉하게 썰어 전분을 입힌 뒤 기름에 튀겼고요. 뜨거울 때 걸쭉한 양념을 끼얹으면 소육 장어채가 됩니다.”예전 주방현과 주청산의 학업을 뒷바라지하던 시절, 집안은 내다 팔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모조리 팔아야 할 만큼 궁핍했다. 고기 한 점조차 쉽게 밥상에 올릴 수 없었던 탓에 정시연은 값싼 채소로 고기와 비슷한 맛과 모양을 내려고 온갖 궁리를 다 했다.그 무렵 정시연은 날마다 부엌에서 살다시피 했다. 솥에서 튄 뜨거운 기름이 손목에 떨어져도 찬물로 대충 씻어 낸 뒤 다시 불 앞에 섰다. 어떻게든 때를 맞춰 음식을 완성해 주방현의 손에 들려 보내려 했다. 그래야 그가 글방에서 점심을 먹을 때 날마다 소찬으로 끼니를 때우지 않아도 되었고, 동학들 앞에서 체면을 구기거나 조롱을 당하는 일도 피할 수 있었으니까.주방현과 주청아가 처음 그 소육을 맛보았을 때의 반응도 지금의 배한설과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눈을 반짝이며 서로를 바라보다가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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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그 말을 들은 정시연의 가슴에 기쁨이 번졌다. 반색하며 고개를 든 순간, 그녀의 시선이 배지혁의 깊고 어두운 눈과 맞닿았다.오늘 배지혁은 묵회색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소매 끝은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여며져 있었고, 검은 머리카락은 옥비녀 하나로 가볍게 틀어 올렸다. 그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뼈대가 선명하고 반듯했으나, 밤에 보았을 때보다도 한층 서늘하고 적막해 보였다.배지혁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불전 위에 모셔진 옥관음처럼 고고하고 냉담한 모습이었다. 세속의 감정 따위에는 영영 흔들리지 않을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그 시선에 잠시 넋을 잃었던 정시연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예, 전하.”차분히 가라앉힌 목소리였으나, 그 안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기쁨이 희미하게 묻어났다.배한설은 배지혁의 시선을 따라 정시연을 바라보았다.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살며시 번져 있었다. 그 미소가 어찌나 부드러워 보였는지, 배한설의 마음까지 덩달아 밝아졌다.배한설은 조심스럽게 배지혁의 눈치를 살핀 뒤, 장어채 한 젓가락을 집어 그의 그릇에 올려놓았다.“아버지께서도 드셔 보세요…….”배지혁은 가늘고 긴 눈매를 내리깔아 아들을 바라보더니 이내 말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민취는 속으로 반색하며 서둘러 사람을 불러 전하의 밥 한 그릇을 더 내오게 했다.배지혁은 평소 조정의 일로 늘 바쁜 사람이었다. 그런 까닭에 배한설조차 오늘처럼 그와 한 상에 마주 앉아 느긋하게 식사할 기회가 드물었다. 더욱이 잘못을 저지른 뒤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이렇게 단란히 함께 밥을 먹는 일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창살을 통과한 햇살이 반듯한 조각으로 나뉘어 방 안에 고르게 내려앉았다. 배지혁은 등을 꼿꼿이 편 채 조용히 식사했다. 반듯한 척추 위로 넓고 평평한 어깨가 단정하게 뻗어 있었다.음식을 향해 성급히 손을 뻗던 배한설과 달리, 배지혁의 동작은 시종 느긋하고 침착했다. 옥젓가락이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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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양여운은 둥글고 복스러운 얼굴을 지녔으며, 웃을 때면 눈썹과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져 한없이 온화해 보였다. 그러나 배한설을 바라보는 눈길만큼은 웃는 낯과 달리 서늘했다.“어제 한설이 때문에 어머님께서 한참이나 가슴이 아프다고 하셨어요. 제가 곁에서 거듭 달래 드리고 나서야 겨우 진정하셨지요.”양여운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그러다 오늘 또 금수당에서 벌어진 일을 들으시고는, 이대로 두었다가는 법도가 바로 서지 않겠다며 직접 찾아오신 겁니다. 헌데 전하께서도 이곳에 계실 줄은 몰랐네요.”배씨 노부인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네가 날마다 조정의 일로 바쁜 것은 안다. 그래도 아이의 버릇과 법도만큼은 제대로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배지혁은 속눈썹을 내리깐 채 묵묵히 그 말을 들었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 아래로 옅은 그늘이 내려앉았지만, 서늘한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이윽고 차를 한 모금 마신 그가 찻잔을 내려놓자, 도자기끼리 맞닿는 청아한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가볍게 울려 퍼졌다.그러고도 배지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그의 침묵에 양여운의 얼굴을 장식하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금수당 안의 공기마저 서늘하게 가라앉자, 누구도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민취는 묵묵히 앉아 있는 배지혁을 바라보다가, 조금 전 부자가 모처럼 평온하게 한 상에서 식사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배한설은 싫어하던 소찬도 얌전히 먹었고, 오늘만큼은 떼를 쓰거나 말썽을 부리지도 않았다. 어쩌면 전하께서 이번에는 도련님을 감싸 주려는 것인지도 몰랐다.마음이 한결 놓인 민취가 서둘러 나섰다.“셋째 부인께서는 아직 모르시겠지만, 도련님께서 오늘 흰무와 표고버섯을 모두 드셨습니다. 이제 다음 달 초하루에는 노부인과 함께 식사하실 날만 기다리고 계십니다.”양여운은 잠시 멈칫하더니 식탁 위에 얼마 남지 않은 음식들을 내려다보았다.어디를 보아도 소찬처럼 보이는 음식은 없었다.양여운이 미지근한 어조로 민취를 나무랐다.“이 아이가 어찌 감히 허튼말을 지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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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저는…….”배한설은 입술을 달싹였으나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배지혁이 제 곁에 앉아 함께 식사해 준 일을 말하고 싶었다. 다른 명문가의 도련님들은 감히 아버지와 한 상에 앉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는데, 오늘 자신은 그와 나란히 밥을 먹었다고. 아버지가 손수 집어 제 그릇에 놓아 준 생선도 무척 맛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그러나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은 배지혁의 얼굴을 마주하자, 그 모든 말이 목에 걸려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함께 식사한 것은 식사한 것일 뿐, 지금 받아야 할 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소찬을 얌전히 먹었다고 해서 다른 잘못까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배지혁은 처음부터 양 수레를 부수는 일을 가볍게 넘길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민취는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두 시종이 양 수레를 옮기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배한설이 다급히 달려가 수레 앞을 막아서더니, 두 팔을 활짝 벌려 제 보물처럼 감쌌다.수레의 긴 채 아래 선 조그마한 몸이 유난히 가냘파 보였다. 배한설은 눈앞의 장대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벌써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지만, 이를 악문 채 기어이 눈물을 참았다.“이건 제 수레예요.”배지혁은 아들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고개를 돌려 뒤에 선 청서에게 명했다.“밖으로 옮겨라.”배한설도 단단히 고집이 났는지 코끝을 새빨갛게 붉힌 채 이를 악물었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수레 앞을 막아선 아이가 끝내 울분을 터뜨렸다.“제 아버지도 아니면서, 무슨 자격으로 저를 혼내는 거예요!”그 말이 떨어지자 넓은 금수당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배지혁의 등 뒤에서 쏟아진 햇살이 그의 얼굴을 짙은 그늘 속에 가렸다. 누구도 그 표정에 어떤 감정이 스쳐 갔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순간, 정시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민취가 이미 배한설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도련님, 전하께서 도련님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소인이 늘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전하께서 다른 누구에게도 이토록 마음 쓰시는 모습은 본 적이 없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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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그때 정시연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도련님께서 이 양 수레를 직접 만드셨습니까?”목 놓아 울던 배한설이 돌연 울음을 멈추었다.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었느냐는 듯 홱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눈물방울까지 옆으로 튀었다.“아니. 내가 어떻게 이런 걸 만들겠느냐?”정시연은 아이와 눈을 맞추며 부드럽게 물었다.“직접 만드신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토록 슬퍼하십니까?”환한 햇살이 뜰을 가득 비추며 정시연의 눈동자를 맑게 밝혀 주었다. 배한설은 산속 깊은 곳에 고인 맑은 샘물처럼 투명한 두 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뜻밖의 물음에 울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했다.“……내 물건이다. 내 물건이 부서지는데 울면 안 된다는 것이냐?”“그럼 짜맞춤이 무엇인지는 아십니까?”배한설은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모른다.”정시연은 손수건으로 아이의 뺨에 흐른 눈물을 살며시 닦아 주었다.“이 수레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모르시는데, 부서진다고 이렇게 울기만 해서 무엇하겠습니까?”발끈한 배한설은 정시연의 손수건을 홱 밀어내며 볼을 잔뜩 부풀렸다.“그럼 너는 아느냐?”정시연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예. 수레를 조심스레 분해해 목재가 상하지 않게 잘 간수하면, 그 나무로 다른 물건을 만들 수 있습니다.”그러자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정시연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지며 두 뺨에 작고 고운 보조개가 패었다.“그네를 만들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이번에는 도련님께서 손수 만드시는 겁니다.”그네는 오래전 아버지가 정시연에게 직접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준 물건이었다. 글을 몰랐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글자를 배우지 못했지만, 두 손으로 그네를 엮는 법만큼은 또렷이 기억했다.배한설은 그 말을 듣고 우두커니 굳었다.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한 방울씩 눈가에서 굴러떨어졌지만, 아이는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정시연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마침 뒤뜰로 갔던 두 시종이 도끼를 가져왔다.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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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곁에 서 있던 청서는 뜻밖의 물음에 잠시 멈칫했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전하가 그 유모의 이름을 묻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청서는 속으로 의아해하며 배지혁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고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소인도 그 여인의 이름은 알지 못합니다.”그는 곧장 걸음을 돌리려 했다.“지금 민취에게 물어보고 오겠습니다.”“그만두어라.”배지혁이 청서를 불러 세웠다. 어차피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한설이에게 소찬을 먹게 했으니…… 마땅히 받을 상은 빠짐없이 내리도록 하거라.”청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엇을 상으로 내리면 좋을지 물으려 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배지혁은 이미 성큼 걸음을 옮겨 멀어지고 있었다.그날 이후 정시연은 날마다 배한설의 식사를 준비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세끼를 꼬박 챙기되 고기와 채소가 고루 어우러지도록 상을 차렸다.식사 때면 민취가 식탁 곁에서 시중을 들었고, 정시연은 한쪽에 조용히 서서 배한설을 살폈다. 아이가 자주 집는 음식과 젓가락이 향하는 순서를 눈여겨보았으며, 거의 손도 대지 않는 반찬까지 하나하나 기억해 두었다. 그러고는 다음 식사에서 재료와 조리법을 조금씩 바꾸어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냈다.그렇게 며칠이 흐르자 배한설의 성정도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사람들 앞에서 제멋대로 떼를 쓰거나 말썽을 일으키는 일도 한결 줄었다.다만 그날 이후 배지혁은 금수당을 다시 찾지 않았다.배한설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으나, 식사할 때마다 이따금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기다리는 눈치였다.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렀다.정시연은 낮이면 배한설의 식사를 만들고, 밤이면 한 차례 젖을 짜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도 왕부에서 내린 상을 받게 되었다.상자를 들고 찾아온 이는 황 어멈이었다. 그 안에는 은자 오십 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정시연이 석 달 가까이 일해야 겨우 받을 수 있는 액수였다.황 어멈은 정시연의 음식 솜씨가 훌륭한 덕분에 배한설이 소찬을 즐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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