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정시연은 약초를 캐러 산에 올랐다가 기억을 잃은 주방현을 발견했다. 갈 곳 없는 그를 거두어 부부의 연을 맺은 지 삼 년. 그동안 정시연은 딸을 낳아 기르며 온갖 고생을 견디는 한편, 부군의 학업을 뒷바라지하는 데 온 정성을 쏟았다. 심지어 집안의 가산마저 모조리 내놓아 주방현이 공부를 이어 갈 수 있게 했다. 정시연의 그 오랜 헌신은 마침내 주방현의 장원급제라는 결실로 돌아왔다. 그가 벼슬길에 오르자, 정시연도 이제야 모진 고생이 끝났다고 믿으며 함께 경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경성에 입성한 주방현은 군주의 환심을 산 뒤, 조강지처인 정시연에게 정실의 자리를 내놓고 첩으로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개미처럼 미천하고 들풀처럼 하찮은 목숨으로 군주와 자매를 칭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지만 정시연은 남들에게 짓밟힌 채 고개를 숙이고 살아갈 만큼 나약한 여인이 아니었다. 타고난 심지가 굳었고, 한번 마음먹은 일은 좀처럼 굽히지 않았다. 부군에게 완전히 정이 떨어진 그녀는 딸아이를 품에 안고 미련 없이 집을 나섰다. 그리고 홀로 살아갈 밑천을 마련하고자 왕부에 들어가 어린 주인님의 유모가 되었다. 화려하고 웅장한 왕부는 그 위세를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을 만큼 막강한 권세를 지닌 곳이었다. 정시연은 그 안에서 제 분수를 지키며 조용히 살아가고 싶었다. 어린 주인님을 정성껏 돌보며 은자를 차곡차곡 모은 뒤, 딸과 함께 살아갈 작은 집 한 채를 마련하는 것. 그것이 그녀의 소박한 바람이었다. 그러나 정작 정시연의 시중을 필요로 한 사람은…… 어린 주인님이 아니었다. 왕부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쥔 실권자이자 군주의 젊은 양부. 배지혁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배지혁은 흠잡을 데 없이 고결하고 기품이 넘쳐,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사내였다. 하지만 남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달랐다. 그는 정시연을 탁자 앞에 몰아세운 채, 그녀의 옷깃을 여민 가느다란 끈을 손끝으로 천천히 풀어내며 나직이 물었다. “그대가 본왕의 병을 고쳐 주었으니……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면 좋겠느냐?” * 주방현은 정시연을 한낱 시골 아낙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경성에는 의지할 사람 하나 없고 수중에는 은자 한 푼 없으니, 자신과 화리하고 나면 가난에 허덕이다 끝내 뼈저리게 후회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훗날, 군주와 혼례를 올린 주방현이 왕부의 상석을 향해 깊이 절을 올리던 순간이었다. 그곳에는 배지혁과 정시연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배지혁은 정시연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는 주방현을 바라보며 입가에 느긋한 미소를 띠었다. “이제 그대도 이 사람을…… 어머님이라 불러야겠구나.”
查看更多주방현은 오랫동안 정시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깊은 곳에 어린 진심을 확인하자, 돌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긴 침묵이 내려앉았다.고요한 방 안에는 주방현 자신의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경성에 들어오더니 귀한 집 여인들이나 하는 짓을 배운 모양이구나. 화리를 하겠다고?”정시연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한 자 한 자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화리는 경성의 귀한 여인들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그녀는 잠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존엄을 지닐 자격이 군주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고요.”그러자 주방현이 코웃음을 쳤다. 이내 그의 목소리가 돌연 사납게 높아졌다.“네가 화리서를 읽을 수나 있느냐? 제 이름 석 자는 알아보기나 해? 내가 먹여 주고 입혀 주며 은자까지 쥐여 줬건만, 너는 여전히 세상 물정을 모르고 팔자 좋은 소리나 지껄이는구나! 네가 군주라도 되는 줄 아느냐? 화리하고 나면 그 얼굴을 밑천 삼아 기루에 몸이라도 팔 셈이야?”말 한마디 한마디가 귓속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정시연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린 채 그 자리에 굳어 섰다.비록 두 사람의 사이가 화리를 논할 만큼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 해도, 주방현이 이토록 모진 말로 자신을 짓밟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기루에 몸을 파는 여인이라니.수많은 말이 가슴을 틀어막아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이 쓰라렸다.심장은 둔중하게 욱신거렸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도, 어디에도 쏟아 낼 수도 없는 고통이었다.격렬한 충격에 젖이 또다시 배어 나와 그녀의 옷섶을 흠뻑 적셨다.너른 침방 안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정시연은 여전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방현의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분노를 이기지 못해 지나친 말을 내뱉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그는 정시연에게 두어 걸음 다가갔다. 그러고는 긴 팔을 뻗어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정시연의 머리 위에 턱을 얹은 주방현이 다시 온화한 목소리로 달랬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그의 눈 깊은 곳에는 짙은 실망이 어려 있었다.주방현은 정시연이 바깥세상의 험난함을 몸소 겪었으니, 순순히 주씨 부저로 돌아온 뒤에는 더는 철없는 고집을 부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경성에는 발에 차일 만큼 귀인이 넘쳐났다. 눈부시게 번화한 이 경성의 영화도 실은 수많은 사람의 뼈를 쌓아 올려 이룬 것이었다.정시연은 자신을 떠나서는 이곳에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군주의 비호 없이는 관직에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것처럼.아무도 그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군주조차 마찬가지였다.오직 주방현과 정시연만이 같은 처지였다.그러니 정시연이 돌아오기만 하면 자신을 이해해 줄 줄 알았다.그렇기에 주방현은 정시연이 이유도 없이 집을 나간 일을 책망하지 않고 너그러이 용서해 주었다. 다정한 말로 달래고, 시종들 앞에서는 꾸짖는 일조차 삼갔다. 자신은 이만하면 그녀를 충분히 아껴 주었고, 체면 또한 부족함 없이 세워 주었다고 여겼다.그런데 정시연은 여전히 철이 없었다.제 처지를 깨닫고 돌아와 놓고도 만족할 줄 모르고, 도리어 자신에게 낯빛을 붉혔다.그동안 자신이 너무 오냐오냐하며 버릇을 잘못 들인 것이 분명했다.주방현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눈에 남은 것은 이제 짙은 실망뿐이었다.정시연이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 버렸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군주께서 청산을 백록서원에 들이기 위해 얼마나 애쓰셨는지 알고 있느냐? 그곳에서 수학하면 청산의 앞날은 탄탄대로나 다름없다! 그래서 내가 그토록 다급하게 나갔던 것이다. 헌데 너는 또 심술을 부리며 군주께 대들었다지!”정시연은 주방현이 쏟아 내는 모진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러다 천천히 눈을 들어, 자신을 실망스럽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가슴속에서 또다시 깊은 무력감이 밀려왔다.너무도 지쳤다.주방현과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온몸의 기운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듯했다.정시연은 그가 결국 이곳으로 찾아와 한바탕 화를 퍼부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시골에 살던 시절의 주방현은 언제나
어멈이 머리 위에 받쳐 들었던 지우산을 거두자, 군주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침방 안으로 들어섰다.눈부시게 화려한 옷차림은 별채의 소박한 살림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군주는 턱을 살짝 치켜든 채 방 안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이윽고 고개를 돌려 정시연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그 아름다운 얼굴을 확인하자 입가에 걸린 웃음을 서서히 거두었다.“정 어멈이 이미 주씨 부저를 떠났다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텐데. 그토록 요란하게 나가 놓고 이제 와 다급히 돌아오다니. 스스로 제 몸값을 떨어뜨리는 꼴로밖에는 보이지 않는군.”말 한마디 한마디가 채찍처럼 날아와 정시연을 사정없이 후려쳤다.그런데도 정시연의 마음은 기이할 만큼 고요했다.오랜 고통 끝에 무감각해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눈앞의 모든 일이 이제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비록 자신의 처지가 바람만 불어도 휘청이는 부들가지와 같아 군주의 눈에는 한없이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정시연은 적어도 스스로를 양심 있는 사람이라 여겼다.화리하기 전, 모든 진실을 군주에게 밝혀 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끝까지 속는 일만큼은 없도록.정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군주와 시선을 마주했다. 눈빛은 잔잔하고 흔들림이 없었다.“저는 주방현이 정식으로 혼인 절차를 밟아 맞아들인 부인입니다. 보물이는 그의 친딸이고, 저희의 혼서도 여전히 강남 관부에 남아 있습니다.”그가 처자식을 버렸다는 사실도, 황제를 기만하고 윗사람을 속였다는 사실도 모두 말할 생각이었다.그런데 군주는 잠시 멈칫하더니, 뜻밖에도 웃음을 터뜨렸다.곧이어 날카롭게 벼린 목소리가 정시연을 향해 쏟아졌다.“부인이면 어떻다는 것이냐? 이곳은 경성이다. 본 군주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너 따위는 죽을 수 있어! 네가 낳은 아이를 내세워 주 공자의 알량한 연민을 얻었으니, 이제는 본 군주에게 위세라도 부리겠다는 것이냐? 고작 계집아이 하나일 뿐이다. 너와 마찬가지로 그 목숨은 길가의 풀잎보다 못해!”정시연은
그러나 다음 순간, 제 말에 정시연이 고개를 들자 주방현은 곧바로 후회했다.보물이에게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 주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군주가 있는 지금, 아이에게 주씨 성을 줄 수는 없었다.보물이를 돌볼 유모를 따로 들인 것만으로도 군주는 이미 못마땅해했다. 이름 모를 어멈의 딸에게 그가 지나치게 마음을 쓴다고 여겼기 때문이다.그런데 아이에게 주씨 성까지 붙여 준다면, 군주가 의심을 품을지도 몰랐다.정시연은 줄곧 고개를 든 채 주방현의 낯빛이 변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으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더없이 차분했다.“그래서요?”창밖에서는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붉은 입술 사이로 흰 이를 드러낸 정시연의 얼굴을 바라보던 주방현은 불현듯 목울대를 움직였다.“그러니 우선은…… 보물이에게 강희의 성을 따르게 하는 게 어떻겠느냐. 강희가 양녀로 들인 아이라고 하면 될 테니.”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온화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동안에도 주방현은 정시연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으로 보물이를 어르며 말을 이었다.“걱정하지 말거라. 훗날 반드시 본래 성으로 되돌려 줄 테니.”보물이에게 강희의 성을 따르게 하겠다고?정시연은 지친 듯 두 눈을 감았다.짙은 무력감이 가슴속에서 밀려왔다. 이제는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문득 그의 이름을 불렀다.“주방현.”그제야 주방현이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그는 정시연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그런데 웃음을 머금은 채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서 이내 눈물이 굴러떨어졌다.정시연은 한없이 진지한 주방현의 눈을 마주 보았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시린 설움이 치밀어 올랐다.사실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경성에 들어온 뒤로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늘 지금과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은근한 경시와 얕잡아 보는 기색.그래서 그녀의 보물이마저 어미와 다를 바 없이, 하찮고 가벼운 존재로 취급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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